베로키오의 제자가 된 레오나르도

 

작품은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바사리는 세르 피에로가 어느 날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Andrea dell Veroccio(1435-88)에게로 가서 아들의 드로잉을 보여주었다는 이유로 베로키오를 피에로의 가까운 친구라고 생각했습니다. 1465년경 피에로는 베로키오에게 오르 산 미첼레 외관의 벽감을 장식할 변호사들의 수호성인 도마를 청동으로 제작할 것을 의뢰했습니다. 베로키오는 훌륭한 작업장을 갖고 있었고 매사에 신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와 피에로가 어떤 우정을 나눴는지는 알 수 없지만, 피에로는 피렌체의 대가들 중에서 베로키오의 문하에 자신의 아들을 맡겼습니다.

베로키오는 매우 부지런한 사람으로 바사리는 그가 그칠 줄 모르게 작업했으며, 늘 손에 무엇인가를 쥐고 있어 “녹이 스는 걸 방지했다”고 적었습니다. 베로키오는 도나텔로Donatello(Donato di Niccolo, 1386?-1466)로부터 수학한 후에도 스승의 작업에 협력했으며, 도나텔로는 자신이 늙어 작업을 할 수 없을 때 구매자들을 젊은 베로키오에게 소개해주었습니다.

도나텔로는 15세기 유럽을 대표할 만한 조각가였으며, 알베르티, 브루넬레스키, 마사초 등과 우정을 나눴고, 1404-07년에 기베르티의 조수로 일했습니다. 스물세 살 때 피렌체 대성당을 위해 <다윗>을 제작했고, 후에도 여러 점의 <다윗>을 제작했습니다. 그가 제작한 <다윗> 가운데 가장 빼어난 건 코시모의 주문을 받아 1430년 청동으로 뜬 것으로 메디치 궁전 안뜰에 세워졌습니다.

베로키오는 1464년에 코시모 데 메디치의 묘비를 의뢰받아 제작했습니다. 이 중요한 작업이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어 그에게 일감이 쏟아졌습니다. 그는 자신이 조각가와 금세공가일 뿐 아니라 화가이며 장식가임을 사람들에게 널리 광고했습니다.


049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그리스도와 성 도마>, 청동, 그리스도의 높이 230cm.

오르 산 미첼레의 동쪽 파사드 벽감


1477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목에 베어지는 세례 요한>, 1477-80, 쇠. 피렌체 대성당 박물관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보다 열일곱 살 많아 레오나르도에겐 아저씨와도 같았습니다. 그는 조각가이자 화가이면서 쇠를 잘 다뤘고, 당시 이탈리아의 중요한 예술가들 가운데 하나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어렸을 적에 금세공을 배웠는데, 파올로 우첼로, 브루넬레스키, 기베르티, 기를란다요 모두 금세공을 배우면서 예술가가 되었습니다. 베로키오의 별명은 ‘진정한 눈 true eye’으로 날카로운 시각 때문에 붙여진 것이 아니라 젊었을 때 그 별명의 성직자 수하였기 때문에 얻게 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도나텔로에게서 수학했다고 했지만, 주요 재능은 금세공에 있었으며, 섬세한 장인적 기교가 뛰어난 것이 특징입니다. 개인적인 위대함으로 보면 도나텔로와 비교가 되지 않지만, 그는 새로운 세대의 이상을 매우 명료하게 표현한 예술가였습니다.




현존하는 베로키오의 쇠 작품은 <목이 베어지는 세례 요한>한 점 뿐입니다. 이 작품은 피렌체 세례당을 위해 제작되었고 현재 대성당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는 조각가로 더 유명했으며 청동을 다루는 데 탁월했지만 대리석과 테라코타 작품도 제작했다. 그가 1475년경에 제작한 <다윗>은 도나텔로의 것보다 더 풍치가 있지만 덜 사고적입니다. 도나텔로의 다윗은 평온한 데 비해 베로키오의 다윗은 이제 막 움직일 수 있는 인물처럼 보입니다. 베로키오를 화가로 보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주장도 일리가 있는 것이 그가 그렸다고 믿어지는 작품이 얼마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작업장은 당시 피렌체에서 가장 큰 작업장으로 많은 유명 화가들이 그의 작업장에서 일했습니다. 그의 작업장은 피렌체에서 가장 다양한 작품을 아주 많이 제작해내는 곳이었고, 제자들의 협력이 스승을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습니다. 때마침 조각이 자연을 철저히 탐색하려는 경향을 보이던 때라서 회화와 조각을 결합시킨 작업이 더욱 촉진되었습니다.

그의 작업장에서는 온갖 작품을 제작해냈습니다. 그의 작업장은 오늘날 상점같이 아래층이 거리에 있어 상품을 진열하듯 행인들이 작품을 볼 수 있도록 전시했으며, 사람들이 아이와 함께 안으로 들어왔고, 개, 닭, 돼지들도 쉽게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바사리에 의하면 베로키오는 싼 것 비싼 것 가리지 않고 모두 주문받았다고 합니다.


068

로렌초 디 크레디의 <베로키오의 초상>, 1485.

베로키오는 오래 포즈를 위하는 데 힘이 들었는지 왼손을 오른손 위에 올려놓고 긴장한 모습이라 로렌초가 속히 초상화를 완성시켜 자신이 하다 만 작업에 임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로렌초 디 크레디가 1485년에 그린 베로키오의 초상화를 보면 사각형의 얼굴에 볼이 통통하고 강렬한 시선을 느낄 수 있으며, 넓은 코 아래 가는 입술에서는 감성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의 얼굴에서 부드러움을 느낄 수 없지만, 턱이 작고 여성적이라서 이 부분에서는 부드러움이 엿보입니다.


062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얼굴을 4분의 3정도 왼쪽으로 향한 젊은 여인의 머리>, 32.4-27.3cm.


444

레오나르도의 <젊은 여인의 머리>, 미완성, 패널에 유채, 24.7-21cm.


레오나르도가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 배우고 조수로 활동한 기간은 12, 13년이나 됩니다. 화가이면서 작가인 첸니노 첸니니는 13년의 기간이면 도제discepolo의 단계에서 수습기간을 마치고 제구실을 하는 장색garzone 단계를 거쳐 숙련공maestro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도제기간에 견습생은 첫 6년 동안 그림 그리는 데 사용하는 붓 만들기, 겉칠하기, 참피나무나 버드나무 패널에 캔버스를 잡아당겨 붙이기, 안료를 알아보고 준비하기 등을 배우게 되며 매일 안료를 섞어 원하는 색을 내는 일도 배웁니다. 이후 6년 동안은 채색법, 착색료로 장식하기, 금실로 천에 수놓기, 벽에 직접 그리기 등, 이 모든 일을 주말에도 휴일에도 쉬지 않고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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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포 브루넬레스키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두오모 대성당: 피렌체 대성당>

피렌체 공화국과 길드의 공동 작업으로 지어진 것으로 1292년에 착공하여 1446년에 완공되었습니다. 브루넬레스키는 1420년 8월에 돔의 건설에 착공하여 1436년에 완공했습니다. 돔 위의 제등은 1471년 베로키오에 의해 완공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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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디자인한 <피렌체 대성당의 돔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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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디자인한 <피렌체 대성당의 돔 모델>, 1420년경, 드로잉.

건축가이며 조각가인 브루넬레스키는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가였으며, 1420-36년에 대성당의 돔을 제작한 후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그는 알베르티, 도나텔로, 마사초와 함께 르네상스 양식의 창시자였습니다. 1401-03년 피렌체의 세례당 문을 놓고 경연을 벌였지만, 기베르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경연에서 진 브루넬레스키는 1412년경 산타 마리아 노벨라를 위해 십자가 처형을 나무로 제작하고 채색한 것 외에는 조각에서 손을 떼고 건축에만 전념했습니다. 그는 화가는 아니었지만, 회화에 관한 논문에서 원근법에 관해 언급했으며, 이는 선구적인 일이었습니다.



1467년 베로키오는 코시모 데 메디치의 묘비를 완성한 뒤 산 로렌초 성당에 장식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거대한 크기의 구체를 청동으로 제작하여 피렌체 대성당 제등 위에 놓았습니다. 피렌체 대성당은 수세기에 걸쳐 건립되었는데,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1300년 이전에 산타 마리아 성당 부지에 건립하기 시작했다가 중단한 후 오랫동안 방치되었고, 조토가 종탑을 디자인했으며, 그 후 안드레아 피사노, 프란체스코 탈렌티, 기베르티,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작업해 완성했습니다.

브루넬레스키는 고대 이래 가장 큰 돔을 건물 위에 올려놓아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무거운 지붕을 올려놓으려면 부축벽이나 이에 상응하는 힘을 지탱하게 하는 구조물이 필요한데 그런 것 없이 기하학적으로 디자인함으로써 건축에 크게 이바지한 것입니다. 1446년 브루넬레스키가 타계했을 때 돔은 세워졌지만 그 위에 장식물은 없었습니다. 대리석 제등을 지붕 위에 올려놓았지만, 그로써 브루넬레스키가 고안한 디자인이 모두 완성된 건 아니었습니다. 베로키오에게 주어진 작업은 이 제등 위에 구체와 십자가를 올려놓아 이 디자인을 완성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쇠로 제작했는데 폭이 6m에 높이 107m, 무게가 2톤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을 제등 위에 올려놓은 후에야 대성당은 비로소 완공되었습니다.

1471년 5월 27일 모든 피렌체인은 구체와 십자가를 높이 올려 제등 위에 세우는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이튿날 오후 3시 팡파르가 울려 퍼졌고 역사학자들은 이 날을 기념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이 작업을 처음부터 마칠 때까지 지켜보면서 예술가이면서 공학가의 작품이 받는 영광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베로키오의 작업장에 들어가자마자 공학부터 배우게 되었습니다.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 수학한 사람은 레오나르도 한 사람뿐이 아니었습니다. 페루지노, 로렌초 디 크레디, 레오나르도보다 예닐곱 살 많은 보티첼리를 비롯해 1450년을 전후해서 태어난 예술가들이 그로부터 수학했으며, 기를란다요와 루카 시뇨렐리도 그로부터 수학한 것 같습니다. 작가 우골리노 베리노는 1490년에 “베로키오의 제자들 거의 모두가 지금 이탈리아 도시들에서 활약하고 있다”고 적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베로키오의 작업장에 들어갔을 때 그곳은 피렌체 젊은 예술가들의 회합장소와도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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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검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무척 다양하다



자기 자신과 미술작품을 서로 연관시킬 수 있는 아이는 자기 성찰과 반성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치료사가 던진 질문에 대해 ‘관찰하는 자아’의 목소리로 대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미술 활동을 모두 마치고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에 한 발 뒤로 물러서서, 관찰자의 시점에서 작품과 자기 자신을 성찰할 줄 아는 아이는 통찰 지향적 치료를 받을 준비가 된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자신들의 작품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는지는 아동의 자아상이나 자존감을 진단내릴 때 참고할 만한 유용한 정보가 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작품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는 표정, 아이들이 하는 말, 작품을 다루는 방식을 관찰하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특히 나이가 어리고 자신이 이룬 성과에 대해 덜 비판적인 아이일수록, 스스로 만든 작품에 대해 큰 자부심을 표현합니다.


아이가 스스로에 대해 직접 평가하는 말은 아이의 자존감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할 수 있는 좋은 단서입니다.

어떤 아이들은 “별로야” 혹은 “망쳤어”라고 중얼거리며 애써 만들어놓은 작품을 완전히 부숴버립니다.

이러한 아이들의 행동은 매우 가치 있는 정보를 제공해줄 수 있기 때문에, 미술 검사를 하는 도중이라면 제지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미술치료사는 과업을 향한 아동의 두드러진 태도가 수치심인지, 자만심인지, 혐오인지, 즐거움인지, 아니면 상반되는 감정을 동시에 느끼는지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때 말로 표현되는 내용만큼이나 몸짓이나 표정 등의 비언어적 표현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미술 평가를 할 때 아이의 심리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작품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가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치료사는 아동이 보이는 비언어적 반응과 언어적 반응 모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작품에 대한 아동의 태도나 반응 외에도 치료사가 던지는 질문에 아동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또한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동 미술치료』의 저자 주디스 아론 루빈은 아동이 과시적인 태도를 보이는지, 무엇인가를 숨기려드는지, 망설이는지, 열심히 대답하는지 등을 유의해 관찰하라고 말합니다.


미술치료사의 과업에 대해 볼프Wolff는 말했습니다.


일련의 미술작품과, 그 작품들이 아이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파악한 후에는 각 요소들의 공통분모를 찾기 위한 분석을 시작해야 한다. 모든 요소들을 결합하고 상호 연관시켜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이의 자아가 미술작품이라는 언어로 말한 문장을 재구성해야 할 수도 있다.


주디스 아론 루빈은 아동과의 만남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미술 검사가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미술치료사는 아동이 표현한 작품들의 전반적인 주제와, 양상, 그리고 행동과 상징의 상호 관계를 검토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한 가지 주제가 미술치료 과정 내내 지속되고, 여러 차례 반복되며, 위장하기 위한 겉껍질이 벗겨지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강렬하게 표현되기도 합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핵심적인 주제들이 여러 가지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 주제들은 한 주제에 대한 두려움이나 희망이 반영된 주제가 또 나타나는 식으로, 서로 연관된 경우가 많습니다.


미술 검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무척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아동의 주요 관심사와 갈등이 무엇인지, 아동의 주된 해결방식이나 방어기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아동이 어떤 발달 단계에 있는지에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술작품과 행동을 통해 전달되는 주제를 보면 아이가 가장 고민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와 더불어 어떻게 속마음을 위장하는지, 미술작품을 어떻게 자각하는지 또한 방어기제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미술 검사를 실시할 때 확인해보아야 할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과연 아이가 미술치료를 통해 개선될 수 있을지, 그리고 답이 ‘그렇다’라면 그 성과는 어느 정도일지입니다.

아이가 너무 혼란스러워하는 상태여서 미술 활동이 아이에게 지나치게 큰 자극을 주는 경우에는 미술치료를 받지 않는 편이 나을 수 있습니다.

혹은 미술치료를 받더라도 그 목적을 무의식적 충동을 밝히고 통찰을 얻는 데 두기보다는 통합 능력과 자존감을 키우는 데 두어야 할 것입니다.


미술은 다양한 아이들의, 다양한 요구를, 다양한 방식으로 충족시켜줄 수 있는 유연한 도구입니다.

그렇다고 개별 아동에게 필요한 목적에 따라 특정 방식을 지정해줄 필요는 없습니다.

자유롭게 미술 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만 조성해주면, 아이들은 스스로의 필요와 능력에 걸맞은 활동을 그때그때 자연스레 찾아 함으로써 건강과 통합에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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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피렌체로 가다


 작품은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피렌체지도

작자미상의 <피렌체 체인 지도>, 1480, 목판화

1. 산타 마리아 노벨라 2. 산 마르코

3. 산 로렌초 4. 산타 아눈치아타

5. 메디치 궁전 6. 이노센트 병원

7. 세례당 8. 피렌체 대성당

9. 종탑 10. 오르 산 미첼레

11. 마르조코 12. 산타 트리니타

13. 시뇨리아 궁전 14. 시뇨리아 로지아(벽이 없는 복도)

15. 산타 크로체 16. 폰테 베키오

17. 산토 스피리토 18. 카르미네 성당

19. 피티 궁전 20. 산 미니아토


레오나르도가 언제 빈치를 떠나 피렌체로 갔는지는 레오나르도의 할머니와 아버지가 작성한 세금보고서를 근거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즉 그 보고서들이 틀림없다면 그가 피렌체로 간 시기는 1470년 무렵입니다. 세금보고서는 호주가 작성하는 것으로, 몇 년 전 할아버지가 타계하자 할머니 몬나 루치아가 호주로서 작성하기 시작했는데, 1469년 작성된 세금보고서에는 그가 할머니와 함께 빈치에서 지내고 있는 것으로 적혀 있습니다. 몬나 루치아는 1469년 혹은 1470년에 세상을 떠났고 레오나르도를 돌봐줄 사람은 이제 아버지뿐이었습니다. 피에로는 아내 프란체스카와 함께 피렌체에 살고 있었고, 장남인 그는 호주로서 법적으로 자신이 거주하는 곳과 가족명단을 세금보고서에 기록해야 했습니다. 이듬해 세르 피에로가 작성한 보고서에는 레오나르도가 피렌체에서 그와 함께 지내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레오나르도가 피렌체로 간 것은 열일곱 살 때이거나 열여덟 살 무렵이었을 것입니다.

레오나르도는 메디치 궁전 앞을 걸으면서 똑바로 뻗은 길 양편에 집들이 일렬로 줄을 선 것을 보고 매우 놀랐을 것입니다. 14세기 초만 해도 피렌체에는 약 150개의 타워가 높이 솟아 있었습니다. 그는 작은 성채가 있는 언덕 주변에 약 50채 정도의 낮은 빌딩들이 있는 빈치에 비해 피렌체가 매우 큰 도시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가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 할 피렌체는 문명의 절정에 이른 곳 같았습니다. 피렌체인은 자신들의 도시를 고대 아테네처럼 아름답게 치장하고 싶어 했습니다. 아르노 강둑에는 네 개의 다리가 있고 건축공사장에서는 못질하고 돌 깎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피렌체에는 푸줏간 수보다도 목공소와 대리석을 다루는 곳이 더 많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피렌체 대성당은 아직 완공이 안 되어 마무리작업이 한창이었고, 대부분의 새 건물들은 개인 소유였습니다. 사업으로 돈을 번 사람들은 대저택을 지으면서 자신들의 저택을 궁전이라고 불렀습니다. 역사학자 베네데토 데이에 의하면 1450~78년 사이에 서른 개의 궁전이 건립되었습니다. 좁은 길은 확장공사로 넓어졌으며 오래된 건물들은 철거되고 상점, 사무실, 마구간, 정원 등이 지어졌습니다. 새 건물들은 엄격하고 단순한 기하학적 규칙을 따라 지어진 것입니다.

레오나르도가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작업장에 갔을 때 재능을 칭찬받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예술가의 작업장에 들어가는 도제의 나이는 보통 열두 살이나 열세 살이었지만, 그가 언제부터 도제생활을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당시 그는 읽고 쓰기를 할 줄 알았고 아마 문법과 셈본을 배웠을 것입니다. 동네 성당의 신부가 동네 아이들에게 문법과 셈본, 그리고 주판사용법을 가르치는 것이 상례였기 때문입니다. 레오나르도는 이때까지도 왼손잡이였으며 빈치 억양의 사투리를 구사했고 라틴어도 마흔이 넘어서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그 시기에 쓴 노트북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성경 이외의 책을 읽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로 그의 철자는 불규칙한데 이는 그가 읽기에 서툴렀음을 짐작하게 해줍니다. 빈치에 제대로 된 책이 있었는지도 의문이지만 그때는 인쇄술이 막 발명되어 이탈리아에 널리 소개되지 못했을 때라서 책값은 비쌌습니다. 고전을 읽지 못한 건 훗날 레오나르도에게 열등감을 심어주었습니다.


055

프라 필리포 리피의 <성모와 아기>, 1440-45년경, 215-244cm.

프라 필리포 리피Fra Filippo Lippi(1406년경-69)는 버려진 아이로 카르미네 수도원에서 자랐고, 1421년에 수사가 되기로 맹세했습니다. 그는 마지못해서 하는 탁발수사였으며, 수녀와 사랑에 빠져 아들 필리피노(1457년경-1504)와 딸 알렉산드리아를 낳았습니다. 필리피노는 열두 살 때부터 아버지가 타계하기 전까지 아버지로부터 그림을 배웠고, 그 후 보티첼리에게서 배운 후 피렌체의 유명한 화가들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리피가 화가가 된 건 마사초가 카르미네 성당에서 그림을 그리는 걸 보고부터였다고 하는데, 리피가 1437년에 그린 <타르퀴니아 성모>는 마사초의 영향을 받아 그린 것입니다. 그러나 1440년부터 그의 양식에 변화가 생겼으며, 좀 더 선을 사용하면서 장식적 모티프를 선호했습니다. 그는 <성모와 아기>의 주제에 집착했고, 이를 둥근 원형에 그린 최초의 화가들 중 하나입니다. 리피는 메디치 가의 후원을 받았으며, 당대의 유명한 화가로 많은 화가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는데, 보티첼리가 주로 영향을 받았으며, 그로부터 수학한 것 같습니다.


057

마솔리노의 <수태고지>, 1425/30, 패널에 템페라, 148-115cm.


058

마사초의 <삼위일체>, 1425,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670-315cm.

피렌체 화가 마사초Masaccio(Tommaso di Ser Giovanni di Mone, 1401-28)는 비록 스물일곱 살에 요절했지만, 위상은 알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 그리고 도나텔로와 어깨를 나란히 합니다. 마사초는 그의 별명으로 ‘칠칠치 못한 탐’이란 뜻입니다. 바사리는 그의 별명과 관련해서 마사초는 세상 것에 관심이 없다 보니 옷을 아무렇게나 남루하게 입고 다녀서 그런 별명을 얻게 되었다고 적었습니다. 마사초가 피렌체의 길드 멤버가 된 건 1422년으로 그가 누구로부터 어떻게 수학했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가장 초기의 작품으로 알려진 것은 현재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성 조베날레 3부작>으로 1422년에 제작한 것입니다. 이 작품은 세련되어 보이지는 않지만, 고딕의 우아함을 배척한 뚜렷한 개성이 드러나 있고 인물들의 체중과 부피를 묘사해내려고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조토의 회화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중력과 장려함을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조토가 공간에 인물을 배치한 것과 달리 마사초는 3차원으로 묘사하려고 했는데, 이는 유럽 회화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그가 미술품을 보기란 어렵지 않았습니다. 공공건물과 성당이 아니더라도 피렌체의 많은 건물 외관이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성당에서 프라 필리포 리피Fra Filippo Lippi(1406년경-69)와 도메니코 베네치아노가 그린 성모자, 이노센티우스 병원 벽을 장식한 루카 델라 로비아의 맑은 파란색의 도자기 메달과 산 미첼레 성당, 그 밖의 세례당, 종탑 등에서 기베르티, 도나텔로, 미켈로조의 조각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피렌체로 오기 전에 아버지를 따라서 엠폴리와 피스토이아에 갔을 때 대성당에서 리피가 그린 제단화와 마솔리노가 그린 프레스코화를 보았을 것입니다. 아르노 강 주변에 있는 엠폴리는 예술이 번성하던 도시였습니다. 레오나르도가 아버지를 따라서 피사에 갔다면 유명한 탑이 있는 캄포를 보았을 것이며, 또한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에서 스물일곱 살에 요절한 마사초Masaccio(Tommaso di Ser Giovanni di Mone, 1401-28)의 중요한 작품도 보았을 것입니다.

레오나르도는 훗날 마사초를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꼽았습니다. 바사리는 마사초의 작품에 관해 언급하는 가운데 “직접 보고 그린 말들은 아주 훌륭해서 사람들은 그보다 나은 그림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적었습니다. 마사초의 영향인지 레오나르도도 말을 여러 점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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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위선택artificial selection과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



별들 사이의 광대한 암흑 속에는 기체, 티끌 그리고 유기분자로 이뤄진 성간 구름, 즉 星間雲(성간운)이 떠돌아다닙니다. 성간운을 전파망원경으로 관측하면 그 안에서 수십 가지의 유기분자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코스모스 Cosmos』(1980)의 저자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은 성간운에 유기분자가 풍부하다는 사실은 생물의 기본 물질이 우주 어디에나 존재할 것이란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생명의 기원과 진화는 시간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하나의 우주적 필연이라고 말합니다. 은하수 은하에 있을 수십억 개의 행성들 중에는 생명이 발붙일 수 없는 곳도 있읍니다. 생명이 발생했다가 모두 죽어버린 곳도 있고, 매우 간단한 형태에서 더 이상 진화하지 못한 곳도 있습니다. 칼 세이건은 외계 행성들 중에는, 지구인보다 더 발달된 고도의 지성을 소유한 존재들이 지구 문명보다 훨씬 앞선 과학 기술과 문화의 꽃을 피워낸 곳도 분명 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지상의 모든 생물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같은 유기화학의 원리가 지상의 생물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들은 오랜 세월 같은 진화의 코드를 통해 변신해왔습니다. 따라서 지구의 생물학은 철저하게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구 생물계에는 단 한 가지의 생물학만으로 충분합니다.

동식물들이 가진 특성 중 많은 부분들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1만 년 전 지구상에는 젖소, 사냥개, 씨알이 굵은 옥수수 따위는 없었습니다. 이 동식물들의 조상은 현재의 모습과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인간이 오랫동안 그것들의 번식과 특성을 지속적으로 조작해왔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특정 형질의 품종들만을 선택적으로 번식시켰습니다. 예를 들어 牧羊犬(목양견)이 필요하면 똑똑하고 충성스러우며 양떼를 잘 지킬 줄 아는 개를 골라 양치기에 필요한 유전형질을 조장하는 쪽으로 키웠습니다. 떼를 지어 사냥하는 개는 양 몰이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엄청나게 커진 젖소의 젖은 우유와 치즈에 대한 인간 욕심의 반영입니다. 현재 우리가 즐기는 알이 굵은 옥수수의 조상도 터무니없이 왜소했습니다. 왜소했던 옥수수의 조상은 수만 세대를 거치는 동안 사람의 입맛에 맞도록 그리고 사람에게 필요한 영양분을 많이 갖추도록, 인간에 의해서 번식이 조절되어 왔습니다. 그 결과 이제는 인간의 도움 없이는 번식할 수 없는 처지로까지 옥수수의 유전형질이 변형되어 버렸습니다.

인간이 동식물의 새로운 품종을 인위선택artificial selection으로 만들 수 있을진대, 자연이라고 그렇게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고 칼 세이건은 말합니다. 자연적으로 유전형질이 변하는 과정을 우리는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이라고 합니다. 지구의 역사에서 인류가 주인으로 군림하기 시작한 건 극히 최근의 사건이라는 사실과, 인류가 지구의 주인으로 군림하는 동안 가축이나 채소가 겪은 변화의 정도가 얼마나 컸던가를 함께 고려한다면, 생물의 변이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화석에 남겨진 생명 진화의 기록에서 우리는 한때 번성했던 종들이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경우를 허다하게 보게 됩니다. 지구 역사에서 현존하는 종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종들이 과거에 이미 멸종되었습니다. 그것들은 진화라는 실험의 실패한 결과물입니다.

야생동물을 가축으로 길들이는 과정에서도 인간이 유도한 유전형질의 변화는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습니다. 토끼는 중세 초기에 길들여졌습니다. 토끼는 프랑스의 수도사들이 처음 길들였습니다. 새로 태어난 어린 토끼는 생선으로 취급되었으므로 교회력에서 육식을 금하는 날에도 고기를 먹을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한 수도사들이 토끼를 길들이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커피의 재배는 15세기에, 사탕무의 재배는 19세기에 시작되었으며, 밍크는 아직도 가축화의 초기 단계에 있습니다. 양의 경우만 보더라도 가축화 이전에는 양 한 마리가 고작 1kg의 거친 털도 채 못 만들었지만, 1만 년이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에 고품질의 고운 털을 10내지 20kg씩 생산해낼 수 있도록 유전형질이 크게 변화되었습니다. 또 젖소 한 마리가 한 수유기 동안에 생산하는 우유의 양이 처음에는 수백 cm3에 불과했지만, 요즘에는 수백만 cm3로 그 양이 엄청나게 증가했습니다. 인위선택이 이렇게 짧은 기간에 그렇게 두드러진 변화를 초래할 수 있었다면, 수십억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자연에서 진행된 자연선택이 가져온 변화가 어느 정도의 규모일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생물 세계의 다양성과 아름다움은 전부 이렇게 해서 생긴 것입니다. 진화는 이론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유전형질의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는 돌연변이가 진화의 동인이 됩니다. 수많은 돌연변이들 중에서 생존율을 증대시킬 수 있는 소수만이 선택되므로, 오랜 기간에 걸쳐 생물은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서서히 변화하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는 새로운 종의 탄생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의 기원이요 진화의 실현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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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시모 데 메디치의 군주정치

 

(작품은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시의회는 1434년 코시모가 망명에서 돌아와도 좋다고 결의했습니다. 코시모는 승리 속에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최고 지도자 도시장관에 선임되었으며, 이에 반해 리날도는 아들들을 데리고 피렌체를 떠나야 했습니다. 코시모는 부하들을 시켜 통치하고 공식 칭호나 직위 또는 권위도 갖고 있지 않았지만, 순전히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피렌체를 통치했습니다. 국가는 단순히 메디치 가의 이익을 옹호하는 기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코시모 민주주의’라는 말은 코시모가 다른 사람을 앞세워 통치하고 특정 가문의 이익을 위해 젊고 새로운 인재들을 등용한 것에 불과했을 뿐 실제로는 위장된 독재정치였다는 의미입니다. 발다치오 당기아리가 코시모를 밀어내려고 음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코시모 추종자들에 의해 붙들려 높은 창문 밖으로 내던져졌을 때 코시모는 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는 “국가는 주기도문으로 다스려지지 않는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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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코포 폰토르모Jacopo Pontormo의 <코시모 데메디리의 초상>, 1518-19년경, 패널에 유채, 86-65cm.

야코포 폰토르모는 주지주의에 입각한 감수성 예민한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코시모는 피렌체를 20년 동안 통치하면서 첫 해에 세금을 487만 5천 플로린(약 121,875,000 달러)을 징수했으며, 공공사업과 복지를 위해 자신의 돈 40만 플로린(약 1천만 달러)을 선뜻 내놓았는데, 이는 그가 메디치 가에 남겨준 유산의 두 배나 되는 액수였습니다. 피렌체 시민들은 그의 처사에 대단히 만족해했습니다. 코시모는 일흔다섯 살 때까지 매일 아침 일찍 자신의 사무실에 출근했습니다. 그는 수수한 복장을 하고 음식물을 절제했으며, 하녀로부터 아들을 얻은 후에는 조용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동정심이 많았고 성격이 부드럽고 너그러웠습니다. 보티첼리, 폰토르모, 베네조가 그의 초상을 그렸습니다. 그는 정치에도 관심이 많았고, 영국의 에드워드 4세가 코시모에게 자금을 빌려달라고 하자 에드워드 3세가 과거에 지불하지 못한 선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뜻 빌려주었습니다. 이후 에드워드 4세는 그 돈을 갚으면서 코시모를 정치적으로 후원했습니다. 코시모는 볼로냐의 주교 토마소 파렌투첼리가 자금난으로 도움을 청했을 때도 들어주었으며, 그가 교황 니콜라스 5세에 취임했을 때는 교황의 재정을 담당하는 직책을 맡았습니다.

15세기 초반부터 피렌체는 번영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이 같은 번영은 코시모의 통치시기에 순조롭게 지속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피렌체의 경제적 번영은 정점에 도달했습니다. 매년 1만6천 필의 천이 베네치아로 수출되었고, 이 교역을 위해 피렌체 수출업자들은 피렌체에 종속된 피사 항구와 1421년 이후에는 10만 굴덴(약 10만 달러)을 주고 사들인 리보르노 항구를 이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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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피렌체 세례당
1059-1150년경에 건립된 이 건축물은 동, 남, 복 방향으로 문이 나 있으며, 남문(제1문)은 안드레아 피사노, 북문(제2문)과 천국의 문이라 불리는 동문(제3문)은 기베르티가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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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 기베르티의 <피렌체 세례당의 북문>, 1403-24
28개의 패널로 구성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생애가 20점, 성인상이 8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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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 기베르티의 <피렌체 세례당의 동문, 일명 천국의 문>, 1425-52
동문은 10개의 대형 패널로 나뉘었고 신중하게 구성된 투시도법적 무대 위에 구약성서에서 따온 일화가 펼쳐집니다. 이러한 부조 대부분은 1437년까지 구상과 실제 제작이 이뤄졌으므로 피렌체 예술가 중 가장 앞선 작품으로 꼽힙니다. 특히 하나의 공간적 틀 안에서의 구도가 뛰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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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 기베르티의 <이삭의 희생>, 1401-03, 세례당 문의 부분, 45-3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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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포 브루넬레스키의 <이삭의 희생>, 1401-03, 45-38cm.
피렌체 세례당 북문 제작자를 선정한 경연작입니다. 브루넬레스키는 보다 깊이가 있는 구성을 한 기베르티에게 패했습니다.

사업에서 부를 쌓은 지배층은 부와 권력을 과시하고 싶어 했습니다. 1401년 모직물 상인들의 길드가 기증한 피렌체 세례당 북문을 제작할 부조 제작자를 결정하는 경연에서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1377-1446)를 제치고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1378-1455)가 선정되었습니다. 조각가이자 금세공가인 기베르티는 1401년 브루넬레스키를 물리치고 상인들의 길드가 위임한 일을 맡음으로써 피렌체의 걸출한 예술가의 위치에 섰습니다. 그는 세례당의 문을 1424년에야 완성했으며, 이듬해에는 이 건물의 동문을 의뢰받아 1452년에 완성했습니다. 이 대작업을 위해 그는 작업장을 확장하고 많은 피렌체 예술가들을 고용했는데, 도나텔로Donatello(1386-1466), 마솔리노Masolino(1383-1447?), 파올로 우첼로Paolo Uccello(1397-1475)가 조수로 그를 도왔습니다. 기베르티는 피렌체 대성당에도 관여하여 창문의 착색유리, 금세공, 송골함, 실재 사람 크기의 청동상들을 제작했습니다. 비평에도 일가견이 있어 많은 글을 남겼는데, 14세기 이탈리아 화가와 조각가들에 관한 가치 있는 자료로 인정받고 있으며, 그는 자서전적인 글도 썼습니다.

기베르티는 북문을 제작하는 데 23년을 보냈습니다. 1425년에는 동문 제작을 의뢰받아 1452년까지 작업했습니다. 두 작업은 당시 피렌체의 시민사회와 종교계의 최대 관심사였습니다. 제작에는 대형 작업장이 필요했으며, 당시 피렌체 미술가들 대부분이 수련기의 일부를 기베르티의 작업장에서 보냈습니다. 기베르티는 피렌체 대성당의 건축사업위원회 평의원으로서도 일했습니다.

고딕의 장인 전통에 깊이 뿌리를 둔 기베르티가 제작한 북문은 이전에 제작된 안드레아 피사노Andrea Pisano(1290?-1348?)의 남문을 모델로 삼았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생애 중 스무 편의 일화와 성인상 여덟 점은 우아한 선, 서정적인 감정, 풍경의 세부적인 면에 주의를 기울이는 데 주력했다는 점에서 국제 고딕양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은 기베르티가 제작한 동문에도 남아 있지만, 이 문은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원리에 따른 것입니다. 동문은 항상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이 문이 ‘천국의 문’에 어울린다고 말한 것으로 바사리는 전합니다. 시민계급은 처음에는 주로 성당이나 사원에 헌납하기 위해 미술품을 주문하다가 15세기 중엽에 이르면 개인의 목적으로 세속적 성격의 미술품을 대량 주문하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영주나 귀족들의 성곽과 저택뿐 아니라 돈 많은 시민들의 집에도 그림과 조각이 장식되기 시작하는데, 이런 예술적 활동 이면에는 자신의 위신을 과신하고 기념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있었습니다. 이러한 의도는 성당에 미술품을 헌납할 때도 그대로 작용했습니다. 이후 피렌체의 유명 가문들은 하나 둘씩 자기네 예배당보다 저택을 짓는 데 더 관심을 쏟기 시작했으며, 미술품 헌납자에서 수집가로 변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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