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시모 데 메디치의 군주정치
(작품은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시의회는 1434년 코시모가 망명에서 돌아와도 좋다고 결의했습니다. 코시모는 승리 속에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최고 지도자 도시장관에 선임되었으며, 이에 반해 리날도는 아들들을 데리고 피렌체를 떠나야 했습니다. 코시모는 부하들을 시켜 통치하고 공식 칭호나 직위 또는 권위도 갖고 있지 않았지만, 순전히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피렌체를 통치했습니다. 국가는 단순히 메디치 가의 이익을 옹호하는 기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코시모 민주주의’라는 말은 코시모가 다른 사람을 앞세워 통치하고 특정 가문의 이익을 위해 젊고 새로운 인재들을 등용한 것에 불과했을 뿐 실제로는 위장된 독재정치였다는 의미입니다. 발다치오 당기아리가 코시모를 밀어내려고 음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코시모 추종자들에 의해 붙들려 높은 창문 밖으로 내던져졌을 때 코시모는 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는 “국가는 주기도문으로 다스려지지 않는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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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코포 폰토르모Jacopo Pontormo의 <코시모 데메디리의 초상>, 1518-19년경, 패널에 유채, 86-65cm.
야코포 폰토르모는 주지주의에 입각한 감수성 예민한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코시모는 피렌체를 20년 동안 통치하면서 첫 해에 세금을 487만 5천 플로린(약 121,875,000 달러)을 징수했으며, 공공사업과 복지를 위해 자신의 돈 40만 플로린(약 1천만 달러)을 선뜻 내놓았는데, 이는 그가 메디치 가에 남겨준 유산의 두 배나 되는 액수였습니다. 피렌체 시민들은 그의 처사에 대단히 만족해했습니다. 코시모는 일흔다섯 살 때까지 매일 아침 일찍 자신의 사무실에 출근했습니다. 그는 수수한 복장을 하고 음식물을 절제했으며, 하녀로부터 아들을 얻은 후에는 조용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동정심이 많았고 성격이 부드럽고 너그러웠습니다. 보티첼리, 폰토르모, 베네조가 그의 초상을 그렸습니다. 그는 정치에도 관심이 많았고, 영국의 에드워드 4세가 코시모에게 자금을 빌려달라고 하자 에드워드 3세가 과거에 지불하지 못한 선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뜻 빌려주었습니다. 이후 에드워드 4세는 그 돈을 갚으면서 코시모를 정치적으로 후원했습니다. 코시모는 볼로냐의 주교 토마소 파렌투첼리가 자금난으로 도움을 청했을 때도 들어주었으며, 그가 교황 니콜라스 5세에 취임했을 때는 교황의 재정을 담당하는 직책을 맡았습니다.
15세기 초반부터 피렌체는 번영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이 같은 번영은 코시모의 통치시기에 순조롭게 지속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피렌체의 경제적 번영은 정점에 도달했습니다. 매년 1만6천 필의 천이 베네치아로 수출되었고, 이 교역을 위해 피렌체 수출업자들은 피렌체에 종속된 피사 항구와 1421년 이후에는 10만 굴덴(약 10만 달러)을 주고 사들인 리보르노 항구를 이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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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피렌체 세례당
1059-1150년경에 건립된 이 건축물은 동, 남, 복 방향으로 문이 나 있으며, 남문(제1문)은 안드레아 피사노, 북문(제2문)과 천국의 문이라 불리는 동문(제3문)은 기베르티가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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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 기베르티의 <피렌체 세례당의 북문>, 1403-24
28개의 패널로 구성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생애가 20점, 성인상이 8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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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 기베르티의 <피렌체 세례당의 동문, 일명 천국의 문>, 1425-52
동문은 10개의 대형 패널로 나뉘었고 신중하게 구성된 투시도법적 무대 위에 구약성서에서 따온 일화가 펼쳐집니다. 이러한 부조 대부분은 1437년까지 구상과 실제 제작이 이뤄졌으므로 피렌체 예술가 중 가장 앞선 작품으로 꼽힙니다. 특히 하나의 공간적 틀 안에서의 구도가 뛰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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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 기베르티의 <이삭의 희생>, 1401-03, 세례당 문의 부분, 45-3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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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포 브루넬레스키의 <이삭의 희생>, 1401-03, 45-38cm.
피렌체 세례당 북문 제작자를 선정한 경연작입니다. 브루넬레스키는 보다 깊이가 있는 구성을 한 기베르티에게 패했습니다.
사업에서 부를 쌓은 지배층은 부와 권력을 과시하고 싶어 했습니다. 1401년 모직물 상인들의 길드가 기증한 피렌체 세례당 북문을 제작할 부조 제작자를 결정하는 경연에서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1377-1446)를 제치고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1378-1455)가 선정되었습니다. 조각가이자 금세공가인 기베르티는 1401년 브루넬레스키를 물리치고 상인들의 길드가 위임한 일을 맡음으로써 피렌체의 걸출한 예술가의 위치에 섰습니다. 그는 세례당의 문을 1424년에야 완성했으며, 이듬해에는 이 건물의 동문을 의뢰받아 1452년에 완성했습니다. 이 대작업을 위해 그는 작업장을 확장하고 많은 피렌체 예술가들을 고용했는데, 도나텔로Donatello(1386-1466), 마솔리노Masolino(1383-1447?), 파올로 우첼로Paolo Uccello(1397-1475)가 조수로 그를 도왔습니다. 기베르티는 피렌체 대성당에도 관여하여 창문의 착색유리, 금세공, 송골함, 실재 사람 크기의 청동상들을 제작했습니다. 비평에도 일가견이 있어 많은 글을 남겼는데, 14세기 이탈리아 화가와 조각가들에 관한 가치 있는 자료로 인정받고 있으며, 그는 자서전적인 글도 썼습니다.
기베르티는 북문을 제작하는 데 23년을 보냈습니다. 1425년에는 동문 제작을 의뢰받아 1452년까지 작업했습니다. 두 작업은 당시 피렌체의 시민사회와 종교계의 최대 관심사였습니다. 제작에는 대형 작업장이 필요했으며, 당시 피렌체 미술가들 대부분이 수련기의 일부를 기베르티의 작업장에서 보냈습니다. 기베르티는 피렌체 대성당의 건축사업위원회 평의원으로서도 일했습니다.
고딕의 장인 전통에 깊이 뿌리를 둔 기베르티가 제작한 북문은 이전에 제작된 안드레아 피사노Andrea Pisano(1290?-1348?)의 남문을 모델로 삼았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생애 중 스무 편의 일화와 성인상 여덟 점은 우아한 선, 서정적인 감정, 풍경의 세부적인 면에 주의를 기울이는 데 주력했다는 점에서 국제 고딕양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은 기베르티가 제작한 동문에도 남아 있지만, 이 문은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원리에 따른 것입니다. 동문은 항상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이 문이 ‘천국의 문’에 어울린다고 말한 것으로 바사리는 전합니다. 시민계급은 처음에는 주로 성당이나 사원에 헌납하기 위해 미술품을 주문하다가 15세기 중엽에 이르면 개인의 목적으로 세속적 성격의 미술품을 대량 주문하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영주나 귀족들의 성곽과 저택뿐 아니라 돈 많은 시민들의 집에도 그림과 조각이 장식되기 시작하는데, 이런 예술적 활동 이면에는 자신의 위신을 과신하고 기념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있었습니다. 이러한 의도는 성당에 미술품을 헌납할 때도 그대로 작용했습니다. 이후 피렌체의 유명 가문들은 하나 둘씩 자기네 예배당보다 저택을 짓는 데 더 관심을 쏟기 시작했으며, 미술품 헌납자에서 수집가로 변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