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피렌체로 가다
작품은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피렌체지도
작자미상의 <피렌체 체인 지도>, 1480, 목판화
1. 산타 마리아 노벨라 2. 산 마르코
3. 산 로렌초 4. 산타 아눈치아타
5. 메디치 궁전 6. 이노센트 병원
7. 세례당 8. 피렌체 대성당
9. 종탑 10. 오르 산 미첼레
11. 마르조코 12. 산타 트리니타
13. 시뇨리아 궁전 14. 시뇨리아 로지아(벽이 없는 복도)
15. 산타 크로체 16. 폰테 베키오
17. 산토 스피리토 18. 카르미네 성당
19. 피티 궁전 20. 산 미니아토
레오나르도가 언제 빈치를 떠나 피렌체로 갔는지는 레오나르도의 할머니와 아버지가 작성한 세금보고서를 근거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즉 그 보고서들이 틀림없다면 그가 피렌체로 간 시기는 1470년 무렵입니다. 세금보고서는 호주가 작성하는 것으로, 몇 년 전 할아버지가 타계하자 할머니 몬나 루치아가 호주로서 작성하기 시작했는데, 1469년 작성된 세금보고서에는 그가 할머니와 함께 빈치에서 지내고 있는 것으로 적혀 있습니다. 몬나 루치아는 1469년 혹은 1470년에 세상을 떠났고 레오나르도를 돌봐줄 사람은 이제 아버지뿐이었습니다. 피에로는 아내 프란체스카와 함께 피렌체에 살고 있었고, 장남인 그는 호주로서 법적으로 자신이 거주하는 곳과 가족명단을 세금보고서에 기록해야 했습니다. 이듬해 세르 피에로가 작성한 보고서에는 레오나르도가 피렌체에서 그와 함께 지내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레오나르도가 피렌체로 간 것은 열일곱 살 때이거나 열여덟 살 무렵이었을 것입니다.
레오나르도는 메디치 궁전 앞을 걸으면서 똑바로 뻗은 길 양편에 집들이 일렬로 줄을 선 것을 보고 매우 놀랐을 것입니다. 14세기 초만 해도 피렌체에는 약 150개의 타워가 높이 솟아 있었습니다. 그는 작은 성채가 있는 언덕 주변에 약 50채 정도의 낮은 빌딩들이 있는 빈치에 비해 피렌체가 매우 큰 도시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가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 할 피렌체는 문명의 절정에 이른 곳 같았습니다. 피렌체인은 자신들의 도시를 고대 아테네처럼 아름답게 치장하고 싶어 했습니다. 아르노 강둑에는 네 개의 다리가 있고 건축공사장에서는 못질하고 돌 깎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피렌체에는 푸줏간 수보다도 목공소와 대리석을 다루는 곳이 더 많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피렌체 대성당은 아직 완공이 안 되어 마무리작업이 한창이었고, 대부분의 새 건물들은 개인 소유였습니다. 사업으로 돈을 번 사람들은 대저택을 지으면서 자신들의 저택을 궁전이라고 불렀습니다. 역사학자 베네데토 데이에 의하면 1450~78년 사이에 서른 개의 궁전이 건립되었습니다. 좁은 길은 확장공사로 넓어졌으며 오래된 건물들은 철거되고 상점, 사무실, 마구간, 정원 등이 지어졌습니다. 새 건물들은 엄격하고 단순한 기하학적 규칙을 따라 지어진 것입니다.
레오나르도가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작업장에 갔을 때 재능을 칭찬받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예술가의 작업장에 들어가는 도제의 나이는 보통 열두 살이나 열세 살이었지만, 그가 언제부터 도제생활을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당시 그는 읽고 쓰기를 할 줄 알았고 아마 문법과 셈본을 배웠을 것입니다. 동네 성당의 신부가 동네 아이들에게 문법과 셈본, 그리고 주판사용법을 가르치는 것이 상례였기 때문입니다. 레오나르도는 이때까지도 왼손잡이였으며 빈치 억양의 사투리를 구사했고 라틴어도 마흔이 넘어서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그 시기에 쓴 노트북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성경 이외의 책을 읽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로 그의 철자는 불규칙한데 이는 그가 읽기에 서툴렀음을 짐작하게 해줍니다. 빈치에 제대로 된 책이 있었는지도 의문이지만 그때는 인쇄술이 막 발명되어 이탈리아에 널리 소개되지 못했을 때라서 책값은 비쌌습니다. 고전을 읽지 못한 건 훗날 레오나르도에게 열등감을 심어주었습니다.
055
프라 필리포 리피의 <성모와 아기>, 1440-45년경, 215-244cm.
프라 필리포 리피Fra Filippo Lippi(1406년경-69)는 버려진 아이로 카르미네 수도원에서 자랐고, 1421년에 수사가 되기로 맹세했습니다. 그는 마지못해서 하는 탁발수사였으며, 수녀와 사랑에 빠져 아들 필리피노(1457년경-1504)와 딸 알렉산드리아를 낳았습니다. 필리피노는 열두 살 때부터 아버지가 타계하기 전까지 아버지로부터 그림을 배웠고, 그 후 보티첼리에게서 배운 후 피렌체의 유명한 화가들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리피가 화가가 된 건 마사초가 카르미네 성당에서 그림을 그리는 걸 보고부터였다고 하는데, 리피가 1437년에 그린 <타르퀴니아 성모>는 마사초의 영향을 받아 그린 것입니다. 그러나 1440년부터 그의 양식에 변화가 생겼으며, 좀 더 선을 사용하면서 장식적 모티프를 선호했습니다. 그는 <성모와 아기>의 주제에 집착했고, 이를 둥근 원형에 그린 최초의 화가들 중 하나입니다. 리피는 메디치 가의 후원을 받았으며, 당대의 유명한 화가로 많은 화가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는데, 보티첼리가 주로 영향을 받았으며, 그로부터 수학한 것 같습니다.
057
마솔리노의 <수태고지>, 1425/30, 패널에 템페라, 148-115cm.
058
마사초의 <삼위일체>, 1425,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670-315cm.
피렌체 화가 마사초Masaccio(Tommaso di Ser Giovanni di Mone, 1401-28)는 비록 스물일곱 살에 요절했지만, 위상은 알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 그리고 도나텔로와 어깨를 나란히 합니다. 마사초는 그의 별명으로 ‘칠칠치 못한 탐’이란 뜻입니다. 바사리는 그의 별명과 관련해서 마사초는 세상 것에 관심이 없다 보니 옷을 아무렇게나 남루하게 입고 다녀서 그런 별명을 얻게 되었다고 적었습니다. 마사초가 피렌체의 길드 멤버가 된 건 1422년으로 그가 누구로부터 어떻게 수학했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가장 초기의 작품으로 알려진 것은 현재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성 조베날레 3부작>으로 1422년에 제작한 것입니다. 이 작품은 세련되어 보이지는 않지만, 고딕의 우아함을 배척한 뚜렷한 개성이 드러나 있고 인물들의 체중과 부피를 묘사해내려고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조토의 회화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중력과 장려함을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조토가 공간에 인물을 배치한 것과 달리 마사초는 3차원으로 묘사하려고 했는데, 이는 유럽 회화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그가 미술품을 보기란 어렵지 않았습니다. 공공건물과 성당이 아니더라도 피렌체의 많은 건물 외관이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성당에서 프라 필리포 리피Fra Filippo Lippi(1406년경-69)와 도메니코 베네치아노가 그린 성모자, 이노센티우스 병원 벽을 장식한 루카 델라 로비아의 맑은 파란색의 도자기 메달과 산 미첼레 성당, 그 밖의 세례당, 종탑 등에서 기베르티, 도나텔로, 미켈로조의 조각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피렌체로 오기 전에 아버지를 따라서 엠폴리와 피스토이아에 갔을 때 대성당에서 리피가 그린 제단화와 마솔리노가 그린 프레스코화를 보았을 것입니다. 아르노 강 주변에 있는 엠폴리는 예술이 번성하던 도시였습니다. 레오나르도가 아버지를 따라서 피사에 갔다면 유명한 탑이 있는 캄포를 보았을 것이며, 또한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에서 스물일곱 살에 요절한 마사초Masaccio(Tommaso di Ser Giovanni di Mone, 1401-28)의 중요한 작품도 보았을 것입니다.
레오나르도는 훗날 마사초를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꼽았습니다. 바사리는 마사초의 작품에 관해 언급하는 가운데 “직접 보고 그린 말들은 아주 훌륭해서 사람들은 그보다 나은 그림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적었습니다. 마사초의 영향인지 레오나르도도 말을 여러 점 그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