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로아스터는 페르시아의 종교를 개혁한 예언자이다

 

 

 

 

 

누가 유일신 개념을 고안해냈건 간에, 확실한 것은 ‘불가사의한 힘’을 대하는 유대인의 생각이 남달랐다는 점이다. “만국의 모든 신은 우상들이지만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시편」 96: 5) 다른 모든 서아시아의 신은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출처가 불분명해보이는 「다니엘」의 외경 <벨과 용> 편에는 이런 기독교인의 사고를 드러내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키루스 2세는 다니엘에게 벨을 섬기라고 명한다. 다니엘은 벨이 가짜신이라 주장하고, 키루스 2세는 가짜신이 어떻게 바친 음식을 모두 먹어치우느냐고 반문한다. 사람들이 매일 밀가루 열두 말과 양 40마리, 포도 여섯 섬을 벨에게 바쳤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우상이 세워져 있는 신전 마루에 몰래 재를 뿌리고 제물을 바친 후 신전 문을 봉하게 한다. 다음날 재를 뿌린 마루에서 발자국이 발견되고 다니엘은 이곳의 “사제와 그들의 식솔들이 와서” 제물을 먹는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이어 키루스 2세가 용을 섬길 것을 강요하자, 다니엘은 “역청과 비계, 머리카락”을 끓여 만든 약을 용에게 먹인다. 이 약 때문에 내장이 갈기갈기 찢긴 용은 죽음을 맞는다.


서아시아의 타 종교의 사상을 끈질기게 거부해온 유대인이었지만 조로아스터교의 ‘최후의 심판’ 개념만큼은 노골적으로 배격하지 않았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키루스 2세 치세 하의 페르시아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비록 페르시아가 갖가지 종교를 믿는 타 민족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지만, 조로아스터의 가르침에 대한 페르시아인의굳건한 믿음만은 흔들림이 없었다. 조로아스터는 기원전 1000년경 페르시아의 종교를 개혁한 예언자이다. 당시에는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에 살고 있던 페르시아인은 그들의 사촌뻘인 아리아인이 북서쪽의 인도를 점령한 직후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페르시아인은 페르시아라는 그리스식 이름 대신 ‘이란’이라는 새 명칭으로 자신들의 국가를 지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조로아스터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조로아스터는 세계의 창조자 지고의 신 아후라 마즈다의 신성한 명령을 따라야 한다고 설파했다.


아후라 마즈다가 절대선이라면 아리만은 어둠과 악을 상징하는 신이다. 이 “파괴적이고 사악한 영혼”은 아후라 마즈다와 숙명적 대결을 펼치고 세상은 혼돈에 휩싸인다. 이전에는 페르시아에 전지전능한 지고신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조로아스터가 처음으로 아후라 마즈다를 통해 절대선의 경지를 보여준 것이다. 조로아스터는 모든 피조물은 아후라 마즈다가 아리만에게 압승을 거둘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해 도와야 한다고 믿었다. 여러 명의 구세주들이 백성을 선한 길로 인도하기 위해 세상을 찾아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상에 당도한 구세주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장소에서 망자들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최후의 심판의 날에 옳은 일을 행한 자는 구원을 받고 죄를 지은 자는 고통을 받게 된다. 그리고 부활한 자와 산 자가 심판을 받게 되고, 이 심판과정에서 쇳물로 뒤덮여 정화된 대지를 무사히 통과한 자만이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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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주의와 민주정치의 다원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

 

 

 

 

진보 성향의 레바논 교수 하산 사브가 저서에서 “폭정의 이슬람교”와 대립되는 “친민주 이슬람교”를 주장한 것처럼, 혹자는 아랍세계에서 진보적 민주정치를 따르는 이슬람교를 지지할지도 모르겠다. 사브 교수는 “무슬림의 정신에서 비롯된 포괄적인 영적 혁명” 은 아랍세계에서 민주정치를 실현해내는 데 필요한 문화 교체를 유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민주주의 전통을 도입하는 데는 문화가 중요하다는 점을 시인한 셈이다. 사브처럼 윤리적 이해를 바탕으로 민주정치를 지향하는 진보주의 이슬람교 사상가는 드물다. 신성한 종교의 재도입과 더불어, 이슬람주의자들은 윤리의식이나 문화적 의미에서 부흥하는 종교가 아니라, 그들이 이슬람교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정교일치(딘와다울라)에 근거한 이슬람세계 질서의 정치에 관심이 많다.
이슬람주의와 민주정치의 다원주의가 양립할 수 없지만, 우리는 민주정치의 게임에 제도적 이슬람주의자를 합류시킬 방도를 찾아야만 한다. 민주정치가 유지되려면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민주정치라는 미명하에 민주화를 저해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미국에서 불거진, 이슬람교와 민주정치를 둘러싼 논쟁은 이 같은 주의사항에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 권위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조차 무지하다는 것도 문제다. 이 방면에 정통한 권위자로 제이노 바란을 꼽을 수 있는데, 그는 저서에서 터키의 AKP가 은근슬쩍 이슬람주의를 장려하면서도 겉으로는 민주정치를 지지하는 척한다고 밝혔다.72 반면, 폴과 에스포시토와 같은 전문가들은 기본적인 원류를 간과했을 뿐 아니라 람주의와 이슬람교를 싸잡아버린 탓에 민주정치의 의미를 희석해버리기도 했다. 우리가 논하려는 것이 무엇인가?
점차 관심을 끌고 있는 정치적 이슬람교는 전 사회를 동원할 수 있는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는 한편, 서양의 학자 및 정책입안자들은 “온건파” 이슬람주의를 민주정치에 합류시킬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위험부담이 큰 전략이다. 우선, 서방세계가 제도적 이슬람주의를 분석한 결과는 정의가 애매한 용어에 토대를 두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이슬람교에 대한 연구는 이슬람교 및 이슬람주의가 모두 민주정치와 양립할 수 있다는 분명한 입장에 근거를 두어야 하는데, 재차 강조하지만, 나는 정치 윤리로서 개혁된 이슬람교가 민주정치와 양립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여기서 이슬람주의는 별개로 제쳐둔다.
민주정치에 대한 사탕발림만으로는 이를 확립할 수가 없다. 나는 아랍 무슬림 친민주정치 이론 및 실천가로서 종교색을 띠지 않은 민주정치를 이슬람세계에 정립하는 데 관심이 많다. 종교는 사회의 윤리의식을 심어주긴 하나 민주정치의 근간이 될 수는 없다. 앞선 연구에서 나는 다음에 열거된 다섯 가지 견해를 발전시키기 위해세 속주의 및 사회과학 개념을 활용했다.

 

1. 정치적 이슬람교를 둘러싼 정통 분석의 관련성: 대체로, 이슬람주의와 민주정치의 관련성을 두고 유용한 무언가를 꺼내기 전에 이슬람주의의 정체부터 확실히 알아야 한다. 이는 학술적이기도 하지만 정치적 관심사이기도 하다. 학술적 분석은 정책의 향방을 결정하는 데 보탬이 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슬람주의에 대한 서방세계의 대응에는 오류가 많았는데, 이는 정책입안자의 기초 지식이 부족한 데다 조치 또한 근거가 확실한 분석에 토대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첫 단계는 이슬람주의의 본질을 규명하는 것이라야 옳다.

 

2. 이슬람교의 다양한 본성: 기독교도 그렇지만 이슬람교 역시 획일적인 종교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신앙과 현지 문화와 문화 교류 문명을 겸한 이슬람교에는 다양성과 변동성이라는 특징이 있다. 애당초 정치색을 띤 종교는 아니었으나 전 역사를 통틀어 이슬람교는 이맘・칼리프의 권위와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항상 사후에— 정치에 내장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슬람주의는 (존 켈세이의 말처럼) 샤리아 논리의 전통73을 “전례” 로 이용하여 새로운 대안을 정당화하고 있다. 이슬람주의자들은 과거에는 존재하지도 않던, 획일적인 이슬람교를 만들기 위해 정교의 결합을 이용할 것이다.

 

3. 이슬람교 대 이슬람주의: “이슬람교” 와 “이슬람주의” 를 혼용하여— 이슬람주의자들에게는 좋겠지만— 개념이 애매해지거나, 폴과 에스포시토 등이 주장한 바와 같이 이슬람주의를 이슬람교의 열혈파(혹은 급진파)로 치부한다면 진실을 왜곡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이슬람교의 샤리아 논리를 분석한 결과에는 대부분 동의하지만, 하산 알반나가 조직한 무슬림 형제단이 “성직자의 샤리아 비전을 구현한 것” 74이라고 저서에 쓴 켈세이의 주장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진정한 무슬림” 을 자처하나 이를 의심할 만한 근거는 한둘이 아니다. 따라서 민주정치와의 양립성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 사실 우리는 두 가지 주제에 대해 서로 다른 두 가지 질문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슬람교와 민주정치의 양립성에 대한 첫 번째 질문에 종교개혁이라는 조건이 따른다면(살라피스트 이슬람교는 예외) 긍정적인 답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인도네시아의 나다툴 울라마Nahdatul Ulama는 이슬람주의가 아닌 이슬람 정당— 민간 이슬람교를 대변하는 민주정치 제도에 부합된다— 인 반면, 이집트의 이슬람주의 집단인 무슬림 형제단은— 하마스 같은 동류집단을 비롯하여— 민주적이라기보다는 전체주의적 시각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조직에 “두려움을 모르는 이슬람교” 를 결부시키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다.

 

4. “온건파”: 이슬람교의 신앙과 종교화된 이데올로기인 이슬람주의의 차이는 평화 지향적인 이슬람주의자와 폭력 지향적인 이슬람주의자의 차이와도 관계가 깊다. 난폭한 이슬람주의자들은 성전을 일으켜 정치적 아젠다를 실현하는 반면, 평화를 추구하는 이슬람주의자들은 전략적 이유로 폭력을 삼간다. 요컨대, 지하디스트 이슬람주의는 제도적 이슬람주의와 의미는 다르지만 목표는 같다. 그런 의미에서 “온건파” 와 “급진파” 가 관행을 두고는 대립하지만 샤리아에 기반을 둔 신이슬람 질서(니잠 이슬라미)라는 같은 비전을 공유한다고 밝힌 켈세이의 주장은 옳다. 바란도 지적했듯이, “온건파” 는
“민주정치 선거가… 권력에 이르는 가장 쉬운 방편” 이라는 데 뜻을 같이하여 폭력을 일삼는 “이슬람주의화보다는… 점진적인 상향식 정책을 지지한다.” “점진적인 이슬람주의화” 전략은 합법적인 선거는 치르나 민주화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5. 선거와 민주정치: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가 민주정치와 양립할 수 있는지 분석할 때에는 민주정치의 특징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민주정치는 제도상으로는 선거 절차에 기초를 두지만 투표보다 훨씬 범위가 넓다. 무엇보다도, 민주정치란 다양성을 인정하는 핵심 가치관을 토대로 합리적 의견을 수용하고 다원주의를 표방하는 정치 문화를 일컫는다. 선거 절차와 정치 문화의 확립은 동일한 체제에서 양분된 것으로, 서로 떼려야 뗄 수가 없는데, 제도적 이슬람주의자들이 이를 분리하려 한다면 상향식 이슬람주의화를 과격한 하향식 이슬람주의화로 대체하는 격에 불과할 것이다. 그들은 투표는
인정하지만 민주적인 시민 사회가 지향하는 다원주의적 정치 문화는 배격한다. 그러나 민주정치의 다원주의 시민 문화를 “세속 원리주의” 라며 거부하는 일부 권위자는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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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주의의 압제를 반대하던 근대 이슬람주의가 대안을 제시할까?

 

 

 

 

 

 

권위주의의 압제를 반대하던 근대 이슬람주의가 대안을 제시할까? 사아드 에딘 이브라힘의 말마따나 우리는 독재정치와 신정정치 사이에 얽혀 있지는 않은가? 독재주의자는 민주정치가 아랍에 적합하지 않다고 둘러대고, 이슬람주의자는 민주정치가 이슬람교에 적절치 않다고 말한다. 이슬람주의자가 상상하는 정치질서는 민주정치가 아니며 기존의 난국을 타파할 방책 또한 될 수 없다. 그래서 변화가 필요한 것이다. 군사력을 동원하여 민주정치 문화를 창출해보겠다던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의 “정권교체”에 실패하자 혹자는 이슬람교와 민주정치의 불화성을 거론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이런 추측을 “동양주의”로 치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일부 아랍인 중에도 그렇게 생각한 탓에 “동양주의에 역행한다” 는 이유로 사디크 알아즘에게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슬람세계에서 민주정치가 발을 내딛지 못한 까닭을 제국주의나 식민지 역사, 혹은 음모(무아마라)론으로 해명할 수는 없다. 그런 발상으로는 이렇다 할 결론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매우 유력하기 때문에 이를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요컨대, 정치적 이슬람교가 샤리아를 헌법으로 고집하는 것은 좀 더 원대한 쟁점이 있다는 방증이다. 정치적 야심을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거나 꾸며내는 것은 널리 확산된 관행이다. 현재 무슬림에게 필요한 것은 이슬람 전통에서 소홀히 여겼지만 존중받아 마땅한 이슬람식 합리주의다. 중세에 합리주의의 영향으로 이슬람문명이 헬레니즘화된 것은 장족의 발전으로 이어진 문화 차용의 일면을 보여준다. 무슬림 사회는 민주정치의 구조 및 제도적 근간을 창출하기 위해 서방세계에서 무언가를 차용해야 한다. 인권과 언론 및 집회의 자유는 문화와 법적 안전망이 보장되어야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슬림은 이것이 서방세계의 강요가 아닌 보편적 재화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시민 다원주의는 민주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결정하는 기준이다. 이슬람주의와 민주정치의 공존성이 흔들리는 까닭은 이슬람주의자들이 민주정치의 다원주의를 배격하기 때문인데, 그들은 서방세계의 가치관이라면 대개 거부하고 본다. 다원주의는 종교화된 정치와 공존할 수가 없다. 민주정치의 보편성과 “이슬람교식 해결책” 의 진정성이 대립하기 때문이다.
이슬람주의자에게 민주정치는 보편적이라기보다는 책략의 원천일 뿐이며, 유럽에 기원을 두었기에 협의(슈라)와 특정 절차의 채택으로 역할이 제한된다. 그러면 민주정치의 기초가 되는 제도적 안전망은 샤리아를 준수해야 하는 제도적 통제 메커니즘으로 전락하고 만다. 진정성이라는 미명하에 말이다. 이슬람교에서 민주정치의 걸림돌은, 내키지는 않지만 한때 배제되었던 사회집단에까지 참여토록 하자는 서방세계의 그것과는 다르다. 다른 사회집단과 계층을 법 앞에서 동등하게 보호하지 않으려는 것은 샤리아의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현상이 생기는 까닭은 첫째, 포괄적인 단일 샤리아가 없다는 것이다. 알라 신의 이름은 들먹이지만 정작 해석을 항상 제 임의대로 하는 것이다. 둘째, 무슬림과 비무슬림의 평등을 거부하므로 샤리아는 종교적 다원주의를 외면한다는 것이다.
민주정치에서 권력은 주관성이 배제된다. 즉 권력은 특정인이 아닌 법정이나 입법부 같은 기관에 존재한다는 이야기인데, 이슬람 전통에 따르면, 이슬람교 지도자(이맘)는 개인적인 권위를 구현한다. 이라크계 미국 학자인 마지드 하두리는 아랍 정치가 정치인의 일대기로 전락했다는 책을 다수 펴냈다. 방법론의 면에서는 오류가 있으나 그의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아랍의 정치권이 기관보다는 개인에 초점을 두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랍 정치에 기관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슬람교의 정신사를 연구하다 보면 “진정한 이맘은 누구인가” 하는 법률가의 의문에 자주 접하게 된다. 법적 문제는 개인의 권한을 토대로 해결되는데, 그의 판단에 비추어 적절하고 공정한 기관이 나서야 할 경우가 거의 없었다.
물론 예외는 있다. 알파라비는 고전 작품 『이상도시』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에 의지하고 이를 이슬람교의 합리주의 전통에 적용하는 사회와 국가의 바람직한 질서를 논했다. 분명 몇 가지 보편적 기준은 다른 문화 사람들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민주정치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기관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배링턴 무어의 고전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을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저서에서 그는 서양과 비서양의 정치 발전사를 비교분석하여, 유럽 사회가 중세의 자치기관들을 등에 업고 민주정치를 개발할 수 있었다는 점을 입증했다. 그리고 기관들은 국가와 더불어 시민 사회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고 결론지었다. 원활한 민주정치는 공정한 이슬람교 지도자뿐 아니라 시민국가 및 사회라는 기관이 존재해야 한다는 전제가 따른다. 이를 감안한다면 “다원 민주정치” 는 존재할 수 없다. 서방세계의 민주정치 양상이 이슬람교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이슬람주의자들의 주장은 민주정치화를 예방하려는 책략일 뿐이다. 게다가 이슬람주의식 사상 또한 정치 참여를 비롯하여, 비무슬림도 동등하게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제도화된 법의 확산을 방해하고 있다. 샤리아는 입법부가 제정한 것이 아니라 개인이 해석하기 나름이므로 제도화될 수 없다.
서방세계를 비판하는 주장은 이슬람교의 문화적 유산을 간과하기도 한다. 문화의 차용이라는 틀 안에서 제삼자에게서 무언가를 학습한다는 것이 아랍 이슬람세계의 유산에 걸맞지 않은 것도 아니며 지금도 분명 관계가 깊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헬레니즘도 이슬람세계의 유산 중 일부이므로 민주정치가 그리스에 기원을 둔다는 사실 역시 이슬람교와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물론 민주정치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나— 각 민주정치는 현지의 형편에 맞게 얼마든지 조율할 수 있다— 그래도 보편적 형편을 만족시켜야 민주정치다운 것이다. 이 같은 조건이 진정성 및 정체성 정치와 화합하지 못한다는 근거는 없으나, 이슬람주의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팔레스타인의 하마스와 이라크의 최고 이슬람 이라크 위원회, 레바논의 헤즈볼라,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예전에는 와사트당Wasat Party으로 위장했다), 튀니지의 알나하다al-Nahada, 요르단의 이슬람 행동전선Islamic Action Front 및 알제리의 FIS는 부상하는 민주정치가 아니라, 민주정치의 탈을 쓰고 권력을 독점하려는 이슬람주의를 보여주는 증표다. 나는 “이슬람교의 부흥” 을 반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민주정치가 정립되려면 이슬람주의식 샤리아의 부활, 그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어 이렇게 주장하는 것인데, 그것도 이제 막다른 골목에 이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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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란 무엇인가

 

 

 

이 장에서는 공리주의utilitarianism를 다루려고 한다. 공리주의의 개념과 그에 대한 몇 가지 비평을 검토한 다음 공리주의가 이런 비평들을 수용하면서 어떻게 발전해가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특히, 도덕의 문제를 놓고 떠오르는 자연스러운 생각들이 어떻게 공리주의 사상으로 발전해가는지, 그리고 비평을 넘어서기 위해 이 이론을 가다듬고 발전시키는 노력이 얼마나 가치 있는가에 중점을 두고자 한다. 이렇듯 특이한 이론적 접근은 비단 ‘상아탑’ 안에서만 이루어질 일이 아니라 우리 삶에서 도덕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도 가치 있는 일이다.

공리주의가 무엇인지를 직접적으로 설명한 이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인 J. J. C. 스마트에 따르면, 공리주의자가 “행위 B가 아닌 행위 A를 실행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행위 A를 실행하는 것이 행위 B를 실행하는 것보다 인류(혹은 모든 지각 있는 존재)를 더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말을 여러 각도에서 검토해보자. 먼저 공리주의가 행복이라는 결과에 집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좀 더 기술적인 용어로 표현한다면 공리주의는 결과주의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결과주의 이론가들은 어떤 행위는 도덕적 가치를 내포한다(요구되거나 금지되거나 하는 식으로)는 의무론자들의 주장을 부정한다.
여기서 무엇이 문제인가를 뚜렷이 하기 위해, 하나의 행위를 금지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해보자. 어떤 신이 몇몇 행위를 금지했다고 하면,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신이 없는 가운데 예컨대, 자연주의(기본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자연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사상) 관점에서 도덕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려고 한다. 그렇지 않다면 신이 금했기에 그런 행위들은 본래부터 나쁜 것이고 따라서 금지되어야 마땅하다(다시 말하자면, 신이 그것들을 금지한 것은 그것들이 본래부터 나쁘기 때문이다)는 정도의 불완전한 추론을 앞에 놓고 우리는 불만을 품을 것이다. 그렇다면 ‘금지’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설명할 수 있는 그 밖의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공리주의자들은 어떤 행위가 본질적으로 요청된다거나 금지된다는 식의 ‘으스스한’ 표현을 혐오한다. 이런 표현은 하나의 금기를 세우려는 것으로 비친다.
물론 사회마다 나름의 금기들이 있고, 이러저러한 행위를 금지하는 까닭에 관한 갖가지 이야기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공리주의자들은 금란 따지고 보면 문화적 기준을 나타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금기 그 자체에는 아무런 타당성이 없다. 그렇다고 공리주의자들이 모든 도덕을 관습적이거나 금기와 같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설령 사회의 모든 금기에 대하여 우리가 의문을 품을지라도, 거기에는 적어도 행복과 불행을 포함하는 어느 정도의 실상이 깃들어 있기 마련이다.
“해서는 안 되느니라”라는 말씀은 들리지 않지만 현실의 고통은 아프기만 하다. 그래서 결과주의가 등장하는 것이다. 설령 금지되거나 요구되는 행위들에 관한 모든 주장을 우리가 ‘훑어보았다’고 하더라도,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은 어떤 현실은 다른 현실에 비해 더 고통스럽고 복지는 더 적어서 낫거나 못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결과주의자들은 현실에 관한 주장은 이해할 수 있지만, 행위의 내재적 가치에 관한 주장은 모호하기 때문에 현실만이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결과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어떤 행위가 옳거나 그르다는 식의 가치를 띠고 있다면, 그것은 오직 그 행위에서 빚어지는 선악의 현실로 나타나므로 그 행위가 파생적으로만 옳거나 그르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결과주의 이론은 어떤 현실이 가치 있는 현실인지를 명시하지 않는 한 완전할 수가 없다. 공리주의에 따르면, 가치 있는 것이란 오로지 지각이 있는 존재의 행복이나 복지일 뿐이다. 결과주의 이론이 반드시 공리주의에 속하는 건 아니다. 공리주의가 아닌 형태의 결과주의 이론 또한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자유나 종의 다양성이나 창조성 같은 것이(그리고 이들이 자체의 가치를 지니지 않을 때에는 그것들이 초래하는 행복이) 현실을 가치 있게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렇지만 공리주의의 한 가지 뚜렷한 장점은 자연주의와 곧바로 조화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신비스럽다거나 본질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그 어떤 것에 기대지 않고서도 행복은 좋은 것이고 고통은 나쁜 것임을 곧바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감각 있는 존재는 그것이 기본적으로 지니는 심리적 구성으로 하여 괴로움 앞에서 움츠리고 즐거움에 이끌린다.
스마트의 정의에서 또한 공리주의가 주로 인간 전체(아니면 감각 있는 존재 전반)의 이익에 관심을 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공리주의의 가장 중요하고 매력적인 측면은 그것이 평등과 공정함을 지지한다는 점이다. 공리주의자는 현실을 선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행복 이상의 어떤 것도 아니라는 전제 아래 오로지 현실의 선을 추구하면서, 한 사람의 행복은 다른 사람의 행복과 마찬가지로 가치가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러한 사고는 현대 사회에 보편화되었다. 태생, 인종, 성별, 사회계층 따위를 기준으로 어떤 사람의 이익을 다른 사람의 이익에 앞세우던 편견을 씻어내는 데 공리주의 사상이 얼마나 중요했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리주의는 그 출발단계부터 “한 사람은 하나로 셈해야 하며 어느 누구도 하나보다 더 많게 셈해서는 안 된다”고 부르짖던 급진적인 이론이었다. 한 사람의 행복은 다른 사람의 행복만큼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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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한 허균許筠

 

 

 

허균許筠(1569, 선조 2~1618, 광해군 10)의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학산鶴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이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성筬이 이복형이며, 봉과 난설헌蘭雪軒이 동복형제이다. 12세 때 아버지를 잃었고, 학문은 유성룡柳成龍에게 배웠으며, 시는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하나인 이달李達에게 배웠다. 이달은 둘째 형의 친구로서 그에게 시의 묘체를 깨닫게 해주었으며, 인생관과 문학관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뒤 26세 때인 1594년(선조27)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고 설서說書를 지냈고, 1597년에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하였다. 이듬해 황해도 도사都事가 되었는데, 서울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여섯 달 만에 파직되었다. 뒤에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형조시랑을 지내고, 1602년 사예司藝·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했으며, 그해에 원접사 이정구李廷龜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하였다. 1604년 수안군수遂安郡守로 부임했다가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아 또다시 벼슬길에서 물러나왔다.

1606년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글재주와 넓은 학식으로 이름을 떨치고, 누이 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보여 이를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공로로 삼척부사가 되었으나 여기서도 석 달이 못 되어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다는 탄핵을 받아 쫒겨났다. 그 뒤 공주목사로 다시 기용되어 서류庶流들과 가까이 지냈으며, 또다시 파직당한 뒤에는 부안으로 내려가 산천을 유람하며 기생 계생桂生을 만났고 천민출신의 시인 유희경柳希慶과도 교분을 두터이 하였다. 1609년(광해군 1) 명나라 책봉사가 왔을 때 이상의李尙毅의 종사관이 되었다. 그해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되었다.

1610년 전시殿試의 시관으로 있으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咸悅로 유배되었다. 그 뒤 몇 년간은 태인泰仁에 은거했는데, 1613년 계축옥사에 평소 친교가 있던 서류출신의 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이첨李爾瞻에게 아부하여 대북大比에 참여하였다. 1614년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중국에 다녀왔으며, 그 이듬해에는 동지 겸 진주부사冬至兼陳奏副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두 차례의 사행에서 많은 명나라 학자들과 사귀었으며 귀국할 때《태평광기太平廣記》를 비롯하여 많은 책을 가지고 왔는데, 그 가운데에는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1617년 좌참찬이 되었으며 폐모론을 주장하다가 폐모를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奇自獻과 사이가 벌어지고 기자헌은 길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광해군 10년(1618) 8월 24일,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문 앞에서 살벌한 국문이 열렸다. 이른바 허균의 역모사건과 관련된 국문이었다. 바로 이전 해 12월 기자헌奇自獻의 아들 기준격奇俊格이 비밀상소를 올렸다. 그 내용은 허균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고 했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기준격의 상소로 인해 시작된 허균과 관련된 논란은 본인 스스로 무고함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해를 넘기게 되었다. 그리고 1618년 광해군 10년 8월 남대문에 한 장의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허균의 심복 현응민玄應旻이 붙였다는 것이 탄로 났으며 허균과 기준격을 대질 심문시킨 끝에 역적모의를 하였다 하여 허균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저자 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당시 허균의 죄상으로 거론되던 대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무오년(광해군 10년, 1618년) 무렵에 여진족의 침범이 있자. 중국에서 군사를 동원하였다. 그러자 조선이 여진의 본고장인 건주建州에서 가까워 혹시 있을지도 모를 여진의 침략으로 인심이 흉흉하고 두려워하는데 허균은 긴급히 알리는 변방의 보고서를 거짓으로 만들고 또 익명서를 만들어, “아무 곳에 역적이 있어 아무 날에는 꼭 일어날 것이다.” 하면서 서울 도성 안 사람을 공갈하였다. 또한 허균은 밤마다 사람을 시켜 남산에 올라가서 부르짖기를, “서쪽의 적은 벌써 압록강을 건넜으며, 유구국琉球國 사람은 바다 섬 속에 와서 매복했으니, 성 안의 사람은 나가서 피하여야 죽음을 면하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노래를 지어, “성은 들판보다 못하고, 들판은 강을 건너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또 소나무 사이에 등불을 달아놓고 부르짖기를, “살고자 하는 사람은 나가 피하라”고 하니, 인심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아침저녁으로 안심할 수 없어 서울 안의 인가人家가 열 집 가운데 여덟아홉 집은 텅 비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김윤황을 사주해서 격문을 화살에 매어 경운궁 가운데 던지게 한 것, 남대문에 붙여진 격문이 허균이 했다는 것 등이다.

허균을 둘러싼 이 같은 의혹에 대해서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광해군일기>에서는 이것이 당시 대북 정권의 핵심이었던 이이첨과 한찬남이 허균 등을 제거하기 위해 모의한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허균의 문집에 실린〈관론官論>·〈정론政論〉·〈병론兵論〉·〈유재론遺才論〉등에서 그는 민본사상과 국방정책. 신분계급의 타파 및 인재등용과 붕당배척의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내정개혁을 주장한 그의 이론은 원시유교사상에 바탕을 둔 것으로 백성들의 복리증진을 정치의 최종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허균은 유교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을 공부한 유가로서 학문의 기본을 유학에 두고 있으나 당시의 이단으로 지목되던 불교·도교에 대하여 사상적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특히, 불교에 대해서는 한때 출가하여 중이 되려는 생각도 있었으며 불교의 오묘한 진리를 접하지 않았더라면 한평생을 헛되이 보낼 뻔했다는 술회를 하기도 하였다. 불교를 믿는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고서도 자기의 신념에는 아무런 흔들림이 없음을 시와 편지글에서 밝히고 있다.

도교사상에 대해서는 주로 그 양생술과 신선사상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은둔사상에도 지극한 동경을 나타내었다. 은둔생활의 방법에 대하여 쓴〈한정록閑情錄〉이 있어 그의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허균 자신이 서학西學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없으나 몇몇 기록에 의하면, 허균이 중국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가지고 온 것을 계기로 하늘을 섬기는 학을 했으니, 이는 곧 그가 새로운 문물과 서학의 이론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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