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주의의 압제를 반대하던 근대 이슬람주의가 대안을 제시할까?

 

 

 

 

 

 

권위주의의 압제를 반대하던 근대 이슬람주의가 대안을 제시할까? 사아드 에딘 이브라힘의 말마따나 우리는 독재정치와 신정정치 사이에 얽혀 있지는 않은가? 독재주의자는 민주정치가 아랍에 적합하지 않다고 둘러대고, 이슬람주의자는 민주정치가 이슬람교에 적절치 않다고 말한다. 이슬람주의자가 상상하는 정치질서는 민주정치가 아니며 기존의 난국을 타파할 방책 또한 될 수 없다. 그래서 변화가 필요한 것이다. 군사력을 동원하여 민주정치 문화를 창출해보겠다던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의 “정권교체”에 실패하자 혹자는 이슬람교와 민주정치의 불화성을 거론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이런 추측을 “동양주의”로 치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일부 아랍인 중에도 그렇게 생각한 탓에 “동양주의에 역행한다” 는 이유로 사디크 알아즘에게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슬람세계에서 민주정치가 발을 내딛지 못한 까닭을 제국주의나 식민지 역사, 혹은 음모(무아마라)론으로 해명할 수는 없다. 그런 발상으로는 이렇다 할 결론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매우 유력하기 때문에 이를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요컨대, 정치적 이슬람교가 샤리아를 헌법으로 고집하는 것은 좀 더 원대한 쟁점이 있다는 방증이다. 정치적 야심을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거나 꾸며내는 것은 널리 확산된 관행이다. 현재 무슬림에게 필요한 것은 이슬람 전통에서 소홀히 여겼지만 존중받아 마땅한 이슬람식 합리주의다. 중세에 합리주의의 영향으로 이슬람문명이 헬레니즘화된 것은 장족의 발전으로 이어진 문화 차용의 일면을 보여준다. 무슬림 사회는 민주정치의 구조 및 제도적 근간을 창출하기 위해 서방세계에서 무언가를 차용해야 한다. 인권과 언론 및 집회의 자유는 문화와 법적 안전망이 보장되어야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슬림은 이것이 서방세계의 강요가 아닌 보편적 재화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시민 다원주의는 민주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결정하는 기준이다. 이슬람주의와 민주정치의 공존성이 흔들리는 까닭은 이슬람주의자들이 민주정치의 다원주의를 배격하기 때문인데, 그들은 서방세계의 가치관이라면 대개 거부하고 본다. 다원주의는 종교화된 정치와 공존할 수가 없다. 민주정치의 보편성과 “이슬람교식 해결책” 의 진정성이 대립하기 때문이다.
이슬람주의자에게 민주정치는 보편적이라기보다는 책략의 원천일 뿐이며, 유럽에 기원을 두었기에 협의(슈라)와 특정 절차의 채택으로 역할이 제한된다. 그러면 민주정치의 기초가 되는 제도적 안전망은 샤리아를 준수해야 하는 제도적 통제 메커니즘으로 전락하고 만다. 진정성이라는 미명하에 말이다. 이슬람교에서 민주정치의 걸림돌은, 내키지는 않지만 한때 배제되었던 사회집단에까지 참여토록 하자는 서방세계의 그것과는 다르다. 다른 사회집단과 계층을 법 앞에서 동등하게 보호하지 않으려는 것은 샤리아의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현상이 생기는 까닭은 첫째, 포괄적인 단일 샤리아가 없다는 것이다. 알라 신의 이름은 들먹이지만 정작 해석을 항상 제 임의대로 하는 것이다. 둘째, 무슬림과 비무슬림의 평등을 거부하므로 샤리아는 종교적 다원주의를 외면한다는 것이다.
민주정치에서 권력은 주관성이 배제된다. 즉 권력은 특정인이 아닌 법정이나 입법부 같은 기관에 존재한다는 이야기인데, 이슬람 전통에 따르면, 이슬람교 지도자(이맘)는 개인적인 권위를 구현한다. 이라크계 미국 학자인 마지드 하두리는 아랍 정치가 정치인의 일대기로 전락했다는 책을 다수 펴냈다. 방법론의 면에서는 오류가 있으나 그의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아랍의 정치권이 기관보다는 개인에 초점을 두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랍 정치에 기관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슬람교의 정신사를 연구하다 보면 “진정한 이맘은 누구인가” 하는 법률가의 의문에 자주 접하게 된다. 법적 문제는 개인의 권한을 토대로 해결되는데, 그의 판단에 비추어 적절하고 공정한 기관이 나서야 할 경우가 거의 없었다.
물론 예외는 있다. 알파라비는 고전 작품 『이상도시』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에 의지하고 이를 이슬람교의 합리주의 전통에 적용하는 사회와 국가의 바람직한 질서를 논했다. 분명 몇 가지 보편적 기준은 다른 문화 사람들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민주정치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기관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배링턴 무어의 고전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을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저서에서 그는 서양과 비서양의 정치 발전사를 비교분석하여, 유럽 사회가 중세의 자치기관들을 등에 업고 민주정치를 개발할 수 있었다는 점을 입증했다. 그리고 기관들은 국가와 더불어 시민 사회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고 결론지었다. 원활한 민주정치는 공정한 이슬람교 지도자뿐 아니라 시민국가 및 사회라는 기관이 존재해야 한다는 전제가 따른다. 이를 감안한다면 “다원 민주정치” 는 존재할 수 없다. 서방세계의 민주정치 양상이 이슬람교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이슬람주의자들의 주장은 민주정치화를 예방하려는 책략일 뿐이다. 게다가 이슬람주의식 사상 또한 정치 참여를 비롯하여, 비무슬림도 동등하게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제도화된 법의 확산을 방해하고 있다. 샤리아는 입법부가 제정한 것이 아니라 개인이 해석하기 나름이므로 제도화될 수 없다.
서방세계를 비판하는 주장은 이슬람교의 문화적 유산을 간과하기도 한다. 문화의 차용이라는 틀 안에서 제삼자에게서 무언가를 학습한다는 것이 아랍 이슬람세계의 유산에 걸맞지 않은 것도 아니며 지금도 분명 관계가 깊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헬레니즘도 이슬람세계의 유산 중 일부이므로 민주정치가 그리스에 기원을 둔다는 사실 역시 이슬람교와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물론 민주정치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나— 각 민주정치는 현지의 형편에 맞게 얼마든지 조율할 수 있다— 그래도 보편적 형편을 만족시켜야 민주정치다운 것이다. 이 같은 조건이 진정성 및 정체성 정치와 화합하지 못한다는 근거는 없으나, 이슬람주의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팔레스타인의 하마스와 이라크의 최고 이슬람 이라크 위원회, 레바논의 헤즈볼라,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예전에는 와사트당Wasat Party으로 위장했다), 튀니지의 알나하다al-Nahada, 요르단의 이슬람 행동전선Islamic Action Front 및 알제리의 FIS는 부상하는 민주정치가 아니라, 민주정치의 탈을 쓰고 권력을 독점하려는 이슬람주의를 보여주는 증표다. 나는 “이슬람교의 부흥” 을 반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민주정치가 정립되려면 이슬람주의식 샤리아의 부활, 그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어 이렇게 주장하는 것인데, 그것도 이제 막다른 골목에 이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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