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주의와 민주정치의 다원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

진보 성향의 레바논 교수 하산 사브가 저서에서 “폭정의 이슬람교”와 대립되는 “친민주 이슬람교”를 주장한 것처럼, 혹자는 아랍세계에서 진보적 민주정치를 따르는 이슬람교를 지지할지도 모르겠다. 사브 교수는 “무슬림의 정신에서 비롯된 포괄적인 영적 혁명” 은 아랍세계에서 민주정치를 실현해내는 데 필요한 문화 교체를 유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민주주의 전통을 도입하는 데는 문화가 중요하다는 점을 시인한 셈이다. 사브처럼 윤리적 이해를 바탕으로 민주정치를 지향하는 진보주의 이슬람교 사상가는 드물다. 신성한 종교의 재도입과 더불어, 이슬람주의자들은 윤리의식이나 문화적 의미에서 부흥하는 종교가 아니라, 그들이 이슬람교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정교일치(딘와다울라)에 근거한 이슬람세계 질서의 정치에 관심이 많다.
이슬람주의와 민주정치의 다원주의가 양립할 수 없지만, 우리는 민주정치의 게임에 제도적 이슬람주의자를 합류시킬 방도를 찾아야만 한다. 민주정치가 유지되려면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민주정치라는 미명하에 민주화를 저해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미국에서 불거진, 이슬람교와 민주정치를 둘러싼 논쟁은 이 같은 주의사항에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 권위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조차 무지하다는 것도 문제다. 이 방면에 정통한 권위자로 제이노 바란을 꼽을 수 있는데, 그는 저서에서 터키의 AKP가 은근슬쩍 이슬람주의를 장려하면서도 겉으로는 민주정치를 지지하는 척한다고 밝혔다.72 반면, 폴과 에스포시토와 같은 전문가들은 기본적인 원류를 간과했을 뿐 아니라 람주의와 이슬람교를 싸잡아버린 탓에 민주정치의 의미를 희석해버리기도 했다. 우리가 논하려는 것이 무엇인가?
점차 관심을 끌고 있는 정치적 이슬람교는 전 사회를 동원할 수 있는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는 한편, 서양의 학자 및 정책입안자들은 “온건파” 이슬람주의를 민주정치에 합류시킬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위험부담이 큰 전략이다. 우선, 서방세계가 제도적 이슬람주의를 분석한 결과는 정의가 애매한 용어에 토대를 두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이슬람교에 대한 연구는 이슬람교 및 이슬람주의가 모두 민주정치와 양립할 수 있다는 분명한 입장에 근거를 두어야 하는데, 재차 강조하지만, 나는 정치 윤리로서 개혁된 이슬람교가 민주정치와 양립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여기서 이슬람주의는 별개로 제쳐둔다.
민주정치에 대한 사탕발림만으로는 이를 확립할 수가 없다. 나는 아랍 무슬림 친민주정치 이론 및 실천가로서 종교색을 띠지 않은 민주정치를 이슬람세계에 정립하는 데 관심이 많다. 종교는 사회의 윤리의식을 심어주긴 하나 민주정치의 근간이 될 수는 없다. 앞선 연구에서 나는 다음에 열거된 다섯 가지 견해를 발전시키기 위해세 속주의 및 사회과학 개념을 활용했다.
1. 정치적 이슬람교를 둘러싼 정통 분석의 관련성: 대체로, 이슬람주의와 민주정치의 관련성을 두고 유용한 무언가를 꺼내기 전에 이슬람주의의 정체부터 확실히 알아야 한다. 이는 학술적이기도 하지만 정치적 관심사이기도 하다. 학술적 분석은 정책의 향방을 결정하는 데 보탬이 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슬람주의에 대한 서방세계의 대응에는 오류가 많았는데, 이는 정책입안자의 기초 지식이 부족한 데다 조치 또한 근거가 확실한 분석에 토대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첫 단계는 이슬람주의의 본질을 규명하는 것이라야 옳다.
2. 이슬람교의 다양한 본성: 기독교도 그렇지만 이슬람교 역시 획일적인 종교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신앙과 현지 문화와 문화 교류 문명을 겸한 이슬람교에는 다양성과 변동성이라는 특징이 있다. 애당초 정치색을 띤 종교는 아니었으나 전 역사를 통틀어 이슬람교는 이맘・칼리프의 권위와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항상 사후에— 정치에 내장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슬람주의는 (존 켈세이의 말처럼) 샤리아 논리의 전통73을 “전례” 로 이용하여 새로운 대안을 정당화하고 있다. 이슬람주의자들은 과거에는 존재하지도 않던, 획일적인 이슬람교를 만들기 위해 정교의 결합을 이용할 것이다.
3. 이슬람교 대 이슬람주의: “이슬람교” 와 “이슬람주의” 를 혼용하여— 이슬람주의자들에게는 좋겠지만— 개념이 애매해지거나, 폴과 에스포시토 등이 주장한 바와 같이 이슬람주의를 이슬람교의 열혈파(혹은 급진파)로 치부한다면 진실을 왜곡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이슬람교의 샤리아 논리를 분석한 결과에는 대부분 동의하지만, 하산 알반나가 조직한 무슬림 형제단이 “성직자의 샤리아 비전을 구현한 것” 74이라고 저서에 쓴 켈세이의 주장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진정한 무슬림” 을 자처하나 이를 의심할 만한 근거는 한둘이 아니다. 따라서 민주정치와의 양립성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 사실 우리는 두 가지 주제에 대해 서로 다른 두 가지 질문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슬람교와 민주정치의 양립성에 대한 첫 번째 질문에 종교개혁이라는 조건이 따른다면(살라피스트 이슬람교는 예외) 긍정적인 답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인도네시아의 나다툴 울라마Nahdatul Ulama는 이슬람주의가 아닌 이슬람 정당— 민간 이슬람교를 대변하는 민주정치 제도에 부합된다— 인 반면, 이집트의 이슬람주의 집단인 무슬림 형제단은— 하마스 같은 동류집단을 비롯하여— 민주적이라기보다는 전체주의적 시각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조직에 “두려움을 모르는 이슬람교” 를 결부시키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다.
4. “온건파”: 이슬람교의 신앙과 종교화된 이데올로기인 이슬람주의의 차이는 평화 지향적인 이슬람주의자와 폭력 지향적인 이슬람주의자의 차이와도 관계가 깊다. 난폭한 이슬람주의자들은 성전을 일으켜 정치적 아젠다를 실현하는 반면, 평화를 추구하는 이슬람주의자들은 전략적 이유로 폭력을 삼간다. 요컨대, 지하디스트 이슬람주의는 제도적 이슬람주의와 의미는 다르지만 목표는 같다. 그런 의미에서 “온건파” 와 “급진파” 가 관행을 두고는 대립하지만 샤리아에 기반을 둔 신이슬람 질서(니잠 이슬라미)라는 같은 비전을 공유한다고 밝힌 켈세이의 주장은 옳다. 바란도 지적했듯이, “온건파” 는
“민주정치 선거가… 권력에 이르는 가장 쉬운 방편” 이라는 데 뜻을 같이하여 폭력을 일삼는 “이슬람주의화보다는… 점진적인 상향식 정책을 지지한다.” “점진적인 이슬람주의화” 전략은 합법적인 선거는 치르나 민주화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5. 선거와 민주정치: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가 민주정치와 양립할 수 있는지 분석할 때에는 민주정치의 특징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민주정치는 제도상으로는 선거 절차에 기초를 두지만 투표보다 훨씬 범위가 넓다. 무엇보다도, 민주정치란 다양성을 인정하는 핵심 가치관을 토대로 합리적 의견을 수용하고 다원주의를 표방하는 정치 문화를 일컫는다. 선거 절차와 정치 문화의 확립은 동일한 체제에서 양분된 것으로, 서로 떼려야 뗄 수가 없는데, 제도적 이슬람주의자들이 이를 분리하려 한다면 상향식 이슬람주의화를 과격한 하향식 이슬람주의화로 대체하는 격에 불과할 것이다. 그들은 투표는
인정하지만 민주적인 시민 사회가 지향하는 다원주의적 정치 문화는 배격한다. 그러나 민주정치의 다원주의 시민 문화를 “세속 원리주의” 라며 거부하는 일부 권위자는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