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한 허균許筠

 

 

 

허균許筠(1569, 선조 2~1618, 광해군 10)의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학산鶴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이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성筬이 이복형이며, 봉과 난설헌蘭雪軒이 동복형제이다. 12세 때 아버지를 잃었고, 학문은 유성룡柳成龍에게 배웠으며, 시는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하나인 이달李達에게 배웠다. 이달은 둘째 형의 친구로서 그에게 시의 묘체를 깨닫게 해주었으며, 인생관과 문학관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뒤 26세 때인 1594년(선조27)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고 설서說書를 지냈고, 1597년에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하였다. 이듬해 황해도 도사都事가 되었는데, 서울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여섯 달 만에 파직되었다. 뒤에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형조시랑을 지내고, 1602년 사예司藝·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했으며, 그해에 원접사 이정구李廷龜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하였다. 1604년 수안군수遂安郡守로 부임했다가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아 또다시 벼슬길에서 물러나왔다.

1606년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글재주와 넓은 학식으로 이름을 떨치고, 누이 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보여 이를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공로로 삼척부사가 되었으나 여기서도 석 달이 못 되어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다는 탄핵을 받아 쫒겨났다. 그 뒤 공주목사로 다시 기용되어 서류庶流들과 가까이 지냈으며, 또다시 파직당한 뒤에는 부안으로 내려가 산천을 유람하며 기생 계생桂生을 만났고 천민출신의 시인 유희경柳希慶과도 교분을 두터이 하였다. 1609년(광해군 1) 명나라 책봉사가 왔을 때 이상의李尙毅의 종사관이 되었다. 그해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되었다.

1610년 전시殿試의 시관으로 있으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咸悅로 유배되었다. 그 뒤 몇 년간은 태인泰仁에 은거했는데, 1613년 계축옥사에 평소 친교가 있던 서류출신의 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이첨李爾瞻에게 아부하여 대북大比에 참여하였다. 1614년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중국에 다녀왔으며, 그 이듬해에는 동지 겸 진주부사冬至兼陳奏副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두 차례의 사행에서 많은 명나라 학자들과 사귀었으며 귀국할 때《태평광기太平廣記》를 비롯하여 많은 책을 가지고 왔는데, 그 가운데에는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1617년 좌참찬이 되었으며 폐모론을 주장하다가 폐모를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奇自獻과 사이가 벌어지고 기자헌은 길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광해군 10년(1618) 8월 24일,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문 앞에서 살벌한 국문이 열렸다. 이른바 허균의 역모사건과 관련된 국문이었다. 바로 이전 해 12월 기자헌奇自獻의 아들 기준격奇俊格이 비밀상소를 올렸다. 그 내용은 허균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고 했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기준격의 상소로 인해 시작된 허균과 관련된 논란은 본인 스스로 무고함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해를 넘기게 되었다. 그리고 1618년 광해군 10년 8월 남대문에 한 장의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허균의 심복 현응민玄應旻이 붙였다는 것이 탄로 났으며 허균과 기준격을 대질 심문시킨 끝에 역적모의를 하였다 하여 허균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저자 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당시 허균의 죄상으로 거론되던 대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무오년(광해군 10년, 1618년) 무렵에 여진족의 침범이 있자. 중국에서 군사를 동원하였다. 그러자 조선이 여진의 본고장인 건주建州에서 가까워 혹시 있을지도 모를 여진의 침략으로 인심이 흉흉하고 두려워하는데 허균은 긴급히 알리는 변방의 보고서를 거짓으로 만들고 또 익명서를 만들어, “아무 곳에 역적이 있어 아무 날에는 꼭 일어날 것이다.” 하면서 서울 도성 안 사람을 공갈하였다. 또한 허균은 밤마다 사람을 시켜 남산에 올라가서 부르짖기를, “서쪽의 적은 벌써 압록강을 건넜으며, 유구국琉球國 사람은 바다 섬 속에 와서 매복했으니, 성 안의 사람은 나가서 피하여야 죽음을 면하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노래를 지어, “성은 들판보다 못하고, 들판은 강을 건너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또 소나무 사이에 등불을 달아놓고 부르짖기를, “살고자 하는 사람은 나가 피하라”고 하니, 인심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아침저녁으로 안심할 수 없어 서울 안의 인가人家가 열 집 가운데 여덟아홉 집은 텅 비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김윤황을 사주해서 격문을 화살에 매어 경운궁 가운데 던지게 한 것, 남대문에 붙여진 격문이 허균이 했다는 것 등이다.

허균을 둘러싼 이 같은 의혹에 대해서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광해군일기>에서는 이것이 당시 대북 정권의 핵심이었던 이이첨과 한찬남이 허균 등을 제거하기 위해 모의한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허균의 문집에 실린〈관론官論>·〈정론政論〉·〈병론兵論〉·〈유재론遺才論〉등에서 그는 민본사상과 국방정책. 신분계급의 타파 및 인재등용과 붕당배척의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내정개혁을 주장한 그의 이론은 원시유교사상에 바탕을 둔 것으로 백성들의 복리증진을 정치의 최종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허균은 유교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을 공부한 유가로서 학문의 기본을 유학에 두고 있으나 당시의 이단으로 지목되던 불교·도교에 대하여 사상적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특히, 불교에 대해서는 한때 출가하여 중이 되려는 생각도 있었으며 불교의 오묘한 진리를 접하지 않았더라면 한평생을 헛되이 보낼 뻔했다는 술회를 하기도 하였다. 불교를 믿는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고서도 자기의 신념에는 아무런 흔들림이 없음을 시와 편지글에서 밝히고 있다.

도교사상에 대해서는 주로 그 양생술과 신선사상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은둔사상에도 지극한 동경을 나타내었다. 은둔생활의 방법에 대하여 쓴〈한정록閑情錄〉이 있어 그의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허균 자신이 서학西學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없으나 몇몇 기록에 의하면, 허균이 중국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가지고 온 것을 계기로 하늘을 섬기는 학을 했으니, 이는 곧 그가 새로운 문물과 서학의 이론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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