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성술의 기원은 클라우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에까지 올라간다


점성술의 기원은 클라우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Claudius Ptolemaeus에까지 올라갑니다. 영어로 프톨레미Ptolemy로 불리는 이 학자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들과 인척관계에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2세기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일하던 대학자였습니다. 이러저러한 행성이 여차저차한 해의, 또는 달의 ‘집’에 올라섰다는 등, ‘물병자리의 시대’라는 등의 난해한 점성술 풀이들 모두 프톨레마이오스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바빌로니아 시대부터 전래된 점성술 전통을 체계화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에 흔히 볼 수 있었던 별점 하나를 읽어 보면, 150년에 태어난 어느 여자 아이의 점괘로 파피루스에 그리스어로 적혀 있습니다.

필로에Philoe 태어나다. 안토니우스 카이사르Antonius Caesar 황제 10년, 파메노스Phamenoth 달 15일과 16일에 걸친 밤 제1시, 해는 물고기자리에, 목성과 수성은 양자리에, 토성은 게자리에, 화성은 사자자리에, 금성과 달은 물병자리에 있었다. 이 아이의 천궁도는 염소자리다.

몇 년 몇 월 하며 날짜를 세는 방식은 수백 년이 흐르는 동안 많이 바뀐 데 비해, 점성술의 시시콜콜한 표현방식은 지금까지 그대로 쓰이고 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저술한 점성술 책 『테트라비블로스 Tetrabiblos』를 펼쳐 보면 이런 식입니다.

토성이 동쪽에 있을 때 태어난 아이들은 그 피부가 거무스름하고, 몸집이 제법 건장하며, 검은 머리털에 고수머리이고, 가슴에 털이 많으며, 중간 정도의 눈과 어중간한 키에, 水氣(수기)와 冷氣(냉기)가 過(과)한 체질이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사람의 언행이 행성과 별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믿었을 뿐 아니라 키, 얼굴색, 성격, 게다가 선천적 장애도 별의 다스림을 받는다고 주장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시대에는 천문학과 점성술이 딱히 구별되지 않았습니다. 천문학자로서 프톨레마이오스가 이룩한 업적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별들에게 이름을 붙여주었고, 그것들의 밝기를 기록하여 목록을 만들었으며, 지구가 왜 구형인지 그럴듯한 이유를 제시했고, 일식이나 원식을 예측하는 공식을 확립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행성들의 이상한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우주의 모형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는 행성 운동의 모형을 개발하여 하늘의 신호를 해독하고자 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태양과 달과 별들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믿었습니다. 지구 중심의 우주관은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생각이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투명한 천구 모형을 두고 훗날 중세 사람들은 천구가 수정으로 만들어졌다고 상상했습니다.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쓰는 천구의 음악이나 제7천국seventh heaven 같은 말도 여기서 유래한 것입니다. 달, 수성, 금성, 태양, 화성, 목성, 토성 그리고 별들이 붙어 도는 구, 즉 천국heaven이 각각 하나씩이므로 모두 일곱 개의 천국이 있는 셈입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모형은 중세의 암흑시대에 교회의 지지를 받았고, 그로부터 1천 년 동안 천문학의 진보를 가로막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마침내 1543년 폴란드의 가톨릭 성직자였던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holaus Copernicus(1473-1543)가 행성의 겉보기 운동을 설명하는 아주 색다른 가설을 내놓았다. 그 가설의 가장 대담한 제안은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가설은 지구를 하나의 행성으로 강등시키고 태양으로부터 세 번째 자리에서 완전한 원 궤도를 도는 존재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 우주관 때문에 심기가 불편해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1616년 드디어 가톨릭교회는 코페르니쿠스의 저술을 금서 목록에 포함시켰습니다. 이 금서령은 1835년까지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코페르니쿠스를 두고 한 말은 재미있습니다. 그는 코페르니쿠스를 가리켜 “벼락출세한 점성술사”라고 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코페르니쿠스를 겨냥해 “이 바보가 천문학이라는 과학을 통째로 뒤엎어 놓으려 한다. 그러나 성서에 분명히 쓰여 있듯이, 여호수아가 멈춰라 하고 명한 것은 태양이지 지구가 아니다”라고까지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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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스승을 능가하다


작품을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베로키오와 레오나르도 합작의 <그리스도의 세례>의 부분으로 두 천사의 모습은 레오나르도가 그린 것입니다. 1475-78년경, 패널에 유채와 템페라, 17.7-15.1cm.

존 러스킨은 그리스도의 옷을 들고 있는 레오나르도의 천사 그림은 “종교적 그리고 전체적 구성에서 볼 때 베로키오의 것보다 우수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 회화적으로는 훨씬 뛰어나다”고 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천사의 어려운 몸짓을 묘사했는데, 천사가 관람자쪽으로 등을 3분의 2쯤 돌린 옆모습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이런 각도로 그리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딱딱하고 오래된 양식의 그림에 레오나르도의 천사가 삽입되어 작품이 한결 부드럽고 정취가 있으며, 부피와 공간이 생겼습니다.


베로키오는 포르타 알라 크로체 근처 도시 성곽 밖에 있는 산 살비 수도원에 커다란 그림 <그리스도의 세례>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가 부분적으로 그린 것으로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패널 중앙에 구성한 베로키오는 회화적 구성을 위해 그리스도 왼쪽 강둑에 천사 두 명을 그려 넣기로 하고 그리스도 바로 옆에 있는 천사는 자신이 그리고, 왼쪽의 천사와 배경은 레오나르도에게 그리게 했습니다.

이 작품은 베로키오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조화와 감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그는 두 수도자의 인체를 해부학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장려하게 표현했습니다. 이탈리아 화가들은 투명한 물을 묘사하는 데 자신이 없어 마른 땅에서 세례를 받는 장면으로 표현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베로키오는 자신감을 갖고 사실주의 방법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는 플랑드르 화가들의 방법을 응용해 강물에 잠긴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의 다리를 그리면서 투명한 강물을 잘 묘사했습니다. 뵐플린이 지적했듯이 레오나르도와 베로키오 사이에는 내적 연결성이 존재했습니다. 바사리의 기록을 보면 두 사람이 매우 가까웠으며 베로키오가 창안해낸 것들을 레오나르도가 많이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레오나르도의 초기 그림들은 놀라우며 베로키오의 <그리스도의 세례>에 그려진 레오나르도의 천사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나온 음성처럼 관람자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바사리에 의하면 스승보다 더 박식한 레오나르도가 그리스도의 옷을 들고 있는 천사를 그렸을 때 베로키오는 너무 놀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자기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고 합니다. 기교에 있어서도 레오나르도가 베로키오에 비해 우수함이 증명되었는데, 엑스-레이를 투시한 결과, 베로키오의 채색은 릴리프처럼 두터우며 붓자국이 생겼지만, 레오나르도는 흰색을 섞지 않고 물감을 기름에 섞어 투명하게 칠했기 때문에 붓자국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레오나르도는 템페라를 사용하지 않고 늘 밑칠을 투명하게 했으므로 엑스-레이를 투시할 경우 나무 패널이 보입니다. 그는 가장 엷고 밝은 색으로 코팅을 한 후 점점 어둡게 해서 인체의 윤곽을 나타내는 기교를 사용했으므로 빛이 착색유리에 비쳐 통과하듯 그의 그림에 빛을 비추면 투명함을 보게 됩니다. 레오나르도가 마지막 그림 <광야의 세례 요한>에 사용한 유상액은 너무 엷어서 엑스-레이를 통해 보게 되면 한결같이 고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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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고양이와 말 스케치>, 29.8-21.2cm.


레오나르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작업이 없을 때는 대상을 관찰하면서 다양한 모습을 드로잉했습니다. 그는 한 가지에 몰두하다가도 불현듯 떠오르는 착상을 손이 가는 대로 그렸습니다. 때로는 고양이를 뒤에서 보고 그리면서 꼬리를 의문부호로 그리기도 하고 어떤 전리품을 움켜쥐고 웅크린 모습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가운데에 작은 용을 그려 넣었는데 고양이처럼 생겨 언뜻 보면 알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종이에는 다양한 말의 모습을 그리면서 주제에서 벗어나 호랑이처럼 생긴 고양이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의 노트북을 보면 관심사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메모한 종이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의사이면서 철학자·지리학자·수학자인 파올로 델 포조 토스카넬리가 적혀 있고, 피렌체에서 산수를 가르치는 베네데토의 이름도 있습니다. 그가 이런 사람들의 강의를 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관심사는 다양했으며 과학에 특히 관심이 많았음이 틀림없습니다.

그가 과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늙은 토스카넬리에 의해서였습니다. 토스카넬리는 브루넬레스키의 친구로서 베로키오와도 종종 만나는 사이였습니다. 레오나르도가 토스카넬리를 만난 건 대성당에 구체를 장식으로 올려놓을 때였습니다. 당시 토스카넬리는 피렌체의 가장 유명한 천체학자였으며 지리학자였습니다. 그는 1474년에 배를 타고 서쪽으로 항해하면 중국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콜럼버스가 그의 이론을 받아들여 대서양을 건넜습니다. 레오나르도는 평생 천체와 지구에 대해 관심을 가졌기에 토스카넬리의 강의를 들었을 것이며, 그에게 질문도 하고 책과 도구를 빌리기도 했을 것입니다. 레오나르도가 그린 지도는 토스카넬리의 영향으로 짐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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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1485-86년경, 175-28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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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드로 보티첼리의 <동방박사의 경배>, 1476-77, 패널에 유채

보티첼리란 ‘작은 몸통’이란 뜻인데, 그의 형이 살이 쪄서 붙여진 별명으로 그에게도 붙여졌고, 후에 그의 성이 되었습니다. 그는 베로키오의 작업장에 들어가기 전, 리피로부터 수학했으며, 그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습니다. 그의 양식은 15세기 후반 예술가들의 것들과 유사하며, 마사초의 과학적 자연주의에 반하는 고딕 양식으로 감성적이고 여성적 우아함과 장식적 요소가 현저합니다. 보티첼리는 1465년경 자신의 작업장을 갖고 독립한 뒤 곧 메디치 가로부터 주문받아 작업했는데, 로렌초의 어머니 루크레지아 토르나부오니를 위한 <유딧>이었습니다. 또한 그녀의 남편 피에로 고토소를 위해 <위대한 성모>와 여기에 소개하는 <동방박사의 경배>를 그렸습니다. <동방박사의 경배>에서는 코시모가 성모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있고, 그 아래 피에로도 무릎을 꿇고 있으며, 로렌초가 칼을 쥐고 있는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그는 메디치 가의 3대를 그림에 삽입한 것입니다. 피에로가 사망한 후 로렌초와 줄리아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보티첼리를 후원했습니다. 보티첼리는 대부분의 생애를 피렌체에서 보냈고, 유일하게 피렌체를 떠난 기간은 1481-82년으로 시스티나 예배당을 장식하기 위해서였으며, 그때 페루지노, 기를란다요 등과 함께 작업했습니다. 그는 로렌초 데 메디치의 주문으로 현재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된 <봄>, <비너스의 탄생>, <아테네와 켄타우로스>를 그렸습니다. 보티첼리는 종교적, 신화적 그림을 주로 그렸지만, 초상화나 단테의 『신곡』을 위해 펜으로 드로잉도 많이 그렸습니다.


레오나르도가 작업하지 않을 때 친구 예술가들과 잘 어울렸는지 알 수 없지만, 자신보다 예닐곱 살 많은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Alessandro di Mariano Filipepi, 1444/5-1510)에 관해 몇 차례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보티첼리의 작품에 관해서는 신통치 않은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그는 보티첼리가 원근법을 중시하지 않는다면서 “산드로, 당신은 어째서 (중앙에 있는) 두 번째 대상이 세 번째의 것보다 작게 보이는지 말하지 않는 거요”라고 적었습니다. 또한 그는 보티첼리가 풍경을 단지 배경으로만 사용하면서 앞에 있는 주제와는 무관하게 표현한다고 비평했습니다. 보티첼리의 <봄>에서 님프들의 발이 땅에 닿은 것처럼 보이지 않고 <비너스의 탄생>에서 나무가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건 레오나르도의 지적을 당할 만했습니다. 그는 화가가 보편성을 추구해야 한다면서 적었습니다.

많은 화가들도 단지 측정하고 비례만을 공부할 뿐 이런 것들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알려고 하지 않는데, 한 가지 분야에서 성공적이더라도 다른 분야에서 아주 잘못되었다면 이는 매우 무가치한 일이다. 어떤 인물은 키가 작고 뚱뚱할 것이며, 어떤 인물은 키가 크고 여위었을 것이며, 어떤 인물은 평균치의 키와 몸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다양한 인물들에 관심이 없는 화가는 인물들을 똑같이 그리게 된다. 이런 화가들은 각각의 인물을 자매들처럼 그릴 것이며 이런 행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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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드로 보티첼리의 <성 세바스천>, 패널에 유채와 템페라, 195-7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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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나무에 묶인 성 세바스천>, 17.4-6.3cm.



베로키오는 재능이 많은 예술가였지만 훌륭한 조각가를 배출하지 못했고 회화에서만 레오나르도, 페루지노, 로렌초 디 크레디Lorenzo di Credi(1458-1537)를 배출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일곱 살 연하의 크레디의 작품에 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관심 밖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뵐플린은 크레디를 가리켜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고 다른 태양의 빛을 받아들이는 별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의 그림들은 학생이 주어진 과제를 부지런히 수행한 것처럼 보인다”고 적었습니다. 크레디는 베로키오 작업장에서 도제로 일한 뒤 배로키오의 조수 겸 작업장의 경영책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숙련된 기술과 성실함으로 베로키오 작업장의 제작방법을 효과적으로 지속시켜나갔습니다. 하지만 그의 화풍은 개성이 부족했고, 작품은 레오나르도의 초기 작품과 유사하므로 바사리는 그들의 작품이 자주 혼동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레오나르도에 정통한 학자 케네스 클락은 이 시기에 레오나르도의 취미는 “옷을 잘 입고, 말을 길들이며, 류트lute(14~17세기의 기타 비슷한 현악기)를 배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피렌체 젊은이들은 오늘날의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파티를 좋아하고, 많은 시간을 어떻게 즐길 것인가에 관해 궁리했습니다. 그들은 평범한 생활을 싫어했습니다. 레오나르도에게는 유머가 있었고, 그 역시 즐거운 시간을 가지려고 했으며, 남에게 웃음을 선사할 수 있는 재미난 이야기를 만들어 퍼뜨리기도 했습니다. 그가 만든 재담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페트라르카가 월계수 잎을 좋아했다면, 그 이유는 소시지와 개똥지빠귀 요리를 만드는 데 적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사람이 왜 아이들이 못생겼는데 네 그림에서는 아름답게 묘사되었느냐고 물으면 그는 “그림은 낮에 그렸지만 아이들은 밤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과학을 좋아한 그는 사람들에게 속임수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유리컵 사이에 나무막대기를 올려놓고 유리컵을 손상시키지 않는 가운데 나무막대기를 자른다든가 끓는 기름에 붉은색 포도주를 부어 다양한 색의 화염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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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세이건, 인간은 코스모스에 연줄을 대고자 안달을 하며 삽니다



생물학은 물리학보다 역사학에 더 가깝습니다. 현재를 이해하려면 과거를 잘 알아야 하고, 그것도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알아야만 합니다. 역사학에 예견론이 없는 것처럼 생물학에도 확립된 예견론이 없습니다. 이유는 양쪽 모두 같습니다. 연구 대상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물학과 역사학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타자를 이해함으로써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외계 생명에 관한 단 하나의 예만 연구할 수 있게 되더라도, 그리고 그 하나가 아무리 미미한 수준의 것이라고 하더라도 생물학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와 다른 생물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외계 생물에 대한 탐구가 중요하다고 누구나 말하지만, 외계 생명을 찾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현실적 어려움을 우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계의 생명은 우리가 추구할 궁극의 목표입니다. 왜냐면 그것이 우리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줄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애초부터 인간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의 배후를 의식하며 살아왔습니다. 인류가 수렵으로 辛酸(신산)한 삶을 살아갈 때 그들은 하늘에서 사냥꾼과 사냥개를 보았고, 하늘에 곰과 젊은 여자를 그렸습니다. 사냥꾼의 관심을 끌 만한 온갖 것들이 하늘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 조상들은 아주 밝은 별이 꼬리를 길게 끌며 순식간에 하늘을 가르고 가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것을 ‘떨어지는 별 falling star’라고 불렀습니다.

태양과 달처럼 별도 항상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집니다. 관측자의 머리 위를 지나는 별이 뜨고 지는 데 하룻밤이 꼬박 걸립니다. 또 계절에 따라 뜨고 지는 별자리가 달라집니다. 초가을에 뜨는 별자리가 따로 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동편 하늘에서 새로운 별자리가 뜨는 경우는 절대로 없습니다. 별들이 뜨는 데도 순서가 있으며, 그것들의 행동거지에도 예측성과 영원성이 있습니다. 별들 중에는 해보다 조금 먼저 뜨거나 조금 늦게 지는 것들이 있는데, 그러한 별들은 계절에 따라 출몰 시각과 위치가 변합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별의 출몰 현상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수년에 걸쳐 그것을 기록으로 남긴다면, 그 사람은 계절을 예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이 1년 중 언제쯤인지도 매일 아침 해가 지평선 어디에서 뜨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늘에는 달력의 역할을 훌륭하게 하는 표지들이 걸려 있는 셈입니다.

하늘에 해, 달, 별 말고 다른 종류의 천체가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들을 ‘떠돌이 별’이란 뜻에서 통틀어 행성planet이라고 불렀습니다. 행성은 떠돌이 삶을 영위하던 유목민들에게는 특별한 정감과 친근감으로 다가갔을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행성이라고 알고 있던 것은 모두 일곱 개였지만, 해와 달을 제외하면 다섯이 남습니다. 행성들은 우리에게 멀리 있는 별들이 이루는 고정된 별자리를 배경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러 달에 걸쳐 행성의 겉보기 운동을 관찰해보면 이 별자리에 들어있던 행성이 저 별자리로 이동하고 여러 천체들이 모두 인간의 삶에 심오한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점성술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점성술에 따르면 사람의 운명은 그가 태어날 때 어느 행성이 어느 별자리에 들어있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합니다. 수천 년 전부터 행성의 움직임이 국왕과 왕조와 제국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생각이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점성술사는 행성의 운동을 연구합니다. 지난번에 금성이 염소자리에 들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나 보고 기억해두었다가 이번에도 그런 비슷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겠는가를 점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성술사는 국가의 통제를 받게 되었습니다. 정식 점성술사가 아닌 사람이 함부로 하늘의 뜻을 읽는 일은 중죄로 다스리는 나라가 많아졌습니다. 왜냐면 현 체제를 전복시키려면 국왕의 몰락을 예언하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는 황실 점성술사가 틀린 예언을 한 죄로 사형을 당하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실제 사건과 딱 맞아 떨어지도록 사건이 벌어진 뒤에 아예 기록을 뜯어고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점성술은 관찰과 수학, 철저한 기록과 엉성한 생각, 그리고 살아남기 위한 거짓말이 묘하게 뒤섞이는 가운데 발달했습니다.

『코스모스 Cosmos』(1980)의 저자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은 점성술의 역사가 얼마나 긴지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여러 단어의 어원에서 찾아볼 수 있다면서 재해를 뜻하는 disaster는 그리스어로 ‘나쁜 별’이란 뜻이고, 유행성 감기를 뜻하는 influenza는 이탈리어로 별의 ‘영향’을 뜻하는 influence에서 온 말이며, 건배를 뜻하는 mazeltov는 히브리어(본질적으로는 바빌로니아어)로 ‘좋은 별자리’라고 말합니다. shlamazel이라는 이디시어는 악운이 끊이지 않고 겹치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이 역시 바빌론의 천문학 용어에서 나왔다고 합니니다. 플리니우스Plinius의 주장에 따르면 로마에는 sideratio라 하여 ‘행성에 얻어맞은’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로마인들은 행성을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고려하다’는 뜻의 consider는 ‘행성과 함께’라는 뜻으로 진지하게 생각할 때에는 반드시 행성을 함께 고려했었기 때문에 생긴 말입니다.

지구라는 행성 위에 있는 국가들의 국기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미국 국기에는 별이 50개 있고, (구)소련과 이스라엘 국기에는 1개, 미얀마는 14개, 그레나다와 베네수엘라는 7개, 중국은 5개, 이라크는 3개, 상투메 프린시페는 2개가 있습니다. 일본, 우루과이, 말라위, 방글라데시, 대만의 국기에는 태양이 하나씩 그려져 있습니다. 브라질 국기에는 천구가 그려져 있으며, 오스트레일리아, 서사모아, 뉴질랜드와 파푸아뉴기니의 국기에는 모두 남십자성이 들어있습니다. 부탄의 국기에는 지구를 상징하는 용의 여의주가 그려져 있고, 캄보디아 국기에는 앙코르와트 천문 관측대가 그려져 있습니다. 인도, 대한민국, 몽골인민공화국의 국기에는 공통적으로 천체 상징물이 들어있습니다. 사회주의 국가들 중에는 국기에 별을 쓴 경우가 특히 많습니다. 이슬람 국가들은 초승달을 많이 씁니다. 모든 국기 중 거의 절반 정도에 천문학적 상징물이 들어있는 셈입니다. 이는 문화권을 초월하고 사상을 넘어서 전 세계적으로 볼 수 있는 공통적인 현상입니다. 이는 우리 시대에 한정된 현상이 아닙니다. 기원전 3천 년 수메르인들이 만든 원통형 도장에도, 혁명 이전 중국 도교 신도들의 여러 가지 깃발에도 별자리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저마다 하늘의 힘과 영원불변함을 현 국가 체제에 빗대어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코스모스에 연줄을 대고자 안달을 하며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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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반 에이크에 의해 유화물감이 피렌체에 소개되다

 

작품을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화가이자 모자이크 제작자이며 스테인드글라스 제작에 뛰어난 알레소 발도비네티Alesso Baldovinetti(1426년경-99)의 작업장에도 갔습니다. 발도비네티가 어디에서 수학했는지는 알려 있지 않지만, 우아하고 세련된 양식은 도메니코 베네치아노와 프라 안젤리코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의 대표작으로 1460-62년 피렌체의 산타 아눈치아타 앞마당에 프레스코로 그린 <예수의 탄생>, 루브르에 있는 <성모자>, 우피치에 있는 <수태고지> 등이 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발도비네티의 풍경화에 관심이 있었지만 물감비법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발도비네티의 작업장에는 아궁이가 있었고 계란 노른자와 송진을 섞어 유약 효과를 냈는데, 이것을 사용해 프레스코를 그리면 유화처럼 신선하고 밝은 느낌을 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사리에 의하면 플랑드르 대가들의 작품이 1530년대에 나폴리와 우르비노에 소개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화면이 매끈하고 빛났으며 색상과 투명한 효과는 전통적인 방법의 채색으로는 도저히 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 화가들은 이런 북유럽 화가들의 비법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회화사에 혁명과도 같은 유화물감이 피렌체에 소개된 건 플랑드르 화가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1395-1441)에 의해서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얀 반 에이크에 대한 기록은 1422년 이후부터 남아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기술적인 완벽함과 현실에 대한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각이 결합되었다는 점에서 사실주의 회화의 최고 위치를 차지하며 15세기의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 화가로서 전 유럽에 명성을 떨쳤습니다. 나폴리의 인문학자 파치오는 15세기 뛰어난 인물에 그를 포함시켰고, 바사리는 미술의 진보에 관한 책에서 그에게 특별한 위치를 부여했습니다.

바사리에 의하면 1456~79년에 주로 활약한 시실리 사람 안토넬로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sina(1430-79)가 이 비법에 대한 실험을 했지만, 번번이 실패한 끝에 플랑드르로 가서 얀 반 에이크로부터 방법을 직접 알아냈다고 합니다. 안토넬로는 베네치아에 안주한 후 친구들에게 이 비법을 가르쳤으며, 도메니코 베네치아노가 이를 배워 피렌체의 작업장에 소개했습니다. 폴랑드르 화풍의 화가였던 안토넬로는 당시 네덜란드 화가들에 의해 지배되었던 나폴리 혹은 밀라노에서 폴랑드르 화가들과의 접촉으로 북구의 기법을 익힌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의 작품 중 현재 런던 내셔널 갤러리의 <그리스도의 책형>(1475-76)의 구도는 이탈리아적이나 빛과 대기를 다룬 방법은 폴랑드르적입니다. 베네치아 회화의 발전에 끼친 그의 영향은 정확하게 평가되지는 않고 있으나 지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470년경 레오나르도가 화가로서 첫 발을 디딜 때만 해도 토스카나 화가들은 유화물감을 사용하는 방법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화가들이 유화물감의 효과를 실험하면서 작품에 유약을 발라 화면을 매끄럽고 빛나게 만들었습니다.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는 유화물감의 혁명을 이룬 것 같고 그로 인해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한 듯 보입니다.

레오나르도와 페루지노가 이곳에서 유화물감 사용법을 배웠으며 이후 라파엘로에까지 전수된 것 같습니다. 물 대신 오일을 사용한 건 회화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는데, 물감이 번지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물감을 덧칠할 수 있어 원하는 색을 섞어 사용할 수 있게 되고, 마르는 데 시간이 걸리므로 색을 정정할 수도 있었습니다. 색 위에 색을 덮어 릴리프 효과도 낼 수 있게 되었으며, 색의 뉘앙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고, 외곽선을 부드럽게 할 수 있었으므로 그림이 부드러워지고 깊이를 나타낼 수 있어 새로운 미적 감각을 야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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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트로 페루지노의 <성모와 아기, 성자들>, 1495-96년경, 패널에 유채, 152-124cm.


피에트로 페루지노Pietro Perugino(Pistro Vannucci, 1445/50-1523)는 이런 부드러운 느낌을 지나치게 즐긴 나머지 작품을 감상적이 되게 했습니다. 페루지노는 레오나르도보다 조금 늦게 베로키오의 작업장에 들어왔습니다. 페루지노는 레오나르도보다 최소한 서너 살 많았고 두 사람은 개성과 야망도 같지 않았습니다. 페루지노는 이 시기에 이미 자신의 고유한 양식을 갖고 있었지만, 피렌체 화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현대화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페루지노와 레오나르도는 젊은 화가 로렌초 디 크레디의 도움을 받아 유화물감을 만드는 방법을 배운 것 같습니다.

페루지노는 주로 페루자Perugia에서 활약했고, 그래서 페루지노란 별명이 붙었습니다. 바사리는 그가 레오나르도와 함께 베로키오의 문하에서 수학했다고 하는데, 피렌체에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로부터 수학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는 1481년 새로 건립한 시스티나 예배당에 프레스코를 그렸는데, 그 외에도 보티첼리, 기를란다요, 코시모 로젤리도 함께 그곳에서 작업했습니다.

로렌초 디 크레디는 베로키오가 사망한 1488년까지 작업장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기교에 뛰어났지만, 개성 있는 양식을 창조해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레오나르도의 초기 양식에 영향을 받았고, 1510년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체에 그린 <성모와 성인들>을 보면 프라 바르톨로메오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남긴 기록에는 그가 유화물감을 만드는 비법에 관해 알려고 노력했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서 실험했지만 실패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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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속에 모네의 아들 태어나다

작품을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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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루브르 앞 제방 Le Quai du Louvre>, 1867, 유화, 65-93cm.

이 작품은 당시의 시가와 파리 사람들의 생활상을 알게 해주는 역사적 자료가 됩니다. 1866-67년 모네는 르누아르와 더불어 파리의 풍경을 그렸으며, 이들의 그림을 통해 당시 파리의 장면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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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루브르 앞 제방>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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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생제르망-오세로아 SaintpGermain-l'Auxerrois>, 1867, 유화, 79-9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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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의 <아르의 다리 Le Pont des Arts>, 1867, 유화, 61.6-102.9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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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루브르의 프린세스 정원 Le Jardin de l'Infante>, 1867, 유화, 91.8-61.9cm.



1867년의 살롱에 <정원의 여인들>과 <옹플레르의 항구>를 출품했다가 낙선의 고배를 마신 모네도 마네와 마찬가지로 만국박람회의 장면들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모네는 뮤지엄의 허락을 받고 르누아르와 함께 루브르 뮤지엄 위층 발코니에서 내려다본 장면을 그렸습니다.

그해 여름 모네는 노르망디로 가서 생타드레스의 숙모 집에 묵었습니다. 살롱에 낙선한 것 말고도 그를 괴롭히는 문제가 발생했는데, 카미유가 그의 아이를 임신한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경제적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버지는 카미유와 헤어지겠다고 약속하기 전에는 도울 수 없다고 완강하게 버텼습니다. 이 시기에 모네의 아버지도 숨겨둔 여인에게서 아이를 낳았는데, 아마 자신의 불륜을 감추기 위해 모네와 카미유와의 관계를 더욱 반대한 것 같았습니다. 모네는 바지유에게 보낸 편지에 돈을 꿔달라면서 “아무 준비도 없는 상황에서 카미유가 아이를 낳는다면 아주 큰 불행을 맛보게 될 것이다”라고 적었습니다. 이런 극한 상황 때문이었는지 모네의 시력이 갑자기 나빠졌으며, 그의 말로는 두 주 후 회복되었다고 했는데 아버지가 그를 돕기로 결정한 후였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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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생타드레스의 테라스 Terrace at Sainte-Adresse>, 1867, 유화, 98-130cm.

모네는 바다가 바라보이는 곳에서 구름과 배의 동향을 보고 자랐습니다. 르아브르에서 그는 부댕, 용킨트와 더불어 바다의 장면을 그리고 도 그렸었습니다. 이 작품은 두 개의 깃발을 중심으로 모네가 오른쪽으로 조금 간 상태에서 그렸기 때문에 비대칭적 구성이 되었으며, 의자에 앉아 있는 아돌프의 오른쪽 여백이 넉넉해졌습니다. 정원의 선과 아돌프의 시선이 대각선이 되게 해서 수직과 수평선에 역동적으로 대비시켰습니다. 아돌프의 시선이 두 개의 깃대 사이를 뚫고 나가게 한 것은 참으로 기발한 착상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숙모의 앉아 있는 모습은 숙모 집 정원에서 그린 것을 삽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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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생타드레스의 테라스>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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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생타드레스의 테라스>의 부분


그는 생타드레스에서 르아브르의 항구와 그곳의 바닷가 장면을 여러 점 그렸습니다. 생타드레스에서 바지유에게 해양화, 인물화, 정원화 모두 잘 그려지고 있다고 편지했습니다. 대표작의 하나인 <생타드레스의 테라스>는 이때 그린 것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생타드레스의 테라스>에는 바다를 배경으로 나란히 게양된 두 개의 깃발이 펄럭이고 잘 가꾸어진 꽃이 만개한 테라스에 두 쌍의 남녀가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모네의 가족들입니다. 바다 가까이에 서서 대화하고 있는 한 쌍은 아저씨 탄테 르카드르와 사촌 잔 마르그리트 르카드르이며, 바다를 바라보고 앉아 있는 사람은 모네의 아버지 아돌프와 숙모 소피입니다. 청록색 바다 위에는 요트들이 떠다니고 멀리 수평선에는 기선을 비롯해 온갖 선박들이 떠 있습니다. 빛과 그림자의 유희 속에 만개한 꽃들이 대조를 이룹니다. 강렬한 햇살 때문에 형상들이 평편하게 보이는 해안의 느낌을 포착했숩니다.

바지유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네는 이 그림을 “깃발이 있는 나의 중국화”라고 적었습니다. 모네가 중국화란 말을 사용했지만, 일본 판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오른쪽을 대각선으로 구성한 듯 보입니다. 당시 프랑스인에게 일본화와 중국화에 대한 구분이 거의 없었습니다. 중국화란 말은 단순히 동양화를 총칭하는 뜻입니다. 그가 대각선으로 구성했지만 일본 판화와는 달리 선을 중심으로 그렇게 한 게 아니라 색으로 한 것입니다. 강렬한 색의 대비를 통한 대각선 구성은 테라스와 수평선을 가로지르는 시각으로 현저하게 나타났습니다. 순수 기본 색들의 사용에서 그의 인상주의 그림이 예고되고 있음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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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생타드레스의 요트 레이스 Les Regates a Sainte-Adresse>, 1867, 유화, 75.2-101.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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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생타드레스의 해안가 La Plage de Sainte-Adresse>, 1867, 유화, 75.8-102.5cm.

왼쪽에 육지, 오른쪽에 바다를 구성하는 것은 모네의 전형적인 경향입니다. 그는 바다에 더욱 중점을 두고 물의 변화를 묘사했습니다.


현존하는 생타드레스 그림들에서 모네의 그림 솜씨가 한결 성숙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생타드레스의 요트 레이스>는 도시 사람들이 차지한 생타드레스의 바닷가 장면으로 <생타드레스의 해안가>와는 대조되는 작품입니다. <생타드레스의 해안가>도 훌륭한 작품으로 어업의 계절이 지난 후의 어부와 그들의 배를 묘사한 것입니다. 노르망디 해안가에 철로가 놓이기 이전의 소박한 바닷가 풍경인데 전통 양식으로 고풍스러운 장면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듯 보입니다. 두 그림의 크기가 거의 같아서 모네가 두 작품을 비교되게 그린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는 “새가 노래하듯 그림을 그린다”고 즐겨 말했는데, 그의 작품에는 누구나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장면이 본래 모습으로 관람자에게 다가오는 게 특기할 만합니다. 생타드레스에서 그는 큰 성과를 올렸습니다.

모네의 작품이 나아지고 있었지만, 잘 팔리지 않아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쪼들렸습니다. 카미유가 그해 1867년 8월 8일 아들을 낳았고, 모네는 아들의 이름을 장이라고 했습니다. 나흘 후 모네는 아이의 대부인 바지유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통통하고 예쁜 사내 녀석이 여간 귀엽지 않네. 하지만 먹을 것도 없이 지내는 애 엄마를 생각하면 가슴이 터진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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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르아브르의 방파제 La Jetee 여 Havre>, 1868, 유화, 147-226cm.


그해 겨울 모네는 다시 카미유를 남겨 두고 르아브르로 갔는데, 이듬해 살롱에 출품할 해양화를 그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두 점을 완성했는데, 하나는 <르아브르의 방파제>로 거센 파도가 방파제를 삼킬 듯 넘실거리는 장면이며, 다른 한 점은 배들이 출항하는 장면으로 이 작품은 분실되어 현존하지 않습니다. 이 작품이 살롱에서 받아들여졌는데 심사위원 도비니가 애써준 덕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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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베네쿠르의 강 Au Bord de l'eau, Bennecourt>, 1868, 유화, 81.5-100.7cm.


모네는 졸라의 도움으로 1868년 봄을 파리 서쪽 베네쿠르에 있는 오베르그 드 글로탱(센 강 북쪽으로 40km 가량 떨어진 작은 동네)에서 카미유와 장과 더불어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는 5월에 그곳에 도착해서 카미유를 모델로 <베네쿠르의 강>을 그렸는데, 이 그림을 간단하게 <강>이라고도 합니다. 그가 붓질을 빠르게 대충 칠했음을 보는데, 일부 미술사학자들 중에는 이런 점을 지적하여 최초의 인상주의 그림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6월 29일 바지유에게 쓴 편지에서 애호가가 그림을 주문하려는지 알아보기 위해 르아브르로 간다고 했습니다. 모네가 말한 ‘애호가’란 사업가인 루이 요아킴 고디베르를 말합니다. 르아브르에서 지내는 동안 그곳에서 열린 국제해상전에 모네는 다섯 점을 출품했습니다. 이 전시회에 부댕, 쿠르베, 코로 등도 참여했습니다. 은메달을 수상한 모네는 은메달의 가치가 겨우 15프랑에 해당한다고 불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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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마담 루이 요아킴 고디베르의 초상 Portrait de Madame Louis-Joachim Gaudibert>, 1868, 유화, 217-138.5cm.

르아브르의 선주인 고디베르는 모네에게 아내의 초상화를 의뢰했습니다. 카미유가 아들을 낳아 세 사람이 혹독한 겨울을 보내려니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히도 돈벌이가 생긴 것입니다.


전람회를 관람한 고디베르는 모네의 바닷가 장면 두 점을 구입하면서 자신과 아내 마그리트의 초상을 그려줄 것을 의뢰했습니다. <마담 루이 요아킴 고디베르의 초상>은 모네가 평생 그린 그림들에 비하면 독특한 작품입니다. 처음으로 의뢰를 받은 인물화여서인지 주문자의 마음에 들게 애쓴 듯 보입니다. 그는 고디베르의 아내를 여왕과도 같은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모네는 이들 부부의 인물화를 그려주고 당장의 궁핍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모네는 바지유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람회의 성공을 알리면서 지난 몇 달 동안 고생스러웠던 점을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8월에 모네는 카미유와 장을 페캉의 노르망디 항구 동네로 오게 하고 그녀와 아들을 모네의 가족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했는데, 가족이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네는 장과 카미유를 데리고 르아브르에서 멀지 않은 에트레타의 해안 동네로 이사했습니다. 바지유에게 쓴 편지를 보면 경제적 형편이 절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고모가 도우려 하지 않는다고 불평했습니다.

난 어제 몹시 절망감을 느껴 어리석게도 물에 몸을 던져 죽으려는 생각까지 했다네. … 내 입장을 상상해 보게. 아이가 병이 났는데도 돈 한푼 없으니 … ”(1868. 8. 6)

그해 10월과 11월에 바지유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는 거의 좌절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내 작품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네. 이젠 명성을 기대하지 않네. … 모든 것이 암담한 지경이고 무엇보다도 나는 여전히 빈털털이일세. 좌절과 치욕, 기대, 그리고 더 큰 좌절. 자네만 믿겠네, 친구여.

그러나 이내 옛날의 열정을 회복한 것 같았습니다. 12월에 보낸 편지에는 즐거운 비명이 적혀 있습니다.

현재 나는 사랑하는 것들에 에워싸여 있네. 저녁이 되면 사랑하는 가족이 따뜻한 불을 피워 놓고 기다리는 작은 집으로 돌아간다네. 자네가 자네의 대자(代子)를 한 번 보면 좋을 텐데. 장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어린 애가 커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 여간 즐겁지 않군. 그 애가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네. 그 애를 그려서 살롱에 출품할까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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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까치 La Pie>, 1869, 유화, 89-13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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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까치>의 부분


모네는 에트레타의 기후와 그곳의 절경을 이루는 벼랑과 강한 바닷바람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까치>에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가족과 함께 하는 순간의 행복감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흰색의 심포니가 이루어진 그림에서 검정색의 작은 까치가 매우 인상적이며, 장차 그릴 인상주의 작품을 예고하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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