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스승을 능가하다
작품을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베로키오와 레오나르도 합작의 <그리스도의 세례>의 부분으로 두 천사의 모습은 레오나르도가 그린 것입니다. 1475-78년경, 패널에 유채와 템페라, 17.7-15.1cm.
존 러스킨은 그리스도의 옷을 들고 있는 레오나르도의 천사 그림은 “종교적 그리고 전체적 구성에서 볼 때 베로키오의 것보다 우수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 회화적으로는 훨씬 뛰어나다”고 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천사의 어려운 몸짓을 묘사했는데, 천사가 관람자쪽으로 등을 3분의 2쯤 돌린 옆모습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이런 각도로 그리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딱딱하고 오래된 양식의 그림에 레오나르도의 천사가 삽입되어 작품이 한결 부드럽고 정취가 있으며, 부피와 공간이 생겼습니다.
베로키오는 포르타 알라 크로체 근처 도시 성곽 밖에 있는 산 살비 수도원에 커다란 그림 <그리스도의 세례>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가 부분적으로 그린 것으로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패널 중앙에 구성한 베로키오는 회화적 구성을 위해 그리스도 왼쪽 강둑에 천사 두 명을 그려 넣기로 하고 그리스도 바로 옆에 있는 천사는 자신이 그리고, 왼쪽의 천사와 배경은 레오나르도에게 그리게 했습니다.
이 작품은 베로키오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조화와 감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그는 두 수도자의 인체를 해부학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장려하게 표현했습니다. 이탈리아 화가들은 투명한 물을 묘사하는 데 자신이 없어 마른 땅에서 세례를 받는 장면으로 표현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베로키오는 자신감을 갖고 사실주의 방법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는 플랑드르 화가들의 방법을 응용해 강물에 잠긴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의 다리를 그리면서 투명한 강물을 잘 묘사했습니다. 뵐플린이 지적했듯이 레오나르도와 베로키오 사이에는 내적 연결성이 존재했습니다. 바사리의 기록을 보면 두 사람이 매우 가까웠으며 베로키오가 창안해낸 것들을 레오나르도가 많이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레오나르도의 초기 그림들은 놀라우며 베로키오의 <그리스도의 세례>에 그려진 레오나르도의 천사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나온 음성처럼 관람자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바사리에 의하면 스승보다 더 박식한 레오나르도가 그리스도의 옷을 들고 있는 천사를 그렸을 때 베로키오는 너무 놀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자기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고 합니다. 기교에 있어서도 레오나르도가 베로키오에 비해 우수함이 증명되었는데, 엑스-레이를 투시한 결과, 베로키오의 채색은 릴리프처럼 두터우며 붓자국이 생겼지만, 레오나르도는 흰색을 섞지 않고 물감을 기름에 섞어 투명하게 칠했기 때문에 붓자국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레오나르도는 템페라를 사용하지 않고 늘 밑칠을 투명하게 했으므로 엑스-레이를 투시할 경우 나무 패널이 보입니다. 그는 가장 엷고 밝은 색으로 코팅을 한 후 점점 어둡게 해서 인체의 윤곽을 나타내는 기교를 사용했으므로 빛이 착색유리에 비쳐 통과하듯 그의 그림에 빛을 비추면 투명함을 보게 됩니다. 레오나르도가 마지막 그림 <광야의 세례 요한>에 사용한 유상액은 너무 엷어서 엑스-레이를 통해 보게 되면 한결같이 고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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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고양이와 말 스케치>, 29.8-21.2cm.
레오나르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작업이 없을 때는 대상을 관찰하면서 다양한 모습을 드로잉했습니다. 그는 한 가지에 몰두하다가도 불현듯 떠오르는 착상을 손이 가는 대로 그렸습니다. 때로는 고양이를 뒤에서 보고 그리면서 꼬리를 의문부호로 그리기도 하고 어떤 전리품을 움켜쥐고 웅크린 모습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가운데에 작은 용을 그려 넣었는데 고양이처럼 생겨 언뜻 보면 알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종이에는 다양한 말의 모습을 그리면서 주제에서 벗어나 호랑이처럼 생긴 고양이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의 노트북을 보면 관심사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메모한 종이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의사이면서 철학자·지리학자·수학자인 파올로 델 포조 토스카넬리가 적혀 있고, 피렌체에서 산수를 가르치는 베네데토의 이름도 있습니다. 그가 이런 사람들의 강의를 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관심사는 다양했으며 과학에 특히 관심이 많았음이 틀림없습니다.
그가 과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늙은 토스카넬리에 의해서였습니다. 토스카넬리는 브루넬레스키의 친구로서 베로키오와도 종종 만나는 사이였습니다. 레오나르도가 토스카넬리를 만난 건 대성당에 구체를 장식으로 올려놓을 때였습니다. 당시 토스카넬리는 피렌체의 가장 유명한 천체학자였으며 지리학자였습니다. 그는 1474년에 배를 타고 서쪽으로 항해하면 중국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콜럼버스가 그의 이론을 받아들여 대서양을 건넜습니다. 레오나르도는 평생 천체와 지구에 대해 관심을 가졌기에 토스카넬리의 강의를 들었을 것이며, 그에게 질문도 하고 책과 도구를 빌리기도 했을 것입니다. 레오나르도가 그린 지도는 토스카넬리의 영향으로 짐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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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1485-86년경, 175-28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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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드로 보티첼리의 <동방박사의 경배>, 1476-77, 패널에 유채
보티첼리란 ‘작은 몸통’이란 뜻인데, 그의 형이 살이 쪄서 붙여진 별명으로 그에게도 붙여졌고, 후에 그의 성이 되었습니다. 그는 베로키오의 작업장에 들어가기 전, 리피로부터 수학했으며, 그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습니다. 그의 양식은 15세기 후반 예술가들의 것들과 유사하며, 마사초의 과학적 자연주의에 반하는 고딕 양식으로 감성적이고 여성적 우아함과 장식적 요소가 현저합니다. 보티첼리는 1465년경 자신의 작업장을 갖고 독립한 뒤 곧 메디치 가로부터 주문받아 작업했는데, 로렌초의 어머니 루크레지아 토르나부오니를 위한 <유딧>이었습니다. 또한 그녀의 남편 피에로 고토소를 위해 <위대한 성모>와 여기에 소개하는 <동방박사의 경배>를 그렸습니다. <동방박사의 경배>에서는 코시모가 성모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있고, 그 아래 피에로도 무릎을 꿇고 있으며, 로렌초가 칼을 쥐고 있는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그는 메디치 가의 3대를 그림에 삽입한 것입니다. 피에로가 사망한 후 로렌초와 줄리아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보티첼리를 후원했습니다. 보티첼리는 대부분의 생애를 피렌체에서 보냈고, 유일하게 피렌체를 떠난 기간은 1481-82년으로 시스티나 예배당을 장식하기 위해서였으며, 그때 페루지노, 기를란다요 등과 함께 작업했습니다. 그는 로렌초 데 메디치의 주문으로 현재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된 <봄>, <비너스의 탄생>, <아테네와 켄타우로스>를 그렸습니다. 보티첼리는 종교적, 신화적 그림을 주로 그렸지만, 초상화나 단테의 『신곡』을 위해 펜으로 드로잉도 많이 그렸습니다.
레오나르도가 작업하지 않을 때 친구 예술가들과 잘 어울렸는지 알 수 없지만, 자신보다 예닐곱 살 많은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Alessandro di Mariano Filipepi, 1444/5-1510)에 관해 몇 차례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보티첼리의 작품에 관해서는 신통치 않은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그는 보티첼리가 원근법을 중시하지 않는다면서 “산드로, 당신은 어째서 (중앙에 있는) 두 번째 대상이 세 번째의 것보다 작게 보이는지 말하지 않는 거요”라고 적었습니다. 또한 그는 보티첼리가 풍경을 단지 배경으로만 사용하면서 앞에 있는 주제와는 무관하게 표현한다고 비평했습니다. 보티첼리의 <봄>에서 님프들의 발이 땅에 닿은 것처럼 보이지 않고 <비너스의 탄생>에서 나무가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건 레오나르도의 지적을 당할 만했습니다. 그는 화가가 보편성을 추구해야 한다면서 적었습니다.
“많은 화가들도 단지 측정하고 비례만을 공부할 뿐 이런 것들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알려고 하지 않는데, 한 가지 분야에서 성공적이더라도 다른 분야에서 아주 잘못되었다면 이는 매우 무가치한 일이다. 어떤 인물은 키가 작고 뚱뚱할 것이며, 어떤 인물은 키가 크고 여위었을 것이며, 어떤 인물은 평균치의 키와 몸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다양한 인물들에 관심이 없는 화가는 인물들을 똑같이 그리게 된다. 이런 화가들은 각각의 인물을 자매들처럼 그릴 것이며 이런 행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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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드로 보티첼리의 <성 세바스천>, 패널에 유채와 템페라, 195-7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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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나무에 묶인 성 세바스천>, 17.4-6.3cm.
베로키오는 재능이 많은 예술가였지만 훌륭한 조각가를 배출하지 못했고 회화에서만 레오나르도, 페루지노, 로렌초 디 크레디Lorenzo di Credi(1458-1537)를 배출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일곱 살 연하의 크레디의 작품에 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관심 밖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뵐플린은 크레디를 가리켜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고 다른 태양의 빛을 받아들이는 별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의 그림들은 학생이 주어진 과제를 부지런히 수행한 것처럼 보인다”고 적었습니다. 크레디는 베로키오 작업장에서 도제로 일한 뒤 배로키오의 조수 겸 작업장의 경영책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숙련된 기술과 성실함으로 베로키오 작업장의 제작방법을 효과적으로 지속시켜나갔습니다. 하지만 그의 화풍은 개성이 부족했고, 작품은 레오나르도의 초기 작품과 유사하므로 바사리는 그들의 작품이 자주 혼동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레오나르도에 정통한 학자 케네스 클락은 이 시기에 레오나르도의 취미는 “옷을 잘 입고, 말을 길들이며, 류트lute(14~17세기의 기타 비슷한 현악기)를 배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피렌체 젊은이들은 오늘날의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파티를 좋아하고, 많은 시간을 어떻게 즐길 것인가에 관해 궁리했습니다. 그들은 평범한 생활을 싫어했습니다. 레오나르도에게는 유머가 있었고, 그 역시 즐거운 시간을 가지려고 했으며, 남에게 웃음을 선사할 수 있는 재미난 이야기를 만들어 퍼뜨리기도 했습니다. 그가 만든 재담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페트라르카가 월계수 잎을 좋아했다면, 그 이유는 소시지와 개똥지빠귀 요리를 만드는 데 적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사람이 왜 아이들이 못생겼는데 네 그림에서는 아름답게 묘사되었느냐고 물으면 그는 “그림은 낮에 그렸지만 아이들은 밤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과학을 좋아한 그는 사람들에게 속임수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유리컵 사이에 나무막대기를 올려놓고 유리컵을 손상시키지 않는 가운데 나무막대기를 자른다든가 끓는 기름에 붉은색 포도주를 부어 다양한 색의 화염을 만들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