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반 에이크에 의해 유화물감이 피렌체에 소개되다

 

작품을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화가이자 모자이크 제작자이며 스테인드글라스 제작에 뛰어난 알레소 발도비네티Alesso Baldovinetti(1426년경-99)의 작업장에도 갔습니다. 발도비네티가 어디에서 수학했는지는 알려 있지 않지만, 우아하고 세련된 양식은 도메니코 베네치아노와 프라 안젤리코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의 대표작으로 1460-62년 피렌체의 산타 아눈치아타 앞마당에 프레스코로 그린 <예수의 탄생>, 루브르에 있는 <성모자>, 우피치에 있는 <수태고지> 등이 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발도비네티의 풍경화에 관심이 있었지만 물감비법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발도비네티의 작업장에는 아궁이가 있었고 계란 노른자와 송진을 섞어 유약 효과를 냈는데, 이것을 사용해 프레스코를 그리면 유화처럼 신선하고 밝은 느낌을 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사리에 의하면 플랑드르 대가들의 작품이 1530년대에 나폴리와 우르비노에 소개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화면이 매끈하고 빛났으며 색상과 투명한 효과는 전통적인 방법의 채색으로는 도저히 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 화가들은 이런 북유럽 화가들의 비법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회화사에 혁명과도 같은 유화물감이 피렌체에 소개된 건 플랑드르 화가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1395-1441)에 의해서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얀 반 에이크에 대한 기록은 1422년 이후부터 남아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기술적인 완벽함과 현실에 대한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각이 결합되었다는 점에서 사실주의 회화의 최고 위치를 차지하며 15세기의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 화가로서 전 유럽에 명성을 떨쳤습니다. 나폴리의 인문학자 파치오는 15세기 뛰어난 인물에 그를 포함시켰고, 바사리는 미술의 진보에 관한 책에서 그에게 특별한 위치를 부여했습니다.

바사리에 의하면 1456~79년에 주로 활약한 시실리 사람 안토넬로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sina(1430-79)가 이 비법에 대한 실험을 했지만, 번번이 실패한 끝에 플랑드르로 가서 얀 반 에이크로부터 방법을 직접 알아냈다고 합니다. 안토넬로는 베네치아에 안주한 후 친구들에게 이 비법을 가르쳤으며, 도메니코 베네치아노가 이를 배워 피렌체의 작업장에 소개했습니다. 폴랑드르 화풍의 화가였던 안토넬로는 당시 네덜란드 화가들에 의해 지배되었던 나폴리 혹은 밀라노에서 폴랑드르 화가들과의 접촉으로 북구의 기법을 익힌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의 작품 중 현재 런던 내셔널 갤러리의 <그리스도의 책형>(1475-76)의 구도는 이탈리아적이나 빛과 대기를 다룬 방법은 폴랑드르적입니다. 베네치아 회화의 발전에 끼친 그의 영향은 정확하게 평가되지는 않고 있으나 지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470년경 레오나르도가 화가로서 첫 발을 디딜 때만 해도 토스카나 화가들은 유화물감을 사용하는 방법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화가들이 유화물감의 효과를 실험하면서 작품에 유약을 발라 화면을 매끄럽고 빛나게 만들었습니다.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는 유화물감의 혁명을 이룬 것 같고 그로 인해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한 듯 보입니다.

레오나르도와 페루지노가 이곳에서 유화물감 사용법을 배웠으며 이후 라파엘로에까지 전수된 것 같습니다. 물 대신 오일을 사용한 건 회화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는데, 물감이 번지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물감을 덧칠할 수 있어 원하는 색을 섞어 사용할 수 있게 되고, 마르는 데 시간이 걸리므로 색을 정정할 수도 있었습니다. 색 위에 색을 덮어 릴리프 효과도 낼 수 있게 되었으며, 색의 뉘앙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고, 외곽선을 부드럽게 할 수 있었으므로 그림이 부드러워지고 깊이를 나타낼 수 있어 새로운 미적 감각을 야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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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트로 페루지노의 <성모와 아기, 성자들>, 1495-96년경, 패널에 유채, 152-124cm.


피에트로 페루지노Pietro Perugino(Pistro Vannucci, 1445/50-1523)는 이런 부드러운 느낌을 지나치게 즐긴 나머지 작품을 감상적이 되게 했습니다. 페루지노는 레오나르도보다 조금 늦게 베로키오의 작업장에 들어왔습니다. 페루지노는 레오나르도보다 최소한 서너 살 많았고 두 사람은 개성과 야망도 같지 않았습니다. 페루지노는 이 시기에 이미 자신의 고유한 양식을 갖고 있었지만, 피렌체 화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현대화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페루지노와 레오나르도는 젊은 화가 로렌초 디 크레디의 도움을 받아 유화물감을 만드는 방법을 배운 것 같습니다.

페루지노는 주로 페루자Perugia에서 활약했고, 그래서 페루지노란 별명이 붙었습니다. 바사리는 그가 레오나르도와 함께 베로키오의 문하에서 수학했다고 하는데, 피렌체에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로부터 수학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는 1481년 새로 건립한 시스티나 예배당에 프레스코를 그렸는데, 그 외에도 보티첼리, 기를란다요, 코시모 로젤리도 함께 그곳에서 작업했습니다.

로렌초 디 크레디는 베로키오가 사망한 1488년까지 작업장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기교에 뛰어났지만, 개성 있는 양식을 창조해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레오나르도의 초기 양식에 영향을 받았고, 1510년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체에 그린 <성모와 성인들>을 보면 프라 바르톨로메오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남긴 기록에는 그가 유화물감을 만드는 비법에 관해 알려고 노력했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서 실험했지만 실패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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