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속에 모네의 아들 태어나다

작품을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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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루브르 앞 제방 Le Quai du Louvre>, 1867, 유화, 65-93cm.

이 작품은 당시의 시가와 파리 사람들의 생활상을 알게 해주는 역사적 자료가 됩니다. 1866-67년 모네는 르누아르와 더불어 파리의 풍경을 그렸으며, 이들의 그림을 통해 당시 파리의 장면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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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루브르 앞 제방>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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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생제르망-오세로아 SaintpGermain-l'Auxerrois>, 1867, 유화, 79-9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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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의 <아르의 다리 Le Pont des Arts>, 1867, 유화, 61.6-102.9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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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루브르의 프린세스 정원 Le Jardin de l'Infante>, 1867, 유화, 91.8-61.9cm.



1867년의 살롱에 <정원의 여인들>과 <옹플레르의 항구>를 출품했다가 낙선의 고배를 마신 모네도 마네와 마찬가지로 만국박람회의 장면들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모네는 뮤지엄의 허락을 받고 르누아르와 함께 루브르 뮤지엄 위층 발코니에서 내려다본 장면을 그렸습니다.

그해 여름 모네는 노르망디로 가서 생타드레스의 숙모 집에 묵었습니다. 살롱에 낙선한 것 말고도 그를 괴롭히는 문제가 발생했는데, 카미유가 그의 아이를 임신한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경제적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버지는 카미유와 헤어지겠다고 약속하기 전에는 도울 수 없다고 완강하게 버텼습니다. 이 시기에 모네의 아버지도 숨겨둔 여인에게서 아이를 낳았는데, 아마 자신의 불륜을 감추기 위해 모네와 카미유와의 관계를 더욱 반대한 것 같았습니다. 모네는 바지유에게 보낸 편지에 돈을 꿔달라면서 “아무 준비도 없는 상황에서 카미유가 아이를 낳는다면 아주 큰 불행을 맛보게 될 것이다”라고 적었습니다. 이런 극한 상황 때문이었는지 모네의 시력이 갑자기 나빠졌으며, 그의 말로는 두 주 후 회복되었다고 했는데 아버지가 그를 돕기로 결정한 후였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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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생타드레스의 테라스 Terrace at Sainte-Adresse>, 1867, 유화, 98-130cm.

모네는 바다가 바라보이는 곳에서 구름과 배의 동향을 보고 자랐습니다. 르아브르에서 그는 부댕, 용킨트와 더불어 바다의 장면을 그리고 도 그렸었습니다. 이 작품은 두 개의 깃발을 중심으로 모네가 오른쪽으로 조금 간 상태에서 그렸기 때문에 비대칭적 구성이 되었으며, 의자에 앉아 있는 아돌프의 오른쪽 여백이 넉넉해졌습니다. 정원의 선과 아돌프의 시선이 대각선이 되게 해서 수직과 수평선에 역동적으로 대비시켰습니다. 아돌프의 시선이 두 개의 깃대 사이를 뚫고 나가게 한 것은 참으로 기발한 착상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숙모의 앉아 있는 모습은 숙모 집 정원에서 그린 것을 삽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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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생타드레스의 테라스>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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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생타드레스의 테라스>의 부분


그는 생타드레스에서 르아브르의 항구와 그곳의 바닷가 장면을 여러 점 그렸습니다. 생타드레스에서 바지유에게 해양화, 인물화, 정원화 모두 잘 그려지고 있다고 편지했습니다. 대표작의 하나인 <생타드레스의 테라스>는 이때 그린 것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생타드레스의 테라스>에는 바다를 배경으로 나란히 게양된 두 개의 깃발이 펄럭이고 잘 가꾸어진 꽃이 만개한 테라스에 두 쌍의 남녀가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모네의 가족들입니다. 바다 가까이에 서서 대화하고 있는 한 쌍은 아저씨 탄테 르카드르와 사촌 잔 마르그리트 르카드르이며, 바다를 바라보고 앉아 있는 사람은 모네의 아버지 아돌프와 숙모 소피입니다. 청록색 바다 위에는 요트들이 떠다니고 멀리 수평선에는 기선을 비롯해 온갖 선박들이 떠 있습니다. 빛과 그림자의 유희 속에 만개한 꽃들이 대조를 이룹니다. 강렬한 햇살 때문에 형상들이 평편하게 보이는 해안의 느낌을 포착했숩니다.

바지유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네는 이 그림을 “깃발이 있는 나의 중국화”라고 적었습니다. 모네가 중국화란 말을 사용했지만, 일본 판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오른쪽을 대각선으로 구성한 듯 보입니다. 당시 프랑스인에게 일본화와 중국화에 대한 구분이 거의 없었습니다. 중국화란 말은 단순히 동양화를 총칭하는 뜻입니다. 그가 대각선으로 구성했지만 일본 판화와는 달리 선을 중심으로 그렇게 한 게 아니라 색으로 한 것입니다. 강렬한 색의 대비를 통한 대각선 구성은 테라스와 수평선을 가로지르는 시각으로 현저하게 나타났습니다. 순수 기본 색들의 사용에서 그의 인상주의 그림이 예고되고 있음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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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생타드레스의 요트 레이스 Les Regates a Sainte-Adresse>, 1867, 유화, 75.2-101.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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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생타드레스의 해안가 La Plage de Sainte-Adresse>, 1867, 유화, 75.8-102.5cm.

왼쪽에 육지, 오른쪽에 바다를 구성하는 것은 모네의 전형적인 경향입니다. 그는 바다에 더욱 중점을 두고 물의 변화를 묘사했습니다.


현존하는 생타드레스 그림들에서 모네의 그림 솜씨가 한결 성숙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생타드레스의 요트 레이스>는 도시 사람들이 차지한 생타드레스의 바닷가 장면으로 <생타드레스의 해안가>와는 대조되는 작품입니다. <생타드레스의 해안가>도 훌륭한 작품으로 어업의 계절이 지난 후의 어부와 그들의 배를 묘사한 것입니다. 노르망디 해안가에 철로가 놓이기 이전의 소박한 바닷가 풍경인데 전통 양식으로 고풍스러운 장면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듯 보입니다. 두 그림의 크기가 거의 같아서 모네가 두 작품을 비교되게 그린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는 “새가 노래하듯 그림을 그린다”고 즐겨 말했는데, 그의 작품에는 누구나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장면이 본래 모습으로 관람자에게 다가오는 게 특기할 만합니다. 생타드레스에서 그는 큰 성과를 올렸습니다.

모네의 작품이 나아지고 있었지만, 잘 팔리지 않아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쪼들렸습니다. 카미유가 그해 1867년 8월 8일 아들을 낳았고, 모네는 아들의 이름을 장이라고 했습니다. 나흘 후 모네는 아이의 대부인 바지유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통통하고 예쁜 사내 녀석이 여간 귀엽지 않네. 하지만 먹을 것도 없이 지내는 애 엄마를 생각하면 가슴이 터진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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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르아브르의 방파제 La Jetee 여 Havre>, 1868, 유화, 147-226cm.


그해 겨울 모네는 다시 카미유를 남겨 두고 르아브르로 갔는데, 이듬해 살롱에 출품할 해양화를 그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두 점을 완성했는데, 하나는 <르아브르의 방파제>로 거센 파도가 방파제를 삼킬 듯 넘실거리는 장면이며, 다른 한 점은 배들이 출항하는 장면으로 이 작품은 분실되어 현존하지 않습니다. 이 작품이 살롱에서 받아들여졌는데 심사위원 도비니가 애써준 덕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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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베네쿠르의 강 Au Bord de l'eau, Bennecourt>, 1868, 유화, 81.5-100.7cm.


모네는 졸라의 도움으로 1868년 봄을 파리 서쪽 베네쿠르에 있는 오베르그 드 글로탱(센 강 북쪽으로 40km 가량 떨어진 작은 동네)에서 카미유와 장과 더불어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는 5월에 그곳에 도착해서 카미유를 모델로 <베네쿠르의 강>을 그렸는데, 이 그림을 간단하게 <강>이라고도 합니다. 그가 붓질을 빠르게 대충 칠했음을 보는데, 일부 미술사학자들 중에는 이런 점을 지적하여 최초의 인상주의 그림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6월 29일 바지유에게 쓴 편지에서 애호가가 그림을 주문하려는지 알아보기 위해 르아브르로 간다고 했습니다. 모네가 말한 ‘애호가’란 사업가인 루이 요아킴 고디베르를 말합니다. 르아브르에서 지내는 동안 그곳에서 열린 국제해상전에 모네는 다섯 점을 출품했습니다. 이 전시회에 부댕, 쿠르베, 코로 등도 참여했습니다. 은메달을 수상한 모네는 은메달의 가치가 겨우 15프랑에 해당한다고 불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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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마담 루이 요아킴 고디베르의 초상 Portrait de Madame Louis-Joachim Gaudibert>, 1868, 유화, 217-138.5cm.

르아브르의 선주인 고디베르는 모네에게 아내의 초상화를 의뢰했습니다. 카미유가 아들을 낳아 세 사람이 혹독한 겨울을 보내려니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히도 돈벌이가 생긴 것입니다.


전람회를 관람한 고디베르는 모네의 바닷가 장면 두 점을 구입하면서 자신과 아내 마그리트의 초상을 그려줄 것을 의뢰했습니다. <마담 루이 요아킴 고디베르의 초상>은 모네가 평생 그린 그림들에 비하면 독특한 작품입니다. 처음으로 의뢰를 받은 인물화여서인지 주문자의 마음에 들게 애쓴 듯 보입니다. 그는 고디베르의 아내를 여왕과도 같은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모네는 이들 부부의 인물화를 그려주고 당장의 궁핍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모네는 바지유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람회의 성공을 알리면서 지난 몇 달 동안 고생스러웠던 점을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8월에 모네는 카미유와 장을 페캉의 노르망디 항구 동네로 오게 하고 그녀와 아들을 모네의 가족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했는데, 가족이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네는 장과 카미유를 데리고 르아브르에서 멀지 않은 에트레타의 해안 동네로 이사했습니다. 바지유에게 쓴 편지를 보면 경제적 형편이 절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고모가 도우려 하지 않는다고 불평했습니다.

난 어제 몹시 절망감을 느껴 어리석게도 물에 몸을 던져 죽으려는 생각까지 했다네. … 내 입장을 상상해 보게. 아이가 병이 났는데도 돈 한푼 없으니 … ”(1868. 8. 6)

그해 10월과 11월에 바지유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는 거의 좌절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내 작품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네. 이젠 명성을 기대하지 않네. … 모든 것이 암담한 지경이고 무엇보다도 나는 여전히 빈털털이일세. 좌절과 치욕, 기대, 그리고 더 큰 좌절. 자네만 믿겠네, 친구여.

그러나 이내 옛날의 열정을 회복한 것 같았습니다. 12월에 보낸 편지에는 즐거운 비명이 적혀 있습니다.

현재 나는 사랑하는 것들에 에워싸여 있네. 저녁이 되면 사랑하는 가족이 따뜻한 불을 피워 놓고 기다리는 작은 집으로 돌아간다네. 자네가 자네의 대자(代子)를 한 번 보면 좋을 텐데. 장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어린 애가 커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 여간 즐겁지 않군. 그 애가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네. 그 애를 그려서 살롱에 출품할까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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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까치 La Pie>, 1869, 유화, 89-13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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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까치>의 부분


모네는 에트레타의 기후와 그곳의 절경을 이루는 벼랑과 강한 바닷바람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까치>에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가족과 함께 하는 순간의 행복감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흰색의 심포니가 이루어진 그림에서 검정색의 작은 까치가 매우 인상적이며, 장차 그릴 인상주의 작품을 예고하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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