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스웰이 전기력과 자기력을 하나의 힘으로 통합하다


영국의 물리학자이며 화학자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1791-1867)의 생각을 발전시켜 전기와 빛 사이의 신비스럽고 밀접한 관계를 설명하는 수학적 이론을 개발한 사람은 1860년대에 활동한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태생의 물리학자이며 수학자 제임스 클럭 맥스웰James Clerk Maxwell(1831-79)입니다. 전기와 자기를 단일한 힘으로 통합한 그의 성과는 뉴턴의 역학과 함께 과학 발전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의 수학적 이론 덕분에 전기력과 자기력을 전자기장electromagnetic field이라는 동일한 물리적 존재의 두 가지 표현으로 기술하는 일련의 방정식들이 생겨났습니다. 맥스웰이 전기력과 자기력을 하나의 힘으로 통합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는 전자기장이 파동의 형태로 퍼져나갈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그 파동의 속도는 그의 방정식들에 등장하는 어떤 수에 의해 결정되는데, 그는 몇 년 전에 실험에 의해서 측정된 데이터를 토대로 그 수를 계산했습니다. 전자기 파동의 속도를 계산해보니 놀랍게도 그 결과는 당시에 실험들을 통해 1% 이내의 오차로 알려진 빛의 속도와 일치했습니다. 빛이 전자기파라는 걸 그가 발견한 것입니다.

맥스웰은 컬러사진을 최초로 만든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는 1861년에 삼원색의 혼합으로 모든 색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응용해 컬러사진을 제작했습니다.

과학자들은 맥스웰을 20세기 물리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19세기 과학자들 가운데 하나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의 업적은 아인슈타인이나 아이작 뉴턴에 견주어지고 있습니다. 2000년도에 BBC는 가장 큰 업적을 남긴 과학자 100명을 선정하면서 아인슈타인, 뉴턴에 이어 맥스웰을 3위로 꼽았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맥스웰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업적은 뉴턴 이후 가장 심원하고 풍성한 물리학의 성과”라고 평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연구실 벽에 뉴턴과 마이클 패러데이의 초상화와 함께 맥스웰의 초상화를 걸어두었다고 합니다.

맥스웰이 발견한 전기장과 자기장을 기술하는 방정식을 ‘맥스웰 방정식Maxwell's equations’이라고 합니다. 맥스웰 방정식은 상업적으로도 가장 중요한데, 가전제품에서부터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온갖 전기기계의 작동을 지배할 뿐 아니라, 마이크로파, 전파, 적외선, X선 등과 같은 빛 이외의 다른 전자기파들을 기술합니다. 이 전자기파들은 한 가지 측면, 오직 파장에서만 가시광선이 다릅니다. 전파는 파장이 1m 이상인 반면, 가시광선의 파장은 십만 분의 몇 미터, X선의 파장은 1억 분의 1m 미만입니다. 태양은 모든 파장을 복사하며, 우리의 눈에 보이는 파장들을 가장 강하게 복사합니다. 호킹은 우리가 다른 행성에서 오는 존재들과 마주칠 경우, 그들은 그들의 태양이 가장 강하게 복사하는 파장들을 보는 능력을 가졌을 거라고 말합니다.

맥스웰 방정식에 따르면 전자기파는 초속 약 30만 km, 즉 사속 약 11억 km로 나아갑니다. 호킹은 속도에 대해 먼저 이해해야 한다면서 우리가 날아가는 제트 여객기의 객실 통로에서 찻잔을 들고 걸을 경우 우리는 우리의 속도가 시속 3km라고 말하겠지만, 지상에 있는 관찰자는 여객기의 속도가 시속 917km이기 때문에 우리가 시속 920km로 움직인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호킹은 태양의 표면에 있는 관찰자의 경우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으므로 그 관찰자는 우리가 초속 29km로 움직인다고 말할 거라고 합니다. 호킹은 동일한 현상의 속도를 다양한 기준 틀에서 다양하게 측정될 수 있음을 지적합니다. 따라서 호킹은 맥스웰 방정식에서 도출된 빛의 속도가 무엇을 기준으로 삼은 속도이냐고 물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호킹은 맥스웰 방정식에서 도출된 빛의 속도가 우주 전체에서 타당하므로 지구를 기준으로 측정한 속도라고 믿을 근거가 없다고 말합니다. 맥스웰 방정식에서 도출된 빛의 속도는 그때까지 탐지되지 않은 우주에 충만한 발광 에테르luminiferous ether, 혹은 줄여서 에테르라는 매질medium을 기준으로 삼은 속도라는 겁니다. 에테르는 원래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상 근처를 벗어난 우주 전체에 가득 차 있다고 믿은 물질의 명칭입니다. 소리가 퍼져나가는 매질이 공기인 것처럼, 전자기파가 퍼져나가는 매질은 그 가설적인 에테르라고 사람들은 한동안 생각했습니다. 에테르가 존재한다면, 절대적인 정지를 말할 수 있고 따라서 절대적인 운동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론적 이유로 에테르의 존재가 가정되었으며, 일부 과학자들은 에테르를 연구할 방법이나 최소한 그 존재를 입증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맥스웰 자신도 그러한 과학자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초음속 비행기에 탑승한 사람이 그 비행기가 뒤에 퍼뜨리는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에테르 속에서 충분히 빠르게 이동하는 여행자는 광파light wave를 앞지를 수도 있습니다. 맥스웰은 이런 생각에 기초해 한 가지 실험을 제안했습니다. 에테르가 존재한다면,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 때 에테르 속에서 운동할 것이라고. 또한 지구는 1월에 운동하는 방향과 4월이나 7월에 운동하는 방향이 다르므로, 1년 중의 다양한 시기에 지구에서 광속을 측정하면 그 결과 사이에 미세한 차이가 생겨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맥스웰은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려고 했지만, 그의 실험이 유효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왕립학회 회보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의 편집자는 맥스웰이 출판을 포기하도록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1879년 고통스러운 위암으로 죽음을 목전에 둔 48세의 맥스웰은 친구에게 편지를 써서 그 제안을 언급했습니다. 그의 편지는 맥스웰이 죽은 후 학술지 『네이처 Nature』에 게재되었고, 앨버트 마이컬슨Albert Abraham Michelson(1852-1931)이라는 독일 태생의 미국 물리학자 같은 사람들이 그 편지를 읽게 되었습니다. 맥스웰의 생각에서 영감을 얻은 마이컬슨과 에드워드 몰리Edward Morley(1838-1923)는 1887년에 지구가 에테르 속에서 움직이는 속도를 측정하기 위해 고안된 매우 섬세한 실험을 수행했습니다. 그들의 아이디어는 서로 직각을 이룬 두 방향에서 다가오는 광속을 비교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빛이 에테르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이동하는 속도가 고정된 값이라면, 지구가 에테르 속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방향에서 다가오는 광속들을 측정하면 조금씩 다른 값들이 나와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마이컬슨과 몰리가 얻은 측정값들은 기대한 차이를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마이컬슨과 몰리가 얻은 실험 결과는 전자기파가 에테르 속에서 퍼져나간다는 모형과 확실히 충돌했으며 따라서 에테르 모형을 퇴출시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마이컬슨의 목적은 빛이 에테르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움직이는 속도를 측정하는 것이었지, 에테르 가설이 옳거나 그름을 증명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의 발견은 그를 에테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이끌지 않았습니다. 아일랜드의 수리 물리학자이며 공학자 윌리엄 톰슨 경Sir William Thomson(1824-1907, 켈빈 남작Baron Kelvin, 작위를 받을 때 그가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 대학교 앞에 흐르는 켈빈 강에서 이름을 따 자신의 이름으로 했습니다)은 1884년에 심지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역학에서 우리가 그 존재를 확신하는 유일한 실체. 우리가 확신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발광 에테르의 실재성과 실체성이다.

호킹은 과학자들이 흔히 꼼수와 미봉책을 써서 모형을 살리려고 애쓴다면서, 당시 과학자들도 에테르 모형을 살리려고 노력했음을 지적합니다. 에테르의 개념을 살리기 위한 노력에 거의 20년 동안 계속되었고, 마침내 스위스 베른의 특허청에서 일하던 무명의 젊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고라목할 만한 논문 한 편으로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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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세이건의 빛의 속도로 여행하기




오늘날 우리는 사람을 다른 별로 데려갈 우주선의 기초적인 설계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우주선들은 지구에서 바로 쏘아 올리는 것이 아니라 지구 궤도에서 일단 만들어진 다음 거기에서 기나긴 항성 간 항해를 시작하게 됩니다. 이런 계획 중의 하나로 오리온 프로젝트Orion Project라는 것이 있으며, 이 프로젝트의 이름은 별자리에서 따온 것이므로 궁극적인 목표가 별이란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오리온은 핵무기인 수소폭탄을 폭발시켜 그 반작용으로 우주선이 전진하게끔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리온은 우주라는 대양을 항해하는 핵추진 모터보트인 셈입니다. 이 프로젝트가 성사된다면 추진력을 핵폭발에서 얻는 오리온 프로젝트의 우주선은 많은 양의 방사능 물질을 발생시킬 것입니다. 미국이 적극적으로 추진하던 오리온 프로젝트는 우주 공간에서의 핵폭발 금지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갑자기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프로젝트 다이달로스Project Daedalus는 영국 행성 간 학회가 내놓은 계획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현존하는 원자력 발전소보다 훨씬 안전하면서도 효율적인 핵융합 반응로의 구현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오리온과 다이달로스는 광속의 10분의 1의 속력으로 여행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입니다. 그러면 4.3광년 떨어진 켄타우루스자리 알파별까지 가는 데 43년이 걸릴 것입니다. 오리온, 다이달로스 또는 이와 비슷한 다세대multigeneration 우주선들의 성사는 21세기 중반까지 기다려야 비로소 가능할 것입니다.

빛의 속도로 우주 공간을 여행하는 것이 수천 년 동안 꿈꿔왔던 인류의 숙원 사업임에 틀림없습니다. 로버트 버사드Robert W. Bussard가 제시한 우주 공간에 있는 수소 원자를 포함한 성간 물질들을 핵융합 엔진으로 흡입하여 이를 뒤쪽으로 분사시켜 추진력을 얻는 성간 램제트ramjet 엔진을 사용하는 광속 비행은 이론상으로는 가능하지만, 우주 공간에 널린 게 수소라고는 하더라도 밀도가 낮으므로 버사드의 램제트 엔진이 작동하려면, 엔진 앞쪽에 설치할 흡입 장치의 크기가 거의 수백 km는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주선이 거의 빛의 속도에 가까워지면 우주선을 향해 접근하는 수소 원자들의 속도 또한 상대적으로 빛의 속도에 가깝게 될 것이고, 따라서 잘못하면 고속으로 가속되어 날아 들어오는 우주선 입자cosmic ray particles 때문에 우주선과 그 안에 타고 있는 승객이 모두 녹아버릴 위험성도 있습니다.

『코스모스 Cosmos』(1980)의 저자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은 이런 기술적인 문제는 잠시 접어두고, 빛의 속도로 여행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 생각해보자면서, 지구는 우리를 지구 중심으로 잡아당기고 있기 때문에 자유 낙하하는 물체가 초속 9.8m씩 가속되면서 떨어진다고 말합니다. 우리를 지구 표면에 묶어두는, 또는 중심으로 끌어당기는 이 힘을 우리는 중력이라 부르고, 그 크기를 1g로 표시하는데, 우리가 지상에서 1g에 해당하는 힘을 받으면서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주여행 중에서도 1g의 가속을 받는다면, 우리는 우주선에서 아주 편안한 여행을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지구에서의 중력과 가속 중인 우주선 안에서 느끼는 관성력이 같은 성격의 힘이라는 것은 아인슈타인이 제안한 일반상대성이론의 주요 개념이기도 합니다. 우주 공간에서 1년 정도 1g의 가속을 계속해서 받으면 광속에 가까운 속도에 도달합니다. 광속과 비슷한 속도를 유지하면 우주선을 타고 움직이는 사람에게는 시간이 매우 느리게 느껴질 것입니다. 바너드의 별Barnard's Star은 태양에서 약 6광년 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우주선을 타고 이 별을 향해 달린다면, 약 8년 후면 이 별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8년은 우주선에 실린 시계로 잰 우리의 시간이지, 우주여행의 장도에 오르는 우리에게 손을 흔들며 환송했던 사람들의 시간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은하수 은하의 중심가지 가는 데는 21년 걸리고 안드로메다 은하에는 28년이면 도착합니다. 그렇지만 지구에 남아있는 사람들에게는 우주여행객의 21년이 무려 3만 년에 해당하는 장구한 세월입니다. 소수점 여러 자리까지 광속에 가깝게 접근한다면, 이론상으로 단 56년이면 우주를 한 바퀴 돌게 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여기서 56년은 우주선에서의 시간입니다. 우주여행에서 돌아올 때쯤이면 지구 자체가 없어졌을 것입니다. 태양은 아주 오래전에 빛의 방출을 멈췄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상대론적 우주여행은 고도로 앞선 문명에게는 우주 전역에 접근할 수 있는 실질적 방안을 마련해줄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우주선을 타고 움직이는 사람들에게만 실현 가능한 방안입니다. 인류가 멸망하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별을 향해 광속 여행을 할 수 있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태양계 내부의 탐사가 끝나면 다른 외계 행성계에 대한 탐사도 이뤄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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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샌델의 대리인 고용하기: 시장과 도덕 논쟁


『정의란 무엇인가? 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와 『왜 도덕인가? Why Morality』의 저자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1953-)은 자유시장에 대한 옹호가 전형적으로 두 가지 주장에 근거하는데, 하나는 자유에 관한 주장이고, 또 하나는 행복에 관한 주장이라고 말합니다. 첫 번째 주장은 시장을 옹호하는 자유시장주의자의 목소리로 이들은 자발적 교환을 허용하는 것이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길이며, 자유시장에 간섭하는 법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말합니다. 두 번째 주장은 시장을 옹호하는 공리주의자들이 내세우는 근거로 이들은 자유시장이 전체의 행복을 증진시키며, 두 사람이 거래할 때 둘 다 이익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거래가 당사자에게 모두 이익이 되고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는 한, 전체 공리는 당연히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시장 회의론자들은 이런 주장에 의문을 품습니다. 이들은 시장에서 이뤄지는 선택이 겉보기처럼 늘 그렇게 자유롭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정 재화나 사회적 행위는 돈으로 사고팔 경우 타락하거나 질이 떨어진다고 주장합니다.

샌델은 다음과 같이 예를 듭니다. 1862년 7월, 에이브러햄 링컨은 부족한 군인을 충당하기 위해 북부에서 처음으로 징병법에 서명했는데, 남부에서는 이미 시행중인 법이었습니다. 징병은 미국의 개인주의 전통을 거스르는 일이었고, 특히 북부의 징병은 더더욱 그러했습니다. 징집을 원치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고용해 대신 복무하게 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리인을 찾는 징집자들은 신문에 광고를 내어 최고 1500달러까지 제시했으며,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남부연합 역시 유급 대리 복무를 하용하다 보니 ‘부자들의 전쟁, 가난한 자들의 싸움’이란 표어가 생길 정도였으며, 북부에서도 이런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1863년 3월, 의회는 이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새로운 징병법을 통과시켰습니다. 대리인을 고용할 권리는 그대로 두되, 정부에 300달러를 내면 병역을 면제해주는 법이었습니다. 이 면제 비용은 미숙련 노동자의 1년에 해당하는 임금과 맞먹는 금액이었지만, 노동자도 돈을 내고 병역을 면제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습니다. 일부 도시와 카운티에서는 징집자에게 이 비용을 보조해주기도 했습니다. 보험업계는 매달 보험료를 내면 징집될 때에 면제 비용을 보장해주는 보험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신문은 ‘300달러냐, 당신의 목숨이냐’라는 머리기사를 실었습니다. 징병과 300달러 면제 비용에 대한 분노는 징병관리 공무원들을 향한 폭력으로 번졌고, 대표적인 사례가 1863년 7월에 일어난 뉴욕시 징병폭동사건입니다. 7일 동안 계속된 폭동으로 100여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다음 해 의회는 병역 면제 비용 제도를 없앤 새로운 징병법을 제정했습니다. 그러나 북부에서만은 대리인을 고용할 권리가 전쟁 기간 내내 유지되었습니다.

결국 비교적 소수의 징집자만이 북군에 입대해 싸운 것입니다. 징병 제비뽑기에 걸린 사람 중 상당수가 도망가거나 장애로 징병을 면제받았습니다. 그 결과 실제 징집 예정자 20만7천 명 가운데 8만7천 명이 면제 비용을 지불했고, 7만4천 명이 대리인으로 채워졌으며, 4만6천 명만이 복무했습니다. 대신 싸울 대리인을 고용한 사람으로는 앤드루 카네기, J.P. 모건,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아버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아버지, 그리고 나중에 미국 대통령이 된 체스터 아서와 클로버 클리블랜드 등이 있었습니다.

마이클 샌델은 부자가 자기들의 전쟁을 대신 싸워줄 사람을 고용했다는 이유로 남북전쟁 때의 병역제도를 부당하다고 말한다면, 오늘날의 자원병에 대해서도 같은 반박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묻습니다. 엔드루 카네기는 자기를 대신할 사람을 찾아 직접 돈을 지불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서 싸울 사람을 군이 모집하고, 납세자가 단체로 그들에게 돈을 지불합니다. 샌델은 우리도 입대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고용해 그에게 목숨을 걸고 대신 전쟁을 치러달라는 셈이 아니냐고 물으면서 이 경우 앞의 경우와 도덕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남북전쟁 때 대리인을 고용한 제도가 부당하다면, 지원병 제도 역시 부당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미국은 1,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쟁 때 징병제를 이용했는데, 제도가 워낙 복잡하고 학생과 특정 직업군에서 징병 유예를 신청하는 일이 비일비재해, 결국 많은 사람들이 참전을 피해갔습니다. 징병제는 특히 대학을 중심으로 한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징병제 폐지를 제안했고, 1973년에 미군이 베트남에서 단계적으로 철수하면서 징병을 모두 자원병으로 대체했습니다. 군 복무가 더 이상 의무가 아니다 보니, 군은 필요한 병력을 모으기 위해 보수를 높이고 복리후생을 늘렸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자원군이라고 부르는 군대는 식당, 은행, 소매점 등의 사업처럼 노동시장을 이용해 모병합니다. ‘자원’이란 말에 문제가 있는데, 군인들은 돈이나 복리후생 혜택을 받는 대가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이 전쟁을 주도하면서, 민주사회에서 시장을 이용해 군인을 모집하는 일이 과연 옳은가를 두고 논쟁이 다시 벌어졌습니다. 징병제를 두고 개인의 자유와 시민의 의무에 관한 문제가 정치철학의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자유지상주의자라면 징병제는 강제성을 띤 일종의 노예라서 부당합니다. 이 제도는 국가가 시민을 소유하고 멋대로 다룰 수 있음을 의미하며, 따라서 시민에게 전쟁에 나가 목숨을 걸고 싸우라고 강요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징병을 노예제와 같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선택권을 제한하고 따라서 전체 행복을 감소시킨다는 이유로 징병에 반대할 수 있습니다. 공리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징병 반대 논리입니다. 대리인 고용은 허용하는 제도와 비교해, 징병은 서로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거래를 금지하여 사람들의 행복을 감소시킨다는 주장입니다. 교환의 자유는 양자의 공리를 모두 높이면서 다른 누구의 공리도 줄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공리주의 논리로 보자면, 남북전쟁 병역제도가 순수 징병제보다 낫습니다. 공리주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원군은 최고의 선택입니다.

샌델은 징병은 의무이고 자원군은 자유라고 규정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단지 강제의 형태가 다를 뿐입니다. 즉 징병은 법이, 자원군은 경제적 어려움이 강제한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자원군 구성 계층을 보면 이런 반박이 어느 정도 타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역 사병 가운데 저소득층에서 중간 소득층 지역(중간층 가계소득이 3만850-5만7836달러인 지역) 출신 젊은이가 차지하는 비율이 현저히 높습니다. 그리고 전체 인구 가운데 소득 수준이 하위 10%에 해당하는 계층과 상위 20%에 해당하는 계층 출신 젊음이가 가장 적습니다. 최근에 모집된 군인의 25% 이상이 정규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일반인 46%가 대학 교육을 받은 데 비해, 18-24세 군인 가운데 대학 문턱을 넘어본 사람은 고작 6.5%에 그쳤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미국 사회 특권층 젊은이들은 군복무를 기피하고 있습니다. 프린스턴 대학의 경우, 1956년 졸업생 750명 가운데 과반수인 450명이 졸업 후 군에 입대한 반면, 2006년에는 졸업생 1108명 가운데 입대한 사람은 고작 9명에 그쳤습니다. 다른 일류 대학이나 미국 수도에서도 상황은 비슷합니다. 의회 의원 가운데 자녀가 입대한 경우는 2%에 불과하다. 2004년 뉴욕시의 자원자 70%가 저소득층 출신의 흑인과 히스패닉이었습니다.

자원군을 지지하는 시장 논리에 대한 반박은 불공평과 강제에 있습니다. 즉 계층 간 차별이라는 불공평 그리고 가난 때문에 대학 교육 등의 혜택을 받는 대가로 어쩔 수 없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젊은이들에게 부과되는 강제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대신 싸워주는 사회와는 사뭇 동떨어진 세계의 전문 유급군입니다. 이는 우리가 같은 시민 가운데 비교적 소수를 고용해 대신 싸우게 해놓고 우리는 발을 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다수의 시민과 그들 이름으로 싸우는 군인 사이의 연결고리가 끊어집니다. 인구 비율로 볼 때 오늘날의 현역군인 수는 2차 세계대전 때의 4% 수준입니다. 그러다 보니, 정책 입안자들이 광범위하고 진지한 사회적 동의를 구하지 않고도 비교적 쉽사리 국가를 전쟁으로 내몹니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케네디David M. Kennedy는 “전쟁에서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사회의 이름을 걸고, 역사상 가장 막강한 병력이 전투에 투입될 수 있다. 이것이 오늘의 현실이다”라고 말합니다. 자원군은 거의 모든 미국인에게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책임을 면제해줍니다. 같이 나눠야 할 희생을 면제해주면 정치적 책임의식이 약화되는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징병을 시민의 의무로 본 가장 유명한 발언은 제네바 태생의 계몽주의 정치이론가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1712-78)의 말입니다. 그는 『사회계약론』에서, 시민의 의무를 팔릴 물건으로 전락시키는 행위는 자유의 가치를 옹호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깎아내린다고 주장했습니다. 루소가 호소한 시민의 이상은 미국 같은 시장 중심 사회에서도 여전히 반향을 일으킵니다. 미국인은 모병을 시장에 떠맡겨놓고도 군복무를 애국심과 시민의 미덕이라는 낡은 개념과 분리하지 못합니다.

자원군과 용병의 차이는 무엇일까? 둘 다 돈을 받고 싸우는 군인이고 급여와 복리후생 혜택을 준다는 약속에 모여든 사람들입니다. 용병은 단지 돈만 바라고 싸우는 외국인인데 반해, 미국 자원군은 미국인만을 고용합니다. 노동시장이 군대를 모을 적절한 수단이라면 왜 미군은 국적을 보고 군인을 고용해야만 하는가. 왜 군복무를 원하고 필요한 자질을 갖춘 외국 시민을 적극 끌어들이지 않는가? 프랑스 외인부대는 외국인을 모집해 프랑스를 위해 싸우게 하는 오랜 전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외인부대 홈페이지는 13개 언어를 지원하며 전 세계에서 군인을 모집합니다. 현재 부대 병력의 1/4이 라틴아메리카 출신이며,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 출신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미국은 외인부대를 창설하지 않았지만, 그 방향으로 옮겨가는 중입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필요한 병력 모집이 어려워지자 임시 비자로 미국에 살고 있는 이주민을 상대로 군인을 모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상당한 보수와 미국 시민권 조기 발급 등의 혜택이 주어집니다. 현재 미군에는 외국인이 3만 명 복무중입니다. 새로운 프로그램에 따라, 지원 자격은 영주권 소지자에서 일시 체류자, 외국인 학생, 망명자로 확대될 예정입니다.

시장 논리는 비단 외인부대 모집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군복무를 여러 직업 중 하나로 본다면, 신병 모집을 정부에서만 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실제로 미국은 대규모 군 기능을 민간 기업에 맡긴 상태입니다. 군사 도급 업체가 전 세계 분쟁에 참가하는 일이 점점 늘어나고 있으며, 이라크에 주둔한 미군의 경우에도 민간 기업체 소속 군인이 상당히 많습니다.

2007년 7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이라크에 주둔한 병력 가운데 미국이 비용을 지불하는 민간 기업체 소속 군인 18만 명이 실제 미군 16만 명보다 많았습니다. 이 도급 인력은 대개 기지건설, 차령정비, 물자보급, 식사제공 같은 비전투 업무를 맡습니다. 그러나 5만 명 정도는 무장한 비밀요원으로, 이들은 기지 수호, 외교관 호위 등을 수행하면서 실제로 전투에 참가합니다. 이라크에서 사망한 민간 도급 인력은 1200명이 넘는데, 이들은 사망해도 성조기가 덮인 관에 들어가지 못하며, 미군 사망자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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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시스티나 예배당 장식에서 소외되다

 

작품을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1481년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로렌초 데 메디치를 살해하려는 교황 측의 음모가 있었고 이를 사전에 안 그는 위기에서 벗어났습니다. 이에 교황 식스투스 4세는 로렌초와 화해하는 뜻으로 이제 막 완공한 자신의 이름을 딴 시스티나 예배당을 장식할 최고의 화가 몇 사람을 보내줄 것을 청했습니다. 당시 로렌초는 일종의 문화적 선전정책을 펴고 있었으므로 나폴리 왕에게 건축가 줄리아노 다 마이아노를 보냈고, 또한 베로키오를 피스토이아로 보내 추기경 니콜로 포르테구에리를 기리는 대리석 조각을 제작하게 했습니다. 교황이 로렌초에게 시스티나 예배당을 장식할 예술가들을 의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피렌체 작업장들은 열광의 분위기에 휩싸였습니다. 바티칸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건물이기 때문입니다.

레오나르도 역시 매우 들떠 있었지만 곧 좌절을 맛보았습니다. 그는 베로키오와 동행하여 베네치아와 로마로 가기를 바랐지만, 선발명단에는 보티첼리, 시뇨렐리, 기를란다요, 페루지노의 이름뿐 그의 이름은 빠져 있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빠진 건 로렌초가 그를 피렌체의 최고 화가로 인정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그에게는 다른 일감을 주기 위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레오나르도가 로렌초와 연관된 일을 한 것이 없었으므로 로렌초가 그의 재능을 알아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로렌초는 아버지 코시모와 달리 예술가들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코시모는 도나텔로, 프라 안젤리코, 마사초, 브루넬레스키, 필리포 리피 등을 적극적으로 후원했지만, 로렌초는 미켈란젤로를 후원했을 뿐 그 외의 예술가들에게는 적극적이지 못했고 의뢰한 작품의 양도 적었습니다. 그는 화가들을 고용하기보다는 외교적 수단으로 대사처럼 국외로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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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이우올로 형제의 <성 세바스천의 순교>, 1475년경, 패널에 유채, 291.5-202.5cm.

폴라이우올Pollaiuolo로 형제는 작업장을 함께 운영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화가, 조각가, 금 세공가였지만, 안토니오Antonio는 금과 청동을 주로 다뤘으며 피에로Piero는 그림을 주로 그렸습니다. 피에로의 그림 몇 점이 현존하는데, 대체로 평범한 작품들이며 안토니오의 도움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피에로의 대표작은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는 이 작품 <성 세바스천의 순교>로 화면 앞에 활을 들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안토니오가 청동으로 제작한 <헤라클레스와 안테우스>를 닮았습니다. 피에로가 1460년경에 제작한 엔그레이빙 <벌거벗은 남자들의 전투>와 많은 도르오이들을 보면 활력 있고 표현적 장면들을 포착해 나타내려고 했슴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피렌체 화가들에게 기여한 점은 인체 운동을 분석하고 뒤틀린 근육을 연구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풍경화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성 세바스천의 순교>를 보면 풍경화에서 선구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토니오의 주요 공동 작품은 교황 식스투스 4세의 무덤장식과 1492-98년경에 청동으로 제작한 교황 이노센티우스 8세의 묘비로 모두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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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델 폴라이우올로의 <교황 식스투스 4세의 무덤을 장식한 철학의 비유>, 1484-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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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드로 보티첼리의 <아테나와 켄타우로스>, 1482, 캔버스에 유채, 207-148cm.



로렌초가 가장 좋아한 예술가는 피에로의 형, 안토니오 델 폴라이우올로였습니다. 안토니오는 로렌초의 명을 받고 보티첼리와 함께 로마로 갔는데, 두 사람 모두 인문주의자들이었으며 신화에 관심이 많아 신화를 주제로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로렌초는 안토니오와 보티첼리의 영향을 받아 신화에 관심을 가졌고 신부, 문법학자, 철학자, 시인으로 구성된 네 명의 가정교사로부터 수학했습니다. 그가 교육을 받은 것은 예술보다는 주로 역사, 철학, 문학이었습니다. 그는 논쟁하고 토스카나어나 라틴어로 글을 쓰고 노래가사, 풍자시와 애가를 쓰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소네트와 노래가사를 작사한 것으로 보아 로렌초는 어머니의 재능을 물려받은 것 같습니다. 로렌초 주변에는 늘 작가들이 있었고 그와 가까워지는 데는 예술가보다는 작가가 유리했습니다.

이런 로렌초의 모임에 소개되었을 때 레오나르도는 소외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당시 헬fp니즘에 정통한 학자 요아네스 아르지로풀로스가 1475년까지 피렌체에서 명강의를 했고 지식인들은 그의 강의에 매료되었지만, 라틴어는 물론 그리스어도 몰랐던 레오나르도가 강의에 관심이 있을 턱이 없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적었습니다.

내가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일부 주제넘은 사람들이 나를 교양 없는 사람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인간들인가! 그들은 마리우스가 고대 로마 귀족들에게 한 것처럼 내가 그들에게 응답할 수 있다는 것을 정녕 모르는 것일까. 다른 사람의 작품에 관해 알고 있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들이 나의 작품에 도전할 수 있을까?

레오나르도는 정식으로 배우지 못했지만 직관이 매우 발달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자연이 스승이었습니다. 그도 로마인의 조각과 얕은 부조를 보면서 고대를 알게 되었지만, 고대의 장점이나 완전함을 부인했고 더러 고대 예술에 관해 말했지만 규범으로 삼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예술이든 과학이든, 문학과 철학을 포함해서 그 어떤 것이든 전적으로 자연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딴 사람의 방법을 모방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자연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로 불리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연적 형상들이 널려 있으므로 자연으로부터 습득한 사람에게 수학하기보다는 자연에 직접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레오나르도는 유행이란 지나가는 것이라면서 자신은 예술로서 돈 버는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로부터 영예와 자긍심을 기대하는 사람에게 주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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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베노이스 성모>


작품을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1477년 베로키오가 조수들을 이끌고 피렌체에서 약 40km 떨어진 피스토이아로 왔습니다. 추기경 니콜로 포르테구에리를 기념하는 대리석 조각을 제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피스토이아에까지 온 기회를 이용해 지방 집정부는 그에게 제단화 <성모자>를 의뢰했습니다. 레오나르도도 이 팀에 가세했는데, 그 이유는 남색사건으로 기소된 일 때문에 잠시 피렌체를 떠나고 싶었던 것으로 짐작되며 오래 머문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가 작업에 참여한 건 작업장에서 작은 부분을 그린 것이 전부입니다. 루브르에 소장되어 있는 테라코타 모델이 레오나르도가 한 것으로 천사가 그리스도와 성모에게 문안을 드리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그가 베로키오의 작업에 참여한 마지막 작품이 되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처음으로 정부로부터 작품을 의뢰받은 건 1478년 1월 1일로 스물다섯 살 때였습니다. 그는 서면으로 시의회로부터 산 베르나르도 예배당 제단화를 주문받고 3월 16일 선불로 25플로린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계약을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제단화에 대한 계약을 파기한 사람은 그만은 아니었습니다.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가 약속을 지키지 않자 기를란다요에게 주문했고, 그도 약속을 지키지 않자 필리포 리피의 몫이 되어 그가 7년 후에 완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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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키오의 공방에서 제작한 <성모와 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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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베노이스 성모>, 1478-80년경, 패널에 유채, 이를 캔버스에 옮김, 48-31cm.

레오나르도는 이 작품에서 성모자를 보통의 어머니가 아기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장면으로 표현했습니다. 19세기 초 이탈리아 음악가가 이 작품을 타르타리의 아스트라칸에서 러시아인 사포지니코브에게 팔았는데, 어디서 구해 팔았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사포지니코브의 손녀딸이 유증받았습니다. 러시아 화가 레온 베노이스의 미망인인 그녀는 1914년에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이 작품을 기증했습니다. 이 작품은 베노이스의 이름을 따서 <베노이스 성모>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1478년 12월 피렌체에는 홍수와 전염병의 재앙이 내려졌고, 레오나르도는 무슨 일이고 해야 했습니다. 노트북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나는 두 점의 성모 마리아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어떤 형식의 그림인지 또 누구를 위해 그렸는지에 관해서는 적지 않았지만 두 점 가운데 하나는 <베노이스 성모>인 것 같습니다. 당시의 전통은 대가가 역사와 전통을 좇아 그리고 차세대 화가들은 대가의 작품을 보고 그 의도를 파악하거나, 책이나 여행을 통해서 이해하고 역사의 범주 내에서 작품을 제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작품을 보면 그런 점이 전혀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는 신성을 단지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으로 표현하면서 성모자를 일상적인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아기 예수는 꽃에 매료되어 잡으려고 하고 성모는 아기가 꽃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합니다. 어머니와 아기 모두 관람자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꽃을 두고 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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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의 팔 습작>, 13.3-13cm.


<베노이스 성모>는 캔버스에 재현된 것으로 원화는 패널에 그려져 있었습니다. 캔버스로 재현된 건 아무래도 원화와는 같을 수 없는 데다 서툰 솜씨로 보수되어 원화와는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성모의 앞이마는 벗겨졌고 볼은 볼록하며 눈은 침침하고 목은 주름져 있습니다. 치아는 색에 덮여 보이지 않고 피부도 보수하는 과정에서 매끈하게 표현되지 않아 레오나르도의 작품이라고 말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원화의 상태로 되돌릴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레오나르도가 도상의 전통을 무시하고 그렸기 때문입니다. 과거 성모 그림은 그녀를 숭고한 모습으로 표현하느라 딱딱하고 몸을 꼿꼿하게 세운 모습으로 그려 마치 사진을 찍을 때 긴장하여 얼어붙은 것처럼 포즈를 취하는 것 같습니다. 후기 콰트로첸토(15세기) 화가들도 그런 식으로 그렸기 때문에 이 작품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베노이스 성모>는 성모가 아기 예수와 재미있게 놀이하는 장면을 그린 최초의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15세기 관람자들이 과연 이 작품을 좋아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의 성모는 베로키오의 수석 조수가 된 로렌초 디 크레디로부터 라파엘로까지 새로운 이미지로 전수되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두 점의 성모 마리아를 그렸다고 했는데 다른 한 점은 무엇일까? 현재 작품은 현존하지 않지만 스케치가 남아 있어 <성모와 고양이>였을 것으로 미술사학자들은 추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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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성모와 고양이 스케치>, 13.2-9.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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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성모와 고양이 스케치>, 13.2-9.6cm.


<성모와 고양이>는 <베노이스 성모>와 유사하지만 꽃 대신 고양이가 삽입되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뮌헨의 피나코텍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성모와 카네이션>이 이때 그린 것으로 추측합니다. 이 작품은 한때 작가미상으로도 알려졌고, 베로키오의 작품이라고 주장한 학자들도 있었지만 근래에는 레오나르도의 작품으로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제작연대에 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여 1478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1473~6년에 제작했을 것으로 짐작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의 초기작품으로 보이며 <베노이스 성모>와는 구성이 달라 같은 시기에 그린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성모와 카네이션>이 그의 작품이라고 믿어지는 이유는 분위기, 배경의 산을 파란색으로 칠한 점, 투명한 화병, 성모의 머리모양이 다른 작품의 요소와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난히 뚱뚱한 아기, 아기의 공허한 표정, 방석 위의 편안해 보이지 않는 자세 등을 들어 그의 작품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고, 또한 성모의 뻣뻣한 자세를 지적하여 그의 작품이 아니라 베로키오나 로렌초 디 크레디의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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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드로 보티첼리의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초상>, 1475년경, 패널


레오나르도가 펜과 잉크로 드로잉한 것들 중에 목을 매달아 처형한 장면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1479년 12월 31일에 그린 것입니다. 로렌초 정권에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음모를 꾸미다 잡힌 베르나르도 바론첼리의 처형장면입니다. 이 자는 한 해 전 로렌초의 동생 줄리아노를 살해하는 데 가담했다가 로렌초의 부하 한 사람에게 상처를 입힌 후 도망쳐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그는 고대 콘스탄티노플 성 안에 숨어 지내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하여 대성당 안에 숨었다가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국경을 넘은 후 배를 타고 터키로 갔습니다. 로렌초는 그를 살해하거나 생포하라고 명령했고, 결국 그는 생포되어 피렌체로 인도되었으며 1479년 12월에 처형되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처형장면을 직접 보고 드로잉하고 하단 왼쪽에 얼굴을 그려 넣었으며, 드로잉의 상단에는 의상에 관해 적었습니다. “작은 갈색 모자, 검정색 가죽 저킨jerkin(소매 없는 남자용 상의), 안감을 댄 모직 속셔츠, 속에 여우털을 댄 파란색 겉옷, 붉은색과 검정색 벨벳으로 장식한 컬러, 베르나르도 디 반디니 바론첼리, 검정색 긴 양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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