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융은 그의 영혼에게 묻는다

 

 

 

 

 

 

카를 융은 “나의 길은 당신의 길이 아니며” “자신의 모습으로 사는 것이 자신의 임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길을 헤쳐 나간다. 환상은 일정한 형태가 반복되고 진화하면서 더욱 깊어진다. 집단적인 인간 역사의 공포와 긍정적인 면이 그의 앞에 펼쳐진다. 영혼은 그에게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과거에 존재했으며 앞으로 존재할 것들을 느낀다.” 그는 엄청난 임무가 앞에 놓인 것을 보고 처음에는 깜짝 놀란다. “미래가 나로부터 자라난다. 나는 그것을 창조하지 않지만 창조한다.”
검은 뱀이 나타나 몸을 틀면서 허물을 벗고 흰 뱀이 되어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환상이 펼쳐진다. “새로운 시대에 고대를 낳는 것이 창조다”라고 그가 쓴다. “우리는 그것(마법)이 필요하다 … 우리가 잉태할 수 없는 것을 잉태하는 방법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내면의 도움을 찾아 융은 꿈에서 열쇠를 네 개 들고 나타난 날개가 있는 “스승”이며 후에 원형적인 마법사가 되는 필레몬에게 “훈련”을 받는다. 융은 그에게서 개인을 넘어선 객관적 현실을 배운다. 그는  인간의 영혼 안에서 싸우는 힘들을 진정한 의미로 결합하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 위험을 무릅쓴다. 합일은 “관대한 영원의 생명, 신성한 생명”의 교착상태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개인적인 “생명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라는 것을 지도한다. 이 이야기는 “그 기준은 네 자신과 더불어서 존재한다. 그것이 길이다”라는 말로 끝난다. 자아성찰의 시기는 그가 “그림자”의 내면상태로 고통스러운 자기비판을 하며 시작된다. “만약 내가 야수인 너를 길들인다면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야수를 길들일 기회를 주는 것이다.” 융은 영혼의 응원을 받고 “흔들리지 않고 창조”를 하지만 초췌한 내면의 남성상은 그에게 “너는 인류의 목적을 위해 피를 흘려야 한다”고 말한다. 1차 세계대전이 무참하게 지속되는 가운데 융은 그의 영혼에게 묻는다. “내가 얼마나 깊은 곳까지 가야 하는가?” 그러자 영혼은 “네 자신과 현재를 넘어 영원히”라고 대답한다.
거의 일 년 동안 심연의 목소리는 말을 하지 않는다. 융은 “새로운 책” 초안을 집필한다. 그러자 필레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너의 의지는 네 것이 아니다. 너는 전체의 의지이다 … 더 가까이 다가가, 신의 무덤으로 들어가라. 네가 작업할 장소는 납골당이다.” 죽은 자가 그의 내면의 상에 나타나자 영혼이 그에게 “죽은 자가 너의 속죄의 기도를 요구한다”고 말한다. 융은 마지못해 요구를 받아들인다. 영혼은 “이 세상의 잣대”가 “융의 헌신을 원하므로” 융의 두려움을 희생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왜 나입니까?”라고 융이 항의한다. “나는 그럴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습니다.” “너는 숨겨진 채로 있으면 안 되는 단어를 갖고 있다”라고 영혼이 말한다. 융이 “선과 미의 존재”라고 느껴 왔던 필레몬이 이번에는 사제복을 입고 나타나 인간의 역할이 포함된 일종의 영지주의적 창조물인 “죽은 자를 위한 일곱 가지 설교”를 한다. 분명하지 않고 무한하며 영원한 “무無이면서 모든 것인” 플레로마Pleroma[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God of gods] 안의 여러 다른 차원에서 창조가 일어난다. 선과 악, 같음과 다름 등 대극의 쌍들은 플레로마 안에서는 서로 균형을 이루고 아무것도 지니고 있지 않지만 창조된 존재에서는 별개로 보인다. 따라서 아래에서는 존재로서의 “자신만의 본질”을 찾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진다.
“창조되고 창조되지 않은” 모든 것이 플레로마 그 자체, 존재의 전체성이다. 플레로마로부터 처음으로 현현한 존재상태는 인류가 잊은 신 아브락사스Abraxas[머리는 수탉, 몸은 인간, 다리는 뱀의 형상을 한 영지주의자들의 신]이다. 아브락사스의 존재상태는 “결과”로, “개연성이 없는 개연성이며 비현실적인 현실”의 역설을 드러낸다. 그것은 “힘, 지속성, 변화”를 함께 의미한다. 그다음 차원인 “신의 창조”에서 현현하는 신은 더욱 한정적인 성격을 지닌다. 신은 본질적으로 “실질적인 충만”함이며 그의 대극인 사탄은 본질적으로 “실질적인 공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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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은 융이 프로이트와 결별한 1913년에 시작되었다

 

 

 

 

 

『카를 융 영혼의 치유자』은 오늘날까지 전 세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심리학적 업적을 남긴 카를 융이 겪은 개인적이며 정신적인 진화의 여정을 이야기한다.

모든 일은 융이 프로이트와 결별한 1913년에 시작되었다. 융은 내면의 경험을 통해 지성에만 의지하지 않는 방법을 찾았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꿈들을 꾸었고 그 꿈들에서 반복적이며 극적인 신호를 받았다. 꿈에서는 대낮에 끔찍한 홍수로 유럽 전체가 휩쓸려가고 피가 강이 되어 흐르는 장면이 펼쳐졌으며 내면의 목소리는 “이것이 현실이 되리라”고 말하고 있었다. 융은 “나는 내가 미쳐 버렸다고 생각했다”고 적었다. 그는 자기심리진단을 해보았으나 별다른 답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내면의 실체에 다가서기 위해 “보링 공법boring method”을 개발했는데 이는 후에 환상에 접근하고 침투하는 수단인 “적극적 상상active imagination”으로 발전하여 그의 심리학의 핵심기반이 되었다. 1913년 후반부터 1914년 중반까지 그는 “가장 어려운 실험”을 위한 재료가 될 내면의 세계, 이미지, 대화를 끊임없이 기록했다.
그런 실험들은 환자 상담이나 가족과의 식사를 마친 밤 시간, 그의 서재에서 벌어지는 일이 많았다. 그는 때때로 요가 형태의 훈련을 하여 감정적 소용돌이를 잠재우고 그의 의식을 비웠다. 그 후 연극을 시작하듯 자연스럽게 환상에 빠져들고 그 속의 인물들과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그 경험의 의미와 중요성을 확실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는 정신병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계속해서 느꼈다.
“마침내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에 그가 말했다. 초기에 겪은 그의 상징적 예지는 무서운 형태로 나타났다. 자신의 경험을 이해하게 된 융은 용기를 내어 손으로 그의 “새로운 책”의 초안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블랙 북』의 내용을 그 책에 옮겨 쓰며 각 에피소드를 더 자세히 해석하고 운문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 책의 면면을 보면 전체 내용의 기본 틀을 파악할 수 있다. 내면의 전쟁이 일어난다. 예언서와 같은 도입부에서 “심연의 영혼”이 그 안의 “시간의 영혼”과 싸운다. 시간의 현대적이며 가변적인 개념은 점차 심연이 지니고 있는 태곳적의, 형성 중인 미래에 자리를 내어 준다.
여기서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에 대해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영적 메시지가 나타난다. 융은 그 메시지를 해석하고 간직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그 내용은 바로 새로운 신의 형상, 즉 크고도 작고 어둡고도 밝은 모든 것 안에 편재하는 신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서 “궁극의 진리와 어리석음은 동일한 하나이다”라는 역설이 드러난다. 그뿐만 아니라 “이성과 비이성이 하나로 녹아들면서 최고의 의미를 만들고” “질서와 혼돈이 결혼을 하면 신성한 아이가 태어난다.”
이 임무는 대극들opposites을 함께 묶는 것으로 “목적은 높은 곳이 아니라 중심”이며 그 중심은 “우리 안의 신”으로 말할 수 있는 자아Self다. 융은 “우리는 … 기독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래하는 신에게 우리는 아무 소용없게 된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그는 신의 영혼과 동물인 인간을 함께 결속시켜 자신 안의 온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융의 개인적 여정에서 그의 여성적 영혼의 목소리는 대극들을 인식하고 대극들 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그와 전쟁을 벌인다. 이 과정에서 불신, 조롱, 판단, 자만심, 저항심, 의심, 혼란, 분노, 공포가 벗겨져 나간다. 이제 그는 내면의 여성성(또는 아니마anima)을 통해 기다리고 견디고 받아들이는 인내심을 키울 필요가 있다. 그는 사고와 감정이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융은 “나에게 인간적이지 않은 어떤 것도 이질적이지 않게 될 때까지” 그가 가장 원하지 않는 사막, 지옥, 살인 등으로 상징되는 것들을 접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대극은 형제와 같다는 것을 깨닫는다. “반대쪽도 우리 안에 있다.” 영혼은 고독, 지식으로 인한 내면의 외로움, 길 또는 목표의 불확실성, 광기의 공포와 가능성을 그의 여정의 일부로 받아들일 것을 조언한다. “나는 … 영혼이 자신의 길을 안다고 믿었다 … 아마 나의 연구로 통찰력을 얻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영혼은 그런 성취를 요구한다 … 나는 희망도 없이 나만을 위해, 신을 위해 이것을 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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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의 연전연승의 비밀은 바로 세계 최고의 무적군단에 있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연전연승의 비밀은 바로 세계 최고의 무적군단에 있었다. 그 중심에는 엄청나게 긴 창을 들고 밀집 대형으로 적을 섬멸하는 창병이 있었다. 기존의 창기병들이 2.4m 길이의 창을 사용했던 것과 달리 알렉산드로스의 창병들은 무려 5m에 달하는 창을 휘둘렀다. 기원전 334년 이 야심만만한 청년 대왕은 32,000명의 보병과 5,1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소아시아를 가로질렀다. 주변의 페르시아 소부대를 모두 무찌르고 소아시아를 손에 넣은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창을 땅속 깊숙이 박아 넣고는 이렇게 외쳤다. “신으로부터 아시아를 선물로 받았노라!” 완전히 새로운 그의 정치관을 드러내는 말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점령지 아시아인을 마케도니아에 복속된 식민국의 백성이라거나 그리스의 노예쯤으로 여기는 법이 없었다. 이런 행보는 이상에 대한 그의 굳건한 믿음에 기반을 둔 정치적 선전의 일환이었다. 그의 선전은 주효했다. 수많은 아시아인들이 이 매력적인 영웅에게 마음을 빼앗겼으니 말이다.
서아시아와 최초로 대적한 그리스의 국가 트로이를 방문해 아킬레우스의 묘소에 참배하며 그리스의 정기를 받은 이 마케도니아의 왕은 내륙으로 진격하여 페르시아 원정에 오른다. 그리고 총 세 번에 걸친 공격 끝에 페르시아 제국을 패퇴시킨다. 처음에 그는 마케도니아 병사와 그리스의 기병 약간 명으로 구성된 간소한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선다. 하지만 두 번째, 세 번째 전투에서는 그리스군・발칸군・마케도니아군이 연합한 대군을 이끌게 된다. 물론 모든 전투에서 선봉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건 마케도니아군이었고, 이들을 이끈 건 당연히 알렉산드로스였다. 하지만 그의 원대한 계획은 연합군 병사들의 도움 없이는 현실화될 수 없는 것이었다. 페르시아를 점령한 후 그는 병력 증강을 위해 서아시아에서도 병사들을 모집했다. 기원전 326년 그가 인도 땅에 발을 디뎠을 즈음 그의 군대는 무려 120,000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그리고 아시아 출신이 병사들의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때에도 진격의 가부를 결정한 건 마케도니아인이었다. 마케도니아인은 왕의 결정을 비준하는 마케도니아인으로 구성된 의회를 조직했다. 동남아시아의 계절풍에 시달리며 행군을 계속했지만 알렉산드로스가 호언장담했던 아시아 대륙의 끝은 보이지 않았던 탓에 그들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들은 알렉산드로스의 결정을 의
심하기 시작했다. 인도란 나라의 어마어마한 크기에 당황하긴 알렉산드로스도 매한가지였다. 그는 내심 갠지스 밸리에 있는 마그다Magdha까지 진격하길 바랐지만, 더 이상은 무리라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그는 회군을 결심한다. 영원할 것 같던 승리의 나날은 종지부를 찍었지만 알렉산드로스가 고대에 누구도 감히 상상하지 못했을 정도의 방대한 영토를 손에 넣은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페르시아 제국의 광활한 영토보다 훨씬 더 넓은 전무후무한 제국의 지배자였다. 그의 특별함은 비단 정복자로서의 탁월한 능력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는 이제껏 어떤 군주도 선보인 적 없는 이상을 추구했으며 다민족이 한데 어울려 사는 왕국을 꿈꿨다. 알렉산드로스는 모든 인간은 자신의 혈통과 상관없이 그 사람 자체로 인간의 가치를 판단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와 그의 최측근 인사들 가운데 여덟 명은 페르시아 귀족 가문의 처자와 혼인하기도 했다. 병사들과 아시아 현지처 간의 결혼이 합법적으로 공인되었고, 병사들이 아시아 여성들에게서 낳은 자식의 교육비가 지급되었다. 이들 중 다수가 알렉산드로스가 아시아에 건설한 70여 개의 신도시에 정착했다. 하지만 비대해진 대제국을 건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대한 영토에 안정을 구가하기 위해서는 군사력의 증강이 급박했다. 하지만 이런 현실적인 고민을 뒤로한 채 알렉산드로스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신성한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이런 그의 몽상적인 태도는 그를 따르던 마케도니아인과 그리스인을 불안에 떨게 했다. 이에 대해 그리스의 역사학자 플루타르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자신을 온 세계를 화합하게 할 신이 보낸 지배자라 여겼다. 사람들을 이성으로 화합하게 할 수 없을 때 무력을 사용하긴 했지만, 그의 모든 행보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사람들의 삶・관습・결혼・생활방식을 모두 한데 어우러지게 하는 것 말이다. 이를테면 그는 전 세계를 화합의 잔 속에 담고 싶어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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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대륙의 그리스, 로마 VS 아시아의 페르시아

 

 

 

 

 

대제국을 건설한 페르시아인이 호전적이었다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하지만 정복의 과정이 그러했을 뿐 영리한 키루스 2세는 관대한 지배자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유연한 국정운영능력을 과시했다. 키루스는 파괴되거나 손상된 도시를 복원하고, 피지배국의 숭배문화를 존중하는 관대한 왕으로 스스로를 포장했다. 마르두크 신전의 부흥과 함께 바빌론에서 싹튼 우상숭배문화 말이다. 마르두크 신전 터에서 발견된 점토판에는 “모든 땅의 왕, 키루스는 에사길라 신전에 애정을 보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키루스 2세의 의욕 넘치는 후임자들인 캄비세스 2세와 다리우스 1세의 치세기에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아라비아 땅을 빼면 이집트와 북서부 인도를 포함하는 서아시아 대부분이 페르시아 제국의 땅이었다. 특히 다리우스 1세의 영토확장의 야심은 멈출 줄을 몰랐다. 기원전 490년에 소아시아의 식민지 그리스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아테네와 에레트리아가 이 반란군에 원군을 보냈다. 이 “서쪽의 야만인”을 척결하기로 결심한 다리우스는 그리스 정벌에 나선다. 사실 다리우스가 유럽 대륙을 향한 야욕을 공공연하게 드러낸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다리우스의 페르시아 함대는 이미 기원전 513년 스키타이 원정길에 지중해 해안을 따라 이탈리아까지 정찰을 마치고 돌아왔다. 기원전 480년에 다리우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리스 원정길에 오른다. 세계 최대의 제국 페르시아의 자존심이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인에게 패퇴했다는 사실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크세르크세스는 부왕이 트라키아에 지어놓은 왕궁에서 자신의 군대를 사열하기도 했다. 언젠가 그리스인을 두 발 아래 무릎 꿇리고야 말겠다던 다리우스의 결심은 그의 자손에게 전해졌다. 유럽과 아시아의 혈투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두 대륙의 피비린내 나는 힘겨루기는 엎치락뒤치락하며 중세까지 이어진다.
크세르크세스 대군의 예기치 않은 퇴각으로 그리스인은 짜릿한 희열을 맛보았다. 이 기념비적인 사건 이후 아테네는 페르시아와의 해전에서 그리스 해군 전체의 수장 역을 맡게 되었다. 이후 그리스 동맹군이 페르시아를 역습한다. 그리스의 강국 스파르타와 아테네 간의 날선 긴장관계 탓에 페르시아를 향한 복수는 생각만큼 쉽게 성공하지 못한다. 하지만 페르시아를 향한 그리스인의 분노 덕에 바다 건너 페르시아 원정에 필요한 병사를 그리스 도시에서 징집하고자 했던 알렉산드로스와 같은 정복자는 우레와 같은 전장의 함성을 들을 수 있었다. 소국 마케도니아의 왕이었던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 군사로 조직된 헬라스 동맹의 수장을 맡아 페르시아 침공에 나섰다. 그리고 약관의 청년 대왕에게 패한 다리우스 3세를 끝으로 전 세계에 맹위를 떨쳤던 아케메네스 왕조는 허망하게 먼지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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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주의와 민주정치가 서로 앙숙이라는 것이다

 

 

 

 

 

 

이슬람주의와 민주정치가 서로 앙숙이라는 것이 나의 분명한 결론이다. 이슬람세계에서는 민주정치가 전대미문의 문화적 개념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글로벌 민주화의 일환으로 민주정치가 성공적으로 도입될까? 그러려면 모든 문명이 일정에 따라 발전되는 제도적 및 문화적 근간이 필요하다. 서방세계의 문화 상대주의자들과 비서양인들은 민주정치가 보편성을 띤다는 주장에 대해 유럽이 꾸며낸 것이라며 이의를 제기했다. 유수프 알카라다위는 “세속 민주정치” 가 외부에서 도입된 해결책
(훌룰 무스타우라다)이라 하여 이슬람교가 배격해야 한다고 역설한 반면, 다른 이슬람주의자들은 반신반의하며 피상적으로 민주정치 흉내를 내고 있다.
이슬람주의자들이 세속 민주정치의 보편성과 샤리아질서에 기반을 둔 “이슬람교식 해결책” 의 화합을 모색하고 싶어 한다는 (혹은 그럴 수 있다는)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민주정치의 문명화된 근간이 이슬람세계에서는 모두 실종되었다. 현재 가동 중인 기관은 공포 문화 속에서 전 인구를 억압・감찰하는 비밀경찰이 있을 뿐이다. 이슬람주의자들이 박해를 일삼는 기관의 피해자라고 하지만 그들 역시 권력을 차지한다면 그 같은 체제를 계속 이어나갈 것이라는 점은 명약관화하다. 이를 입증하는 대표적인 증거로는 이슬람 공화국인 이란을 꼽을 수 있으며, 하마스가 장악한 가자지구와 AKP가 집권한 터키는 우리를 심란하게 만들고 있다.
이슬람주의자가 진심으로 사상을 바꾸어 민주정치를 정치 문화로 수용한다면 명실상부한 포스트이슬람주의자가 될 것이나, 그러려면 그들이 정치적・종교적 신념의 핵심을 포기해야 한다. 정치적 이슬람교의 중심 신조—즉 정교일치를 비롯하여 코란에는 존재하지 않는 “샤리아국가 개념,” 그리고 지하디스트의 정치적 수단인 “이슬람세계의 혁명” 이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룬 정체성을 둘러싼 신념— 는 민주정치의 사상・정치 문화와 분쟁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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