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대륙의 그리스, 로마 VS 아시아의 페르시아

 

 

 

 

 

대제국을 건설한 페르시아인이 호전적이었다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하지만 정복의 과정이 그러했을 뿐 영리한 키루스 2세는 관대한 지배자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유연한 국정운영능력을 과시했다. 키루스는 파괴되거나 손상된 도시를 복원하고, 피지배국의 숭배문화를 존중하는 관대한 왕으로 스스로를 포장했다. 마르두크 신전의 부흥과 함께 바빌론에서 싹튼 우상숭배문화 말이다. 마르두크 신전 터에서 발견된 점토판에는 “모든 땅의 왕, 키루스는 에사길라 신전에 애정을 보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키루스 2세의 의욕 넘치는 후임자들인 캄비세스 2세와 다리우스 1세의 치세기에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아라비아 땅을 빼면 이집트와 북서부 인도를 포함하는 서아시아 대부분이 페르시아 제국의 땅이었다. 특히 다리우스 1세의 영토확장의 야심은 멈출 줄을 몰랐다. 기원전 490년에 소아시아의 식민지 그리스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아테네와 에레트리아가 이 반란군에 원군을 보냈다. 이 “서쪽의 야만인”을 척결하기로 결심한 다리우스는 그리스 정벌에 나선다. 사실 다리우스가 유럽 대륙을 향한 야욕을 공공연하게 드러낸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다리우스의 페르시아 함대는 이미 기원전 513년 스키타이 원정길에 지중해 해안을 따라 이탈리아까지 정찰을 마치고 돌아왔다. 기원전 480년에 다리우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리스 원정길에 오른다. 세계 최대의 제국 페르시아의 자존심이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인에게 패퇴했다는 사실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크세르크세스는 부왕이 트라키아에 지어놓은 왕궁에서 자신의 군대를 사열하기도 했다. 언젠가 그리스인을 두 발 아래 무릎 꿇리고야 말겠다던 다리우스의 결심은 그의 자손에게 전해졌다. 유럽과 아시아의 혈투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두 대륙의 피비린내 나는 힘겨루기는 엎치락뒤치락하며 중세까지 이어진다.
크세르크세스 대군의 예기치 않은 퇴각으로 그리스인은 짜릿한 희열을 맛보았다. 이 기념비적인 사건 이후 아테네는 페르시아와의 해전에서 그리스 해군 전체의 수장 역을 맡게 되었다. 이후 그리스 동맹군이 페르시아를 역습한다. 그리스의 강국 스파르타와 아테네 간의 날선 긴장관계 탓에 페르시아를 향한 복수는 생각만큼 쉽게 성공하지 못한다. 하지만 페르시아를 향한 그리스인의 분노 덕에 바다 건너 페르시아 원정에 필요한 병사를 그리스 도시에서 징집하고자 했던 알렉산드로스와 같은 정복자는 우레와 같은 전장의 함성을 들을 수 있었다. 소국 마케도니아의 왕이었던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 군사로 조직된 헬라스 동맹의 수장을 맡아 페르시아 침공에 나섰다. 그리고 약관의 청년 대왕에게 패한 다리우스 3세를 끝으로 전 세계에 맹위를 떨쳤던 아케메네스 왕조는 허망하게 먼지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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