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방 자살. 베르테르 효과


 

 

 

 

자살의 전염성은 소셜 네트워크의 파괴적 위력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자살의 원인은 많지만, 단지 다른 사람이 하니까 자기도 따라 죽겠다는 생각은 합리적 설명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자살이 순전히 개인적 행동이라는 개념에 의문을 품게 합니다.

연쇄 자살은 전 세계에서 모든 종류의 공동체에서 나타나며, 그 사례는 먼 옛날부터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일부 집단 자살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으로 보이지만, 많은 연쇄 자살들은 전염과정을 포함하고 있으며, 우연이나 교란 요인, 동류 선호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1974년에 사회학자 데이비드 필립스David Phillips가 자살의 전염성에 관한 고전적 연구를 발표했습니다. 필립스는 1947년부터 1968년까지 자살에 관한 기사가 『뉴욕타임스』에 일면으로 실린 달에는 전국적으로 자살 발생 건수가 증가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필립스는 이 현상을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1774년에 쓴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따와 ‘베르테르 효과’라고 명명했습니다. 이 소설을 읽은 일부 젊은 남성들이 주인공과 같은 방식으로 자살을 하는 바람에 이탈리아와 독일, 덴마크에서 이 소설의 출판과 판매를 금지하기까지 했습니다.

연쇄 자살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나 『뉴욕타임스』의 일면 기사처럼 매체의 전염을 통해 작용하는 것과 자살한 사람과 연결된 사람들 사이에 직접적인 전염을 통해 작용하는 것이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빈은 1978년에 지하철이 개통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이 교통수단을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달리는 전동차에 몸을 던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언론 매체는 자살 소식을 생생하게 전했고, 자살 시도는 1년에 약 40건에 이르렀습니다. 빈의 정신과 의사들은 이 사태에 관심을 갖고 기자들과 함께 행동에 나섰습니다. 1987년부터 자살 사건 보도에 변화가 일어났으며, 그 후 자살 시도는 즉각 연간 6건 정도로 줄었습니다.

뉴스에서 인명과 지명을 가명으로 쓰고 실제 사건과는 관계가 없다는 걸 밝힌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이고 동정심을 유발하는 요소를 모두 뺀 것입니다.

1974년에 필립스의 논문이 나온 후 자살 분석은 그 정밀성이 크게 높아져, 국지적인 연쇄 자살 사건과 직접적 전염으로 일어난 연쇄 사건에 초점을 맞출 정도로 지리적 범위를 좁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집단 심인성 질환MPI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연쇄 자살은 긴밀하게 연결된 학교나 작은 공동체에 특히 큰 책임이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게다가 자살의 전염은 대부분 청소년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24세가 넘은 어른은 아는 사람이 자살하거나 신문에서 관련 기사를 읽었다고 해서 자기도 따라 자살할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삶의 많은 영역에서는 친구들에게 영향을 받고 모방하기 쉬운 십대 청소년은 문제가 다릅니다. 『행복은 전염된다 Connected』(2010)의 저자는 당사자의 나이와 감수성 사이의 연관 관계가 네트워크에서 노드의 속성이 어떤 현상의 흐름을 결정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연쇄 자살 사건을 가장 최근에 조사한 연구는 네트워크 방법과 대규모 자료를 결합하여 직접적 전염을 더욱 자세히 조사해 확인했습니다. 미국 청소년 건강연구에서 청소년 1만346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자살한 친구가 있는 사람은 자살을 생각하는 비율이 더 높았습니다. 전해에 자살한 친구가 있는 소년은 그렇지 않은 소년보다 자살을 생각하는 비율이 3배나 높았고, 실제로 자살을 시도한 비율도 2배나 높았습니다. 자살한 친구가 있는 소녀는 그렇지 않은 소녀보다 자살을 생각하는 비율이 2.5배나 높았으며, 실제로 자살을 시도한 비율도 2배나 높았습니다.

자살의 전염성이 성인에게서 전혀 볼 수 없는 현상은 아닙니다. 1990년대 스톡홀름 주민 120만 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자살한 직장 동료가 있는 남성은 그렇지 않은 남성보다 자살을 하는 비율이 3.5배나 높았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비교적 작은 회사에서만 동료들 사이에 전파되는 것으로 밝혀진 비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의 자살이 다른 사람들의 자살 위험을 높이는 경향은 직원 수가 100명 미만인 회사에서만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큰 회사보다는 작은 회사에서는 직장 동료들이 자살 희생자와 실제적 연결 관계로 이어져 있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에서는 실제로 자살 전염병이 광범위하게 번졌습니다. 1997년의 조사에서 미국 청소년 중 13%가 전해에 자살을 심각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고 응답했으며, 실제로 4%는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게다가 20%는 전해에 자살을 시도한 친구가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1950년부터 1990년까지 15-24세의 미국인 중 자살률은 10만 명당 4.5명에서 13.5명으로 증가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같은 기간에 픽션 속에서도 자살 전염병이 번졌다는 사실입니다.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인 IMDB.com에서 영화 내용을 분석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자살을 묘사한 영화 비율이 1950년대에 1%이던 것이 1990년대에는 8% 이상으로 증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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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렌페스트는 1933년에 암스테르담에서 자살했다


 

 

 

 

그날 저녁 에렌페스트를 만난 보어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다음날 밤을 꼬박 세운 보어는 드디어 아인슈타인의 논리에서 작은 오류를 발견했다. 질량과 에너지는 등가이므로 광자를 방출한 상자는 무게가 조금 가벼워진다. 아인슈타인의 중력이론에 따르면 에너지는 무게를 갖고 있으므로 에너지를 방출한 상자는 중력장 아래서 아주 조금 위로 솟아오를 것이다(상자는 용수철에 매달려 있다). 그러나 이것은 광자에 대한 불확정성원리를 재확인하는 사례에 불과하다. 상자무게의 불확정성과 셔터 속도의 불확정성을 계산해보면 이 상자가 불확정성원리를 만족한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증명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보어는 아인슈타인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사용한 것이다. 이로써 보어는 세기적 논쟁의 승리자가 되었으며 아인슈타인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아인슈타인은 “신은 이 세계의 운명을 주사위로 결정하지 않는다 God does not play dice with the world”면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이 말을 전해들은 보어는 “제발 신 타령 좀 그만해라. 우리는 신학자가 아니라 물리학자다”라고 반박했다. 훗날 아인슈타인은 마침내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면서 말했다. “양자역학이 확고한 진리의 한 조각을 포함하는 이론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에 내재되어 있는 미묘한 역설을 이해하지 못하는 물리학자들을 끝까지 경멸했다. 그는 말했다. “요즘 물리학자들 사이에는 파격적인 생각을 펼치는 것이 무슨 유행처럼 퍼져있다. 그들은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것은 스스로를 기만하는 행위이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이 옳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거기에는 ‘진리를 근사적으로 서술하는 이론’이라는 단서가 붙어있었다. 일반상대성이론이 뉴턴의 고전역학을 붕괴시키지 않고 일반화시킨 것처럼 그는 양자역학을 포함하면서 더욱 일반적이며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통일장이론을 완성하기로 결심했다.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 그리고 보어와 하이젠베르크가 각각 한편이 되어 물리학계를 뜨겁게 달궜던 논쟁은 지금까지도 세간에 회자될 정도로 유명한 사건이었다. 그때 아인슈타인이 제기한 사고실험은 그동안 실험기술이 발달한 덕분에 실험실에서 직접 실행할 수 있게 되었다. 최근 들어 60개의 탄소원자로 이루어진 버키볼Buckyball(플러린fullerene을 구성하는 공 모양의 분자. 나노Nano 기술의 선구자로 미국 라이스 대학의 리처드 스몰리Richard E. Smalley(1943~2008) 교수는 탄소 형태의 버키볼을 발견한 공로로 1996년 노벨화학상을 공동수상했다)을 이용하여 놀라운 실험을 수행함으로써 보어가 말했던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를 나누는 벽’의 개념은 완전히 폐기되었다. 실험물리학자들은 수천 개의 원자로 이루어진 바이러스가 동시에 두 장소에 존재하려면 어떤 조건이 만족되어야 하는지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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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과 보어의 논쟁


 

 

 

 

1930년에 개최된 솔베이 물리학회에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 사이에 세기적 논쟁이 시작되었다. 존 훗날 휠러는 이 사건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논쟁이었다고 회고했다. 하나의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을 제안하면서 양자역학을 향한 포문을 연 사람은 아인슈타인이었고,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 보어는 아인슈타인이 공격할 때마다 휘청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학회가 진행되는 동안 아인슈타인은 매일 아침 잭인더박스jack-in-the-box(상자의 뚜껑을 열면 인형이 튀어나오는 장난감)처럼 뻘떡 일어나서 다음 반론을 펴곤 했다. 마침내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마지막 실험을 제안했다. 광자기체(여러 개의 광자)가 담겨 있는 상자를 예로 들면 상자에는 조그만 셔터가 달려 있어 이것을 열 때마다 광자 하나가 바깥으로 탈출하고, 우리는 셔터가 움직이는 속도와 광자의 에너지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으므로 광자의 물리적 상태를 아무런 오차 없이 결정할 수 있다. 이 경우에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원리가 통하지 않는다.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난 네덜란드의 이론물리학자로 상대성이론, 기체론, 양자이론 등 이론물리학의 여러 분야에서 활약했으며, 특히 보어의 초기 양자이론에서 원자 내 전자의 정상상태를 결정하는 양자조건의 기초가 된 단열불변량adiabatic potential(斷熱不變量, 양자역학적으로 분자를 볼 때 무거운 원자핵의 속도가 전자의 속도보다 훨씬 느리므로 원자핵이 정지해있다고 가정하는 것을 단열근사라 하는데, 이때 원자핵과 전자 사이 거리의 관계로 나타낸 전자의 에너지를 가리킨다)에 관해 연구한 폴 에렌페스트Paul Ehrenfest(1880~1933)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아인슈타인이 제안한 마지막 사고실험은 보어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습니다. 보어는 그 자리에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날 저녁 보어는 침통한 표정으로 여러 학자들을 찾아다니면서 하소연하듯 말했습니다. ‘만약 아인슈타인이 옳다면 물리학은 여기서 끝장입니다. 그의 논리는 어딘가 분명 틀렸을 것입니다. 반드시 그래야만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인슈타인의 논리에는 잘못된 구석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그 두 사람이 회의장을 떠나는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역시 거장답게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유유히 걸어 나갔으며 보어는 몹시 격앙된 표정으로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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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루이 다비드의 <적선을 받는 벨리사리우스>

 

 

 



 

 

 

다비드는 1780년 7월 17일 로마를 출발해 9월 말 파리에 도착했다. 그는 우선 아카데미 회원이 되기를 바랐는데, 회원에게는 궁정의 프로젝트를 맡을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며 루브르에서 매 2년마다 개최되는 유일한 대규모 전시회인 살롱전에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아카데미 회원이 되려면 심사위원들로부터 작품을 심사받아야 하고 그들이 인정해줄 경우 준회원으로 받아들여진다. 준회원이 되면 아카데미가 요구하는 주제의 그림을 그려야 하고 그 작품이 심사를 통과할 경우 비로소 정회원이 된다. 다비드는 <성 로츠>59와 로마에서 그린 그 밖의 작품들에 대한 심사를 원했지만 궁정화가이자 아카데미 원장인 장-밥티스트 피에르64는 그 작품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파리에서 제작한 작품을 제출하라고 했다. 아카데미의 독선에 대한 다비드의 불신과 혐오는 이때 증폭되었다. 피에르는 때로 다비드에게 호의적으로 대했지만 두 사람은 결국 서로를 증오하게 된다.

 

 



69

 

다비드는 1781년 고대사에서 주제를 구해 새로운 작품을 제작했는데 <적선을 받는 벨리사리우스>68가 그 중 하나이다. 벨리사리우스는 비잔틴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때 충성을 다하며 용맹을 떨친 장군이었다. 그는 반달족, 고트족, 그리고 불가리아인의 침략을 막아냈지만 정치적 책략에 연루되어 황제의 버림을 받고 거지가 되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그의 두 눈이 뽑혔다고도 한다. 1767년 장 프랑수아 마르몽텔이 쓴 소설로 그의 이야기는 더욱 알려졌다. 다비드는 1779년 로마에서 페이롱으로부터 마르몽텔의 소설을 받아서 읽고 이 작품을 그리게 되었다. 다비드는 반 다이크가 그린 벨리사리우스 장군의 작품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했는데, 17세기 제노바 화가 루치아노 보르조네의 작품을 그가 반 다이크의 작품으로 착각했던 것이다.69

 

다비드가 1779년 펜으로 드로잉한 것70과 2년 후 유채로 그린 것68이 구성에 있어 동일해 처음부터 건물은 수직으로, 인물들은 수평으로 구성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과거 벨리사리우스를 섬긴 군인을 삽입한 것은 보르조네의 작품을 인용한 것이지만 여인의 적선을 청하는 장면은 다비드의 창작이다. 벨리사리우스를 주제로 그리는 것은 당시의 유행이었으며 당대 다비드와 대적할 만한 페이롱과 프랑수아 앙드레 빈센트 또한 그를 주제로 그렸다.

 

페이롱의 작품66에서 벨리사리우스는 과거 자신의 보호를 받던 농부들로부터 존경 받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빈센트의 작품71에서는 벨리사리우스가 유스티니아누스의 군인으로부터 적선 받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어, 과거 장군으로서의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두 사람에 비하면 다비드의 작품이 훨씬 극적이며 관람자에게 감동을 주고 그림의 크기도 두 사람 것의 일곱 배가 넘는다.

 

다비드는 하단 왼쪽에 라틴어로 ‘L. DAVID FACIEBAT ANNO 1781 LUTE-TIAE(다비드가 이것을 파리에서 1781년에 제작하다)’라고 적었다. 파리의 고대 명칭이 루테티아Lutetia였다.

 

다비드는 이 작품을 다른 작품과 함께 1781년 8월 24일 아카데미에 출품했다. 심사위원들은 만장일치로 그를 준회원으로 받아들였고 그의 작품은 살롱전에 전시할 수 있게 되었다. 8월 25일부터 한 달 동안 개최된 살롱전에서 <적선을 받는 벨리사리우스>68는 인기 있는 작품이었다. 디드로는 적었다.

 


 

매일 이것을 보지만 볼 때마다 처음 보는 느낌이다. 이 젊은이는 웅대한 방법으로 작업하며, 그에게는 혼이 있고, 얼굴은 꾸밈이 없으며, 태도에 있어서는 고상하고 자연스러우며, 드로잉을 할 줄 알고, 주름진 휘장과 접힌 부분을 처리할 줄 알며, 색은 번쩍이지 않고 훌륭하다.

 

 

하지만 이 작품이 살롱전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영예는 <프란시스 1세의 팔에 안겨 죽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72에게 돌아갔는데 다비드와 함께 비엥의 아틀리에에서 수학한 적이 있는 프랑수아 기욤 메나지오의 작품이다. 양식의 발달이란 측면에서 보면 다비드의 작품에 못미치지만 프랑스 왕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을 좋아하고 그에게 존경을 표하고 있었기 때문에 메나지오가 영예를 차지할 수 있었다. 여하튼 다비드는 <적선을 받는 벨리사리우스>로 파리 화단에 화려하게 데뷔한 셈이다.

 

그는 1780년 제자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는데 이는 수입을 늘이는 방법인 동시에 그들을 조수로 부릴 수 있기 때문에 일거양득이었다. 18세기까지만 해도 콜렉터들은 화가에게 원작을 다시 그려줄 것을 주문했고 때로는 크기를 달리 해서 그려달라고도 했으므로 이런 작업은 조수들과 함께 하는 것이 상례였다. 1781년의 살롱전을 계기로 다비드는 이듬해 루브르 내에 아틀리에를 갖게 되었으며 이는 그가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했다. 다비드에게 수학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 제자의 수가 부쩍 늘었다. 그의 영향 아래 그림을 그린 제자들 중에 장 제르맹 드루아, 앤 루이 지로드, 프랑수아 사비에르 파브르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다비드는 1782년 5월 16일 루브르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성 제르맹 오세로아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마거리트 샤로테를 신부로 맞았다. 당시 그는 경제적으로 부족한 편은 아니었지만 신부가 많은 지참금을 가져왔으므로 전에 누리지 못했던 부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결혼한 지 9개월 만에 첫 아들 샤를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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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터무니없는 존재


 

 

 

 

과학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이론으로 꼽히는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원자, 분자 및 빛 등의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뉴턴의 운동법칙이나 맥스웰의 전자기법칙과 같은 고전이론들을 대신하는 새로운 운동법칙이 발견되어 체계를 이룬 역학이다. 양자역학에서는 운동상태를 양자적 상태라고 말하며, 이런 양자상태는 원자와 같은 미시적 세계에서는 깨달을 수 없다)의 절정에는 표준모형standard model이 자리 잡고 있다. 표준모형은 원자규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이론이다.



양자역학은 그 체계가 아직 불완전한데다가 철학적 기초도 그리 탄탄하지 않다. 양자적 논쟁에 몰입하다보면 18세기 영국계 아일랜드의 성공회 주교, 철학자, 과학자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1685~1753, 정신적인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은 감각기관에 의해 지각되는 경우에만 존재한다고 주장한 경험론 철학으로 유명하다)의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그는 모든 사물이 존재하는 것은 그것을 봐주는 관측자가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관점을 유아론solipsism(唯我論, 인식론적으로 극단적인 형태의 주관적 관념론) 혹은 관념론idealism(개요 경험을 해석할 때 관념적인 것, 혹은 정신적인 것이 중심역할을 한다고 강조하는 견해)이라고 한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숲속에서 홀로 쓰러지는 나무는 진정으로 쓰러진 것이 아니다.



리처드 파인만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철학적 난점을 비교했다. “과거에는 상대성이론을 이해하는 학자가 전 세계에 12명뿐이라고 말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더라도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주장도 있다. 그는 말했다. “양자역학은 상식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정말 터무니없는 방식으로 자연을 서술하고 있으며, 그 모든 것은 실험결과와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이라는 것 자체가 원래부터 터무니없는 존재였음을 사실로 인정해야 한다.” 양자역학의 등장으로 사람들은 관측자와 관측행위를 분리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막스 플랑크는 말했다. “과학은 자연의 궁극적 신비를 결코 풀지 못할 것이다. 자연을 탐구하다보면 자연의 일부인 자기 자신을 탐구해야 할 때가 반드시 찾아오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후원자가 되어 그를 베를린으로 유치한 막스 플랑크는 인생이나 물리학에서 지극히 보수적이었다는 점에서 아인슈타인과 대비되지만 나치가 집권하기 전까지 두 사람은 따뜻하고 성실한 관계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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