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루이 다비드의 <적선을 받는 벨리사리우스>

 

 

 



 

 

 

다비드는 1780년 7월 17일 로마를 출발해 9월 말 파리에 도착했다. 그는 우선 아카데미 회원이 되기를 바랐는데, 회원에게는 궁정의 프로젝트를 맡을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며 루브르에서 매 2년마다 개최되는 유일한 대규모 전시회인 살롱전에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아카데미 회원이 되려면 심사위원들로부터 작품을 심사받아야 하고 그들이 인정해줄 경우 준회원으로 받아들여진다. 준회원이 되면 아카데미가 요구하는 주제의 그림을 그려야 하고 그 작품이 심사를 통과할 경우 비로소 정회원이 된다. 다비드는 <성 로츠>59와 로마에서 그린 그 밖의 작품들에 대한 심사를 원했지만 궁정화가이자 아카데미 원장인 장-밥티스트 피에르64는 그 작품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파리에서 제작한 작품을 제출하라고 했다. 아카데미의 독선에 대한 다비드의 불신과 혐오는 이때 증폭되었다. 피에르는 때로 다비드에게 호의적으로 대했지만 두 사람은 결국 서로를 증오하게 된다.

 

 



69

 

다비드는 1781년 고대사에서 주제를 구해 새로운 작품을 제작했는데 <적선을 받는 벨리사리우스>68가 그 중 하나이다. 벨리사리우스는 비잔틴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때 충성을 다하며 용맹을 떨친 장군이었다. 그는 반달족, 고트족, 그리고 불가리아인의 침략을 막아냈지만 정치적 책략에 연루되어 황제의 버림을 받고 거지가 되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그의 두 눈이 뽑혔다고도 한다. 1767년 장 프랑수아 마르몽텔이 쓴 소설로 그의 이야기는 더욱 알려졌다. 다비드는 1779년 로마에서 페이롱으로부터 마르몽텔의 소설을 받아서 읽고 이 작품을 그리게 되었다. 다비드는 반 다이크가 그린 벨리사리우스 장군의 작품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했는데, 17세기 제노바 화가 루치아노 보르조네의 작품을 그가 반 다이크의 작품으로 착각했던 것이다.69

 

다비드가 1779년 펜으로 드로잉한 것70과 2년 후 유채로 그린 것68이 구성에 있어 동일해 처음부터 건물은 수직으로, 인물들은 수평으로 구성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과거 벨리사리우스를 섬긴 군인을 삽입한 것은 보르조네의 작품을 인용한 것이지만 여인의 적선을 청하는 장면은 다비드의 창작이다. 벨리사리우스를 주제로 그리는 것은 당시의 유행이었으며 당대 다비드와 대적할 만한 페이롱과 프랑수아 앙드레 빈센트 또한 그를 주제로 그렸다.

 

페이롱의 작품66에서 벨리사리우스는 과거 자신의 보호를 받던 농부들로부터 존경 받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빈센트의 작품71에서는 벨리사리우스가 유스티니아누스의 군인으로부터 적선 받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어, 과거 장군으로서의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두 사람에 비하면 다비드의 작품이 훨씬 극적이며 관람자에게 감동을 주고 그림의 크기도 두 사람 것의 일곱 배가 넘는다.

 

다비드는 하단 왼쪽에 라틴어로 ‘L. DAVID FACIEBAT ANNO 1781 LUTE-TIAE(다비드가 이것을 파리에서 1781년에 제작하다)’라고 적었다. 파리의 고대 명칭이 루테티아Lutetia였다.

 

다비드는 이 작품을 다른 작품과 함께 1781년 8월 24일 아카데미에 출품했다. 심사위원들은 만장일치로 그를 준회원으로 받아들였고 그의 작품은 살롱전에 전시할 수 있게 되었다. 8월 25일부터 한 달 동안 개최된 살롱전에서 <적선을 받는 벨리사리우스>68는 인기 있는 작품이었다. 디드로는 적었다.

 


 

매일 이것을 보지만 볼 때마다 처음 보는 느낌이다. 이 젊은이는 웅대한 방법으로 작업하며, 그에게는 혼이 있고, 얼굴은 꾸밈이 없으며, 태도에 있어서는 고상하고 자연스러우며, 드로잉을 할 줄 알고, 주름진 휘장과 접힌 부분을 처리할 줄 알며, 색은 번쩍이지 않고 훌륭하다.

 

 

하지만 이 작품이 살롱전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영예는 <프란시스 1세의 팔에 안겨 죽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72에게 돌아갔는데 다비드와 함께 비엥의 아틀리에에서 수학한 적이 있는 프랑수아 기욤 메나지오의 작품이다. 양식의 발달이란 측면에서 보면 다비드의 작품에 못미치지만 프랑스 왕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을 좋아하고 그에게 존경을 표하고 있었기 때문에 메나지오가 영예를 차지할 수 있었다. 여하튼 다비드는 <적선을 받는 벨리사리우스>로 파리 화단에 화려하게 데뷔한 셈이다.

 

그는 1780년 제자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는데 이는 수입을 늘이는 방법인 동시에 그들을 조수로 부릴 수 있기 때문에 일거양득이었다. 18세기까지만 해도 콜렉터들은 화가에게 원작을 다시 그려줄 것을 주문했고 때로는 크기를 달리 해서 그려달라고도 했으므로 이런 작업은 조수들과 함께 하는 것이 상례였다. 1781년의 살롱전을 계기로 다비드는 이듬해 루브르 내에 아틀리에를 갖게 되었으며 이는 그가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했다. 다비드에게 수학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 제자의 수가 부쩍 늘었다. 그의 영향 아래 그림을 그린 제자들 중에 장 제르맹 드루아, 앤 루이 지로드, 프랑수아 사비에르 파브르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다비드는 1782년 5월 16일 루브르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성 제르맹 오세로아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마거리트 샤로테를 신부로 맞았다. 당시 그는 경제적으로 부족한 편은 아니었지만 신부가 많은 지참금을 가져왔으므로 전에 누리지 못했던 부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결혼한 지 9개월 만에 첫 아들 샤를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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