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루이 다비드의 <호라티우스의 맹세>



 



 

 

 

다비드는 1782년 정부로부터 호라티우스 삼형제에 관한 그림을 의뢰받고작품에 대한 자료를 제출했다. 이들 삼형제는 기원전 7세기의 로마 왕국 사람들이다. 로마 왕국이 이웃의 알바 왕국과 영토문제로 분쟁하던 중 두 왕국은 각각 세 용사를 뽑아 싸우게 해 분쟁을 해소하기로 합의했다. 호라티우스 형제 중 하나는 알바의 쿠리아티가의 딸 사비나와 결혼한 몸이었고 알바의 삼형제 중 하나는 호라티우스가의 딸 카밀라와 결혼한 몸이었다. 어느 편이 이겨도 두 집안에는 비극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호라티우스 형제가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카밀라는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큰오빠를 저주했고 오빠는 누이동생을 칼로 쳐서 죽였다. 장남은 살인죄로 기소되었는데 아버지가 변호해 아들의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조국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비극은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호라티우스와 쿠리아티 형제의 이야기는 회화의 주제로는 드문데 로마를 처음 방문했을 때 다비드는 궁정 뮤지엄에서 카발리에르 다르피노가 1612년 두 집안 사이의 싸움을 그린 프레스코를 본 적이 있었다.

다비드는 1781년부터 이 이야기를 주제로 드로잉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호라티우스 형제가 승리를 거두고 로마로 돌아와 카밀라를 살해하는 장면78을 그렸지만 1782년 2월 공식으로 제출한 드로잉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변호하는 장면79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바꿔서 공식적으로 제출한 드로잉대로 그리지 않기로 했는데, 변호하는 장면에 행위가 수반되지 않아 시각적으로 두드러져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자신이 상상한 이미지를 극적으로 구성했다. 호라티우스 삼형제가 조국를 위해 전투에 임하기 전 아버지 앞에서 맹세하는 구국의 정신과 용사로서의 결연한 자세를 묘사하기로 한 것이다. 다비드는 자크-앙트완 비포르80와 개빈 해밀턴81의 <브루투스의 맹세>를 자신의 작품에 응용한 것 같다.

1784년 4월 27일 다비드의 둘째 아들 외젠이 태어났고 그해는 다비드의 제자 장-제르맹 드루아가 로마대상을 수상한 해이기도 했다. 제자가 이 영예로운 상을 수상한 것은 처음 있는 일로 다비드의 위상은 한층 높아졌고, 다른 대가들 문하의 화가지망생들이 다비드의 문하로 몰려와 제자의 수가 40명에 이르렀으며, 자연스럽게 다비드 학파가 생기게 되었다. 그해 9월 드루아가 로마로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다비드가 동행했다. 로마로 가는 것이 제자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하다며 드루아를 가르치는 가운데 자신도 배우는 게 있다고 한 그의 말에서 드루아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10월 8일 로마에 도착한 다비드는 작업실을 빌리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실제 모델을 그렸으며, 마네킹에 옷을 걸쳐놓고 옷에서 생기는 주름을 정교하게 묘사하기도 했다. 이때의 드로잉들이 현존하며 호라티우스 삼형제를 드로잉한 것도 있다.77 그는 근처에 있는 장인에게서 칼과 투구 등 필요한 소품들을 구입해 오브제로 사용했다. 그는 만족할 때까지 동일한 오브제를 드로잉했는데 호라티우스 맏형의 왼쪽 다리는 스무 번의 드로잉 끝에 만족할 만하게 그릴 수 있었다. 드루아는 스승을 도와 그림의 뒷배경과 사비나의 노란 의상을 그렸다. 그는 스승에게 영웅들의 누드를 그리라고 권유했지만 다비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호라티우스의 맹세>8를 완성한 것은 1785년 7월 말이었지만 작품에는 서명과 함께 ‘로마에서 1784년’이라고 그린 장소와 날짜를 적었다. 그는 이 작품과 <적선을 받는 벨리사리우스>67를 아틀리에에서 공개했고 일간지와 언론이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많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그의 작품들을 보러 왔다. 노화가 폼페오 바토니는 다비드에게 그의 재능을 인정해주는 로마에 머물 것을 청하면서 “자네와 나만이 화가일 뿐 나머지들은 강물에 던져질 놈들이네”라고 했다. 바토니는 1787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이 사용하던 붓과 팔레트를 존경의 표시로 다비드에게 남겼다.

다비드는 <호라티우스의 맹세>를 파리에 있는 친구에게 보내면서 그해 1785년 살롱전에 출품시키고 좋은 자리에 걸 것을 주문했다. 그는 편지에 “자네의 코미디가 제대로 공연되지 않으면 어떻겠나?”라는 말로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벽에 걸도록 당부했지만 이 작품은 살롱전이 이미 개최된 후에 도착하여 높은 벽에 걸렸다.85 그러나 <호라티우스의 맹세>는 살롱전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품이었고 다비드는 프랑스 화단에서 독보적 존재가 되었다. 사람들이 이 작품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모델을 사용해 그리면서 불필요한 요소들을 모두 제거하고 화면에 긴장감이 나타나도록 한 매우 새로운 양식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이해 살롱전에 출품한 페이롱의 <알세스티스의 죽음>65은 <호라티우스의 맹세>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1790년대에는 <호라티우스의 맹세>가 프랑스 혁명의 상징물로 이용되었지만 다비드가 정치적 의도를 갖고 그린 것은 아니었다. 이 작품이 그려질 때만 해도 혁명의 기운이 움트지 않았고 감히 전제군주를 전복시킬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할 수 없을 때였다. 1787년 10월, 로마 주재 프랑스 아카데미 책임자 자리가 공석이어서 다비드는 자신이 그 지위에 오르기를 희망했지만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부족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를 반대한 사람들은 그가 서른아홉 살도 채 되지 않는 데다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을 꼽으면서 새 책임자의 임기가 끝나는 6년 후에라면 다비드가 책임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카데미의 책임자는 훌륭한 교사이어야 하지만 또한 외교적 수완이 뛰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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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적 공간이동Quantum Teleportation


 

 

 

 

이론적으로 평행우주의 개념은 양자컴퓨터 이외에 양자적 공간이동에도 응용될 수 있다. 사람이나 물건을 순식간에 먼 거리로 전송하는 공간이동장치는 환상적 장비다. 그러나 공간이동은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원리에 위배되는 것처럼 보여 한동안 물리학자들이 관심을 두지 않았다. 원자의 복제품을 만들려면 그 원자를 관측해야 하는데, 관측행위 자체가 원자를 교란시키기 때문에 원본과 완전히 같은 원자를 만드는 것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일단의 과학자들이 1993년에 양자적 얽힘quantum entanglement의 현상을 연구하던 중 이 논리의 중요한 허점을 발견했다. 양자적 얽힘은 1935년에 아인슈타인Einstein과 그의 연구 동료였던 유대계 러시아의 물리학자 보리스 포돌스키Boris Podolsky(1896~1966) 그리고 유대계 미국의 물리학자 네이선 로젠Nathan Rosen(1909~95)이 양자역학의 한계를 지적하기 위해 제안한 역설적인 실험에서 유래했다. 이 물량의 측정문제를 제기한 정교한 사고실험을 세 사람의 이름의 앞 글자를 따서 EPR 역설EPR paradox이라고도 한다. 예를 들면 한 지점에서 폭발이 일어나 두 개의 전자가 거의 빛의 속도로 서로 반대방향으로 향해 날아간다고 가정할 경우, 전자는 팽이처럼 자전하며 두 전자의 스핀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가정하자. 즉 한 전자는 반시계방향으로 자전하고(이런 스핀을 업up이라고 한다), 다른 전자는 시계방향으로 자전한다(이런 스핀을 다운down이라고 한다). 이런 경우 두 전자의 총스핀은 0이다. 그러나 전자를 직접 관측하기 전에는 누구의 스핀이 up이고 누구의 스핀이 down인지 알 수 없다. 몇 년 뒤 두 전자의 거리가 몇 광년 단위로 벌어졌더라도 한 전자의 스핀을 관측하여 up이라는 결과를 얻게 되면 나머지 전자의 스핀을 볼 것도 없이 down으로 결정된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논리로 한 쌍의 전자 중 하나를 관측함으로써 불확정성원리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놀라운 것은 그의 논리가 전에는 모르고 있었던 양자역학의 기이한 특성을 적나라하게 그려냈다는 점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물리학자들은 우주가 국소적local이어서 우주의 한 부분을 교란시키면 그곳을 중심으로 영향이 파급되어나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이 근본적으로 비국소적nonlocal인 특성을 갖고 있으며, 한 곳에 가해진 교란은 다른 곳에 즉각적으로 영향을 미침을 증명했다. 그는 이를 원거리 유령작용spooky action-at-a-distance이라 칭하면서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결과로 치부했다. 이리하여 평소에 양자역학을 부정적으로 보았던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신념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양자역학을 부정하면 EPR 역설을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다. 즉 실험장비의 성능이 완벽하다면 전자들의 스핀방향을 사전에 결정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 된다. 이렇게 되면 전자의 스핀과 위치에 관한 불확정성은 실험장비의 불완전함에서 비롯된 일종의 환상인 셈이다. 아인슈타인을 지지하는 물리학자들은 “불확정성을 야기하지 않으면서 양자역학보다 더욱 근본적인 물리이론이 존재한다”고 믿었는데, 이것을 ‘숨은 변수이론 hidden variable theory’이라 한다.



물리학자 존 벨John Bell은 1964년에 EPR 역설을 실험적으로 확인하는 방법을 개발하여 학계를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는 EPR식 실험을 수행하면서 두 전자의 스핀 사이에 산술적 관계가 성립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중요한 점은 이 산술적 관계가 어떤 이론을 채택했느냐에 따라서 달리 나타난다는 것이다. 숨은 변수이론이 옳다면 두 전자의 스핀은 특정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했다. 벨의 실험결과에 따라 양자역학의 진위 여부가 결정되는 운명적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벨은 자신의 논리에 따라 정교한 실험을 수행했으며, 그 결과 양자역학의 승리로 끝났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3년 후, 프랑스의 물리학자 알랭 아스펙Alan Aspect과 그의 동료들은 칼슘원자에서 방출된 광자를 13m 간격으로 떨어져 있는 두 개의 감지기로 관측하여 벨의 실험결과를 재확인했으며, 1997년에는 11km 간격으로 설치된 감지기를 이용하여 동일한 실험이 실행되었는데, 이들 모두 양자역학이 옳다는 쪽으로 결론지어졌다. 어떤 특정한 형태의 정보는 빛보다 빠르게 전달되고 있었던 것이다.



벨은 이 결과를 베텔스만Bertelsman이라는 수학자의 경험담에 종종 비유하곤 했다. 베텔스만은 매일 아침마다 한쪽 발에는 초록색 양말을, 다른 쪽 발에는 푸른색 양말을 신고 나가는 버릇이 있었는데, 양말의 좌우관계는 때마다 무작위로 결정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러분이 그의 왼쪽 발에 푸른색 양말이 신겨져 있는 것을 목격했다면 여러분은 그의 오른쪽 발에 신겨있는 양말의 색상정보를 빛보다 빠르게 접수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아냈다고 해서 정보를 이런 식으로 교환할 수는 없다. 정보를 알아내는 것과 전송하는 것은 전혀 다른 행위이기 때문이다. EPR 실험(벨의 실험)이 빛보다 빠른 정보입수를 허용한다 해도 텔레파시를 빛보다 빠르게 전송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 스스로를 우주로부터 완전히 격리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기존의 우주관은 수정될 수밖에 없다. 우리의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원자와 우주 저편에 있는 원자들은 우주적으로 얽혀 있는 관계에 있다. 우주의 만물은 빅뱅이라는 하나의 사건으로부터 탄생했으므로 우리의 몸을 이루고 있는 원자들은 모종의 우주적 연결망cosmic web을 통해 우주 저편에 있는 원자들과 어떻게든지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양자적으로 얽혀 있는 입자들은 천문학적 거리에 걸쳐 일종의 탯줄(파동함수)로 연결되어 있는 쌍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중 한쪽에 어떤 일이 일어나면 다른 한쪽에 그 영향이 즉각적으로 전달되며, 한 입자에 관한 정보가 알려지면 다른 입자의 정보도 즉각적으로 알려진다. 양자적으로 얽혀 있는 한 쌍의 입자들은 그들 사이의 거리가 아무리 멀다 해도 하나의 물체처럼 행동한다.



물리학자들은 1993년에 EPR 얽힘을 이용해 양자적 공간이동장치를 이론적으로 고안했다. 그 후 1997년과 1998년에 칼텍과 덴마크 오르후스 대학Arahus University 그리고 웨일스 대학Wales University의 과학자들은 광자 하나를 책상 너머로 공간이동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실험 팀의 일원이었던 웨일스 대학의 사무엘 브라운스타인Samuel Braunstein은 양자적으로 얽힌 관계에 있는 입자들을 사랑하는 연인에 비유했다. “연인들은 서로 상대방을 잘 알고 있으므로 먼 거리에서 사랑을 보내도 금방 느낄 수 있다. 얽힌 관계에 있는 입자들도 이와 비슷하게 행동한다.”



양자적 공간이동 실험을 하려면 3개의 대상 A B C가 필요하다. 여기서 B와 C는 양자적으로 얽혀 있다. B와 C 사이를 아무리 벌려놓아도 이 관계는 변하지 않는다. 이런 조건에서 A와 B를 접촉시키면 A의 정보가 B로 옮겨가면서 멀리 있는 C도 동일한 정보를 획득하게 된다. 즉 C가 A의 복사본으로 변하는 것이다. 이것은 A가 C로 공간이동한 것과 동일한 결과이다.



양자적 공간이동 기술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2003년에 스위스 제네바의 과학자들은 광케이블을 이용하여 광자를 약 2km 거리까지 공간이동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파장이 1.3mm인 광자를 공간이동시켜 파장 1.55mm짜리 광자를 얻어냈는데, 이들 사이는 기다란 광케이블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 실험에 참여한 스위스 제네바 대학의 니콜라스 지생Nicolas Gisin은 “내가 죽기 전에 원자가 아닌 분자가 공간이동되는 광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커다란 물체를 이동시키는 것은 아직 불가능하다”고 했다.



2004년에는 미국표준기술연구소NIST(National Institute of Standards and Technology)의 과학자들이 원자 하나를 통째로 공간이동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3개의 베릴륨beryllium(녹주석 속에 들어있는 은백색의 금속원소로 야금술에서 경화제로, 그 밖의 많은 분야와 핵응용에 사용된다)원자를 양자적으로 얽히게 만든 후 한 원자의 특성을 다른 원자에 복사하여 전체적인 공간이동을 실현시켰다.



양자적 공간이동의 응용분야는 실로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기술적인 문제가 남아있다. 첫 번째 문제는 이동시키는 과정에서 원본에 해당하는 물체가 파괴되기 때문에 여러 개의 복사본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방법으로는 오로지 하나의 복사본만을 만들어낼 수 있다. 두 번째 양자적 공간이동에도 상대성이론이 적용되지 때문에 물체를 빛보다 빠르게 이동시킬 수 없다. 물체 A를 물체 C로 이동시키려면 이들을 연결하는 B라는 매개체를 통해야 하는데, B가 빛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이동과정도 빛보다 빠를 수 없다. 세 번째 문제는 양자컴퓨터가 직면했던 문제와 동일하다. 즉 공간이동과 관련된 모든 물체가 양자적 결맞음상태coherence state(두 개 이상의 상태에서 한 쪽의 위상phase을 알면 다른 상태의 위상 역시 알 수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주변 환경에 의해 교란되면 공간이동은 불가능해진다. 그러나 21세기가 끝나기 전에 인류는 바이러스를 통째로 공간이동시킬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을 공간이동시킬 때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브라운스타인은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인간의 몸에는 너무 많은 정보가 담겨있다. 현재 동원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정보전달수단을 사용하더라도 한 사람의 정보를 모두 전송하려면 거의 우주의 나이에 맞먹는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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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루이 다비드의 <헥토르의 죽음을 애도하는 안드로마케>



 



 

 

 

다비드는 1783년 8월 23일 <헥토르의 죽음을 애도하는 안드로마케>9를 제출하여 아카데미 정회원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이 작품은 살롱전을 통해 소개되었다. 이것은 『일리아드』의 한 장면으로 트로이 전쟁에서 아킬레우스에 의해 살해된 남편 헥토르의 시신 앞에서 애통해 하는 아내의 처절한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다. 아버지를 잃은 아스티아나스가 슬퍼하는 어머니를 위로하고 있는데, 아스티아나스의 나이가 다비드의 아버지가 결투로 세상을 떠났을 때의 다비드 나이쯤 된다. 남편을 잃은 여인과 아버지를 여읜 아이에서 자신과 어머니를 연상해서 그리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가 이 그림을 아홉 살에 아버지를 잃은 자신의 처지와 일치되게 그렸다고 추측하는 이유는, 빙켈만이 설명한 『일리아드』에서의 아스티아나스는 이 그림에 그려진 8-9세보다 어린 나이이기 때문이다. 다비드는 『일리아드』에서 안드로마케가 독백한 그리스어 첫 귀절을 오른쪽 큰 촛대에 적어 넣었다.

 



남편이여, 당신은 젊은 나이에 날 과부로 남기고 죽었구려. 당신과 내가 세상에 내놓은 우리의 아들은 불행하게도 아직 너무 어리다오.

 

다비드는 1783년의 살롱전에 이 작품 외에도 여섯 점을 더 출품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십자가의 그리스도>73이다. 이것은 매우 신실한 가톨릭 신자인 노아이유 부부를 위해 그린 것이다. 노아이유 부부는 다비드와 그 밖의 두 화가에게 카퓌시느 성당 내 가족 예배당을 위한 종교화를 의뢰했다. 다비드는 종교화를 그리는 것이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다고 판단하고 종교화로는 마지막작품이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특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지 못했으므로 군인을 모델로 그렸다. 노아이유 부인은 군인을 모델로 그렸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성스러움이 손상되었다고 다비드를 법정에 세웠다. 그러나 신성을 손상시켰다고 증명할 방법이 없어 유죄가 적용되지는 않았다. 노아이유 부부는 이 작품을 예배당에 걸지 않고 자신의 집에 장식했다. 혁명 후에 이 부부의 작품 대부분이 압수당했는데 흥미롭게도 노아이유 부인은 이 작품을 덮개로 가려 보존했다.

 

다비드는 1783년의 살롱전에 초상화 두 점도 함께 소개했는데 하나는 이모부 <자크-프랑수아 드마이송의 초상>18이고 다른 하나는 <알폰스 르로이의 초상>74이다. 르로이는 산부인과 의사로 1783년 초, 다비드의 첫 아들 샤를의 출산을 담당했던 사람이었다. 다비드는 르로이를 매우 지성적이며 세련된 용모를 갖춘 사람으로 묘사했지만 이는 그의 실제 모습과 많은 차이가 났다. 르로이는 성을 곧잘 냈고, 논란이 되는 의학적 견해를 고집했으며, 무능하고 태만했고, 결국 자신의 종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런 그를 다비드가 자신의 직업에 존엄성을 가진 계몽주의의 상징이 될 만한 인물로 만든 것이다. 이런 변형의 기교에서 말하면 다비드는 매우 훌륭한 초상화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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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우주이론Multiverse Theory


 

 

 

 

존 휠러의 제자이며 이론물리학자 휴 에버렛 3세Hugh Everett III(1930~82)는 죽은 고양이와 살아 있는 고양이가 서로 다른 우주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가설을 도입하여 선택과 관련된 문제를 우회적으로 해결했다. 에버렛은 다중우주이론을 주제로 하여 1957년에 박사학위논문을 제출했으나 당시만 해도 그런 황당한 이론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지금은 양자역학의 역설을 해결해줄 가장 강력한 후보로 인정받고 있다. 다중우주란 다양한 가능성이 있는 우주들을 말한다. 평행우주와 같은 의미이다.



에버렛의 다중우주해석에 따르면 고양이가 들어 있는 상자의 뚜껑을 여는 순간에 우주는 두 갈래로 갈라져서 진행된다. 이것들 중 하나의 우주에서 고양이는 살아 있고 다른 우주의 고양이는 죽은 채로 존재한다. 고양이뿐만 아니라 임의의 관측이 행해질 때마다 양자적 분기점이 형성되면서 우주는 끊임없이 갈라진다.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으면 그 사건이 발생하는 우주가 반드시 존재하며, 이 모든 우주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만큼 현실적이다. 각 우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우주가 유일한 현실이라고 믿으면서 다른 우주를 상상이나 허구의 세계로 간주한다. 그러나 모든 평행우주들parallel universes은 결코 환영이 아니며, 거기 속해 있는 모든 물체는 지금 우리가 보고 느끼는 물체들처럼 구체적이고 확고한 실체로 존재한다.



다중우주해석의 장점은 양자역학의 세 번째 가정, 즉 파동함수wave function(양자역학에서 물자입자인 전자・양성자・중성자 등의 상태를 나타내는 양을 말하는 기초방정식이다. 근본이 되는 슈뢰딩거의 방정식Schrodinger equation은 파동함수의 시간적, 공간적 변화를 기술하는 것으로 뉴턴역학Newtonian mechanics에서의 운동방정식equation of motion과 비슷한 구실을 양자역학에서 하고 있지만, 그 수학적 해인 파동함수에서 유도되는 지식은 확률적 성격을 지니며 뉴턴의 운동방정식의 결정론적 성격과는 이질적 특징을 나타낸다)의 붕괴를 도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중우주에서 파동함수는 붕괴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파동함수로 분리되면서 영원히 계속된다. 파동함수는 마치 거대한 나무처럼 관측이 행해지는 순간마다 가지를 쳐나가고, 각 가지의 끝에는 하나의 완전한 우주가 대응된다. 이것은 파동함수의 붕괴를 주장하는 코펜하겐학파의 해석보다 훨씬 단순하고 명확하다. 수백, 수천만 갈래로 갈라지는 우주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관측과 파동함수의 붕괴라는 골치 아픈 문제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다중우주가 존재한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몸은 다른 우주에 다른 상태로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다른 우주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곳에 있는 우리와 상호작용을 주고받을 수 없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우주들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양자역학의 해석은 공상과학소설처럼 우리의 흥미를 자극하지만 현실로 받아들이기에는 황당한 구석이 있다. 평행우주는 모두 비슷하게 생겼지만 함유하는 에너지의 양이 각기 다르다. 각각의 우주는 무수히 많은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에너지의 차이도 매우 클 것이다. 그런데 파동의 에너지는 파동의 진동수에 비례하므로(플랑크의 법칙Planck's law), 각 우주를 나타내는 파동은 진동수가 서로 달라서 상호작용을 하지 않으며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도 없다.



놀랍게도 과학자들은 이 희한한 우주관을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이용해 코펜하겐학파가 얻은 결과를 고스란히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이것은 파동함수의 붕괴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이룬 쾌거였다. 코펜하겐학파의 실험결과와 다중우주를 가정하고 행해진 실험결과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은 다중우주이론이 현실세계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보어가 제안했던 파동함수의 붕괴는 주변 환경에 의한 교란과 수학적으로 동등한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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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이야기: 폭탄Bomb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공식 E=mc2에 의해 원자 속에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으나 대다수의 물리학자들은 이 에너지를 꺼내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원자핵을 발견한 영국의 물리학자 어니스트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1871~1937)조차도 “원자가 분해되면서 방출하는 에너지는 거의 실용성이 없다. 이것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하자는 것은 한마디로 정신 나간 생각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러더퍼드는 우라늄방사선 연구를 하면서 이온화작용의 차이에서 방사선의 성분에 두 종류가 있음을 발견하고 알파(α)선, 베타(β)선으로 명명하고 그 성질을 조사했다. 물질 중에서의 투과성, 이온화작용, 이온생성의 비율과 속도의 정밀한 측정으로 이 분야의 실험연구를 개척했다. 1898년 토륨thorium(천연방사성원소의 하나)의 에머네이션emanation(라듐radium(알카리토류 금속에 속하는 천연방사성원소)이 붕괴될 때에 생기는 생성되는 방사성 기체원소로 토론thoron(토륨이 붕괴될 때에 생성되는 방사성 기체원소), 악티논actinon(악티늄계열에 속하는 방사성원소), 라돈radon(라듐이 붕괴할 때에 생성되는 희귀한 기체방사성원소)의 세 동위 원소가 있다)을 발견, 원자의 변환을 예상하여 1901년부터 에머네이션이 방사성radioactivity 비활성기체inert gas라고 결론지었다. 러더퍼드는 1908년에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1917년에 질소원자에 알파(α)선을 충격시켜 수소를 관측, 1919년에 처음으로 원자핵의 인공전환에 성공했다.



1939년 학계에 심상치 않은 이야기가 떠돌고 있었는데, 독일의 화학자 오토 한Otto Hahn(1879~1968)과 독일의 여성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1878~1968)가 우라늄원자핵uranium nucleus이 반으로 갈라지면서 에너지가 방출되는 현상을 관측했다는 소문이 그것이었다. 이른바 핵분열nuclear fission이 실험실에서 처음 확인된 것이다.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모든 것은 우연과 확률에 의해 결정된다. 한과 마이트너는 중성자neutron가 우라늄원자핵을 두 조각으로 분열시킨 뒤 두 개 이상의 중성자가 튀어나와서 다른 우라늄원자핵들을 분열시키고, 이 과정에서 튀어나온 중성자들이 또 다른 우라늄원자핵들을 분열시키는 일련의 연쇄반응이 일어날 확률을 계산했다. 그랬더니 반응이 이런 식으로 일어나면 도시 하나를 날려버릴 정도로 막강한 에너지가 발휘된다는 놀라운 결과가 얻어졌다. 특정한 중성자가 우라늄원자핵을 분열시킬지의 여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수십억 개의 우라늄원자핵들이 분열되면서 가공할 위력을 발휘할 확률은 매우 정확하게 계산될 수 있다. 이것이 양자역학의 위력이다.



한과 마이트너는 양자역학에 입각하여 치밀한 계산을 수행한 결과 원자폭탄atomic bomb이라는 가공할 무기가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로부터 두 달 후 닐스 보어와 헝가리 부다페스트 태생의 미국 이론물리학자 유진 위그너Eugene Paul Wigner(1902~95), 헝가리 부다페스트 태생의 미국 물리학자 레오 실라르드Leo Szilard(1898~1964) 그리고 존 휠러는 프린스턴 대학의 아인슈타인을 찾아가 원자폭탄의 가능성에 대해 신중한 토론을 벌였다. 보어는 원자폭탄을 만들려면 범국가적인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굳게 믿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실라르드의 끈질긴 설득에 굴복한 아인슈타인은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1882~1945) 대통령에게 “전쟁에서 이기려면 원자폭탄을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같은 해인 1939년에 나치는 우라늄원자로부터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얻어낼 수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보어의 제자인 하이젠베르크에게 “히틀러를 위해 원자폭탄을 만들라”는 명령을 내렸다.



나치가 유럽의 대부분 지역을 접수하면서 한창 위력을 떨치던 1941년에 하이젠베르크는 옛 스승 보어를 만나기 위해 코펜하겐으로 비밀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는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사건의 전말은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2002년에 보어의 유족들이 편지를 공개하면서 부분적으로 밝혀졌다. 보어는 1950년대에 하이젠베르크와 여러 통의 편지를 교환했는데, 개중에는 써놓기만 하고 보내지 않은 편지가 여러 장 남아있다. 이 편지에 의하면 하이젠베르크는 나치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당시 나치의 위력은 그 누구도 대항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했으므로 보어 역시 나치를 위해 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이탈리아의 물리학자로 컬럼비아 대학 교수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1901~54)는 연쇄적인 핵분열을 실험실에서 구현할 수 있다는 확실한 결론을 내렸다. 노벨상 수상을 기회로 미국으로 망명한 페르미는 컬럼비아 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그곳에서 중성자연구에 전념했다. 그는 1942년에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1942년부터 1945년까지 최초의 원자폭탄을 만든 미국 정부의 연구계획)에 참가했다. 그의 계산에 의하면 원자폭탄은 뉴욕시의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무기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휠러는 당장 페르미와 합류하여 시카고 대학의 스태그필드(원형트랙이 딸려있는 시카고 대학의 운동장) 밑에 있는 지하실에서 대형 원자로를 제작했으며, 인류의 핵에너지시대는 이렇게 소박한 분위기에서 시작되었다.



1940년대에 휠러는 원자폭탄으로 얼룩진 전쟁사를 생생하게 경험했다. 전쟁기간 동안 그는 워싱턴주에서 핸퍼드 보호구역Hanford Reservation이라는 거대한 방사능폐기물 처리장의 건설에 참여했는데, 이곳에서 처리된 플루토늄은 훗날 일본의 나가사키를 초토화시킨 원자폭탄에 사용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휠러는 또 다시 폭탄제조에 참여하여 1952년에 태평양의 한 섬에서 수소폭탄이 터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10여 년에 걸쳐 대량살상용 무기개발에 끌려 다닌 휠러는 마침내 모든 것을 버리고 그의 첫사랑이었던 양자역학으로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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