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루이 다비드의 <호라티우스의 맹세>



 



 

 

 

다비드는 1782년 정부로부터 호라티우스 삼형제에 관한 그림을 의뢰받고작품에 대한 자료를 제출했다. 이들 삼형제는 기원전 7세기의 로마 왕국 사람들이다. 로마 왕국이 이웃의 알바 왕국과 영토문제로 분쟁하던 중 두 왕국은 각각 세 용사를 뽑아 싸우게 해 분쟁을 해소하기로 합의했다. 호라티우스 형제 중 하나는 알바의 쿠리아티가의 딸 사비나와 결혼한 몸이었고 알바의 삼형제 중 하나는 호라티우스가의 딸 카밀라와 결혼한 몸이었다. 어느 편이 이겨도 두 집안에는 비극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호라티우스 형제가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카밀라는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큰오빠를 저주했고 오빠는 누이동생을 칼로 쳐서 죽였다. 장남은 살인죄로 기소되었는데 아버지가 변호해 아들의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조국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비극은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호라티우스와 쿠리아티 형제의 이야기는 회화의 주제로는 드문데 로마를 처음 방문했을 때 다비드는 궁정 뮤지엄에서 카발리에르 다르피노가 1612년 두 집안 사이의 싸움을 그린 프레스코를 본 적이 있었다.

다비드는 1781년부터 이 이야기를 주제로 드로잉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호라티우스 형제가 승리를 거두고 로마로 돌아와 카밀라를 살해하는 장면78을 그렸지만 1782년 2월 공식으로 제출한 드로잉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변호하는 장면79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바꿔서 공식적으로 제출한 드로잉대로 그리지 않기로 했는데, 변호하는 장면에 행위가 수반되지 않아 시각적으로 두드러져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자신이 상상한 이미지를 극적으로 구성했다. 호라티우스 삼형제가 조국를 위해 전투에 임하기 전 아버지 앞에서 맹세하는 구국의 정신과 용사로서의 결연한 자세를 묘사하기로 한 것이다. 다비드는 자크-앙트완 비포르80와 개빈 해밀턴81의 <브루투스의 맹세>를 자신의 작품에 응용한 것 같다.

1784년 4월 27일 다비드의 둘째 아들 외젠이 태어났고 그해는 다비드의 제자 장-제르맹 드루아가 로마대상을 수상한 해이기도 했다. 제자가 이 영예로운 상을 수상한 것은 처음 있는 일로 다비드의 위상은 한층 높아졌고, 다른 대가들 문하의 화가지망생들이 다비드의 문하로 몰려와 제자의 수가 40명에 이르렀으며, 자연스럽게 다비드 학파가 생기게 되었다. 그해 9월 드루아가 로마로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다비드가 동행했다. 로마로 가는 것이 제자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하다며 드루아를 가르치는 가운데 자신도 배우는 게 있다고 한 그의 말에서 드루아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10월 8일 로마에 도착한 다비드는 작업실을 빌리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실제 모델을 그렸으며, 마네킹에 옷을 걸쳐놓고 옷에서 생기는 주름을 정교하게 묘사하기도 했다. 이때의 드로잉들이 현존하며 호라티우스 삼형제를 드로잉한 것도 있다.77 그는 근처에 있는 장인에게서 칼과 투구 등 필요한 소품들을 구입해 오브제로 사용했다. 그는 만족할 때까지 동일한 오브제를 드로잉했는데 호라티우스 맏형의 왼쪽 다리는 스무 번의 드로잉 끝에 만족할 만하게 그릴 수 있었다. 드루아는 스승을 도와 그림의 뒷배경과 사비나의 노란 의상을 그렸다. 그는 스승에게 영웅들의 누드를 그리라고 권유했지만 다비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호라티우스의 맹세>8를 완성한 것은 1785년 7월 말이었지만 작품에는 서명과 함께 ‘로마에서 1784년’이라고 그린 장소와 날짜를 적었다. 그는 이 작품과 <적선을 받는 벨리사리우스>67를 아틀리에에서 공개했고 일간지와 언론이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많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그의 작품들을 보러 왔다. 노화가 폼페오 바토니는 다비드에게 그의 재능을 인정해주는 로마에 머물 것을 청하면서 “자네와 나만이 화가일 뿐 나머지들은 강물에 던져질 놈들이네”라고 했다. 바토니는 1787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이 사용하던 붓과 팔레트를 존경의 표시로 다비드에게 남겼다.

다비드는 <호라티우스의 맹세>를 파리에 있는 친구에게 보내면서 그해 1785년 살롱전에 출품시키고 좋은 자리에 걸 것을 주문했다. 그는 편지에 “자네의 코미디가 제대로 공연되지 않으면 어떻겠나?”라는 말로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벽에 걸도록 당부했지만 이 작품은 살롱전이 이미 개최된 후에 도착하여 높은 벽에 걸렸다.85 그러나 <호라티우스의 맹세>는 살롱전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품이었고 다비드는 프랑스 화단에서 독보적 존재가 되었다. 사람들이 이 작품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모델을 사용해 그리면서 불필요한 요소들을 모두 제거하고 화면에 긴장감이 나타나도록 한 매우 새로운 양식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이해 살롱전에 출품한 페이롱의 <알세스티스의 죽음>65은 <호라티우스의 맹세>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1790년대에는 <호라티우스의 맹세>가 프랑스 혁명의 상징물로 이용되었지만 다비드가 정치적 의도를 갖고 그린 것은 아니었다. 이 작품이 그려질 때만 해도 혁명의 기운이 움트지 않았고 감히 전제군주를 전복시킬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할 수 없을 때였다. 1787년 10월, 로마 주재 프랑스 아카데미 책임자 자리가 공석이어서 다비드는 자신이 그 지위에 오르기를 희망했지만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부족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를 반대한 사람들은 그가 서른아홉 살도 채 되지 않는 데다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을 꼽으면서 새 책임자의 임기가 끝나는 6년 후에라면 다비드가 책임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카데미의 책임자는 훌륭한 교사이어야 하지만 또한 외교적 수완이 뛰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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