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루이 다비드의 <헥토르의 죽음을 애도하는 안드로마케>



 



 

 

 

다비드는 1783년 8월 23일 <헥토르의 죽음을 애도하는 안드로마케>9를 제출하여 아카데미 정회원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이 작품은 살롱전을 통해 소개되었다. 이것은 『일리아드』의 한 장면으로 트로이 전쟁에서 아킬레우스에 의해 살해된 남편 헥토르의 시신 앞에서 애통해 하는 아내의 처절한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다. 아버지를 잃은 아스티아나스가 슬퍼하는 어머니를 위로하고 있는데, 아스티아나스의 나이가 다비드의 아버지가 결투로 세상을 떠났을 때의 다비드 나이쯤 된다. 남편을 잃은 여인과 아버지를 여읜 아이에서 자신과 어머니를 연상해서 그리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가 이 그림을 아홉 살에 아버지를 잃은 자신의 처지와 일치되게 그렸다고 추측하는 이유는, 빙켈만이 설명한 『일리아드』에서의 아스티아나스는 이 그림에 그려진 8-9세보다 어린 나이이기 때문이다. 다비드는 『일리아드』에서 안드로마케가 독백한 그리스어 첫 귀절을 오른쪽 큰 촛대에 적어 넣었다.

 



남편이여, 당신은 젊은 나이에 날 과부로 남기고 죽었구려. 당신과 내가 세상에 내놓은 우리의 아들은 불행하게도 아직 너무 어리다오.

 

다비드는 1783년의 살롱전에 이 작품 외에도 여섯 점을 더 출품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십자가의 그리스도>73이다. 이것은 매우 신실한 가톨릭 신자인 노아이유 부부를 위해 그린 것이다. 노아이유 부부는 다비드와 그 밖의 두 화가에게 카퓌시느 성당 내 가족 예배당을 위한 종교화를 의뢰했다. 다비드는 종교화를 그리는 것이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다고 판단하고 종교화로는 마지막작품이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특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지 못했으므로 군인을 모델로 그렸다. 노아이유 부인은 군인을 모델로 그렸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성스러움이 손상되었다고 다비드를 법정에 세웠다. 그러나 신성을 손상시켰다고 증명할 방법이 없어 유죄가 적용되지는 않았다. 노아이유 부부는 이 작품을 예배당에 걸지 않고 자신의 집에 장식했다. 혁명 후에 이 부부의 작품 대부분이 압수당했는데 흥미롭게도 노아이유 부인은 이 작품을 덮개로 가려 보존했다.

 

다비드는 1783년의 살롱전에 초상화 두 점도 함께 소개했는데 하나는 이모부 <자크-프랑수아 드마이송의 초상>18이고 다른 하나는 <알폰스 르로이의 초상>74이다. 르로이는 산부인과 의사로 1783년 초, 다비드의 첫 아들 샤를의 출산을 담당했던 사람이었다. 다비드는 르로이를 매우 지성적이며 세련된 용모를 갖춘 사람으로 묘사했지만 이는 그의 실제 모습과 많은 차이가 났다. 르로이는 성을 곧잘 냈고, 논란이 되는 의학적 견해를 고집했으며, 무능하고 태만했고, 결국 자신의 종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런 그를 다비드가 자신의 직업에 존엄성을 가진 계몽주의의 상징이 될 만한 인물로 만든 것이다. 이런 변형의 기교에서 말하면 다비드는 매우 훌륭한 초상화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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