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이야기: 폭탄Bomb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공식 E=mc2에 의해 원자 속에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으나 대다수의 물리학자들은 이 에너지를 꺼내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원자핵을 발견한 영국의 물리학자 어니스트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1871~1937)조차도 “원자가 분해되면서 방출하는 에너지는 거의 실용성이 없다. 이것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하자는 것은 한마디로 정신 나간 생각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러더퍼드는 우라늄방사선 연구를 하면서 이온화작용의 차이에서 방사선의 성분에 두 종류가 있음을 발견하고 알파(α)선, 베타(β)선으로 명명하고 그 성질을 조사했다. 물질 중에서의 투과성, 이온화작용, 이온생성의 비율과 속도의 정밀한 측정으로 이 분야의 실험연구를 개척했다. 1898년 토륨thorium(천연방사성원소의 하나)의 에머네이션emanation(라듐radium(알카리토류 금속에 속하는 천연방사성원소)이 붕괴될 때에 생기는 생성되는 방사성 기체원소로 토론thoron(토륨이 붕괴될 때에 생성되는 방사성 기체원소), 악티논actinon(악티늄계열에 속하는 방사성원소), 라돈radon(라듐이 붕괴할 때에 생성되는 희귀한 기체방사성원소)의 세 동위 원소가 있다)을 발견, 원자의 변환을 예상하여 1901년부터 에머네이션이 방사성radioactivity 비활성기체inert gas라고 결론지었다. 러더퍼드는 1908년에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1917년에 질소원자에 알파(α)선을 충격시켜 수소를 관측, 1919년에 처음으로 원자핵의 인공전환에 성공했다.



1939년 학계에 심상치 않은 이야기가 떠돌고 있었는데, 독일의 화학자 오토 한Otto Hahn(1879~1968)과 독일의 여성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1878~1968)가 우라늄원자핵uranium nucleus이 반으로 갈라지면서 에너지가 방출되는 현상을 관측했다는 소문이 그것이었다. 이른바 핵분열nuclear fission이 실험실에서 처음 확인된 것이다.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모든 것은 우연과 확률에 의해 결정된다. 한과 마이트너는 중성자neutron가 우라늄원자핵을 두 조각으로 분열시킨 뒤 두 개 이상의 중성자가 튀어나와서 다른 우라늄원자핵들을 분열시키고, 이 과정에서 튀어나온 중성자들이 또 다른 우라늄원자핵들을 분열시키는 일련의 연쇄반응이 일어날 확률을 계산했다. 그랬더니 반응이 이런 식으로 일어나면 도시 하나를 날려버릴 정도로 막강한 에너지가 발휘된다는 놀라운 결과가 얻어졌다. 특정한 중성자가 우라늄원자핵을 분열시킬지의 여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수십억 개의 우라늄원자핵들이 분열되면서 가공할 위력을 발휘할 확률은 매우 정확하게 계산될 수 있다. 이것이 양자역학의 위력이다.



한과 마이트너는 양자역학에 입각하여 치밀한 계산을 수행한 결과 원자폭탄atomic bomb이라는 가공할 무기가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로부터 두 달 후 닐스 보어와 헝가리 부다페스트 태생의 미국 이론물리학자 유진 위그너Eugene Paul Wigner(1902~95), 헝가리 부다페스트 태생의 미국 물리학자 레오 실라르드Leo Szilard(1898~1964) 그리고 존 휠러는 프린스턴 대학의 아인슈타인을 찾아가 원자폭탄의 가능성에 대해 신중한 토론을 벌였다. 보어는 원자폭탄을 만들려면 범국가적인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굳게 믿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실라르드의 끈질긴 설득에 굴복한 아인슈타인은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1882~1945) 대통령에게 “전쟁에서 이기려면 원자폭탄을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같은 해인 1939년에 나치는 우라늄원자로부터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얻어낼 수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보어의 제자인 하이젠베르크에게 “히틀러를 위해 원자폭탄을 만들라”는 명령을 내렸다.



나치가 유럽의 대부분 지역을 접수하면서 한창 위력을 떨치던 1941년에 하이젠베르크는 옛 스승 보어를 만나기 위해 코펜하겐으로 비밀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는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사건의 전말은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2002년에 보어의 유족들이 편지를 공개하면서 부분적으로 밝혀졌다. 보어는 1950년대에 하이젠베르크와 여러 통의 편지를 교환했는데, 개중에는 써놓기만 하고 보내지 않은 편지가 여러 장 남아있다. 이 편지에 의하면 하이젠베르크는 나치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당시 나치의 위력은 그 누구도 대항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했으므로 보어 역시 나치를 위해 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이탈리아의 물리학자로 컬럼비아 대학 교수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1901~54)는 연쇄적인 핵분열을 실험실에서 구현할 수 있다는 확실한 결론을 내렸다. 노벨상 수상을 기회로 미국으로 망명한 페르미는 컬럼비아 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그곳에서 중성자연구에 전념했다. 그는 1942년에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1942년부터 1945년까지 최초의 원자폭탄을 만든 미국 정부의 연구계획)에 참가했다. 그의 계산에 의하면 원자폭탄은 뉴욕시의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무기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휠러는 당장 페르미와 합류하여 시카고 대학의 스태그필드(원형트랙이 딸려있는 시카고 대학의 운동장) 밑에 있는 지하실에서 대형 원자로를 제작했으며, 인류의 핵에너지시대는 이렇게 소박한 분위기에서 시작되었다.



1940년대에 휠러는 원자폭탄으로 얼룩진 전쟁사를 생생하게 경험했다. 전쟁기간 동안 그는 워싱턴주에서 핸퍼드 보호구역Hanford Reservation이라는 거대한 방사능폐기물 처리장의 건설에 참여했는데, 이곳에서 처리된 플루토늄은 훗날 일본의 나가사키를 초토화시킨 원자폭탄에 사용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휠러는 또 다시 폭탄제조에 참여하여 1952년에 태평양의 한 섬에서 수소폭탄이 터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10여 년에 걸쳐 대량살상용 무기개발에 끌려 다닌 휠러는 마침내 모든 것을 버리고 그의 첫사랑이었던 양자역학으로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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