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슬림 형제단은 친민주정치를 운운한다

 

 

 

 

 

『파이낸셜 타임스』지의 기사에서 룰라 할라프는 무슬림 형제단이 “조직 면에서 유리하게 출발했고 매우 강력한 동원 수단— 종교— 에 의존할 수 있다” 고 시인했다. 그는 무슬림 형제단이 2005년에 실시된 선거에 참여한 점을 거론하면서(의석의 20%를 차지) “형제단”은 2년 후 적절한 정책 의제를 입안하려 했으나 여성과 비무슬림은, 정부의 방침을 심의하는 종교회의를 창설할 수 없고, 국가 수반의 자격 또한 금한 탓에 동요가 일어났다고 덧붙였다. 무슬림 형제단은 여론의 반대에 부딪쳐 이 같은 요구를 보류했지만 이슬람주의 의제는 포기하지 않았다. 때문에 무슬림 형제단이 친민주정치를 운운하나 일단 권좌에 오르면 가자지구와 이란에서 보이는 “이슬람식 민주정치” 를 실시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무바라크 퇴진 이후, 조급한 선거는 악영향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이집트는 권위주의를 탈피하고 민주정치다운 모습을 찾기 위해 세심한 제도적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오늘날 중동에서 서양식 민주정치를 실시하는 데 필요한 민주주의 제도는 모두 실종되고 없다. 최근 정치 이론을 일부 살펴보면, 저개발 현상은 미개발 경제구조에 국한되지 않는다고들 한다. 기관이 형성되는 수준 낮은 정도가 저개발을 가늠하는 토대가 되는데, 중동의 권위주의 독재자들은 개인의 통치를 위해서 기관의 토대를 허물어버렸다. 이 같은 환경에서 독재정권이 몰락하자
이슬람주의자만이 채울 수 있는 정치적 공백이 생긴 것이다. 그들은 유일한 야권세력으로 중동을 넘어 다국적을 지향하는 지하 네트워크를 유지해왔다. 반면, 진보민주정치 야권이 이슬람주의자와 경쟁하기 위해 기관을 마련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토머스 프리드먼은 선거가 민주화의 이름으로 실시되고 무슬림 형제단이 승리를 거머쥔다면 그들이 이집트 최초의 자유 헌법을 제정하는 데 극단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뿐 아니라 정교의 관계를 비롯하여 여성과 주류 및 의복을 규제할 것이라고 서술했다. 이에 대해 개혁안을 내세우며 대선에 도전하고 있는 전 국제원자력기구 사무총장 무함마드 엘바라데이는 “대표성이 희박한 의회가 대표성이 희박한 헌법을 제정하게 될 것” 이라 역설했고, 개혁당 당수인 오사마 가잘리 하릅은 “무슬림 형제단이 만반의 준비가 완료된 상태이므로 선거부터 치르자고 할 것” 이라고 덧붙였다. “세속주의 세력인 우리가 당을 통합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이처럼 복잡다단한 실상을 이해하려면 민주정치가 선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다원주의 문화와 시민 사회에 대한 철학도 감안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선거를 당장” 치르고 싶어 하나, 시민 사회의 라이프스타일과 민주적인 다원주의 가치관은 배격한다.
이집트 혁명의 범위는 굉장히 넓다. 비이슬람주의자들은 무바라크 정권의 3대 사회악, 즉 열악한 개발정책, 실업률 및 빈곤율의 증가, 비밀경찰의 억압에 항거하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는데, 이 같은 사회악은 법적으로도 이미 부족한 정권의 자질을 더욱 떨어뜨리고 말았다. 시위의 대상이 된 정권이 주장한 바에도 불구하고 전문가의 견해에 따르면, 이슬람주의자들은 대규모 시위를 선동하지 않았다. 즉 튀니지와 이집트의 이슬람주의자들이 시위에 놀랐다는 이야기다. 자발적인 시위를 불러일으킨 조직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슬람주의 조직체를 제외하고는— 그 같은 동요를 유도할 수 있는 야권 조직이 없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이집트라면 무슬림 형제단이, 튀니지라면 1981년 이후 라쉬드 알가누히가 무슬림 형제단을 본따 창설한 알나다가 그랬을 것이다. 권위주의 정권이 야권세력을 잔혹하게 억압하자 이슬람주의는— 유럽에 정치적 망명을 요청한—유력한 네트워크와 함께 폭정에서 살아남기 위해 정치집단 외부에서 조직된 유일한 실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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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자의 고달픈 삶

 

 

 

 

 

 

 

공리주의가 안고 있는 이러한 문제들은 어떻게 좋은 공리주의자가 될 수 있는지를 더 깊게, 그리고 더 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그러나 답을 찾기에 앞서 몇 가지 문제를 더 살펴보자. 첫째는 공리주의 사고의 경직성이다. 앞서 필자는 공리주의가 도덕적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분명하고도 확실한 방법을 쓴다는 일종의 찬사를 보낸 바 있다. 그 대목에서 약간 냉소 같은 걸 느끼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그 방법이란, 곧 선택할 수 있는 모든 대안을 펼쳐 놓고, 각각의 대안을 선택할 때 들어가는 비용(그리고 실제로 그 비용을 지출할 확률)과 그 대안을 채택할 때 얻을 수 있는 효과(그리고 그것이 실현될 확률)를 계산한 다음 실현 가능성이 가장 높으면서 비용 대비 효과의 값이 가장 큰 행위의 대안을 찾아내는 것이다. 쉬운 일이다. 하지만 실제로 들어가면 행위자가 채택할 수 있는 대안과 경우의 수가 많을 수 있어서 어지러울 정도로 계산이 복잡해질 것이다. 이 점에 비추어, 공리주의는 본래 목적에서 빗나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공리주의가 추구하는 핵심적 가치는 더 나은 세상을 실현하는 데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처럼 거창한 계산을 하는 데 시간을 보내고 나면 행복을 실현하거나 고통을 완화할 시간을 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둘째는 공리주의자 역시 우정 같은 인간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친목이나 충성처럼 인간이 맺을 수 있는 다양한 인간관계의 범위가 얼마나 넓은지를 생각해보라. 필에게 전화를 걸어 주말 여가를 같이 보낼 수 있는지 알아보려 한다. 왜 다른 사람이 아니고 하필이면 필인가? 도와야 할 사람들도 많이 있는데? 필은 내 친구이기 때문이다. 다른 아이들보다는 내 아이들을 위해 시간과 돈을 쓴다. 부모님께 전화를 드리는 건 그들이 내 부모이기 때문이다. 내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안고 있는 문제에 참견하는 건 그들이 내 학생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그들이 모두 나의 친구, 아이, 부모, 배우자 등등 나와 가까운 관계에 있으면서 서로 귀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란 사실이다. 이러한 연결로 나는 다른 사람들이 아닌 이들에 대하여 특별한 충성심을 지니거나 특별한 배려를 해야 한다(물론 이들에 대한 특별한 고려가 무엇인지는 내가 이들과 어떤 형태의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제 공리주의자들이 평등이나 공정, 그리고 복지 같은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살펴보자. 공리주의자라면 약속이란 것에 뒤따르는 구속이나 금기란 것에 깃든 금지란 말을 들을 때처럼, ‘특별한 관련성’이란 말을 그저 신비스럽기만 한 언어로 생각하지 않을까? 급진적 공리주의를 대변하던 윌리엄 고드윈14이 개인적인 관계를 맹렬히 공격한 내용은 특히 인상적이다. 그는 죽어야 할 처지에 놓인 두 사람 가운데 오직 한 사
람만 살려내야 하는 사례를 든다. 한 사람은 대주교 페늘롱이고 또 한 사람은 대주교의 시종이다(그런데 이 시종은 우리의 형이거나 아버지다). 고드윈은 묻는다. “도대체 ‘나의 누구’란 것이 무엇이기에 공정한 진실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할 결정을 뒤집어 놓는단 말인가?” William Godwin(1756~1836)고드윈(최초의 근대 아나키즘 사상가로 일컬어지는 영국의 사회철학자, 정치평론가)은 대주교를 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복지를 증진하는 데 더 크게 이바지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사례에서 개인적 관계란 것은 도덕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이에 비추어, 공리주의적 삶은 지극히 엄격하고, 자기 희생적이며, 금욕적이어서 인간의 심성에 깊이 뿌리내린 친족관계, 감동, 친밀함 같은 것들을 도덕이란 이름으로 깡그리 부정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리주의자가 우정이나 그 밖의 개인적인 관계를 도외시하는 것은 공리주의의 도덕이 그만큼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인간에게 부과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우리가 살펴본 세계적 빈곤의 문제와도 관련된다. 심히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은 도덕적 상식이다. 한편 우리가 ‘틈틈이’ 짬을 내어 자신의 기획을 추진할 권리를 지닌다는 것도 도덕적 상식에 속한다. 하지만 공리주의자들은 ‘여유 있는’ 시간이란 도덕적으로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풋볼을 하거나 바이올린을 배우거나 외국어를 배우거나 소설을 읽거나 이런 일을 할 시간이 있다면, 그 시간을 모두 인간 전체가 누릴 행복의 총량을 늘리는 데 써야 한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이 곤경에 빠진 터에 이렇듯 한가한 활동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공리주의자들의 눈에는 이기적인 자기 몰입으로 비칠 뿐이다. 공리주의자들은 도덕의 범위를 확대하여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뒤덮어 버린다. 이렇게 되면 개인 사이의 모든 관계와 모든 개인적인 기획은 공리주의적 도덕에 뒤덮여 질 식사를 면하기 어려워진다.

전체의 복지를 위해 성실한 관계나 개인적인 쾌락을 모두 포기해야 한다는 공리주의의 주장은 모든 사람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압박감을 주지만, 이러한 공리주의자들의 태도에 일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공리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그 누구의 행복도 다른 사람의 행복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없다면, 다시 말해서, 그 누구도 더 부유한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 행복해야 할 까닭이 없다면, 자신의 행복이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복을 다른 사람들의 행복보다 중시해야 할 이유는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해야 할 까닭이 무엇일까? 물론 그들이 나에겐 특별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리라. 하지만 나의 관점이 내세우는 타당성은 왜 그처럼 유별난 것일까? 가까운 사람들만을 중시한다는 건 결국, ‘가진’ 사람은 언제나 더 많이 거둬들이면서 살아가는데, ‘갖지 못한’ 사람은 늘 자기 몫을 잃어버린 채 어렵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친구나 가족 같은 사람들의 이익을 돌보는 것이 자기 종족의 이익만을 돌보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결국, 두 가지 모두 비도덕적인 일이 아닐까?
그렇지만 고드윈의 엄격한 공리주의적 태도마저 본래 목적이나 의도를 실현하기는 어렵다. 다시 두 세상을 비교해보자. 하나는 사람들이 우정과 사랑으로 관계를 맺고, 자신의 재능과 이해를 마음껏 발휘하거나 (오보에를 연주하고, 시를 읽거나 쓰면서……) 추구하는 세상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못한 세상이다. 인간의 삶에서 이런 관계와 이해가 행복의 중요한 근원이라면, 두 번째보다는 첫 번째 세상에서 사람들은 더 행복하게 살 것이다. 그런데 고드윈 같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두 번째에 가깝지 않을까? 공리주의는 세상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데 목적을 둔다고 하는데, 이런 목적은 결국 빗나가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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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은 검은 옷을 입은 예수회 수사의 모습에서 엄청난 공포를 느꼈다

 

 

 

 

 

비슷한 시기에 융은 그가 마주친 검은 옷을 입은 예수회 수사의 모습에서 엄청난 공포를 느꼈다. 예수와 예수회에 대한 인상 때문에 그는 종교의 외적인 면을 불신했고 교회에 가는 것을 싫어하게 되었다. 꿈의 세계는 그를 내면의 영적 세계와 이어주고 그의 삶의 주된 방향을 이끌고 예견했다. 훗날 그는 보통 어린 시절의 꿈이 여러 차원에서 삶의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융이 기억하는 최초의 꿈은 서너 살 때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는 육십 대 중반이 될 때까지 그 꿈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신령적 상징성이 있는 그 꿈은 부모님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초원에서 펼쳐졌다.

 

꿈속의 나는 초원에 있었다. 갑자기 나는 돌로 에워싸인 어둡고 네모난 구멍을 땅에서 발견했다 … 호기심이 생긴 나는 그곳으로 다가가 구멍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아래로 내려갈 수 있는 돌계단이 보였다. 두려운 마음에 주저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밑에는 녹색 커튼으로 가려진 둥근 아치 모양의 문이 있었다. 양단과 같은 천으로 만든 크고 무거워 보이는 화려한 커튼이었다. 뒤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궁금해진 나는 커튼을 옆으로 젖혔다. 희미한 빛 속에서 10미터 길이의 네모난 방이 보였다. 깎은 돌로 덮인 천장은 아치 모양이었다. 바닥에는 판석이 놓여 있었고 중앙에는 붉은 양탄자가 입구에서 낮은 재단까지 깔려 있었다. 이 재단 위에는 놀라울 정도로 화려한 황금 옥좌가 있었다.

확실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위에 붉은 쿠션이 놓여 있었던 것 같다. 동화에 나오는 왕이 앉을 법한 아름다운 옥좌였다. 그 위에는 무언가가 서 있었는데 처음에 나는 그것이 높이 약 4미터에 지름 50~60센티미터의 통나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천정에 닿을락 말락 할 만큼 거대했다. 하지만 그것은 피부와 살로 되어 있었으며 꼭대기에는 얼굴도 머리카락도 없는 둥근 머리와 같은 것이 있는 매우 신기한 형상이었다. 머리 꼭대기에는 눈이 하나 달려 있었는데 그 눈은 요동 없이 위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방에는 창문도 없었고 빛이 들어올 만한 곳이 없었는데도 꽤 밝은 편이었다. 머리 위에는 밝은 기운이 머물러 있었다. 그 빛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언제라도 벌레처럼 옥좌를 기어 내려와 나를 향해 다가올 것만 같았다.
나는 공포에 휩싸였다. 그 순간 바깥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는 나에게 외쳤다.“ 그를 잘 보아라. 그는 식인귀야!” 그 말을 듣자 나는 더욱 겁에 질렸고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융은 그 꿈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는 고전과 종교, 오늘날과 선사시대의 원초적 문화를 연구하면서 수십 년 동안 그를 쫓아다닌 그 꿈의 의미를 조금씩 파악하게 되었다.
“이름도 없는” 지하의 신 … 남근상

✚ 제의적인 남근상
✚ 이 땅의 비밀에 입문
✚ 어린 시절 꿈속의 무시무시한 나무
✚“ 생명의 숨결”이자 창조적인 충동으로 드러났다.10

그가 말하는 남근상은 켈트, 독일, 그리스, 이집트, 중동과 극동 사람들이 숭배하던 강력한 남근신, 삶을 선사하는 창조적인 힘을 상징하는 신과 일맥상통한다. 융이 평생 연구한 것 중 많은 내용은 이런 원초적인 지하신에 뿌리를 두며 부성주의보다는 모성주의를 더 강조했다.


 

그 당시 나는 땅에 묻혔다가 몇 년이 지나서야 다시 밖으로 나온 것 같았다. 이제 나는 가능한 한 가장 많은 빛을 어둠으로 가져가기 위해 그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안다. 나는 어둠의 영역으로 들어섰다. 그때 나의 지적 활동이 무의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참고: 기원전 6세기경 선사시대에 제작된 뿔이 달린 켈트 신 케르눈노스는 외경심과
숭배심을 불러일으키는 강력한 힘과 존재감을 지녔다. 켈트어로 “뿔 달린 자”란 뜻의 케르눈노스는 가장 오래된 켈트 신들 가운데 하나로 그 기원은 프랑스 북부와 중부 그리고 영국에서 발견된 구석기시대의 동굴 벽화에 묘사된 뿔 달린 인물과 관련이 있다.
수사슴 뿔이 달린 케르눈노스는 짐승의 왕으로 간주되며, 뱀이나 늑대의 형상을 취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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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융의 유년 시절

 

 

 

 

 

 

융은 만년에 자서전을 엮는 작업에 전념했다. 사실상 대중이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된 데는 그 어떤 책보다도 자서전의 영향이 컸다. 그의 자서전 『기억 꿈 사상』은 융에게 일어났던 외적인 사건들을 독자에게 거의 알려주지 않는다. 대신 유년 시절에서 성인시절까지의 그의 내면을 마치 풍경을 바라보듯 시각적으로 묘사한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작은 악마가 하나 나타났다. 이 악마는 나의 말과 생각을 달아나게하고 그 말과 생각을 과거의 안개 속에서 솟아오르는 여러 영상들의 급물살로 바꾸어서, 불가사의하게 아름답지만 무시무시할 정도로 세속적이며 기만적인 세상에서 영문을 모른 채 당황스러워하는 한 소년의 모습을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이 소년은 1875년 스위스 케스빌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교구 목사인 파울 융과 그의 아내 에밀리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아홉 살에 동생이 태어나기까지 외동으로 자랐다.

 

 


부모님의 결혼생활에 난관이 닥칠 것이라는 희미한 조짐이 내 곁을 맴돌고 있었다. 1878년에 내가 병을 앓은 것은 아마도 부모님의 일시적인 별거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바젤의 병원에서 몇 달을 보냈는데, 어머니의 병은 순탄치 않은 결혼생활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보인다. 아픈 어머니를 대신하여 어머니보다 스무 살이나 더 많은독신의 이모가 나를 돌봐주었다. 나는 어머니가 곁에 없어서 고통스러웠다“. 사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 말을 절대 믿지 않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또한“ 여자”라는 말을 들어도 원래부터 믿지 못할 존재라는 감정이 떠올랐다. 반면 나에게“ 아버지”는 믿음직함, 동시에 무력함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이것은 내가 인생의 초기부터 안고 가야했던 약점이었다. 하지만 어렸을 때 지녔던 이런 생각은 커가면서 조금씩 변하게 되었다. 남자친구들을 믿었다가 그들에게 실망한 반면, 원래 신뢰하지 않던 여자에게 실망하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동물, 식물, 흙, 바위, 산, 강, 호수와 함께하며 살았기 때문에 자연에 대한 깊은 사랑을 평생 간직했다. 하지만 그가 살았던 시골의 소박한 생활방식은 고독한 삶을 의미하기도 했다.

 

 

나는 내 방식대로 홀로 놀았다. 아쉽게도 내가 무얼 하고 놀았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방해받기를 싫어했다는 것은 기억난다. 나는 놀이에 깊이 몰입했으며 노는 동안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거나 이래라저래라 하는 걸 참을 수 없어 했다.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알베르트 외리Albert Oeri는 융과의 첫 대면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내가 융을 처음 본 것은 우리 둘 다 어린아이였던 시절이었다. 나의 부모님이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였는데 부모님들은 우리가 서로 어울려 놀기를 바랐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카를은 방 한가운데 앉아 구주희핀을 아홉 개 세우고 일정한 거리에서 공을 굴려 쓰러뜨리는 놀이를 하느라 바빠서 나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약 오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첫 만남을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비사회적인 괴물과 마주친 것이 난생처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활기차게 북적이는 유아원에서 자랐는데, 그런 곳에서는 함께 놀든 치고받고 싸우든 끊임없이 사람들과 섞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완전히 혼자였다. 그때는 그의 여동생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였다.

 

융이 아홉 살 때 여동생 게르트루트Gertrud가 태어났는데 둘이 함께 어울리기에는 서로의 터울과 기질의 차이가 컸다. 융의 가족은 18세기에 지어진 목사관에서 궁핍에 가까울 정도로 검소하게 살았다. 그 집의 인위적인 장식품이라고는 어두운 방에 걸린 그림 두 점이 전부였는데 어린 융은 그 그림들을 매우 좋아했다. 그의 부모는 교구가 바라는 “경건한 목사와 그를 내조하는 아내”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융의 삼촌 두 명과 외삼촌 여덟 명이 목사였으며 그들은 신앙, 성경, 선행을 추구하는 관습 속에서 안정적인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하지만 섬세하고 예민했던 융은 그런 환경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는 그런 삶의 형태에 반항하여 종종 말썽을 일으켰다. 『기억 꿈 사상』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주변 환경은 그의 신앙심을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변화시키기도 했다.
인근의 묘지에서 교회 관리인이 구덩이를 파자 갈색 흙더미가 속살을 드러내며 쌓여갔다. 여기에 길고 검은 프록코트를 입고 이상하리만치 높은 모자에 번들거리는 검정 구두를 신은 사람들이 침통한 표정으로 검은 상자를 이고 왔다. 목사복을 입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주변에 울려 퍼졌다. 여자들은 흐느꼈다. 나는 사람을 구덩이에 묻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예전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땅에 묻혔으며 이제 주 예수가 그들을 데려간다는 이야기도 듣게 되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기도문을 가르쳐주고 매일 저녁 기도하게 했다. 나는 밝은 마음으로 기도했다.
날개를 펴주시옵소서 자비하신 예수여, 당신의 작은 새, 당신의 아이를 받아주소서 …
하지만 이제 나는 주 예수가 아이 말고도 다른 사람들까지“ 데려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데려간다는 건 그들을 구덩이에 빠뜨린다는 의미였다 … 나는 주 예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주 예수는 더 이상 푸근하고 자애로운 큰 어미 새의 느낌이 아니라 검은
프록코트를 입고 높은 모자에 광이 나는 검은 신발을 신고 분주하게 검은 상자를 운반하던 온통 검은색으로 뒤덮인 음울한 사람들이 함께 연상되는 존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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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융: 상처 입은 자

 

 

 

 

 

 

 

진실, 즉 자연의 힘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유일한 통로인 나를 이용한다. 나는 당신이 어떤 순간에 사악해지는지 떠올릴 수 있다. 예를 들어 살아가면서 태도를 일부러 꾸민 사람은 나를 못 견디게 만드는데 내가 자연인이기 때문이다.
내가 존재함으로써 나는 결정체가 되고 발효한다. 인위적인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의 무의식은 나를 위험한 사람으로 인식한다. 내가 말하는 방식, 웃음 등 나의 모든 것이 그들을 괴롭힌다. 그들이 나에게서 자연을 느끼기 때문이다.

 

 

융이 자신을 “자연인”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예순여섯 살이었다. 이 시기 그는 인간의 정신에 “본성적으로 신앙심이 있음”을 인식하고 이를 심도 있게 연구한 최초의 정신의학자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논란의 대상이기도 했다. 자신을 “경험주의자”, “영혼의 치유자”로 표현한 그는 자신과 환자들의 내면을 꿰뚫어 보고 그 경험을 고전과 세계문화와 연결했으며 그가 발견한 내용을 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세상에 전파했다.

편지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나의 주 관심사는 신경증의 치료가 아니라 신의 존재를 느끼게 하는numinous … 길이다. 그것이 진정한 치료이다.

 

융의 저작들은 다음의 사항을 가르친다.

 

✚ 인간은 완전한 삶을 살기 위해 온전한 자아가 되어야 한다.

✚ 신은 그의 창조물인 인간이 자신을 모방하고 진화하기를 바란다.

✚ 온전한 인간은 공동 창조자로서 신과 소통한다.

 

융의 지인들은 그가 자신의 심리학을 삶을 통해 몸소 보여주었다고 증언한다. 오류를 범하기 쉬운 인간인 동시에 위대한 인간이었던 그는 세속과 영성의 두 세계에서 살았다. 외적 삶과 내적 삶에서 그는 인간 본성의 자연상태를 보았다. 융의 업적은 그의 삶에서 나왔다. 그는 자신에 대해 “나는 대극들의 충돌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오랜 생애를 살면서 양극성을 경험하고 이를 화해시켜 하나의 통합된 전체로 만드는 법을 배웠다.

그는 여든네 살 때 그 긴 여정에 대해 말했다.


 

구름 속의 뻐꾸기 나라에서 현실로 오는 여행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걸은 순례자의 길에서“ 나”라는 작은 흙덩어리에 손을 뻗을 수 있을 때까지 내려가려면 사다리를 천 개나 거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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