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융의 유년 시절

 

 

 

 

 

 

융은 만년에 자서전을 엮는 작업에 전념했다. 사실상 대중이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된 데는 그 어떤 책보다도 자서전의 영향이 컸다. 그의 자서전 『기억 꿈 사상』은 융에게 일어났던 외적인 사건들을 독자에게 거의 알려주지 않는다. 대신 유년 시절에서 성인시절까지의 그의 내면을 마치 풍경을 바라보듯 시각적으로 묘사한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작은 악마가 하나 나타났다. 이 악마는 나의 말과 생각을 달아나게하고 그 말과 생각을 과거의 안개 속에서 솟아오르는 여러 영상들의 급물살로 바꾸어서, 불가사의하게 아름답지만 무시무시할 정도로 세속적이며 기만적인 세상에서 영문을 모른 채 당황스러워하는 한 소년의 모습을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이 소년은 1875년 스위스 케스빌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교구 목사인 파울 융과 그의 아내 에밀리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아홉 살에 동생이 태어나기까지 외동으로 자랐다.

 

 


부모님의 결혼생활에 난관이 닥칠 것이라는 희미한 조짐이 내 곁을 맴돌고 있었다. 1878년에 내가 병을 앓은 것은 아마도 부모님의 일시적인 별거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바젤의 병원에서 몇 달을 보냈는데, 어머니의 병은 순탄치 않은 결혼생활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보인다. 아픈 어머니를 대신하여 어머니보다 스무 살이나 더 많은독신의 이모가 나를 돌봐주었다. 나는 어머니가 곁에 없어서 고통스러웠다“. 사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 말을 절대 믿지 않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또한“ 여자”라는 말을 들어도 원래부터 믿지 못할 존재라는 감정이 떠올랐다. 반면 나에게“ 아버지”는 믿음직함, 동시에 무력함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이것은 내가 인생의 초기부터 안고 가야했던 약점이었다. 하지만 어렸을 때 지녔던 이런 생각은 커가면서 조금씩 변하게 되었다. 남자친구들을 믿었다가 그들에게 실망한 반면, 원래 신뢰하지 않던 여자에게 실망하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동물, 식물, 흙, 바위, 산, 강, 호수와 함께하며 살았기 때문에 자연에 대한 깊은 사랑을 평생 간직했다. 하지만 그가 살았던 시골의 소박한 생활방식은 고독한 삶을 의미하기도 했다.

 

 

나는 내 방식대로 홀로 놀았다. 아쉽게도 내가 무얼 하고 놀았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방해받기를 싫어했다는 것은 기억난다. 나는 놀이에 깊이 몰입했으며 노는 동안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거나 이래라저래라 하는 걸 참을 수 없어 했다.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알베르트 외리Albert Oeri는 융과의 첫 대면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내가 융을 처음 본 것은 우리 둘 다 어린아이였던 시절이었다. 나의 부모님이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였는데 부모님들은 우리가 서로 어울려 놀기를 바랐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카를은 방 한가운데 앉아 구주희핀을 아홉 개 세우고 일정한 거리에서 공을 굴려 쓰러뜨리는 놀이를 하느라 바빠서 나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약 오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첫 만남을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비사회적인 괴물과 마주친 것이 난생처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활기차게 북적이는 유아원에서 자랐는데, 그런 곳에서는 함께 놀든 치고받고 싸우든 끊임없이 사람들과 섞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완전히 혼자였다. 그때는 그의 여동생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였다.

 

융이 아홉 살 때 여동생 게르트루트Gertrud가 태어났는데 둘이 함께 어울리기에는 서로의 터울과 기질의 차이가 컸다. 융의 가족은 18세기에 지어진 목사관에서 궁핍에 가까울 정도로 검소하게 살았다. 그 집의 인위적인 장식품이라고는 어두운 방에 걸린 그림 두 점이 전부였는데 어린 융은 그 그림들을 매우 좋아했다. 그의 부모는 교구가 바라는 “경건한 목사와 그를 내조하는 아내”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융의 삼촌 두 명과 외삼촌 여덟 명이 목사였으며 그들은 신앙, 성경, 선행을 추구하는 관습 속에서 안정적인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하지만 섬세하고 예민했던 융은 그런 환경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는 그런 삶의 형태에 반항하여 종종 말썽을 일으켰다. 『기억 꿈 사상』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주변 환경은 그의 신앙심을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변화시키기도 했다.
인근의 묘지에서 교회 관리인이 구덩이를 파자 갈색 흙더미가 속살을 드러내며 쌓여갔다. 여기에 길고 검은 프록코트를 입고 이상하리만치 높은 모자에 번들거리는 검정 구두를 신은 사람들이 침통한 표정으로 검은 상자를 이고 왔다. 목사복을 입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주변에 울려 퍼졌다. 여자들은 흐느꼈다. 나는 사람을 구덩이에 묻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예전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땅에 묻혔으며 이제 주 예수가 그들을 데려간다는 이야기도 듣게 되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기도문을 가르쳐주고 매일 저녁 기도하게 했다. 나는 밝은 마음으로 기도했다.
날개를 펴주시옵소서 자비하신 예수여, 당신의 작은 새, 당신의 아이를 받아주소서 …
하지만 이제 나는 주 예수가 아이 말고도 다른 사람들까지“ 데려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데려간다는 건 그들을 구덩이에 빠뜨린다는 의미였다 … 나는 주 예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주 예수는 더 이상 푸근하고 자애로운 큰 어미 새의 느낌이 아니라 검은
프록코트를 입고 높은 모자에 광이 나는 검은 신발을 신고 분주하게 검은 상자를 운반하던 온통 검은색으로 뒤덮인 음울한 사람들이 함께 연상되는 존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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