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리주의자의 고달픈 삶

공리주의가 안고 있는 이러한 문제들은 어떻게 좋은 공리주의자가 될 수 있는지를 더 깊게, 그리고 더 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그러나 답을 찾기에 앞서 몇 가지 문제를 더 살펴보자. 첫째는 공리주의 사고의 경직성이다. 앞서 필자는 공리주의가 도덕적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분명하고도 확실한 방법을 쓴다는 일종의 찬사를 보낸 바 있다. 그 대목에서 약간 냉소 같은 걸 느끼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그 방법이란, 곧 선택할 수 있는 모든 대안을 펼쳐 놓고, 각각의 대안을 선택할 때 들어가는 비용(그리고 실제로 그 비용을 지출할 확률)과 그 대안을 채택할 때 얻을 수 있는 효과(그리고 그것이 실현될 확률)를 계산한 다음 실현 가능성이 가장 높으면서 비용 대비 효과의 값이 가장 큰 행위의 대안을 찾아내는 것이다. 쉬운 일이다. 하지만 실제로 들어가면 행위자가 채택할 수 있는 대안과 경우의 수가 많을 수 있어서 어지러울 정도로 계산이 복잡해질 것이다. 이 점에 비추어, 공리주의는 본래 목적에서 빗나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공리주의가 추구하는 핵심적 가치는 더 나은 세상을 실현하는 데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처럼 거창한 계산을 하는 데 시간을 보내고 나면 행복을 실현하거나 고통을 완화할 시간을 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둘째는 공리주의자 역시 우정 같은 인간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친목이나 충성처럼 인간이 맺을 수 있는 다양한 인간관계의 범위가 얼마나 넓은지를 생각해보라. 필에게 전화를 걸어 주말 여가를 같이 보낼 수 있는지 알아보려 한다. 왜 다른 사람이 아니고 하필이면 필인가? 도와야 할 사람들도 많이 있는데? 필은 내 친구이기 때문이다. 다른 아이들보다는 내 아이들을 위해 시간과 돈을 쓴다. 부모님께 전화를 드리는 건 그들이 내 부모이기 때문이다. 내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안고 있는 문제에 참견하는 건 그들이 내 학생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그들이 모두 나의 친구, 아이, 부모, 배우자 등등 나와 가까운 관계에 있으면서 서로 귀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란 사실이다. 이러한 연결로 나는 다른 사람들이 아닌 이들에 대하여 특별한 충성심을 지니거나 특별한 배려를 해야 한다(물론 이들에 대한 특별한 고려가 무엇인지는 내가 이들과 어떤 형태의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제 공리주의자들이 평등이나 공정, 그리고 복지 같은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살펴보자. 공리주의자라면 약속이란 것에 뒤따르는 구속이나 금기란 것에 깃든 금지란 말을 들을 때처럼, ‘특별한 관련성’이란 말을 그저 신비스럽기만 한 언어로 생각하지 않을까? 급진적 공리주의를 대변하던 윌리엄 고드윈14이 개인적인 관계를 맹렬히 공격한 내용은 특히 인상적이다. 그는 죽어야 할 처지에 놓인 두 사람 가운데 오직 한 사
람만 살려내야 하는 사례를 든다. 한 사람은 대주교 페늘롱이고 또 한 사람은 대주교의 시종이다(그런데 이 시종은 우리의 형이거나 아버지다). 고드윈은 묻는다. “도대체 ‘나의 누구’란 것이 무엇이기에 공정한 진실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할 결정을 뒤집어 놓는단 말인가?” William Godwin(1756~1836)고드윈(최초의 근대 아나키즘 사상가로 일컬어지는 영국의 사회철학자, 정치평론가)은 대주교를 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복지를 증진하는 데 더 크게 이바지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사례에서 개인적 관계란 것은 도덕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이에 비추어, 공리주의적 삶은 지극히 엄격하고, 자기 희생적이며, 금욕적이어서 인간의 심성에 깊이 뿌리내린 친족관계, 감동, 친밀함 같은 것들을 도덕이란 이름으로 깡그리 부정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리주의자가 우정이나 그 밖의 개인적인 관계를 도외시하는 것은 공리주의의 도덕이 그만큼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인간에게 부과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우리가 살펴본 세계적 빈곤의 문제와도 관련된다. 심히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은 도덕적 상식이다. 한편 우리가 ‘틈틈이’ 짬을 내어 자신의 기획을 추진할 권리를 지닌다는 것도 도덕적 상식에 속한다. 하지만 공리주의자들은 ‘여유 있는’ 시간이란 도덕적으로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풋볼을 하거나 바이올린을 배우거나 외국어를 배우거나 소설을 읽거나 이런 일을 할 시간이 있다면, 그 시간을 모두 인간 전체가 누릴 행복의 총량을 늘리는 데 써야 한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이 곤경에 빠진 터에 이렇듯 한가한 활동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공리주의자들의 눈에는 이기적인 자기 몰입으로 비칠 뿐이다. 공리주의자들은 도덕의 범위를 확대하여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뒤덮어 버린다. 이렇게 되면 개인 사이의 모든 관계와 모든 개인적인 기획은 공리주의적 도덕에 뒤덮여 질 식사를 면하기 어려워진다.
전체의 복지를 위해 성실한 관계나 개인적인 쾌락을 모두 포기해야 한다는 공리주의의 주장은 모든 사람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압박감을 주지만, 이러한 공리주의자들의 태도에 일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공리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그 누구의 행복도 다른 사람의 행복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없다면, 다시 말해서, 그 누구도 더 부유한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 행복해야 할 까닭이 없다면, 자신의 행복이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복을 다른 사람들의 행복보다 중시해야 할 이유는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해야 할 까닭이 무엇일까? 물론 그들이 나에겐 특별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리라. 하지만 나의 관점이 내세우는 타당성은 왜 그처럼 유별난 것일까? 가까운 사람들만을 중시한다는 건 결국, ‘가진’ 사람은 언제나 더 많이 거둬들이면서 살아가는데, ‘갖지 못한’ 사람은 늘 자기 몫을 잃어버린 채 어렵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친구나 가족 같은 사람들의 이익을 돌보는 것이 자기 종족의 이익만을 돌보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결국, 두 가지 모두 비도덕적인 일이 아닐까?
그렇지만 고드윈의 엄격한 공리주의적 태도마저 본래 목적이나 의도를 실현하기는 어렵다. 다시 두 세상을 비교해보자. 하나는 사람들이 우정과 사랑으로 관계를 맺고, 자신의 재능과 이해를 마음껏 발휘하거나 (오보에를 연주하고, 시를 읽거나 쓰면서……) 추구하는 세상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못한 세상이다. 인간의 삶에서 이런 관계와 이해가 행복의 중요한 근원이라면, 두 번째보다는 첫 번째 세상에서 사람들은 더 행복하게 살 것이다. 그런데 고드윈 같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두 번째에 가깝지 않을까? 공리주의는 세상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데 목적을 둔다고 하는데, 이런 목적은 결국 빗나가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