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절 워버턴Nigel Warburton『한 권으로 읽는 철학의 고전 27 Philosophy the Classics』(도서출판 知와 사랑)


이 책은 27개의 장으로 이뤄졌으며, 각 장은 한 권의 철학 고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27권의 철학책이 한 권에 담긴 것입니다. 이 고전들은 현재에도 여전히 토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철학적 문제들을 담고 있으며, 새로운 통찰력을 지속적으로 제공해줍니다. 이런 이유 외에도 27권은 자체로 위대한 문학작품으로서의 지위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 책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플라톤『국가』 중에서

동굴 the cave

동굴이 하나 있다고 상상해보자. 갇힌 자들은 사슬에 묶인 채 안쪽 깊숙이 있는 벽면을 마주하고 있다. 이들은 평생 거기에 묶여 있었으며, 이들의 머리는 동굴의 벽면 말고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도록 고정되어 있었다. 그들 뒤로 불이 있으며, 불과 그들의 등 사이에 길이 하나 있다. 길을 따라 다양한 사람들이 걸어 지나가면서 그림자를 동굴의 벽면에 드리운다. 몇몇은 동물의 모형을 운반하면서 그림자를 만든다. 동굴 안의 갇힌 자들은 언제나 그림자들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이들은 그림자들을 실재라고 믿는다. 이것들 보다 나은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이들은 결코 진짜 사람들을 보고 있지 않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풀려나서 불 쪽을 볼 수 있게 된다. 처음에 그는 불빛에 눈이 부셔 아무 것도 볼 수 없다가, 점차 주변의 세계를 식별하기 시작한다. 그런 다음에 그는 태양빛이 충만한 동굴 밖으로 나오게 되었고, 또다시 눈이 부셨다. 서서히 그는 이제까지의 삶이 빈약했음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는 언제나 그림자들의 세계에 만족했었다. 그의 등 뒤에서는 실재의 세계가 풍요로움의 밝은 빛을 발하고 있었을 때 말이다. 이제 그의 눈이 낮의 밝음에 적응되면서 그의 동료들이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되고 동료들이 안쓰럽게 느껴진다. 드디어 그는 빛에 익숙해져서 태양조차 직접 바라볼 수 있다.

그런 다음에 그는 동굴 속의 자기 자리로 되돌려 보내진다. 이제 그의 눈은 그림자들에 더 이상 익숙하지 않다. 그는 더 이상 그림자들을 정교하게 식별할 수 없다. 그의 동료들은 쉽게 해내는데도 말이다. 이들이 보기에, 그는 동굴 밖을 다녀온 뒤로 시력을 잃었다. 그는 실재 세계를 보았지만, 그의 동료들은 피상적인 현상의 세계에 만족한 채 남아 있으며, 동굴을 떠날 수 있다 하더라도 떠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이 ‘동굴에 갇힌 자들의 비유’는 플라톤의 대표작 『국가』의 중간쯤에 나온다. 이것은 실재의 본성을 설명하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대한 분명한 그림을 제공해준다. 플라톤에 따르면 사람들 대부분은 갇힌 자들처럼 순전한 현상의 세계에 만족한다. 오직 철학자들만이 동굴 밖을 여행하여 실재 사물들을 경험하는 법을 배운다. 오직 이들만이 진정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일상적 지각의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며 불완전하다. 그러나 철학자들이 접하는 이데아의 세계는 불변하며 완전하다. 이데아의 세계는 오감을 통해서는 지각될 수 없으며, 누구든 오직 사유를 통해서만 그것을 경험할 수 있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 Plato and Socrates

스승 소크라테스의 삶과 죽음은 플라톤 철학에 주된 영향을 미쳤다. 소크라테스는 주변에 있는 아테네의 부유한 젊은이들을 매료시킨 카리스마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아무런 저술도 남기지 않았지만 장터에서 나누는 대화를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자신이 가르칠 학설은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면서, 오히려 일련의 매서운 질문들을 통해 그의 대화 상대자가 경건, 정의, 또는 도덕성과 같은 것들에 대해 실제로는 얼마나 적게 알고 있는지를 드러내 보여주고자 했다. 플라톤이 아직 청년이었을 때,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신들을 믿지 않는다는 죄명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전통적인 집행방식에 따라 독약을 마셨다.

플라톤은 자신의 대화편을 통해 소크라테스에게 일종의 사후의 삶을 주었다. 그렇지만 플라톤의 저작에서 소크라테스로 불리는 인물은 그 견해에 있어 실재 소크라테스와는 아마도 상당히 다를 것이다. 플라톤은 실제 있었던 대화를 기록하듯이 썼지만, 그가 『국가』를 쓸 당시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는 이미 플라톤 자신의 견해를 알리는 대변자가 되어 있었다.

『국가』는 플라톤의 두 가지 특색 있는 글쓰기 방식의 혼합을 보여준다. 제1권에는 소크라테스와 몇몇 친구들 사이의 대화가 있는데, 이것은 연극으로 보면 제1막에 해당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배경설정을 비롯하여 및 서로 다른 인물들의 성향에 관해 알게 된다. 그러나 뒷부분에서는 ─ 비록 플라톤은 계속 대화 형식을 지키기는 하지만 ─ 설명의 추진력은 소크라테스의 말에 실려 있으며, 보조 출연자들은 그저 그의 발언에 동의할 뿐이다.





트라시마쿠스와 글라우콘 Thrasymachus and Glaucon

『국가』의 본문은 트라시마쿠스와 글라우콘의 도전에 대한 응답들로 이루어져 있다. 트라시마쿠스는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은 그저 강자의 이익에 봉사하는 행위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힘이야말로 무엇이든 옳게 만드는 것의 전부이다. 정의는 단지 강자가 설정한 이기적 규칙들에 순종하는 것의 문제이다. 개인적 행위의 차원에서 보면 불의가 정의보다 훨씬 더 이익이다. 즉 자신의 정당한 몫보다 더 많은 것을 챙기는 사람들이 정의로운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다.

글라우콘은 더 나아가서 정의롭게 행동하는 사람들은 오직 일종의 자기보존으로서 그렇게 할 뿐이라고 제안한다. 신화의 인물 가이게스처럼, 투명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반지를 손에 넣은 사람은 누구든 정의롭게 행위 할 동기를 상실할 것이다. 이런 사람은 범죄나, 유괴, 사기를 저지르고도 무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라우콘은 한 명의 정의로운 사람이 그 밖의 사람들에 의해 불의한 자로 여겨지는 상황을 상상한다. 그 사람은 고초를 겪고 형을 받을 것이다. 그의 삶은 행운과는 무관한 듯이 보인다. 이런 사람을 교활하고 사악한 어떤 사람, 즉 빠져나갈 수 있다 싶을 때마다 온갖 나쁜 짓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정의로운 체하는 사람과 비교해 보라. 그는 행복한 삶을 살 것이며, 존경의 모범으로 여겨질 것이다. 비록 그 가면의 속은 철저히 악할지라도 말이다. 이것이 보여주는 바는 정의란 보상을 주지 못한다는 것, 아니면 적어도 언제나 보상을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소크라테스가 정의로운 삶을 옹호하기 원한다면 그는 앞서 기술된 상황이 이야기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사실 이 책의 나머지에서 소크라테스는 바로 이런 일을 하고자 한다. 그는 정의가 보상을 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임을 보여줄 길을 찾는다. 정의는 두 가지 점에서, 즉 그 결과에 있어서 그리고 그 자체로 좋다는 것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프로이트를 찾아온 환자들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은 순수하지 않고 여러 부분들로 나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분들은 서로 갈등을 겪습니다. 프로이트에게 정신은 종종 내란에 가까운 갈등 상황을 겪는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에고와 이드』에서 말했습니다. 이드id는 본능으로서 비합리적이고 충동적인 부분이며, 에고ego는 자아로서 현실을 기준으로 한 합리적 요소입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심리 구조를 이드(본능), 에고(자아), 슈퍼에고(초자아) 세 가지로 분류합니다.

자아는 세 주인에게 의존하는 빈약한 창조물로, 결국 세 주인에게 위협을 받는다. 세 주인이란 외부 세상, 원아의 리비도, 혹독한 초자아를 일컫는다. 세 종류의 불안은 이 세 가지 위험에 대응하는데, 불안이란 위험에서 후퇴한 걸 말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성이란 내적 갈등과 그것이 필연적으로 야기하는 고통에 대한 여러 가지 해결책과 함께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그는 대부분의 해결책을 열중이라는 형태로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열중은 일반적으로 초자아를 좀 더 부드럽게 변화시켜 덜 가혹한 판단을 내리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에 와인 한 잔만 마시고 싶어 하다가 한 잔 마시고 나면 한 잔 더 마시고 싶어 합니다. 프로이트는 상위자아가 알코올을 통해 긴장을 푸는 걸 요구한다고 주장합니다.

4월 17일 일요일(부활절)은 프로이트가 연구를 한 지 52주년이 되는 날인 동시에, 자신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치료자라고 믿어온 그가 더는 환자를 볼 수 없는 슬픈 날이기도 했습니다. 합병 뒤 그는 자신을 둘러싼 복잡한 상황으로 치료가 불가능해지면서 마지막 남은 두 환자를 돌려보내야 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자각하는 의식이 곤란한 처지에 놓이면 자각하지 못하는 무의식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다.

프로이트를 찾아온 환자들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노이로제를 접한 평범한 의사들은 손을 들며 포기를 선언할 뿐이었습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먹을 수 없는 사람, 외출을 하지 못하는 사람, 도시의 광장을 걸을 수 없는 사람, 부모와 함께 집에 있는 걸 견디지 못하는 사람, 종교의식에 너무 열중해서 슬픈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것 말고는 제대로 된 인생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프로이트를 찾아왔습니다.

프로이트는 그들이 욕망의 복잡성과 그 욕망이 억압되어 있을 때의 장점을 자각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들은 프로이트가 마음을 산란하게 만드는 이야기, 예를 들면 형부와 사랑에 빠진다거나 사랑하는 남동생이 죽기를 바란다는 식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구토증을 느끼고 소름 끼쳐 했지만, 그 순간을 기점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프로이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차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금지된 것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중요한 건 다른 사람들도 금지된 것을 갈망한다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건 그들이 기괴하거나 터무니없는 짓을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프로이트는 종종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 고통스러워합니다.” 정신분석이 가르치는 것들 중 하나가 그러한 기이한 욕망이야말로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이라는 사실입니다.

프로이트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서 우선 자신들이 품은 가장 기이한 욕망과 마주하는 걸 견뎌내고 차분한 인내심과 심지어는 유머 감각을 가지고 그것을 바라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프로이트가 포기해야만 했던 건 환자만이 아니었습니다. 4월 19일 그는 동생 알렉산더에게 모아둔 시가를 모두 건넸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너의 72번째 생일에 나는 기나긴 인생을 함께 했던 우리가 헤어질 때가 되었다는 걸 알았다. 미래는 늘 불확실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특히 앞을 내다보기 힘들구나. 수년간 모아둔 맛 좋은 시가를 네게 아낌없이 주련다. 넌 이 즐거움을 여전히 누릴 수 있지만, 난 이제 그럴 수가 없구나.

스물네 살부터 흡연을 시작한 프로이트는 담배에서 곧장 시가로 옮겨갔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엄청난 흡연가여서 여든한 살 때까지 손에서 담배를 놓지 못했습니다. 프로이트는 조카 해리가 열일곱 살 때 그의 생애 처음으로 담배를 주었습니다. 해리가 거절하자 그는 말했습니다.

얘야, 담배는 인생에서 가장 값이 싸면서도 가장 큰 즐거움을 선사한단다. 네가 나중에도 담배를 피우지 않겠다고 결심한다면 네가 무척 안쓰러울 것 같구나.

프로이트는 1923년에 자신의 턱과 의치에 종양이 자란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담배를 끊으라는 말을 들을까봐 한동안 의사들이 그 사실을 알지 못하게 하려고 애썼습니다. 의사들은 암의 진행 상황을 알았고 그에게 조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의사들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시가를 피웠습니다. 턱이 고통 속에 거의 굳어버리다시피 했을 때에도 그는 지렛대로 입을 열어 사랑하는 시가를 물었습니다.

절친한 친구 플리스가 시가에 정신분석학을 대입해 생각해보라는 설득에 프로이트도 시가가 다른 모든 중독처럼 세상에서 가장 흔하고 희귀적인 중독, 바로 자위행위의 대용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습니다. 흡연에 대한 몰두는 강력하고 지속적인 열망이 체환된 것입니다. 담배 중독, 혹은 그것을 향한 욕구는 사랑이나 명예를 향한 욕구만큼이나 잠재적인 것입니다. 알렉산더에게 모아놓은 시가를 준 뒤에도 프로이트는 시가를 끊지 않았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히틀러와 파울 괴벨스는 빈에서 군중과 마주했다


 

 

 

 

오스트리아에서 이룬 성공은 독일인들 사이에서 히틀러의 인기를 더욱 높여주었습니다. 히틀러의 연설에는 신이 독일의 재탄생을 이끌 인물로 자신을 선택했다는 자화자찬이 가득했습니다. 자신감이 넘친 히틀러는 슈슈니크가 3월 13일로 정한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통합에 대한 국민 투표를 진행시키고 침략을 취소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히틀러는 총통으로서 자신이 오스트리아에서 한 일이 전적으로 합법적이란 점과 오스트리아인이 자신을 운명의 인물로 환영한다는 사실을 세상에 부여주고 싶었습니다.

투표 전날인 토요일, 히틀러와 파울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1897-1945)는 빈에서 군중과 마주했습니다. 1928년에 국화의원에 당선, 이듬해에 당 선전부장이 된 괴벨스는 새로운 선전수단을 구사하고 교묘한 선동정치로서 1930년대 당세 확장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1933년 나치스가 정권을 잡자 국민계발선전장관, 문화회의소 총재로서 문화를 완전히 통제했습니다. 최후까지 히틀러에 충성한 그는 히틀러가 자살한 다음날 총리 관저의 대피호에서 처자와 함께 자살하게 됩니다. 

그날 히틀러와 괴벨스가 군중과 마주한 장면을 나치 기관지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발코니에 나타난 괴벨스 박사가 선언한다. ‘독일인이여, 난 위대한 독일제국의 날을 선포한다. 깃발을 올려라.’ 사이렌이 울린다. 깃대에서 깃발이 올라간다. 수만 명이 머리를 위로 올린 채 서 있다. 그들의 침묵은 기도이다. 기쁨의 함성을 외치라는 요구도 소용없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은 우리의 조물주에게 밀려드는 기쁨 그 이상의 것을 말한다.

그날 늦게, 자신을 맹목적으로 예수와 비교하던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독일제국이 이곳에 한 청년을 보낸 건 분명 신의 뜻이다. 청년을 지도자로 세워 자신을 모국을 독일제국에 되돌리는 건 명백한 신의 뜻이다. 그게 아니라면 신의 섭리를 의심해야 한다.

히틀러는 눈물을 글썽이며 군중에게 외쳤습니다.

나는 가장 심각한 굴욕에 처해 있을 때에도 독일을 믿었다.

이제 오스트리아가 히틀러를 믿어야 할 시간이었습니다. 투표 결과 오스트리아 선거인의 99.73%가 통합에 찬성했습니다. 독일에서는 90.2%가 동의했고, 99.8%는 새로운 독일 의회를 위해 히틀러가 내세운 후보자들을 찬성했습니다. 오스트리아인 1만1,281명이 히틀러를 반대했는데, 그중 4,939명이 빈 시민들이었습니다. 히틀러가 말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나의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게슈타포가 프로이트의 막내딸 안나를 데려가다


 

 

 

 

3월 22일 화요일, 비밀국가경찰geheime staatspolizei인 게슈타포gestapo가 베르크가세 19번지에 들이닥쳐 프로이트의 막내딸 안나를 데려갔습니다. 나치는 국제정신분석학회가 반파시즘 운동의 선봉에 섰다고 믿었습니다. 안나는 게슈타포에게 아버지가 계단도 오르내리기 힘들 정도로 쇠약하기 때문에 아파트를 떠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안나는 아버지 대신 그들을 따라가서 학회에 대한 질문에 응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날 아파트에 함께 있던 마리 보나파르트도 안나와 마찬가지로 자신도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왕가의 저명인사를 체포해서 대중에게 비난 받을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안나가 게슈타포와 떠나기 전, 프로이트의 주치의 막스 슈어Max Schur(1897-1969)는 나치가 고문하려고 하면 곧바로 자살할 수 있는 독약 베로날(최면제)을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습니다. 빈 전역에 있던 유대인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일부는 살해당했고, 대다수는 다카우의 강제수용소에 끌려갔습니다.

나치와 대면한 안나가 무슨ㅇ 말을 했는지, 무슨 말을 하지 않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녀는 아버지가 수년 동안 해온 일을 옆에서 지켜보았고, 프로이트가 이런 위급상황이 발생할 경우 사용할 수 있는 완벽에 가까운 커버스토리를 딸에게 알려주었을 것입니다. 안나는 경찰을 철저하게 속였고, 그들에게 그것은 완벽한 사실이 되었습니다.

1938년 3월 28일, 프로이트는 반가운 소식을 접했습니다. 어니스트 존스가 영국 정부에게서 프로아트와 그 가족뿐 아니라 빈의 정신분석학자들까지 영국으로 이민 오는 걸 허가받은 것입니다. 대략 성인 18명과 아이들 6명이 영국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존스는 왕립협회 사무관인 처남 윌리엄 트로터William Trotter를 통해 협회 회장인 물리학자 윌리엄 브래그William Henry Bragg(1862-1942) 경을 소개받았습니다. 윌리엄 경은 프로이트의 이민을 추천할 수 있는 내무장관 새뮤얼 호어Samuel Hoare에게 쓴 편지를 존스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영국이 프로이트와 그의 가족을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그것이 나치도 그들의 이민에 동의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프로이트 가족은 나치에게서 자기들에게 더는 요구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문서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 진술서를 받기 위해 프로이트 가족은 엄청난 망명 세금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나치가 프로이트의 집과 출판사를 샅샅이 뒤지던 날


 

 

 

 

예쁘지도 않고 매력적인 외모가 아닌 마르타와 프로이트가 결혼한 지 50년이 되었습니다. 항상 자신의 일에 신중한 마르타는 여섯 자녀를 키우면서 자녀들을 바른 길로 인도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방해받지 않고 연구할 수 있도록 서재를 깔끔하게 정리했습니다. 그녀의 집은 늘 깨끗했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연구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습니다. 그녀는 남편과 지적인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습니다. 프로이트의 대화 상대는 그의 친구들이나 딸 안나, 때때로 그런 일에 호기심과 재능이 있는 처제 민나였습니다.

나치가 프로이트의 집과 출판사를 샅샅이 뒤지던 날, 빈의 모든 유대인에게 가해지는 협박을 안 빈 주재 공사 존 윌리는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Cordell Hull 에게 전보를 보냈습니다. “존경하는 프로이트 박사가 노령과 질병의 고통도 모자라 위험에 처했습니다.” 헐은 이 메시지의 복사본을 프로이트와 함께 윌슨 책을 펴내기도 했고, 당시 파리에 살던 윌리엄 불리트에게 보냈으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도 현재 상황을 보고했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시간을 두고 프로이트가 보나파트라 공주에 의해 안전하게 파리로 이송되는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프랑스가 그에게 비자를 발급하면 가능한 일입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독일 주재 미국 대사 휴 로버트 윌슨Hugh Robert Wilson에게 메시지를 보내라고 헐에게 지시했습니다. 헐이 쓴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윌리가 어제 빈에서 프로아트 박사가 위험에 처했다는 전보를 보내왔습니다. 대통령은 대사께서 이 문제를 적당한 독일 관료들과 사적이고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다뤄줄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또 적합한 권위자가 해결방안을 마련해서 프로이트 박사와 그의 가족이 빈을 떠날 수 있도록 조치해주기를 강력히 희망하셨습니다.

곧이어 코델 헐은 나치가 프로이트의 집에 침입해 돈을 훔치고 그의 여권을 몰수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여권은 미국이 프로이트를 돕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프로이트가 아끼는 제자 어니스트 존스Ernst Jones는 합병 초기부터 프로이트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미국인 외교관들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섰습니다. 존스는 정신분석을 시작한 초기에 어린이 환자들에게 음란행위를 한 혐의로 고발되어 출생지인 영국으로 떠나야 했습니다. 당시 존스는 환자들이 그들의 환상을 자신에게 투사하는 것이라고 항변했습니다. 그는 영국에서 캐나다 토론토로 옮겨가 정신분석학을 강의하고, 1911년에는 미국 정신분석학회를 창립하는 데 공헌했습니다. 2년 뒤 존스는 영국으로 돌아와 정신분석 개업의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존스는 프로이트를 공격에서 보호하고 스승의 생각을 정교하게 만들었지만, 자신의 생각을 반영한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나치가 출판사와 프로이트의 집에 침입한 뒤 존스는 스승에게 빈을 떠날 것을 제안했지만, 프로이트는 그곳에 머무를 확고한 결심을 내비쳤습니다. 프로이트는 존스에게 자신은 여행은커녕 기차 객실까지도 갈 수 없을 것이고, 자신을 받아주고 싶어 하는 나라도 없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존스는 타이타닉호의 2등 항해사 라이톨러Lightoller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는 배의 보일러가 터지면서 바다 표면으로 떠 밀려갔으나 난파선을 타고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훗날 심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언제 배에서 내렸습니까?” 그가 말했습니다. “전 한 번도 배에서 내린 적이 없습니다. 배가 저를 떠났지요.

이후 기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3월 22일 화요일에 일어난 일은 프로이트의 생애에 최악의 것으로, 그의 행보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프로이트가 안나를 거의 잃을 뻔한 악몽 같던 날, 그의 곁에는 또 다른 동맹군이 있었는데, 그가 ‘우리의 공주님’이라고 부르던 마리 보나파르트였습니다. 공주는 나폴레옹의 형제 루시앙Lucien의 증손녀입니다. 그녀는 그리스의 왕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1세의 형제이자 덴마크의 왕 크리스티안Christian 10세의 종형제인 조지George 왕자와 결혼했습니다. 공주는 어마어마한 부자이고 유럽에 있는 모든 사람, 아니 적어도 특별한 계층의 사람들은 모두 알았습니다. 프로이트는 하루에 두 시간씩 두 달 넘게 공주의 정신을 분석했습니다. 그는 공주의 성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는데, 그녀는 자신이 불감증이라고 말했습니다. 공주 또한 정신분석자가 되어 다수의 에세이와 책을 집필했습니다. 그중엔 프로이트와 끊임없이 서신 왕래를 하면서 쓴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1809-49)에 대한 연구도 있습니다.

공주는 프로이트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에게 반했습니다. 그녀는 프로이트를 두고 아인슈타인과 프랑스의 화학자, 미생물학자로 화학조성, 결정구조, 광학활성의 관계를 연구하여 입체화학의 기초를 구축한 파스퇴르Louis Pasteur(1822-95)를 합쳐놓은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프로이트가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그런 말로 치켜세우니 기분이 좋군. 하지만 당신 말에 동의할 수 없어. 내가 겸손해서 그런 건 절대 아냐. 난 내가 발견한 것에 자부심을 느끼지만, 자신에 대한 자부심은 아니라네. 훌륭한 발견자는 반드시 훌륭한 의식을 가져야 하는 건 아니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만큼 세상을 바꾼 사람이 있나? 그렇지만 그는 모험가일 뿐이야.

프로이트도 공주에 빠졌는데, 그는 그녀가 양성애자이고, 세상을 여자의 눈만이 아닌 남자의 눈으로도 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19세기 유럽의 지성계에서 가장 매혹적인 여성과 그녀를 비교하면서 말했습니다.

루 안드레아스-살로메는 단지 거울에 불과하지. 그녀에게는 당신과 같은 남자다움도, 진실함도, 멋도 없어. 당신은 어떤 상황에서도 얌전한 척하지 않아. 어느 누구도 나만큼 당신을 이해하지 못할 거야. 하지만 나는 프티부르주아petit bourgeois(소시민)일 뿐이지. ... 난 내 아들이 이혼하거나 딸이 불륜을 저지르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까.

합병이 있고 며칠 뒤 공주는 빈으로 와서 그리스 공사관에 거처를 구한 다음 프로이트 가족과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1938년, 나치가 국제적 힘을 얻기 위해 움직일 때 공주 같은 인물이 얼마든지 그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그 시점에서 공주는 나치에게 대항할 수 있었습니다.

공주가 베르크가세 19번지에 도착한 3월 17일, 휴 로버트 윌슨은 외무부에서 독일 국무장관 에른스트 폰 바이츠제커Ernst von Weizsäcker(1882-1951)를 만나 프로이트에 대한 자신의 걱정을 전했습니다. 바이츠제커는 대사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빈에서 프로이트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아닌 수수께끼 같은 인물 안톤 사우어발트Anton Sauerwald 박사였습니다. 합병 후 나치는 빈에 있는 모든 유대인 사업을 관리하는 소위 ‘위원’을 임명했는데, 사우어발트가 프로이트와 그의 책을 출간한 출판사를 담당했습니다. 출판사의 자산을 정리해 나치 정부에 가져다주는 임무를 맡았을 때 사우어발트의 나이 35세였습니다. 그는 빈 대학에서 과학과 의학, 법학을 전공했고, 1929년에 졸업했습니다. 이후 그는 화학연구소를 열고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사우어발트를 고용해 빈과 그 주변에 매설된 폭탄을 연구, 보고하는 임무를 맡겼습니다. 폭탄은 대부분 당시 불법 단체였던 나치가 묻었으며, 때로는 하루에 40개나 폭발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 일을 통해 사우어발트는 놀라운 성공을 거뒀는데, 그가 폭발물의 종류와 개수에 대한 보고서를 신속하게 제출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정확한 보고로 빈 경찰과 함께 화려한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자신의 연구실에서 나치를 위한 폭발물을 제작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는 낮에 폭탄을 제작하고 다음날 아침에 보고했습니다.

처음 출판사를 둘러보던 사우어발트는 나치에 헌신적인 일원인양 행세했습니다. 그는 무엇 때문에 비열한 유대인과 어울리느냐면서 출판사 직원들을 모욕했습니다. 한참 거들먹거리면서 욕설을 퍼붓고 나니 따분함이 밀려왔습니다. 그는 프로이트의 책과 에세이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엄청난 무언가를 발견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