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절 워버턴Nigel Warburton『한 권으로 읽는 철학의 고전 27 Philosophy the Classics』(도서출판 知와 사랑)


이 책은 27개의 장으로 이뤄졌으며, 각 장은 한 권의 철학 고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27권의 철학책이 한 권에 담긴 것입니다. 이 고전들은 현재에도 여전히 토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철학적 문제들을 담고 있으며, 새로운 통찰력을 지속적으로 제공해줍니다. 이런 이유 외에도 27권은 자체로 위대한 문학작품으로서의 지위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 책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플라톤『국가』 중에서

동굴 the cave

동굴이 하나 있다고 상상해보자. 갇힌 자들은 사슬에 묶인 채 안쪽 깊숙이 있는 벽면을 마주하고 있다. 이들은 평생 거기에 묶여 있었으며, 이들의 머리는 동굴의 벽면 말고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도록 고정되어 있었다. 그들 뒤로 불이 있으며, 불과 그들의 등 사이에 길이 하나 있다. 길을 따라 다양한 사람들이 걸어 지나가면서 그림자를 동굴의 벽면에 드리운다. 몇몇은 동물의 모형을 운반하면서 그림자를 만든다. 동굴 안의 갇힌 자들은 언제나 그림자들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이들은 그림자들을 실재라고 믿는다. 이것들 보다 나은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이들은 결코 진짜 사람들을 보고 있지 않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풀려나서 불 쪽을 볼 수 있게 된다. 처음에 그는 불빛에 눈이 부셔 아무 것도 볼 수 없다가, 점차 주변의 세계를 식별하기 시작한다. 그런 다음에 그는 태양빛이 충만한 동굴 밖으로 나오게 되었고, 또다시 눈이 부셨다. 서서히 그는 이제까지의 삶이 빈약했음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는 언제나 그림자들의 세계에 만족했었다. 그의 등 뒤에서는 실재의 세계가 풍요로움의 밝은 빛을 발하고 있었을 때 말이다. 이제 그의 눈이 낮의 밝음에 적응되면서 그의 동료들이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되고 동료들이 안쓰럽게 느껴진다. 드디어 그는 빛에 익숙해져서 태양조차 직접 바라볼 수 있다.

그런 다음에 그는 동굴 속의 자기 자리로 되돌려 보내진다. 이제 그의 눈은 그림자들에 더 이상 익숙하지 않다. 그는 더 이상 그림자들을 정교하게 식별할 수 없다. 그의 동료들은 쉽게 해내는데도 말이다. 이들이 보기에, 그는 동굴 밖을 다녀온 뒤로 시력을 잃었다. 그는 실재 세계를 보았지만, 그의 동료들은 피상적인 현상의 세계에 만족한 채 남아 있으며, 동굴을 떠날 수 있다 하더라도 떠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이 ‘동굴에 갇힌 자들의 비유’는 플라톤의 대표작 『국가』의 중간쯤에 나온다. 이것은 실재의 본성을 설명하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대한 분명한 그림을 제공해준다. 플라톤에 따르면 사람들 대부분은 갇힌 자들처럼 순전한 현상의 세계에 만족한다. 오직 철학자들만이 동굴 밖을 여행하여 실재 사물들을 경험하는 법을 배운다. 오직 이들만이 진정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일상적 지각의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며 불완전하다. 그러나 철학자들이 접하는 이데아의 세계는 불변하며 완전하다. 이데아의 세계는 오감을 통해서는 지각될 수 없으며, 누구든 오직 사유를 통해서만 그것을 경험할 수 있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 Plato and Socrates

스승 소크라테스의 삶과 죽음은 플라톤 철학에 주된 영향을 미쳤다. 소크라테스는 주변에 있는 아테네의 부유한 젊은이들을 매료시킨 카리스마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아무런 저술도 남기지 않았지만 장터에서 나누는 대화를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자신이 가르칠 학설은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면서, 오히려 일련의 매서운 질문들을 통해 그의 대화 상대자가 경건, 정의, 또는 도덕성과 같은 것들에 대해 실제로는 얼마나 적게 알고 있는지를 드러내 보여주고자 했다. 플라톤이 아직 청년이었을 때,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신들을 믿지 않는다는 죄명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전통적인 집행방식에 따라 독약을 마셨다.

플라톤은 자신의 대화편을 통해 소크라테스에게 일종의 사후의 삶을 주었다. 그렇지만 플라톤의 저작에서 소크라테스로 불리는 인물은 그 견해에 있어 실재 소크라테스와는 아마도 상당히 다를 것이다. 플라톤은 실제 있었던 대화를 기록하듯이 썼지만, 그가 『국가』를 쓸 당시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는 이미 플라톤 자신의 견해를 알리는 대변자가 되어 있었다.

『국가』는 플라톤의 두 가지 특색 있는 글쓰기 방식의 혼합을 보여준다. 제1권에는 소크라테스와 몇몇 친구들 사이의 대화가 있는데, 이것은 연극으로 보면 제1막에 해당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배경설정을 비롯하여 및 서로 다른 인물들의 성향에 관해 알게 된다. 그러나 뒷부분에서는 ─ 비록 플라톤은 계속 대화 형식을 지키기는 하지만 ─ 설명의 추진력은 소크라테스의 말에 실려 있으며, 보조 출연자들은 그저 그의 발언에 동의할 뿐이다.





트라시마쿠스와 글라우콘 Thrasymachus and Glaucon

『국가』의 본문은 트라시마쿠스와 글라우콘의 도전에 대한 응답들로 이루어져 있다. 트라시마쿠스는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은 그저 강자의 이익에 봉사하는 행위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힘이야말로 무엇이든 옳게 만드는 것의 전부이다. 정의는 단지 강자가 설정한 이기적 규칙들에 순종하는 것의 문제이다. 개인적 행위의 차원에서 보면 불의가 정의보다 훨씬 더 이익이다. 즉 자신의 정당한 몫보다 더 많은 것을 챙기는 사람들이 정의로운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다.

글라우콘은 더 나아가서 정의롭게 행동하는 사람들은 오직 일종의 자기보존으로서 그렇게 할 뿐이라고 제안한다. 신화의 인물 가이게스처럼, 투명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반지를 손에 넣은 사람은 누구든 정의롭게 행위 할 동기를 상실할 것이다. 이런 사람은 범죄나, 유괴, 사기를 저지르고도 무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라우콘은 한 명의 정의로운 사람이 그 밖의 사람들에 의해 불의한 자로 여겨지는 상황을 상상한다. 그 사람은 고초를 겪고 형을 받을 것이다. 그의 삶은 행운과는 무관한 듯이 보인다. 이런 사람을 교활하고 사악한 어떤 사람, 즉 빠져나갈 수 있다 싶을 때마다 온갖 나쁜 짓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정의로운 체하는 사람과 비교해 보라. 그는 행복한 삶을 살 것이며, 존경의 모범으로 여겨질 것이다. 비록 그 가면의 속은 철저히 악할지라도 말이다. 이것이 보여주는 바는 정의란 보상을 주지 못한다는 것, 아니면 적어도 언제나 보상을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소크라테스가 정의로운 삶을 옹호하기 원한다면 그는 앞서 기술된 상황이 이야기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사실 이 책의 나머지에서 소크라테스는 바로 이런 일을 하고자 한다. 그는 정의가 보상을 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임을 보여줄 길을 찾는다. 정의는 두 가지 점에서, 즉 그 결과에 있어서 그리고 그 자체로 좋다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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