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처럼 가부장적인 신은 초자아가 겪는 위기에 대한 해답이다

 

 

 

 

6월 10일 금요일, 프로이트는 애완견 륀을 만나기 위해 외출했습니다. 륀은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라드부르크 그로브에 소재하는 검역소로 보내졌습니다. 이런 만남까지도 기사화하는 매체가 있었습니다. ‘그 무엇도 위대한 과학자와 애완견 친구를 떼어놓지 못했다.’ 프로이트는 자신을 칭송하는 영국인 대부분이 자신의 저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책을 읽고 온전히 이해했다면 그들은 분명 프로이트에게 분노했을 것입니다. 마이클 몰나르Michael Molnar는 오스트리아의 스포츠 신문 『레프리 Refree』에서 검역소 관계자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동물이 그렇게 행복해하는 건 처음 보았습니다. 주인에게 모든 걸 이해한다는 표정을 짓더군요. 프로이트 박사는 한 시간 내내 강아지와 놀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세상의 모든 애정을 쏟아 붓는 것 같았습니다. 그 연세에 매우 긴 여행이었을 텐데도 그분은 가능한 한 자주 륀을 보러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프로이트는 1927년 『환상의 미래』에 종교에 강력하게 반대하는 글을 쓴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서구의 신앙을 압제적 가부장제에 대한 향수병 같은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는 인간이 아버지를 그리워한다고 했습니다. 더 정확한 표현으로, 어린 시절의 아버지가 돌아와 주기를 갈망한다고 했습니다. 프로이트는 거의 모든 사람이 절대적인 안전, 아니 절대적인 안전의 환상 속에 살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아이에게 완벽하게 느껴지는 보호와 함께 반박할 수 없이 명쾌한 선과 악에 대한 관념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자라면서 부모도 결함이 있고, 정확하지 못하며, 판단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들은 전능하지 못한 부모에게서 필연적으로 믿음을 잃게 됩니다. 그들은 자식이 어릴 적에 본 완벽한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연구 전반에 걸쳐 주장한 것처럼 사람들은 한때 자신의 감정을 충족시켰다고 느낀 대상을 떠나려 하지 않습니다. 이는 프로이트 개념의 핵심입니다. 주어진 목적이나 개념에 전념하고 자신의 임무를 완벽히 수행한 것을 발견한 원아는 자신의 모든 힘이 사라지지 않도록 강력하게 저항합니다. 애국자는 옳든 그르든 자신의 나라를 죽도록 사랑합니다. 여자는 한때 자신에게 기쁨을 준 남편이 자신을 속여도 꾸준히 사랑합니다. 아버지는 저세상으로 간 자식을 위해 울음을 멈추지 않습니다. 현실이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갔을 때 받은 첫 충격과 그 이후로도 지속되는 충격은 환상을 통해 재구성됩니다.

프로이트는 사랑하는 뛰어난 존재,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분명히 아는 인물의 보호를 박도 감시를 받는다는 느낌보다 만족스러운 상황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인물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우리의 판단이 말할 때, 정신은 반발하면서 자신의 모든 희망을 일치시킨 최상의 존재를 재창조합니다. 이러한 현상이 종교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물론 정치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사람들이 최상의 허구를 날조하여 적대적이기만 한 속수무책 세상에 저항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독재자처럼 가부장적인 신은 초자아가 겪는 위기에 대한 해답입니다. 초자아는 최악의 상태일 때 무의식 상태가 됩니다. 그것은 지나친 요구를 하고 잔인해지다 못해 가학적 양상을 보이기도 합니다. 프로이트는 『문명 속의 불만』(1930)에서 초자아는 우리가 실제로 관습에 도전할 때뿐만 아니라, 그런 의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를 벌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행동이 아닌 갈망까지도 처벌의 대상이 된다는 뜻입니다. 외부로 표출된 초자아, 즉 가부장적인 하늘의 신은 잔인하고 지나친 요구를 하기도 하지만 인류를 위해 계율을 남기기도 합니다. 그의 성서와 예언을 통해 사람들은 어떤 행동이 그의 노여움을 달랠 수 있는지, 심지어 무엇으로 그의 환심을 살 수 있는지 깨닫습니다. 독재자와 마찬가지로 하늘의 신도 인간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지나치게 복잡한 상황을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그의 말에 우리는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정의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이 땅 위의 번영과 다가올 구원을 보장받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환상의 미래 l'Avenir de l'illusion』(1927)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신성한 신이 내린 자비로운 법칙은 위험으로 가득한 인생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을 가라앉힌다. 도덕적 세상의 질서를 확립함으로써 정의가 요구하는 것, 인류 문명이 여전히 충족하지 못한 것들을 완성한다. 그리고 미래 인류의 생명 연장은 이러한 희망이 실현될 시간과 공간을 제공한다.

프로이트는 인류의 희망을 통해서만 진리를 발견하고, 그들의 인생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연구 후반기에 그의 주요 가설 중 하나는 사람들이 순간순간, 매일매일 누릴 수 있는 즐거움보다는, 자신보다 위대한 존재와 결합함으로써 진리를 구하려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인간은 자극적이고 다양하며 복잡한 것, 즉 풍부하고 신기하지만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는 세상을 접하는 것보다 절대적인 의미를 구했을 때 좋은 기분을 느낍니다. 정해진 답이 없는 존재의 대가는 극심한 불안입니다.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그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다음과 같은 히틀러의 말은 적절해보입니다.

군중은 청원자보다 지휘자를 사랑한다. 그들은 사실상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버려진 느낌을 받기 쉬운 자유보다는 규칙을 참고 지키는 것에 큰 만족을 느낀다.

후기 집필 과정에서 프로이트는 어머니를 향한 오이디푸스의 열망에 대해선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오이디푸스콤플렉스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젠 왕을 필요로 하는, 가부장에 대한 인간의 욕망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싶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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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절 워버턴Nigel Warburton『한 권으로 읽는 철학의 고전 27 Philosophy the Classics』(도서출판 知와 사랑) 중에서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 군주론 』

 

 

『군주론』이라고 하면 아마 무자비한 자기계발서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때때로 위선과 냉혹함을 옹호했을지라도, 이 책에는 보다 미묘한 의미가 담겨있다. 그가 높이 평가하는 것은 힘과 간계를 구사하는 시점과 방식을 꿰뚫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는 강하고 유능한 통치자가 어떻게 국익에 가장 이바지할 수 있는지 설명한다. 그의 조언은 다름 아닌 군주들을 겨냥한다. 군주의 행동은 백성들의 운명을 결정한다. 마키아벨리에게 바람직한 군주상은 지나치게 도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다. 군주는 최선의 결과를 위해 재빠르고 능숙하게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국가에게 최선이란 기존의 도덕을 무시하는 것일지 모른다.

마키아벨리는 고국인 피렌체에서 정치가로서 성공을 맛보았다. 하지만 1513년, 당시 피렌체를 지배한 메디치 가문에 대한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받고 투옥되어 고문을 당하다가 결국 피렌체 밖으로 추방되었다. 그가 『군주론』을 집필한 동기는 새로운 군주들에게 정치적 조언자로서의 자격을 입증하기 위해서인 듯하다. 『군주론』은 치열한 정치적 삶에 복귀하는 데 발판으로 삼기 위한 일종의 명함이었다. 그런 점에서 『군주론』은 실패한 책이었다. 그는 예전의 지위를 회복하지 못했다. 마키아벨리가 사망한 직후인 1532년에 출판된 『군주론』은 지금까지도 논란의 대상이다. 오늘날 이 책은 정치에서 ‘더러운 손’의 불가피성에 관한 논의에서 자주 인용된다. 그리고 ‘마키아벨리적’이라는 수식어는 흔히 교활하게 이기심을 추구하는 행위를 묘사할 때 쓰이지만 여기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군주론』은 ‘군주를 위한 거울mirrors for princes’이라는 장르의 소책자로, 통치자를 고무시키고 권고하기 위해 쓰였다. 군주를 위한 거울은 르네상스기에 크게 유행했으며, 흔히 용기와 동정심 같은 미덕을 권면했다. 그런데 마키아벨리의 조언은 전혀 달랐다. 그는 성공적인 군주는 선량함에서 벗어나는 방법과 필요할 경우에는 기민하고 잔인한 행동을 취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주문했다. 항상 정직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은 이롭지만, 군주는 필요할 때에만 자신의 약속을 지키면 된다. 군주는 다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을 알아차리고 피하기 위해 여우처럼 행동해야 하고, 때로는 사자처럼 겁을 줘서 주변의 늑대들을 쫓아버릴 필요도 있다. 마키아벨리가 던진 메시지는, 군주는 야수처럼 행동하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군주는 백성들에게 도덕적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는 인본주의적인 전통에 대한 도전이었다.

인간의 본성 human nature

마키아벨리는 인간의 본성을 낮게 평가한다. 피렌체 역사와 고전 문헌에 대한 지식과 나름의 관찰을 바탕으로 그는 인간이란 원래부터 부정적인 방식으로 행동한다고 본다. 인간은 변덕스럽고 거짓말을 하며, 위험을 회피하려 들고 탐욕스럽다. 이런 상황에서 군주가 효과적으로 통치하려면 두려움을 활용해야 한다. 즉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은 믿을만한 권력의 원천이 아니다. 사람들은 편의에 따라 고마움의 끈을 저버리기 때문이다. 사랑받는 동시에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있다면 최선이겠지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후자를 택해야 한다.

마키아벨리는 행위의 당위성이 아니라 행위의 현실성에 관심이 있었다. 요컨대 군주가 인간이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알지 못하면, 십중팔구 실패를 맛본다. 현실적으로 사람들은 쉽게 약속을 깬다. 군주는 자기가 한 약속을 지키고자 애쓸 필요가 없으며, 약속을 한 사람을 믿는 것 또한 소용없는 일이다.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마키아벨리가 보기에 군주는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이나 기독교에서 비롯된 기존의 도덕관과 전혀 다른 규범을 따라야 한다.

외관은 군주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이다. 사람들은 피상적인 특징에 반응할 뿐, 군주의 진정한 모습을 인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결과적으로 군주는 설령 자신의 참모습과 전혀 다를지라도 교묘하게 꾸며낸 가면을 써야 한다.

비르투 virtù�

『군주론』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개념은 ‘역량prowess’으로 번역되는 이탈리아어 비르투virtù�이다. 비르투는 미덕virtue의 어원인 라틴어 비르투스virtus에서 비롯되었지만, 『군주론』에서는 아주 다른 의미로 쓰인다. 『군주론』을 관통하는 마키아벨리의 목표는 군주가 비르투라는 자질을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하는 것이다. 비르투는 국가의 안전과 지속적인 번영을 담보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재빠르고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것은 거짓 약속을 하는 것, 나를 위협하는 자들을 죽여 없애는 것, 그리고 심지어 필요할 경우에는 내 편도 처치하는 것을 뜻할 수 있다.

비르투를 갖추면 통치자로서 성공을 거둘 가능성이 높아지지만, 비르투를 보여주는 통치자라고 해서 반드시 성공하지는 않는다.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우리 삶의 절반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운명적 사건에 좌우된다. 즉 아무리 철저하게 대비해도 운이 나쁘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 운명은 밀려드는 강물과 같다. 강물이 가득 들어차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하지만 강물이 가득 들어차기 전에 행동을 취하면 피해를 줄일 수는 있다. 미리 대비하지 않을 경우에 운명적 사건들은 큰 피해를 몰고 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마키아벨리는 운명이 젊고 용감한 자들의 편이라고 믿는다. 비유컨대 운명은 젊고 용감무쌍한 남자의 접근에 반응하는 여인이다. 그녀는 자신을 압도하고 위압하는 대담한 남성들에게 응답한다. 비르투는 남자가 운명을 정복하기 위해 발휘하는 남성적 자질이다.

마키아벨리가 비르투를 보여주는 군주상으로 제시한 인물은 체사레 보르자였다. 그의 역량, 즉 비르투는 오르시니 가문 사람들을 시니가글리아로 유인해 처치해버릴 때 발휘되었다. 보르자의 여러 행동 중에서 마키아벨리가 가장 높이 평가하는듯한 것은 그의 수하들 가운데 한 사람을 처분한 것이었다. 로마냐 지방을 장악한 뒤 보르자는 잔인한 성격의 충복 레미로 데 오르코를 책임자로 임명했고, 오르코는 그 지역을 신속하게 무력으로 평정했다. 그런데 보르자는 그런 무자비한 방식은 점점 한계에 봉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쏠리기 시작하는 증오의 싹을 자르기 위해 그는 오르코를 죽이고 시체를 두 토막 내어 광장에 전시하였다. 그 잔인한 광경 하나만으로 보르자는 로마냐 지방 주민들을 달래는 동시에 충격을 선사했다. 마키아벨리는 보르자를 잔인성을 노련하게 활용한 인물로 높이 평가한다. 그리고 보르자를 범죄자나 다름없고 미덕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 잔인무도한 폭군 아가토클레스와 비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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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칭성Supersymmetry

 

 

 

 

1905년 상대성이론이 탄생하자 시공간의 대칭변환은 속도를 바꾸는 대칭성까지 포함하도록 확장되었다. 1967년 제프리 만둘라Jeffrey Mandula와 시드니 콜먼은 시공간과 관련된 대칭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이 직관을 체계화했다. 그들은 한 가능성을 간과했다. 초대칭성은 보존과 페르미온을 상호 교환하는 기묘한 대칭변환과 관련된다. 그러나 초대칭성이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아직은 가설에 불과하다. 물리학자들이 초대칭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초끈이다. 초대칭성에 기반한 초끈이론은 표준모형의 입자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있는 단 하나의 끈이론이다. 초대칭성이 포함하지 않는 끈이론이 우리 우주를 기술하기는 어렵다. 두 번째 이유는 초대칭성이론들이 계층성문제를 풀 가능성이 있게 때문이다. 초대칭성이 약력규모 질량과 플랑크 질량의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큰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지만 계층성문제를 유발하는 힉스입자 질량에 미치는 막대한 양자 기여를 상쇄시켜준다. 여분차원 이론들이 해결 대안으로 떠오르기 전까지 초대칭성이론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초대칭세계에서 우리가 아는 입자들은 모두 초대칭 변환에 의해 교환될 수 있는 초대칭짝superpartner(혹은 supersymmetry partner)을 갖는다. 초대칭 변환을 통해 페르미온은 보존짝으로, 보존은 페르미온짝으로 변환될 수 있다. 페르미온과 보존은 스핀에 의해 구별되는 두 종류의 입자들이다. 페르미온이 정수의 반에 해당하는 스핀 1/2, 3/2 등을 갖는 반면 보존은 정수 스핀 0, 1, 2 등을 갖는다. 정수 스핀이 보통 물체가 공간에서 자전할 때 갖는 스핀이라면 정수의 반인 스핀은 양자역학에서만 볼 수 있다. 초대칭성이론에서 페르미온은 모두 보존의 짝으로 변환될 수 있고 보존은 모두 페르미온의 짝으로 변환될 수 있다. 1970년대 유럽과 러시아의 물리학자들이 대칭변환을 통해 보존과 페르미온을 상호 교환할 수 있으며 그런 교환 전후에 물리학 법칙이 동일하다는 점을 밝혀냈다. 보존과 페르미온의 수가 같을 경우에만 초대칭성이 성립한다. 또한 짝을 이룬 보존과 페르미온은 질량과 전하량이 같아야 하고 이것들의 상호작용은 동일한 변수로 기술되어야 한다.

끈이론은 초대칭성 연구의 계기였으며, 중력을 포함한 초대칭성이론인 초중력이론을 연구함으로써 실제 세계를 설명할 가능성이 있는 끈이론의 제1후보인 초끈이론이 등장할 수 있었다. 프랑스 태생의 물리학자 피에르 라몽Pierre Ramond(1943~)이 1971년에 처음 초대칭성이론을 제안했다. 라몽의 목표는 끈이론에 페르미온을 포함시키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라몽은 앙드레 느뵈Andre Neveu, 존 슈바르츠John Schwarz와 함께 2차원 초대칭성을 포함하는 자신의 이론을 페르미온끈이론fermionic string theory으로 발전시켰다. 라몽의 이론은 최초의 끈이론이었다. (구)소련의 Y.A. 골판드Y.A. Gol'fand와 E.P. 릭트만E.P. Likhtman이 라몽과 동시에 초대칭성을 발견했지만 그들의 논문은 철의 장막에 가려 서방세계에 알려지지 않았다.

1973년 독일의 물리학자 율리우스 베스Julius Wess(1934~2007)와 이탈리아의 이론물리학자 브루노 주미노Bruno Zumino(1923~)는 4차원 초대칭성이론을 만들었다. (구)소련에서는 드미트리 볼코프Dmitri Volkov와 블라디미르 아쿨로프Vladimir Akulov가 독립적으로 다른 4차원 초대칭성이론을 유도했지만 냉전으로 인해 아이디어를 교환하지 못했다. 그러나 4차원 초대칭성이론에 힘을 전달하는 게이지보존을 포함시킬 방법을 아는 물리학자들이 없었다. 이탈리아의 물리학자로 칼텍의 교수 세르조 페라라Sergio Ferrara(1945~)와 브루노 주미노가 1974년 이 난제를 해결했다. 페라라-주미노 이론 덕분에 물리학자들은 초대칭성이론에 전자기력과 약력, 강력을 포함시키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중력은 초대칭성이론에서 제외되었다. 1976년 세 명의 물리학자 페라라, 댄 프리드먼Dan Freedman 그리고 페터 반 뉘벤후이젠Peter van Nieuwenhuizen은 중력과 상대성이론을 포함하는 복잡한 초대칭성이론인 초중력supergravity이론을 구축하고 이 문제를 해결했다.

초중력이론이 구축되어 가는 동안 끈이론 또한 발전을 거듭해 페르디난도 글로치Ferdinando Glozzi, 조엘 셰르크Joel Scherk와 데이비드 올리브David Olive가 느뵈와 슈바르츠, 라몽이 만든 페르미온 끈이론을 이용해 안정적인 끈이론을 발견했다. 페르미온 끈이론은 이전의 이론에는 없으나 초중력이론에만 존재하는 어떤 종류의 입자를 갖는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새로운 입자는 중력자graviton의 초대칭짝인 그래비티노gravitino와 동일한 성질을 가졌다고 추정되었는데, 나중에 그래비티노였음이 밝혀졌다. 물리학자들은 페르미온 끈이론에 초대칭성이 존재함을 밝혀냈다. 이 결과 초끈이론이 탄생했다.

초대칭성이론의 장점은 암흑물질의 후보를 포함하는 점이다. 암흑물질은 우주에 널리 퍼져있는 빛을 내지 않는 물질로 중력효과에 의해 발견되었다. 우주의 에너지 중 약 4분의 1이 암흑물질에 저장되어 있지만 우리는 암흑물질이 무엇인지 모른다. 붕괴하지 않으면서 적당한 질량과 상호작용 세기를 갖는 초대칭성 입자가 있다면 그것이 암흑물질의 후보가 될 것이다. 가장 가벼운 초대칭성 입자는 광자의 초대칭짝인 포티노photino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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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절 워버턴Nigel Warburton『한 권으로 읽는 철학의 고전 27 Philosophy the Classics』(도서출판 知와 사랑) 중에서

 

 

 

보이티우스의 『 철학의 위안 』

 

 

『철학의 위안』을 쓸 무렵 보이티우스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 죽고 싶다고 느낄 정도로 그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까지 그에게 부과 자유를 선사했던 운명은 이제 모두를 앗아갔다. 보이티우스는 자신의 비통한 마음을 시로 표현했는데, 그때 그는 한 여인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이 여인은 보통 사람 정도의 키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했다. 여인의 옷단 맨 아래와 맨 위에는 각각 그리스문자 파이π와 세타θ가, 중간에는 사다리 무늬가 수놓아져 있었다. 옷은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으며, 여인은 손에 책 몇 권과 왕권을 상징하는 홀을 하나 들고 있었다. 이 여인은 철학의 화신이었다. 그리스 문자 파이는 실천철학(윤리학을 포함)을 상징하고, 세타는 사변철학(형이상학과 과학)을 의미한다.

여인은 보이티우스가 자신을 저버렸다고 꾸짖었다. 보이티우스는 철학의 화신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갈구하는 위안을 찾았다. 그녀는 비록 그가 억울하게 사형선고를 받고 부와 명예, 자유와 위안을 잃었을지라도, 철학은 그에게 정신적 힘을 선사해줄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여인은 보이티우스의 절망에 이성이라는 처방을 제시했다. 철학은 일종의 자기수양, 즉 정신적 위안이다. 보이티우스는 가끔 철학을 자신을 돌봐주는 간호사로 부르기도 했다.

우리가 아는 한 『철학의 위안』은 서기 524년경에 보이티우스가 고트족 황제 테오도리쿠스에 대한 반역을 꾀했다는 죄목으로 파비아의 감옥에서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중에 집필한 책이다. 그는 실로 극적인 몰락의 주인공이었다. 한때 그는 테오도리쿠스 황제의 총애를 받은 신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곤봉으로 고문을 받다 죽고 말았다. 한때 평판 높았던 시민으로서 피하고만 싶었던 불명예스러운 죽음이었다.

보이티우스는 음악을 비롯한 다방면의 책을 집필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상당수를 라틴어로 번역하기도 했지만, 오늘날 그의 저서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마지막 유작인 『철학의 위안』이다. 이 책은 산문과 시, 대화가 골고루 등장하는 흥미진진한 책이다. 또 중세와 르네상스기에 사람들이 가장 즐겨 읽은 책 가운데 하나였고, 훗날 영국의 초서와 엘리자베스 1세가 『철학의 위안』을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철학의 위안』에 담긴 철학적 내용은 완전히 독창적이지는 않지만, 사상을 전달하는 방식에서 재미와 지적 자극을 선사한다.

철학 philosophy

보이티우스는 여인으로 의인화한 철학을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그는 신플라톤주의자였다. 다시 말해 그의 철학적 관점은 플라톤 철학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특히 그는 철학적 관조를 통해 오도된 외관의 세계에서 벗어나 진정한 실재를 경험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진리의 빛과 대조적인 덧없는 외관의 세계라는 은유를 되풀이해 사용한다. 그것은 플라톤이 『국가』에서 동굴의 비유에 등장하는 선의 형상을 상징하는 태양을 암시하는 것이다.

철학의 화신은 보이티우스에게 철학자라면 행운과 불운의 영향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일깨운다. 철학의 화신이 보이티우스의 기억을 상기시키려는 장면도 지식을 일종의 상기想起로 보는 플라톤의 가르침을 암시하려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운명과 행복 chance and happiness

진정한 철학자는 운명에 좌우되지 않는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돌기 마련이고, 최고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도 순식간에 최악의 자리로 떨어진다. 이것이 바로 운명의 본성이다. 운명은 변덕스럽다. 철학은 보이티우스에게, 운명이 인간에게 가장 기여하는 순간은 불운의 모습을 띨 때라고 말한다. 행운은 우리를 속인다. 진정한 행복이라는 환상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명이 가면을 벗고 스스로가 얼마나 믿을 수 없는 존재인지 보여주는 그 순간 우리는 가장 많은 것을 배운다. 역경은 우리가 행복이라고 믿는 부, 명예, 쾌락의 덧없음을 가르쳐준다. 또한 누가 과연 우리의 진정한 친구인지도 가르쳐준다.

보이티우스는 대단한 행운아였다. 대중들은 보이티우스가 국가 경영에 기여한 바를 인정해 그의 두 아들을 한날에 집정관으로 뽑았다. 하지만 그가 반역죄로 투옥되면서부터 행복은 저 멀리 사라져버렸다. 철학은 보이티우스의 어리석음을 탓한다. 참된 행복은 부와 명예처럼 운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면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보이티우스는 외부적 영향에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을 강조하는 스토아학파의 관점에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스토아학파의 관점에서 볼 때 행복은 운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 역량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악과 보상 evil and reward

보이티우스는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한탄한다. 악한 사람들은 부귀영화를 누리는 반면 선하고 고결한 사람들은 고통스럽게 살아간다. 그러나 철학은 진정한 보상을 받는 것은 다름 아닌 고결한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고결한 사람들에게는 선을 추구함으로써 궁극적 목적인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힘이 있기 때문이다. 악한 사람들은 겉으로만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사실 도리를 외면하는 그런 자들은 인간 이하의 존재로 전락하기 마련이고, 보복보다는 동정과 치료가 필요한 대상이다.

신과 자유의지 God and free will

철학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진정한 행복이 명예, 부, 쾌락 따위가 아니라 철학적 관조에서 생긴다는 점 그리고 사악한 사람들은 진정한 행복을 이루지 못한다는 점을 상기시킨 뒤, 신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주제로 보이티우스와 토론한다. 이 부분에서 『철학의 위안』은 플라톤의 대화 같은 진지한 철학적 대화로 변모한다. 보이티우스는 질문자의 역할을 맡고, 철학은 그에게 신의 본성을 설명한다. 또 그가 이성의 도움을 통해 단순한 외관에서 벗어나 순수와 빛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보이티우스와 철학의 토론은 ‘인간이 어떻게 자유의지, 즉 행위에 관한 진정한 선택의 능력을 가질 수 있는가 그리고 동시에 인간의 행위를 미리 아는 신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자유의지가 없다면 이성적 행동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또 신이 인간의 행위를 미리 알 수 있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로운 선택을 한다고 할 수 있는가?

철학이 이 문제에 대해 내놓은 답변은 숙명과 예지의 차이이다. 숙명을 믿는 사람들은 앞으로 어떤 사건들이 반드시 일어나도록 신이 예정해 두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예지는 단순히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아는 것이다. 철학은 신은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할지 미리 알고 있으나, 신이 그 선택을 초래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선택의 주체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신의 예지는 인간의 진정한 선택과 모순되지 않는다. 일어날 일을 미리 아는 것과,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만약 신이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지 미리 안다면, 우리가 선택이라고 믿는 것은 진정한 자유의지가 아니라 환상이 아닐까? 이 질문에 대해 철학은, ‘예지’라는 관념 자체가 우리의 생각이 시간에 대한 인간의 경험에만 의존한다고 대답한다. 신은 우리와 다르다. 신은 시간 밖에 있고 영원한 현재 속에 존재한다. 신이 시간 밖에 있기 때문에 신의 예지는 현재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양립할 수 있다. 즉 신에게 과거, 현재, 미래는 모두 하나이다. 지금 일어나는 일에 관한 우리의 지각이 그것을 초래하지는 않는다. 또한 신의 예지가 인간이 어떤 행동을 진정으로 선택할 가능성을 아예 없애버리지도 않는다. 우리가 범하는 실수는 신과 시간과의 관계를 우리와 시간과의 관계로 오해하는 것이다. 신은 일어난, 일어나고 있는, 일어날 모든 일을 알고 있다.

끝으로 철학은 보이티우스에게 선을 권한다. 인간은 시간 밖에 있으며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신의 눈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철학의 위안』에서 보이티우스의 지적 여행은 플라톤의 『국가』에 등장한 철학자의 길을 되짚어본 것이다. 보이티우스는 동굴 벽의 희미한 그림자와 다름없는 덧없는 외관의 세계를 뒤로하고, 선의 형상에 관한 지식, 궁극적으로는 신에 관한 지식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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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절 워버턴Nigel Warburton『한 권으로 읽는 철학의 고전 27 Philosophy the Classics』(도서출판 知와 사랑)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

『 니코마코스 윤리학 』

 

행위와 책임 action and culpability

아리스토텔레스는 특히 단순한 행동behaviour보다는 행위action에 관심을 가진다. 인간이란 존재는 그저 행동한다기보다는 행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삶의 여러 영역에서 우리는 선택할 능력을 가진다. 이와 달리 개미는 그저 행동할 뿐이다. 개미는 무엇을 행하거나 행하지 않을지에 대해 숙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자신의 행위에 책임질 수 있는 개인에게만 책임을 묻는다. 만일 이들이 어쩔 수 없어서 어떤 행위를 했다면, 이들을 비난하는 것은 이상한 짓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의도적 행위를 다른 두 가지 행동과 구분한다. 비자발적 행동involuntary과 자발성과 무관한 행동non-voluntary이 그것이다.

비자발적 행동은 충동이나 무지로부터 결과하는 행동이다. 예를 들어 만일 어떤 사람이 당신을 창문 쪽으로 밀쳤다면, 당신은 유리를 깬 책임을 지지 않을 것이다. 특히 당신이 유리를 깨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면 말이다. 만일 당신이 무지 때문에 독버섯을 식용버섯인 줄 알고 먹었다면, 이것 역시 비자발적이다. 앞의 두 경우에 당신은 그런 결과들에 유감스럽기는 하겠지만, 둘 중 어느 경우에 대해서든 당신이 직접적인 통제력을 가진 것은 아니다. 이런 일들은 당신의 의지에 반해서 일어나며, 만일 당신이 그럴 수만 있었다면 행하지 않았을 그런 일들이다. 그런데 이와 다른 종류의, 강제적이지만 당신이 일종의 선택을 할 수 있는 어떤 행위가 있다. 예를 들어 돌풍에서 배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화물을 버리는 일이라고 할 때, 선장이 이것을 명령할 경우 선장의 행위는 그가 그 행위를 선택했다는 의미에서 자발적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그 행위는 극단적 상황에 의해 강제된 것이다. 어떤 맥락에서 보면 화물을 배 밖으로 내던지는 행위는 비난의 대상이 될지 모르지만 특수한 상황에서 그 행위는 사태에 의해 강요된 행위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신이 쾌락의 욕구에 의해 특정 방식으로 강요될 수 있다는 견해에 대해 고찰한 뒤, 그런 견해를 거부한다. 예를 들어 당신의 욕망이 당신으로 하여금 연쇄색정광이 되도록 ‘강제’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런 사실이 당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면제시킬지 모른다. 만일 당신이 이런 입장을 취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하듯이 당신은 자신의 선한 행위에 대해서도 칭찬을 요구해서는 안 되는 것이 일관성 있는 사고일 것이다. 만일 그 행위가 욕망에서 온다면 그것 역시 당신의 통제 밖에 있기 때문이다.

 

자발적이지 않은 또는 의도와 무관한 행동은 당신이 그 행동에 대해 유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자발적 또는 비의도적 행동과 다르다. 비의도적 행동의 결과에 대해 유감을 느낀다는 것은, 만일 당신이 자신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었다면 그 행위를 하지 않았을, 즉 당신이 유리창 쪽으로 밀쳐지지 않았을 것임을 뜻한다. 또는 당신이 충분한 지식을 가졌더라면 결코 독버섯을 먹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을 그런 행동으로 몰고 간 것은 순전히 외적 요인들이다. 만일 내가 의도하지 않았으나 당신의 감정을 해쳤고 이런 행동에 유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나의 이런 행동은 자발성과 무관한 행동이다.

 

아크라시아: 의지박약 akrasia: weakness of will

‘아크라시아akrasia’는 보통 ‘자제불능’으로 번역되는데, 이 용어는 오늘날의 독자들 대부분에게는, 특이한 또는 종종 당황스러운 신체적 자기 통제의 상실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 용어는 더 일반적인 어떤 것을 의미한다. 당신이 무엇을 행해야 할지, 무엇이 삶을 더 성공적으로 만들어줄지 잘 알면서도, 스스로 고집하여 잘못된 선택임을 잘 알고 있는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의학적 의미에서의 ‘자제불능’과는 달리, 그것은 ‘자발적’ 행위이다. 예를 들어, 당신은 혼외정사가 당신의 ‘에우다이모니아’를 파괴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혹적이고 기꺼이 허락할 상대자가 나타나면, 당신은 직접적 쾌락을 위한 욕망에 정복당하고 유혹에 굴복한다. 비록 당신이 간통이 당신의 ‘에우다이모니아’의 전망을 해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고,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당신도 ‘에우다이모니아’를 추구하면서도 말이다. 당신은 스스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 선택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신이 최선의 행위임을 진정으로 알면서도 그것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견해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플라톤에 있어서 만일 당신이 진정으로 선을 안다면, 즉 선의 이데아를 안다면 당신은 자동적으로 그것에 따라 행위 할 것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진정한 ‘아크라시아’란 있을 수 없다. 즉 아크라시아처럼 보이는 사례는 실제로는 선에 대한 무지에 지나지 않음에 틀림없다. 이와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크라시아’의 현상은 현실적으로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아크라시아로 고통 받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어떤 유형의 행위는 자신들에게 좋지 못하며, 자신들을 번창하게 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이들은 심지어 특정 상황에 처해서 자신들이 하고 있는 행위는 그르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한다. 그러면서도 실제로 그런 행위를 할 때, 그들은 이것을 진정으로 느끼지 못하며 단순히 배운 말들을 되뇔 뿐이다. 그들은 욕망에 정복당하고 직접적 쾌락의 유혹에 굴복한다. 자신들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는 알지라도 그들은 그것을 선택하지 않는다. 일반 원리로부터 특수 사례를 추론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명상하는 삶 the contemplative life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끝 무렵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이 좋은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는 활동에 대해 설명한다. 이론적 또는 명상적 활동이 그것이다. 자신의 저작의 대부분을 번창을 일으키는 행위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실천적 덕의 문제에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의 지식을 재고찰하는 일이 인간에게 가능한 최고의 활동임을 밝힌다. 그의 추론은 다음과 같다. 인간 특유의 활동은 합리적 활동이기 때문에, 그리고 모든 것의 탁월성은 그것 특유의 기능을 충분히 실현하는 데서 오기 때문에, 인간의 탁월성은 합리적 활동에서 이룩됨은 틀림없는 진리이다. 그러나 오직 신들만이 중단 없는 철학적 명상의 삶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 그런 명상은 필수요소이지만, 이것만으로 좋은 삶 전체가 만들어질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상은 우리에게 열려 있는 최고 형태의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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