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이절 워버턴Nigel Warburton의 『한 권으로 읽는 철학의 고전 27 Philosophy the Classics』(도서출판 知와 사랑)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
『 니코마코스 윤리학 』
행위와 책임 action and culpability
아리스토텔레스는 특히 단순한 행동behaviour보다는 행위action에 관심을 가진다. 인간이란 존재는 그저 행동한다기보다는 행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삶의 여러 영역에서 우리는 선택할 능력을 가진다. 이와 달리 개미는 그저 행동할 뿐이다. 개미는 무엇을 행하거나 행하지 않을지에 대해 숙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자신의 행위에 책임질 수 있는 개인에게만 책임을 묻는다. 만일 이들이 어쩔 수 없어서 어떤 행위를 했다면, 이들을 비난하는 것은 이상한 짓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의도적 행위를 다른 두 가지 행동과 구분한다. 비자발적 행동involuntary과 자발성과 무관한 행동non-voluntary이 그것이다.
비자발적 행동은 충동이나 무지로부터 결과하는 행동이다. 예를 들어 만일 어떤 사람이 당신을 창문 쪽으로 밀쳤다면, 당신은 유리를 깬 책임을 지지 않을 것이다. 특히 당신이 유리를 깨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면 말이다. 만일 당신이 무지 때문에 독버섯을 식용버섯인 줄 알고 먹었다면, 이것 역시 비자발적이다. 앞의 두 경우에 당신은 그런 결과들에 유감스럽기는 하겠지만, 둘 중 어느 경우에 대해서든 당신이 직접적인 통제력을 가진 것은 아니다. 이런 일들은 당신의 의지에 반해서 일어나며, 만일 당신이 그럴 수만 있었다면 행하지 않았을 그런 일들이다. 그런데 이와 다른 종류의, 강제적이지만 당신이 일종의 선택을 할 수 있는 어떤 행위가 있다. 예를 들어 돌풍에서 배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화물을 버리는 일이라고 할 때, 선장이 이것을 명령할 경우 선장의 행위는 그가 그 행위를 선택했다는 의미에서 자발적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그 행위는 극단적 상황에 의해 강제된 것이다. 어떤 맥락에서 보면 화물을 배 밖으로 내던지는 행위는 비난의 대상이 될지 모르지만 특수한 상황에서 그 행위는 사태에 의해 강요된 행위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신이 쾌락의 욕구에 의해 특정 방식으로 강요될 수 있다는 견해에 대해 고찰한 뒤, 그런 견해를 거부한다. 예를 들어 당신의 욕망이 당신으로 하여금 연쇄색정광이 되도록 ‘강제’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런 사실이 당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면제시킬지 모른다. 만일 당신이 이런 입장을 취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하듯이 당신은 자신의 선한 행위에 대해서도 칭찬을 요구해서는 안 되는 것이 일관성 있는 사고일 것이다. 만일 그 행위가 욕망에서 온다면 그것 역시 당신의 통제 밖에 있기 때문이다.
자발적이지 않은 또는 의도와 무관한 행동은 당신이 그 행동에 대해 유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자발적 또는 비의도적 행동과 다르다. 비의도적 행동의 결과에 대해 유감을 느낀다는 것은, 만일 당신이 자신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었다면 그 행위를 하지 않았을, 즉 당신이 유리창 쪽으로 밀쳐지지 않았을 것임을 뜻한다. 또는 당신이 충분한 지식을 가졌더라면 결코 독버섯을 먹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을 그런 행동으로 몰고 간 것은 순전히 외적 요인들이다. 만일 내가 의도하지 않았으나 당신의 감정을 해쳤고 이런 행동에 유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나의 이런 행동은 자발성과 무관한 행동이다.
아크라시아: 의지박약 akrasia: weakness of will
‘아크라시아akrasia’는 보통 ‘자제불능’으로 번역되는데, 이 용어는 오늘날의 독자들 대부분에게는, 특이한 또는 종종 당황스러운 신체적 자기 통제의 상실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 용어는 더 일반적인 어떤 것을 의미한다. 당신이 무엇을 행해야 할지, 무엇이 삶을 더 성공적으로 만들어줄지 잘 알면서도, 스스로 고집하여 잘못된 선택임을 잘 알고 있는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의학적 의미에서의 ‘자제불능’과는 달리, 그것은 ‘자발적’ 행위이다. 예를 들어, 당신은 혼외정사가 당신의 ‘에우다이모니아’를 파괴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혹적이고 기꺼이 허락할 상대자가 나타나면, 당신은 직접적 쾌락을 위한 욕망에 정복당하고 유혹에 굴복한다. 비록 당신이 간통이 당신의 ‘에우다이모니아’의 전망을 해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고,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당신도 ‘에우다이모니아’를 추구하면서도 말이다. 당신은 스스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 선택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신이 최선의 행위임을 진정으로 알면서도 그것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견해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플라톤에 있어서 만일 당신이 진정으로 선을 안다면, 즉 선의 이데아를 안다면 당신은 자동적으로 그것에 따라 행위 할 것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진정한 ‘아크라시아’란 있을 수 없다. 즉 아크라시아처럼 보이는 사례는 실제로는 선에 대한 무지에 지나지 않음에 틀림없다. 이와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크라시아’의 현상은 현실적으로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아크라시아로 고통 받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어떤 유형의 행위는 자신들에게 좋지 못하며, 자신들을 번창하게 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이들은 심지어 특정 상황에 처해서 자신들이 하고 있는 행위는 그르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한다. 그러면서도 실제로 그런 행위를 할 때, 그들은 이것을 진정으로 느끼지 못하며 단순히 배운 말들을 되뇔 뿐이다. 그들은 욕망에 정복당하고 직접적 쾌락의 유혹에 굴복한다. 자신들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는 알지라도 그들은 그것을 선택하지 않는다. 일반 원리로부터 특수 사례를 추론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명상하는 삶 the contemplative life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끝 무렵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이 좋은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는 활동에 대해 설명한다. 이론적 또는 명상적 활동이 그것이다. 자신의 저작의 대부분을 번창을 일으키는 행위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실천적 덕의 문제에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의 지식을 재고찰하는 일이 인간에게 가능한 최고의 활동임을 밝힌다. 그의 추론은 다음과 같다. 인간 특유의 활동은 합리적 활동이기 때문에, 그리고 모든 것의 탁월성은 그것 특유의 기능을 충분히 실현하는 데서 오기 때문에, 인간의 탁월성은 합리적 활동에서 이룩됨은 틀림없는 진리이다. 그러나 오직 신들만이 중단 없는 철학적 명상의 삶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 그런 명상은 필수요소이지만, 이것만으로 좋은 삶 전체가 만들어질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상은 우리에게 열려 있는 최고 형태의 활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