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절 워버턴Nigel Warburton『한 권으로 읽는 철학의 고전 27 Philosophy the Classics』(도서출판 知와 사랑) 중에서

 

 

 

보이티우스의 『 철학의 위안 』

 

 

『철학의 위안』을 쓸 무렵 보이티우스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 죽고 싶다고 느낄 정도로 그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까지 그에게 부과 자유를 선사했던 운명은 이제 모두를 앗아갔다. 보이티우스는 자신의 비통한 마음을 시로 표현했는데, 그때 그는 한 여인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이 여인은 보통 사람 정도의 키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했다. 여인의 옷단 맨 아래와 맨 위에는 각각 그리스문자 파이π와 세타θ가, 중간에는 사다리 무늬가 수놓아져 있었다. 옷은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으며, 여인은 손에 책 몇 권과 왕권을 상징하는 홀을 하나 들고 있었다. 이 여인은 철학의 화신이었다. 그리스 문자 파이는 실천철학(윤리학을 포함)을 상징하고, 세타는 사변철학(형이상학과 과학)을 의미한다.

여인은 보이티우스가 자신을 저버렸다고 꾸짖었다. 보이티우스는 철학의 화신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갈구하는 위안을 찾았다. 그녀는 비록 그가 억울하게 사형선고를 받고 부와 명예, 자유와 위안을 잃었을지라도, 철학은 그에게 정신적 힘을 선사해줄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여인은 보이티우스의 절망에 이성이라는 처방을 제시했다. 철학은 일종의 자기수양, 즉 정신적 위안이다. 보이티우스는 가끔 철학을 자신을 돌봐주는 간호사로 부르기도 했다.

우리가 아는 한 『철학의 위안』은 서기 524년경에 보이티우스가 고트족 황제 테오도리쿠스에 대한 반역을 꾀했다는 죄목으로 파비아의 감옥에서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중에 집필한 책이다. 그는 실로 극적인 몰락의 주인공이었다. 한때 그는 테오도리쿠스 황제의 총애를 받은 신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곤봉으로 고문을 받다 죽고 말았다. 한때 평판 높았던 시민으로서 피하고만 싶었던 불명예스러운 죽음이었다.

보이티우스는 음악을 비롯한 다방면의 책을 집필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상당수를 라틴어로 번역하기도 했지만, 오늘날 그의 저서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마지막 유작인 『철학의 위안』이다. 이 책은 산문과 시, 대화가 골고루 등장하는 흥미진진한 책이다. 또 중세와 르네상스기에 사람들이 가장 즐겨 읽은 책 가운데 하나였고, 훗날 영국의 초서와 엘리자베스 1세가 『철학의 위안』을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철학의 위안』에 담긴 철학적 내용은 완전히 독창적이지는 않지만, 사상을 전달하는 방식에서 재미와 지적 자극을 선사한다.

철학 philosophy

보이티우스는 여인으로 의인화한 철학을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그는 신플라톤주의자였다. 다시 말해 그의 철학적 관점은 플라톤 철학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특히 그는 철학적 관조를 통해 오도된 외관의 세계에서 벗어나 진정한 실재를 경험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진리의 빛과 대조적인 덧없는 외관의 세계라는 은유를 되풀이해 사용한다. 그것은 플라톤이 『국가』에서 동굴의 비유에 등장하는 선의 형상을 상징하는 태양을 암시하는 것이다.

철학의 화신은 보이티우스에게 철학자라면 행운과 불운의 영향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일깨운다. 철학의 화신이 보이티우스의 기억을 상기시키려는 장면도 지식을 일종의 상기想起로 보는 플라톤의 가르침을 암시하려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운명과 행복 chance and happiness

진정한 철학자는 운명에 좌우되지 않는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돌기 마련이고, 최고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도 순식간에 최악의 자리로 떨어진다. 이것이 바로 운명의 본성이다. 운명은 변덕스럽다. 철학은 보이티우스에게, 운명이 인간에게 가장 기여하는 순간은 불운의 모습을 띨 때라고 말한다. 행운은 우리를 속인다. 진정한 행복이라는 환상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명이 가면을 벗고 스스로가 얼마나 믿을 수 없는 존재인지 보여주는 그 순간 우리는 가장 많은 것을 배운다. 역경은 우리가 행복이라고 믿는 부, 명예, 쾌락의 덧없음을 가르쳐준다. 또한 누가 과연 우리의 진정한 친구인지도 가르쳐준다.

보이티우스는 대단한 행운아였다. 대중들은 보이티우스가 국가 경영에 기여한 바를 인정해 그의 두 아들을 한날에 집정관으로 뽑았다. 하지만 그가 반역죄로 투옥되면서부터 행복은 저 멀리 사라져버렸다. 철학은 보이티우스의 어리석음을 탓한다. 참된 행복은 부와 명예처럼 운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면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보이티우스는 외부적 영향에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을 강조하는 스토아학파의 관점에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스토아학파의 관점에서 볼 때 행복은 운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 역량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악과 보상 evil and reward

보이티우스는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한탄한다. 악한 사람들은 부귀영화를 누리는 반면 선하고 고결한 사람들은 고통스럽게 살아간다. 그러나 철학은 진정한 보상을 받는 것은 다름 아닌 고결한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고결한 사람들에게는 선을 추구함으로써 궁극적 목적인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힘이 있기 때문이다. 악한 사람들은 겉으로만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사실 도리를 외면하는 그런 자들은 인간 이하의 존재로 전락하기 마련이고, 보복보다는 동정과 치료가 필요한 대상이다.

신과 자유의지 God and free will

철학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진정한 행복이 명예, 부, 쾌락 따위가 아니라 철학적 관조에서 생긴다는 점 그리고 사악한 사람들은 진정한 행복을 이루지 못한다는 점을 상기시킨 뒤, 신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주제로 보이티우스와 토론한다. 이 부분에서 『철학의 위안』은 플라톤의 대화 같은 진지한 철학적 대화로 변모한다. 보이티우스는 질문자의 역할을 맡고, 철학은 그에게 신의 본성을 설명한다. 또 그가 이성의 도움을 통해 단순한 외관에서 벗어나 순수와 빛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보이티우스와 철학의 토론은 ‘인간이 어떻게 자유의지, 즉 행위에 관한 진정한 선택의 능력을 가질 수 있는가 그리고 동시에 인간의 행위를 미리 아는 신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자유의지가 없다면 이성적 행동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또 신이 인간의 행위를 미리 알 수 있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로운 선택을 한다고 할 수 있는가?

철학이 이 문제에 대해 내놓은 답변은 숙명과 예지의 차이이다. 숙명을 믿는 사람들은 앞으로 어떤 사건들이 반드시 일어나도록 신이 예정해 두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예지는 단순히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아는 것이다. 철학은 신은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할지 미리 알고 있으나, 신이 그 선택을 초래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선택의 주체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신의 예지는 인간의 진정한 선택과 모순되지 않는다. 일어날 일을 미리 아는 것과,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만약 신이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지 미리 안다면, 우리가 선택이라고 믿는 것은 진정한 자유의지가 아니라 환상이 아닐까? 이 질문에 대해 철학은, ‘예지’라는 관념 자체가 우리의 생각이 시간에 대한 인간의 경험에만 의존한다고 대답한다. 신은 우리와 다르다. 신은 시간 밖에 있고 영원한 현재 속에 존재한다. 신이 시간 밖에 있기 때문에 신의 예지는 현재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양립할 수 있다. 즉 신에게 과거, 현재, 미래는 모두 하나이다. 지금 일어나는 일에 관한 우리의 지각이 그것을 초래하지는 않는다. 또한 신의 예지가 인간이 어떤 행동을 진정으로 선택할 가능성을 아예 없애버리지도 않는다. 우리가 범하는 실수는 신과 시간과의 관계를 우리와 시간과의 관계로 오해하는 것이다. 신은 일어난, 일어나고 있는, 일어날 모든 일을 알고 있다.

끝으로 철학은 보이티우스에게 선을 권한다. 인간은 시간 밖에 있으며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신의 눈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철학의 위안』에서 보이티우스의 지적 여행은 플라톤의 『국가』에 등장한 철학자의 길을 되짚어본 것이다. 보이티우스는 동굴 벽의 희미한 그림자와 다름없는 덧없는 외관의 세계를 뒤로하고, 선의 형상에 관한 지식, 궁극적으로는 신에 관한 지식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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