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어느덧 시작되었습니다

 

 

 

새해가 어느덧 시작되었다고 말할 법 합니다.

지난 크리스마스는 조용히, 연말은 몇 차례의 송년회 핑계의 술자리로 지나갔고, 생각해보니 새해의 날이 밝은 것입니다.

언젠가부터 크리스마스는 더 이상 명절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에선 11월 셋째 목요일인 Thanksgiving day가 지난 바로 다음날부터 모든 라디오에서 일제히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면서 크리스마스 명절이 시작됩니다.

예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12월이 되면 종로와 명동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졌는데, 몇 해 전부터 그런 풍습이 사라졌습니다.

음악기기의 발달로 음악을 다 함께 듣는 기회가 사라진 것이 크리스마스 캐럴을 사라지게 한 요인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각각 선택해서 음악을 듣는 것에 익숙해져서 함께 듣는 풍습은 사라졌습니다.

그러다보니 크리스마스는 들뜬 마음으로 함께 보내는 날이 아닌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크리스마스 케익을 사들고 가는 사람들을 거리에서 많이 볼 수 있어 그 날을 즐거운 마음으로 사람들이 모여 보내는 풍습이 아직은 남아있는 것 같지만, 전에 비하면 매우 단출해진 것입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경직된 현상 때문인지 사람들에게는 생활의 여유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젊은이들은 고액의 등록금과 취업난으로 마음이 꽁꽁 얼어붙었고, 가장들은 비정규직이 해결되지 않아 명절을 즐길 여유가 없었습니다.

개인사업자들은 경제의 침체와 물가의 앙등으로 주머니가 비어 흥청망청 명절을 보낼 처지가 못 되었습니다.

게다가 정치권의 추악한 일련의 사태들이 국민을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가장 발전하지 못한 분야가 정치입니다.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이 정부와 국회 그리고 사법부에 대거 진출해 있어 정치가 발전할 수 없었습니다.

‘나꼼수’가 그나마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지만, 그중 하나가 구속되어 청취자들을 우울하게 만들었습니다.

‘나꼼수’를 들으며 사인방의 웃음소리는 내게 늘 슬픈 곡소리로 들립니다.

그것은 웃는 소리가 아니라 절규입니다.

슬픔을 안으로 삼키는 자조적인 노력입니다.

선한 사람들에게 비아냥거리는 것은 체질에 맞지 않습니다.

사인방은 모두 선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아냥거리는 입장에 스스로를 놓고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대통령 측근의 비리가 연일 터져 더욱 국민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듭니다.

언론에 알려진 비리는 불과 일부이겠지요.

모든 비리가 언젠가는 터져 나올 텐데 그땐 그 분노를 국민은 어떻게 삭여야 할까?

이런저런 어수선한 가운데 연말을 보내고 나니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새해를 맞게 된 느낌입니다.

김근태 민주주의 투사가 우리의 곁을 떠나면서 새해 벽두부터 쓸쓸해지기 시작합니다.

봄은 아직 멀었는데, 마음은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총선에서 얼어붙은 국민의 마음이 녹여질까?

새로운 희망이 움틀까?

그런 바람이 있어 그나마 다행입니다.

현실이 이렇다보니 새해가 어느덧 시작되었다고 말할 법 합니다.

늦게나마 여러분,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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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맥호벡Frank MacHovec의 『한 권으로 읽는 동양철학』(도서출판 知와 사랑) 중에서

 

승려의 의자, 선의 찻잔, 선사의 기적, 승려의 사명, 천국과 지옥 가까이에서!

승려의 의자

예로부터 불교의 승려들은 서열에 따라 지정된 의자에 앉았다. 어느 날 한 어린 수도승이 선불교의 접근법을 이용하여 나이도 가장 많고 가장 높은 깨 달음의 경지에 올랐다는 승려의 자리에 앉았다. 노승은 그 자리에 앉은 제자 에게 다가가 선불교의 대화를 시작했다.

노승 불교식으로 말해 나이가 몇인고?

제자 선사시대의 붓다만큼이나 오래되었습니다.

제자의 말에 주위가 고요해졌다. 그 자리에 있던 승려들은 그 제자가 매우 강한 선불교의 논거를 제시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노승은 당황하지 않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저리 비키게. 내 증손자 아닌가.”

 

오도의 불꽃

이것은 선에서 말하는 전형적인 ‘한 수 앞서가기one-upmanship’ 로 겉으로는 유치한 말장난으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깊은 영적 의미가 담 겨 있다. 선불교를 믿는 신자들은 철저히 단순한 방식으로 수행하기 때문에 어린이처럼 쾌활하다. 그들은 아기처럼 세상을 있는 그대로 순수하고 단순하게 바라본다.

선의 찻잔

서양의 한 학자가 유명한 선사를 찾아갔다. 학자는 자신의 경험과 훈련, 연 구, 저서, 여행담, 관심분야 등에 관해 설명한 후 선을 배우고 싶다고 밝혔다. 학자가 쉬지 않고 이야기하는 동안 선사는 차를 내왔다. 그리고 손님의 찻잔 이 넘칠 때까지 계속 차를 부었다. 학자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찻잔이 가득 찬 게 안 보이십니까?”

선사가 조용히 말했다.

“네, 당신의 머리도 생각으로 가득 차 넘치는군요. 빈 찻잔을 가져오지 않 는 한 당신에게 선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오도의 불꽃

선은 인지하기보다는 경험에 의거하며 이론적이기보다는 실질 적이다. 배울 수는 있으나 알 수 없고, 읽을 수 있으나 결코 깨달을 수 없다. 선사는 개인의 편견과 이미 터득한 지식까지도 깨달음을 얻는 데 방해물이 될 수 있음을 지적했다.

선사의 기적

선사가 앉은 자세로 명상에 잠겨 있을 때 서양 선교사 한 명이 다가왔다.

선교사 제가 믿는 종교의 창시자는 많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그분은 물 위를 걷기도 했습니다. 선생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선사 전 그저 작은 기적을 행할 뿐입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습니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외로우면 더 큰 진리를 생각합니다. 모욕을 당했을 때 용서를 할 수도 있답니다.

 

오도의 불꽃

이 대화는 직설적이고 성급한 서양과 우회적이고 사색적인 동 양의 특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승려의 사명

수세기 전 일본에 한 승려가 살고 있었다. 그는 일본어로 인쇄된 최초의 불 교 경전을 만드는 일을 사명으로 삼고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며 시주를 받았다. 십 년 노력 끝에 마침내 필요한 돈을 모았지만, 공교롭게도 그해에 우지 강이 범람하여 큰 흉년이 들었다. 결국 승려는 그 돈 을 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썼다.

승려는 다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불경 인쇄에 필요한 돈을 모았다. 십 년이 지나 충분한 돈을 모았을 때 전염병이 돌았다. 그는 그동안 모은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약을 사주었다.

세 번째로 승려는 십 년 동안 온 나라를 떠돌며 돈을 모았다. 그는 늙고 지 쳤지만 죽기 전에 자신의 사명을 완수했다. 불경은 일본어로 인쇄되었고, 오 늘날 우리는 그 불경을 박물관과 도서관에서 볼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승려가 인쇄한 불경이 그의 첫 번째, 두 번째 업적만큼 훌륭하지 않다는 사실을 안 사람들이 전해준 것이다.

 

오도의 불꽃

이 우화는 19세기 영국의 평론가이자 시인인 제임스 헌트James Henry Leigh Hunt의 『아부 벤 아뎀Abou Ben Adhem』과 다소 흡사하다. 아부 벤 아 뎀은 8세기의 유명한 무슬림 신비주의자로 왕좌를 버리고 금욕주의자가 되 어 알라 신에게 자신을 바쳤다. 헌트의 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어느 날 밤, 벤 아뎀 앞에 천사가 나타났다. 천사는 황금 책에 신을 사랑하는 자들의 이름을 적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는지 묻자 천사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러자 “그렇다면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제 이름을 적어주십시오”라고 요청했다. 이 시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다음 날 밤

천사가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신이 사랑하여 축복을 내린 사람들의 이름을 보여주었다.

아! 벤 아뎀의 이름이 맨 위에 적혀 있었다.

천국과 지옥 가까이에서!

황제의 호위대장인 유명한 사무라이가 자리에서 물러났다. 노년을 깨달음 을 얻는 데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존경받는 선사를 찾아가 자신의 의지를 밝혔다.

무사 선생의 철학과 명상에 대해 배우고 싶습니다.

선사 무엇이 알고 싶소?

무사 천국과 지옥이 정말로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선사 당신은 누구요?

무사 저는 황제의 호위대장이었습니다.

선사 말도 안 되오. 당신 같은 사람을 받아주는 황제도 있단 말이오?

무사(분개하여) 나는 전장에서 수없이 승리를 거둔 사무라이오.

선사 못 믿겠는데. 내겐 그저 거지로 보일 뿐이오만.

(무사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칼을 뽑아들려고 했다.)

선사 아, 칼은 보이네그려. 아마 훔쳤을 거요. 칼을 쓸 줄도 모르는 게 분명하오. 녹이 슬고 무뎌서 아무것도 자를 수가 없을 거요.

(무사는 분노하여 칼을 뽑아들고 선사의 목을 겨눴다.)

선사(차분하게) 자! 이제 질문의 답을 반은 얻은 셈이오. 지금 지옥의 문이 당신 에게 열려 있소.

(무사는 처음에는 혼란스러워 하다가 나중에는 몹시 화가 났다. 하지만 이제껏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끈 건 그의 빠른 판단력과 지혜였다. 선사의 말에 갑작스런 충격을 받은 그는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그리고 굉장한 오도의 폭발에 몸을 떨며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선사(차분하게) 자, 아들아! 이제 나머지 반의 해답도 얻었구나. 지금은 천국의 문 이 너를 향해 활짝 열려 있단다.

 

오도의 불꽃

선을 설명하기 위해 일부러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기도 한다. 선사는 무사의 전투세계에 들어가 그것을 참고로 무사의 관심을 끌고 그가 오도를 경험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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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절 워버턴Nigel Warburton『한 권으로 읽는 철학의 고전 27 Philosophy the Classics』(도서출판 知와 사랑) 중에서

 

 

바루흐 드 스피노자의 『 윤리학 』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아주 특이한 책이다. 『윤리학』에는 정의, 공리, 명제, 계, 예증 같은 유클리드 기하학 용어가 즐비하다. 하지만 이러한 기하학적 용어 너머에는 우주에서 우리 인간의 위치를 이해하기 위한 매력적이고 심오한 시도가 깃들어 있다.

이 책의 정식 제목은 『기하학적 방식으로 입증한 윤리학Ethics Demonstrated in a Geometrical Manner』이다. 철학서를 기하학 교과서의 형태로 집필한 까닭은 무엇일까? 우선 스피노자는 다양한 가설에서 논리적으로 결론을 추론한 유클리드의 방식에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유클리드의 방식에서 결론은 전제에서 어김없이 투명하고 우아하게 도출되었다. 스피노자가 도출한 결론에는 여러 정의의 진정한 함의가 무엇인지 조목조목 설명되어 있다. 그가 내세운 전제를 받아들이면 그가 얻은 결론도 수용해야 한다. 그의 추론이 옳다면 말이다.

이 책에 거침없이 등장하는 기하학 용어에도 불구하고 스피노자의 논증은 기하학적 논증 특유의 순수성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이 난해한 책 안에는 거대한 힘에 대한 철학적・�심리적 통찰이 담겨있다.

스피노자는 흔히 합리론자로 평가된다. 그는 우주에서의 우리 위치에 관한 지식을 오직 이성의 힘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경험과 관찰을 지식의 원천으로 믿은 경험론자들과 아주 달랐다. 스피노자는 이성을 통해 우주의 본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우주가 이성적 질서에 따라 배열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우주의 체계는 결코 우연히 이뤄지지 않는다. 거기에는 필연적 이유가 있다. 불완전한 감각적 경험은 결코 우주를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스피노자가 과학적 연구를 경시했다는 말이 아니다. 그는 광학과 연관된 렌즈가공업으로 생계를 유지했으며, 그가 만든 렌즈는 과학적 지식을 넓히는 도구인 현미경과 망원경에 쓰였다.

제목 the title

앞서 살펴봤듯이 이 책의 정확한 제목은 『기하학적 방식으로 입증한 윤리학』이다. 하지만 이 책의 모든 부분이 흔히 우리가 『윤리학』에서 연상하는 내용을 다루지는 않는다. 1부의 꽤 많은 부분이 실체(혹은 본질)와 신에 관한 내용인데, 이 두 가지는 결국 동일한 것으로 판명된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이것은 형이상학에 해당할 것이다. 스피노자의 주제는 우주와 우주 속에서의 우리의 위치, 즉 실재의 본성이다. 스피노자가 보기에 형이상학과 윤리학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실재의 본성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신과 범신론 God and pantheism

『윤리학』의 도입부에서 스피노자는 실체에 대한 정의를 바탕으로 일원론, 즉 하나의 실체만 존재할 수 있으며 그것이 바로 신이라는 점을 증명하기 시작한다. 이에 따르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존재한다. 신은 자연을 창조하지 않았다. 신이 바로 자연이다. 스피노자는 ‘신 또는 자연’을 논하는 동안 두 가지를 동일시한다. 사유와 연장extension(물리적 공간을 차지하는 것)은 신의 무한한 속성 중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두 가지 속성이다. 스피노자는 복잡한 논증을 통해 이런 입장을 옹호한다. 모든 것이 신 안에 존재한다는 그의 결론은 흔히 일종의 범신론으로 간주된다. 더욱 예리한 해석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주장은 신이 세계와 다름없다는 것이 아니라, 신의 모든 속성이 세계에 표현되어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피노자의 범신론은 세계와 신이 동일하다고 보는 노골적인 범신론과는 다르다.

스피노자의 신학적 입장은 확실히 신의 본성에 관한 기독교나 유대교의 정통교리와 크게 다르다. 스피노자는 1632년에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난 포르투갈계 유대인이었다. 그는 1656년에 유대교 신앙을 저버림으로써 유대공동체로부터 추방을 당했다. 때문에 사후에야 비로소 『윤리학』이 출판될 수 있었고, 당대의 일부 사람들이 그가 신을 믿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신과 육체 mind and body

스피노자는 인간 존재의 정신적 측면과 육체적 측면의 관계를 설명하는 문제에 대한 해법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동시대인인 데카르트의 철학적 업적을 익히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철학 저서를 펴내기도 했다. 그러나 스피노자와 데카르트는 많은 부분에서 견해가 뚜렷이 달랐다. 정신과 육체가 전혀 별개의 사물이라고 주장한 데카르트와 달리 스피노자는 정신과 육체는 동일한 사물의 두 가지 불가분적 측면이라고 단언했다. 즉 정신은 육체와 동일한 것이다. 그것은 육체적인 것일 수도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다. 정신은 실체가 아니라 실체의 양태이다. 데카르트의 설명과 달리 정신과 육체는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대신에 정신과 육체는 단지 동일한 실체의 두 가지 측면일 뿐이다. 이런 관점의 논리적 귀결은 모든 물리적 실체는 정신적 측면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자유와 인간의 속박 Freedom and Human Bondage

스피노자의 도덕적 가르침의 핵심은 자유의 개념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원인과 결과의 사슬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모든 행동 그리고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선행적 원인에 의해 결정된다. 당신은 지금 이 책을 선택해 읽고 있지만, 스피노자의 설명에 따르면 당신의 선택은 이미 선행적 결정과 물리적 사건 등에 의해 정해져 있다. 당신의 결정은 아무런 원인 없이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신의 행동에는 선행적 원인이 없다는 점에서 오직 신만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과의 속박에서 벗어나 있다는 의미에서 인간의 자유에는 희망이 없다. 그렇지만 스피노자는 우리가 정념의 굴레에서는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정념의 굴레에서 벗어날 경우 우리는, 외적 원인가 아니라 내적 원인에 의해서만 자유로울 수 있다. 도덕적 행동은 정념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작동한다. 정념은 우리를 이리저리로 몰아감으로써 우리를 무기력한 희생자로 전락시킨다. 그런 정념의 수동적인 수단에서 벗어나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다.

인간의 속박이란 자기 행동의 원인을 모르는 사람들이 처한 상태이다. 그들은 외부적 원인에 의해서만 움직이며,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한다. 그들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날아가는 돌과 같다. 우리가 이런 속박에서 벗어나서 외적 동기가 아니라 내적 동기에 따라 행동할 수 있으려면 행위의 원인을 이해해야 한다. 어떤 감정의 원인을 인식하면, 그 감정은 더 이상 정념의 형태로 우리를 옥죄지 않는다. 『윤리학』에는 이런 점을 일깨우려는 의도도 담겨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스피노자의 사상은 일종의 심리요법을 연상시킨다. 정념으로부터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행위의 진정한 원인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는 자유로운 결정에 더 이상 원인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진정한 원인을 이해하면 그 원인은 내면화되며, 우리의 이해를 통해 원인이 변화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그러나 원인을 초래하는 행동은 여전히 결정된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이 특정한 의미에서의 인간의 자유의지와 선행적으로 결정되는 우리의 행동이 서로 조화를 이룬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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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맥호벡Frank MacHovec의 『한 권으로 읽는 동양철학』(도서출판 知와 사랑) 중에서

 

공주의 머리와 승려의 여인

공주의 머리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어 몹시 속상한 공주가 있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얼굴이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공주의 가족은 얼굴이 분명 보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안심시켰지만, 공주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가족이니까 그렇게 말해주는 거예요.”

거울이 앞에 놓여 있었지만 그녀는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이건 내 사진이에요. 머리는 맞지만 분명 내 머리는 아니에요.”

공주의 아버지는 필사적인 심정으로 딸을 마을 광장 기둥에 묶어 놓고 머 리가 잘 붙어 있다고 말해서 공주를 안심시켜달라는 내용의 팻말을 행인들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걸었다. 많은 사람들이 적힌 대로 했지만 공주를 더욱 속상하게 할 뿐이었다. 그녀는 이렇게 탄식했다.

“나는 볼 수가 없어요. 느낄 수도 없어요. 머리가 없는 게 틀림없어요.”

바로 그때였다. 지팡이를 짚은 한 노인이 다가와 팻말에 적힌 글을 읽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지팡이를 휙휙 돌리더니 공주의 머리를 냅다 내리쳤다. 공주가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자 노인이 말했다.

“바로 그게 당신의 머리요!”

 

 

 

오도의 불꽃

수백 년 동안 전해오는 이 우화는 엄한 사랑 혹은 현실요법의 한 사례다. 때로는 단순한 행동이 백 마디 말보다 낫다. 때로는 생각보다 신체적 감각이 더 많은 걸 깨닫게 한다.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심리치료에 직면 直面을 사용하는 프리츠 펄스의 게스탈트 요법에서도 이 우화는 가장 보편적 인 사례가 될지 모른다. 경험이 치료인 것이다!

승려의 여인

승려 두 명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마을에서 음식 시주를 받았다. 우기였으므로 거리가 온통 진흙탕이었다. 한 매력적인 여인이 값비싼 비단옷을 망칠까 염려하여 길을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한 승려가 망설임 없이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여인이 승낙하자 그는 여인을 번쩍 안아서 길 건너편에 내려주었다. 그러자 다른 승려가 몹시 언짢아했다. 그리고 사찰로 돌아가는 내 내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여인과 접촉하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는 걸 잘 알지 않는가. 우리는 여인의 근처에도 가서는 안 되네. 특히 아름다운 여인은 더더욱 안 되지. 절 대 손을 대서는 안 돼.”

사찰 입구에 도착하자 첫 번째 승려가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보게, 난 몇 시간 전에 그 여인을 잠깐 들었다 놨을 뿐이네. 하지만 자네 는 아직도 그 여인을 마음에 품고 있지 않는가.”

 

 

 

오도의 불꽃

수세기 동안 선사들은 새 신자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얼마나 많은 짐을 지고 있습니까?”

혹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짐을 너무 많이 가져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버리려면 시간이 꽤 많이 걸리거든요.”

이는 선불교에서 끝내지 못한 마음의 고민, 풀지 못한 문제, 그리고 해결되지 않은 과거의 인간관계를 말하는 전형적인 방법이다. 근심 걱정 없는 시간 을 기대하며 휴가를 계획했던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짊어지고 온 긍정 적, 부정적 짐을 깨닫고 이내 실망하고 만다. 선불교에서는 가벼운 여행이 최선이라고 가르친다. 오직 이 순간만이 현실이다. 어제는 영원히 지나가버렸으며 내일은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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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이란 이름은 굳이 미술을 공부하지 않았더라도 소비문화를 공유하는 대중적인 세대의 사람이라면 한두 번은 들어봤음 직 하다. 간단한 상이 색채만 뒤바뀌고 계속 반복되는 모습의 이미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보다 더 앤디 워홀에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은 영화 팩토리 걸을 접한 후였다. 영화가 상영되던 당시 곳곳에 붙어있던, 영화 팩토리 걸의 화려한 색감의 메인 포스터는 내 눈길을 끌었고,
본문요약 앤디 워홀이란 이름은 굳이 미술을 공부하지 않았더라도 소비문화를 공유하는 대중적인 세대의 사람이라면 한두 번은 들어봤음 직 하다. 간단한 상이 색채만 뒤바뀌고 계속 반복되는 모습의 이미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보다 더 앤디 워홀에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은 영화 팩토리 걸을 접한 후였다. 영화가 상영되던 당시 곳곳에 붙어있던, 영화 팩토리 걸의 화려한 색감의 메인 포스터는 내 눈길을 끌었고, 나는 워홀과 그가 영화를 제작하던 시기 그의 예술 감각에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에디 세즈웍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다. 영화는 그의 뮤즈와 뮤즈의 비극에 중점을 두며 워홀의 작품 활동 시기 중 일부만을 다루었고, 은빛 머리칼로 기억되는 대중스타로서의 워홀의 이미지는 간략하게 언급했기에 영화자체만으로는 워홀 알아가기에 많은 부족함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쁜 일상 속에 그의 삶에 대해 더 이상의 접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현대미술사 강의를 수강하면서 얻은 뜻밖의 기회로 앤디 워홀의 생애와 작품에 대해 보다 더 알아보고자 했다. 앤디 워홀은 수많은 작품을 그의 독창적인 기법과 시각을 활용하여 남겼지만 분량 상, 전반적인 작가의 행적에 대해서는 간략히 언급하고 ‘실크스크린과 반복의 미학’, ‘앤디 워홀과 죽음 이미지’, ‘창조의 공간, 팩토리’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작가 연구를 진행했다.
목차 서 론

#1.실크스크린과 반복의 미학

#2. 앤디 워홀과 죽음 이미지

#3. 창조의 공간, 팩토리반복,


죽음 그리고 창조
참고자료 이자벨 드 메종 루주, 2007, 『현대미술』
앤디 워홀, 1975, 『앤디 워홀의 철학』
노버트 린튼, 1993, 『20세기의 미술』
클라우드 호네프, 2006, 『앤디 워홀』
김광우, 1997, 『워홀과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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