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더스 문명은 여전히 우리에게 거대한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인더스 문명에서 발견된 문서는 그 수도 얼마 되지 않거니와, 아직까지도 해독되지 못했다. 수메르어와 아카드어로 쓰인 고대 기록 덕분에 고대 서아시아 문명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었던 것과 달리, 인더스 문명은 여전히 우리에게 거대한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인더스 문명은 말이 없으니 유적지에 남아 있는 유물들을 살펴 그들의 삶을 어림짐작해보는 것이 고작이다. 모헨조다로에서 발견된 건축물은 크게 세 가지, 즉 대형 목욕탕・곡물창고・기둥이 세워진 집회장으로 분류된다. 너비가 12m, 폭 7m에 이르는 대형 목욕탕은 깊이가 무려 3m나 된다. 목욕탕 양 끝에 있는 역청을 바른 나무 발판이 있는 견고한 계단으로 탕에 출입할 수 있다. 탕 안에 물을 가두어두기 위해서 욕탕 바닥을 톱으로 잘라, 시멘트와 모래를 물로 반죽한 석고 모르타르를 바른 벽돌로 만드는 것으로 방수처리를 했다. 벽돌의 겉면에는 비슷한 비율로 모르타르가 칠해져 있고, 벽돌 사이사이에 역청을 발라 이어 붙였다. 물은 근처 우물에서 끌어오게 되어 있고, 한쪽 모서리에 배수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목욕탕 주변에는 탈의실들이 있고, 위층으로 이어지는 계단도 있다. 고지대의 최상부에 위치한 이 정교한 건물은 종교적인 용도로 쓰인 건물임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이 목욕탕은 이후의 인도 역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사원 호수의 원형인 제례용 목욕탕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목욕탕을 이용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특권계급인 사제들뿐이었을 것이다. 당시 사제의 모습을 가장 여실하게 보여주는 유물은 모헨조다로에서 발견된 소형 조상이다. 소형 조상은 장식 머리띠를 하고 있는 턱수염이 난 사제의 모습을 돌에 새긴 조각상이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것은 붓다에게 일생을 바친 데 대한 존경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대형 목욕탕에서 조금 떨어진 북쪽에서는 여덟 개의 소형 목욕실이 발견되었다. 이곳을 발굴한 이는 이 유적이 사제들만의 성소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종교를 후원하는 상류계급의 전용 욕실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심지어는 상류층 인사들의 부인이나 딸들이 이곳을 이용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모헨조다로 사람들이 몸을 씻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는 사실은 이 목욕탕이 종교적 의식과 관련 있는 시설임을 분명히 암시한다. 이 종교적 의식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바가 전혀 없지만 말이다. 대형 목욕탕 서쪽에는 거대한 곡물창고가 있는데, 이곳은 목욕탕처럼 알쏭달쏭한 미지의 공간은 아니다. 이 곡물창고는 환기구가 이리저리 복잡하게 나 있는 27개의 벽돌 구조물 위에 건축되어 있다. 소실된 곡물창고의 상부는 아마 목재로 건축되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인더스 계곡의 울창한 숲에서는 흑단같이 쓸 만한 목재를 구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이곳의 흑단을 실은 상선이 페르시아 만과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도착했다는 기록도 있다.
곡물창고는 대형 목욕탕보다 더 오래된 건축물인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고대인이 곡물의 저장을 수단으로 사회질서를 유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집권세력은 노예이건 자유인이건 간에, 고용인에게 현물로 임금을 지불해야 했을 것이다. 모헨조다로에서 잉여식량을 곡물창고에 저장한 것은 생산과 분배의 체계가 엄격한 통제 하에 있
었다는 걸 의미한다. 저 멀리 남쪽 로톨에 있는 벽돌로 지은 항구에서 그러했듯이 말이다. 인더스 문명에도 상거래를 하는 계층은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고고학적 증거들은 정부 주도의 경제활동이 주를 이뤘음을 보여준다. 모헨조다로 북부의 하라파 유적지에서는 두 채의 곡물창고가 발견되었다. 각 곡물창고에는 5칸의 작업장과 2칸의 창고가 있었다. 특정한 목적을 위해 건축된 이 시설에서 정부가 고용한 인부들이 도시의 거주민들을 위해 밀가루를 저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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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두 번째 문명: 인더스 계곡

 

 

 

 

 

 

1921년에 펀자브의 작은 마을 하라파에서, 그리고 1922년에는 인더스 강 하류 신드의 모헨조다로에서 인도 아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고대도시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지금껏 제일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도시유적보다 무려 2000년 전에 존재한 도시의 자취였다. 첫 발굴 이후로 일명 ‘인더스 문명’이라 불리는 인도 아대륙 최고문명의 수혜를 받은 촌락터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수가 천여 개에 이를 정도였다. 놀라운 사실은 이 촌락들이 일률적인 도시계획에 의해 건설된 거주지구라는 사실이었다. 북쪽에 위치한 촌락이건 남쪽에 위치한 촌락이건 촌락터에는 기가 막힌 질서가 존재했다. 고고학자들은 이 거대 촌락지구의 발견은 대제국, 아니면 적어도 국가연합의 존재를 제시하는 사건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촌락들은 엄청나게 광범위한 지역에 퍼져 있었다. 현재까지 발견된 촌락의 분포만으로도 아시아 3대 문명의 발상지, 즉 메소포타미아 문명・인더스 문명・황허 문명 중에서 가장 인구 수가 많은 지역이라는 결론을 내리기에 충분했다. 그 차이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비교해볼 때 한층 확연했다.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계곡의 면적은 약 65,000km2인 데 반해, 인더스 계곡의 면적은 무려1,200,000km2에 달했다. 중국의 상나라가 지배했던 지역은 인더스 문명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현대의 중국은 엄청난 땅덩어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말이다. 다른 점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도시를 기반으로 한 수메르인과 달리 인더스 계곡의 거주자들 대부분이 도시 관할 하의 촌락에 살았다. 이것은 매우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하라파 거주 인구는 약 40,000명이었고 모헨조다로의 거주 인구는 약 30,000명이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도시들과 그 규모 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더스 문명의 도시들은 이례적으로 광범위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인더스 계곡에 위치한 대부분의 도시들은 중앙집권세력이 거주하는 중심부 촌락이 중심에 있고,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지역에 촌락들이 듬성듬성 자리 잡고 있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 반면 수메르나 바빌로니아의 거주지들은 다른 거주지의 모습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근접거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인더스 문명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나 중국의 황허 문명과 달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는 것도 중요한 차이점이다. 이 고도로 발달된 아시아의 두 번째 문명은 기원전2400~1800년까지 고작 600여 년 동안 지속되었을 뿐이다. 심지어 모헨조다로에서 도시가 활성화되기 시작한 건 기원전 2350년 즈음으로 추정된다. 동부지역에 거대한 시가지가 생겨났는데, 이 동부지역 전체를 요새화할 수 없었던 것도 이해가 간다. 또 서쪽에는 진흙과 진흙을 구워 만든 벽돌로 성채도 건설했다. 남쪽은 높이 3m, 북쪽은 높이 6m에 이르는 이 성채에 쓰인 진흙 벽돌 덕에 이곳 사람들은 홍수를 막아낼 수 있었다. 인더스 강의 주기적인 범람으로 보리나 밀, 각종 과일과 채소를 재배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자연의 선물에는 대가가 따랐다. 강변에 위치한 촌락은 홍수를 막아내기 위해 지속적인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구운 진흙벽돌의 발명으로 진흙을 이용해 건설한 벽과 기반은 몰라보게 튼튼해졌다. 인더스 강변에 위치한 모헨조다로의 시민들에게는 더없이 필요한 선물이었던 것이다. 현재 모헨조다로 유적지에는 성채가 있는 ‘고지대’와 시민들의 주거지가 있는 ‘저지대’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어마어마한 규모의 인공구조물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의 손길로 이 고대도시가 건설되었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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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아랍세계와 이스라엘의 관계가 종말을 고하게 될 것

 

 

 

 

 

 

 

중동 평화에 중점을 두면 현 사태를 달리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분석가 요시 K. 할레비가 “이집트의 유일한 야권세력인 무슬림 형제단이 집권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암울한 가정” 을 두고 『뉴욕 타임스』지의 글로벌 에디션에 기고한 바에 따르면, “결국은 아랍세계와 이스라엘의 관계가 종말을 고하게 될 것” 이라고 한다. “무슬림 형제단은 일찍이 이스라엘과의 평화를 반대해온 데다, 권력을 장악하면 1979년에 체결한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을 폐기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뉴욕 타임스』지의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도 이를 잘 알고 있었으나, 본지에는 “무바라크가 분노의 대상이 될 법하다” 며 무바라크 퇴진 “이후는 이스라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니 당국이 우려할 만하다” 고 밝혔다. 하지만 무바라크와 이스라엘은 이를 초래한 책임을 서로 감당하고 있다. 예컨대, 무바라크는 “권위주의 국가와 무슬림 형제단 사이의 공백을 채우려” 하지 않았고, 이스라엘 총리인 네타냐후— 오늘날과 1990년대 말 초기 집권 시대를 통틀어— 는 “평화안을 테이블에 제시하지 않기 위해 갖은 구실을 찾으려 한 탓에 평화협상의 무바라크가 되었으니 말이다.” 이 같은 혼란 속에서 무슬림 형제단은 무바라크 이후 중동에서 활약할 수 있는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고 말았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마스가 가자지구를 장악할 때와 마찬가지로, 이를 두고도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샤리아국가” 는 카이로와 튀니스 거리를 메운 사람들이 열망해온 민주정치와는 관계가 없다. 이슬람주의의 유일한 세속적 “대안” 이라며 자신을 정당화한 독재자들은— 퇴출자와 현역을 통틀어— 이슬람세계를 왜곡했는데, 이슬람주의자들이 “[이슬람주의를 일컫는] 이슬람교가 해결책” 이라며 내세운 슬로건으로 그 주장을 반박할 때도 왜곡이 또 한 차례 벌어지고 말았다. 비이슬람주의 무슬림에게는 이슬람주의가 아니라 민주적인 자유가 대안이었다.
따라서 중동의 미래는 분명치가 않다. 권위주의에서 민주정치가 급속도로 이행되리라는 발상은 서방세계의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이슬람주의 조직이 권위주의 정권을 이은 정부— 실체가 무엇이든— 수립에 참여하는 것은 민주정치의 향방을 더욱더 불분명하게 만들 따름이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촉발된 아랍의 봄은 리비아를 비롯하여 탱크를 동원하여 대량 살상을 자행한 시리아에까지 번졌다. 이슬람주의자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시리아의 바스정권이 시리아를 공동묘지로 만든다면 2011년 말경의 소요사태는 암울한 아랍의 겨울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2011년 가을, 아랍의 봄은 이미 이슬람주의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당시 이슬람주의자들의 조직들은 현지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를 두고 어느 친민주정치 당원은 『뉴욕 타임스』지와의 인터뷰에서 “이슬람주의자들은… 실제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같습니다. … 리비아인은 대개 독실한 이슬람교도가 아닙니다만 이슬람주의자들은 조직력이 강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라고 밝혔다. 본지는 이슬람주의 지도자 셰이크 알리 살라비와 트리폴리 여단의 압둘 하킴 벨하지 사령관이 각각 정치와 군
사력에 행사하는 영향력도 아울러 보도했다. 이집트와 튀니지에서도 조직력이 탄탄한 이슬람주의 집단이 부각되고 있다.
지역을 살펴보자면, 터키는 아랍의 봄을 지지했다. 독재자가 축출된 세 국가— 이집트, 리비아, 튀니지— 에 2011년 말경 순방한 첫 정치인은 에르도안 터키 총리였다. 그는 방문 일정을 앞두고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이스라엘을 규탄하고 터키 주재 이스라엘 대사를 추방했다. 그러자 카이로의 무슬림 형제단은 그를 “영웅” 으로 추앙했다. 뉴스 전문가는 이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에르도안 총리는 수 세기간 오스만 제국의 중심지였던 터키에서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아랍의 봄을 발판으로 삼으려고 했다.” 또 다른 권위자는 터키가 “아랍 지역에서 정치세력으로 부상한 자국을 홍보하며 영향력을 확산시키려 했다”99고 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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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 공리주의와 규칙 공리주의의 형식상 차이

 

 

 

 

 

행위 공리주의와 규칙 공리주의의 형식상 차이는 이것들이 각기 옳은 행위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에서 발생한다. 행위 공리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상황에서의 행위가 다른 행위보다 더 큰 효용을 가져올 때, 그리고 오직 그러할 때에만 그 행위가 옳은 행위다. 이와 달리, 규칙 공리주의에서는 하나의 규칙 아래 놓여 있으면서 그 규칙을 따르는 행위가 다른 규칙을 따를 때보다 더 큰 효용을 가져올 때, 그리고 오직 그러할 때에만 그 행위가 옳은 행위다. 행위 공리주의와 규칙 공리주의의 차이를 덜 형식적인 방법으로 설명하려면, 앞서 공리주의의 문제를 지적할 때 나온 사례들을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 예컨대 우리는 앞서, 행위 공리주의의 절차에 따라 각 행위의 효용을 계산하고 비교하는 행위자는 친구들로부터 신뢰를 받을 수 없으므로, 또한 이러
한 행위자들로 채워진 사회는 약속이 잘 지켜지는 사회보다 덜 행복한사회이므로, 공리주의는 본래 목표를 이루지 못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규칙 공리주의자들은 바로 이런 행위 공리주의의 약점을 끌어다가 오히려 자신들의 논리를 강화하는 데 쓴다. 규칙 공리주의가 내세우는 논리는 두 개의 세상, 곧 약속이 지켜지는 세상과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세상을 비교하는 데서 출발한다. 전자가 더 행복한 세상인 것으로 판명되면, ‘약속을 지키라’는 규칙을 채택하여 사람들이 이 규칙에 따르도록 한다. 가족관계나 우정 같은 문제에서도 같은 방법이 적용된다. 이런 관계가 형성되고 유지되는 세상이 그렇지 못한 세상보다 더 행복한 것으로 판명되면, ‘친구를 위하라’는 규칙을 채택하여 모든 사람이 따르도록 한다. 친구들을 위하고, 약속을 지키는 것 같은 행위는 규칙 공리주의에 비추어 옳은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규칙 공리주의는 본래 공리주의가 안고 있던 많은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자부한다. 아닌 게 아니라, 규칙 공리주의는 끝이 전혀 보이지 않던 계산의 터널에서 공리주의자들을 구해내고, 공리주의를 궁극의 목표에서 빗나가게 한다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한다. 공리주의는 궁극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비평 앞에서 규칙 공리주의자들이 진실로 주장하려 한 것은 앞서 행위 공리주의를 논하는 가운데 전제된 가장 적절하다는 규칙, 곧 ‘언제나 나의 행위가 가져올 결과를 평가하고 가장 적절하게 행위하라’는 규칙을 따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점이다. 요컨대, 행위 공리주의가 내세우는 규칙을 따르더라도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며 차라리 의무론의 지시와 관습적 도덕의 요구에 가까운 규칙들을 따를 때에 더 나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규칙 공리주의의 또 다른 이점은 공리주의가 비도덕적인 행위를 조장한다는 인상을 털어낸다는 점이다. 죄 없는 사람을 벌주던 사례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앞서 죄 없는 사람을 벌주는 것이 죄 있는 사람을 벌주는 것과 똑같은 혜택(예컨대, 억제의 효용)을 가져온다고 생각될 경우, 공리주의는 언제라도 서슴없이 죄 없는 사람을 벌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법관들은 사건에 따라 재량으로 판결을 내릴 것이다. 그런데 규칙 공리주의의 시각에서 이 일을 돌이켜보며 모든 개인이 관행이나 제도에 바탕을 둔 다양한 규칙에 따라 행위한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다시 두 개의 세상이 있다고 가정하자. 하나는 법관이 전체의 복지를 위해 이롭다고 판단할 경우, 재량에 따라 죄 없는 사람이라도 벌을 줄 수 있는 ‘목적론적 처벌’15 제도가 시행되는 세상이다. 또 하나는 우리가 이미
익숙해진 형벌제도를 시행하는 세상으로, 오직 죄 있는 사람만이 규칙에 따라 벌을 받는다. 행복의 총량이 더 큰 세상은 어느 쪽일까? 존 롤스는 논문 「규칙의 두 가지 개념Two Concepts of Rules」에서 목적주의에 입각하고 있으며, 의무론과는 반대의 견해다.
분적으로는 법관들이 해명할 필요가 없는 권위, 따라서 쉽사리 남용될 수 있는 권위를 행사하여 죄 없는 사람이라도 자의와 재량에 따라 처벌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부분적으로는 시민이 혹시 희생양이 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면서 형을 받은 사람을 불쌍히 여겨야 할지, 그에게 저주를 퍼부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불안에 떨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롤스는 오직 죄 있는 사람만을 벌주는 세상이 더 행복한 세상이라 주장했다. 인간이 붙들고 살아야 할 규칙은 ‘오직 죄 있는 사람만을 벌주라’는 규칙이다. 모든 대안 가운데 (또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대안 가운데) 이 규칙만이 최선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규칙 공리주의는 ‘원칙 없는 공리주의’를 손가락질하는 의무론자들의 날 선 비평에서 독을 빼냈다. 규칙 공리주의는 원칙 있는 도덕을 제시했고, 그 원칙 가운데는 직관적으로 찬성할 만한 것이 많다. 이렇듯 규칙 공리주의는 우리의 지지를 받을 만한 많은 원칙들포함하면서도, 의무론을 따르는 사람들이 곧잘 쓰는 ‘마땅히 해야 하느
니라’ 식의 애매함을 배제했다. 설령 어떤 사람이, 금기는 그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모호하다는 결과주의론적 견해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일련의 원칙들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규칙 공리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런 원칙들은 오직 좋은 결과를 가져올 때에만 비로소 정당화된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들의 권위를 설명하기 위해 행복이나 고통 이상의 그 어떤 모호한 개념을 사용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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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법을 찾아서: 규칙 공리주의

 

 

 

 

 

 

공리주의에 관해 지금까지 제기된 비평들을 정리해보자. 첫째, 공리주의가 부도덕한 결과를 빚어낸다는 점이다. 둘째, 공리주의는 인류 전체의 행복을 증진해나가는 데 필요한 사회의 관행(약속과 같은)이나 인간관계를 수용하지 못해, 본래 목적에서 빗나가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셋째, 공리주의는 정책결정 과정을 거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려서 정작 그 결정에 따라 행복을 증진할 시간을 남겨두지 않기 때문에, 본래 목적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런 일련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공리주의는 나름의 대책을 내놓는다. 여기서는 마지막 비평, 즉 공리주의의 거창하고 복잡한 정책결정 방식을 들여다보려 한다.
먼저, 비평의 요지를 더 확실하게 해둘 필요가 있다. 공리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는 그것이 인간의 능력과 합리성을 너무 비현실적으로 과대평가하는 데 있다. 공리주의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합리적인 사고에 따라 개인의 이익과 전체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존재로 본다.
그렇게 보는 것이 옳다면, 인간은 능숙한 계산가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늘 여러 대안들을 평가하고 비용과 효과를 셈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공리주의를 비평하는 사람들이 볼 때, 이런 인간의 모형은(경제학 자라면 좋아할지 모르지만) 인간이 실제로 생각하고 행위하는 방식을 아주 잘못 그리고 있다. 인간은 각각의 단계마다 일일이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의 형태를 따라 행위한다. 행위의 패턴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렇듯 행위의 형태를 마련해두고 있기에, 매 순간마다 처음부터 일일이 계산해나가는 실로 불가능한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인간 행위의 패턴 자체를 재검토할 여지는 있지만, 이런 일은 상대적으로 무척 드물게 이루어질 뿐이다. 대개는 시간이 없어서 깊이 생각하거나 검토하는 일에 매달리는 것은 오히려 비생산적인 결과만 가져올 뿐이
다. 그뿐 아니라 공리주의는 사회적 환경을 극복해가는 개인의 합리성을 과대평가한다. 실상을 들여다보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어서 사회적 환경을 뛰어넘어 멀리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이 한정되어 있다. 대체로 인간이 사고하고 행위하는 방식은 사회구조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그것의 영향을 받는다.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낸 행위의 형태를 따르는데, 이것이 여러 사람들과 공유하는 사회적 형태다. 수없이 다양한 인간들의 행위는 개인이 제각각 효용을 계산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사회에서 형성된 관행이자 규칙을 반영한다. 그 밖의 방식으로도 인간의 행위를 옳게 이해할 수는 없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치명적인 비평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곧 살펴볼 터이지만 공리주의는 오히려 이런 비평들을 역이용하여 자신들의 논리를 강화한다. 말하자면, 공리주의자들은 인간이 행위하고 사고하는 방식에 관한 이 모든 경험적 사실을 일단 인정한다. 물론 공리주의자들에 따르면, 공리주의도 자연주의 이론이기에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하며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진실로 이렇게 생각한다면, 인간의 사고와 행위에 관한 이런 통찰을 바탕으로 공리주의가 펼쳐야 할 논리의 형식이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공리주의가 내세워야 할 논리는 인간이 합리적으로 이익을 극대화하는 존재가 아니라 규칙을 따르는 존재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세워져야 한다. 앞서 지적한 대로, 공리주의에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발생한 것은 인간의 모든 행위를 옳거나 그르다고 판정하는 이른바 행위 공리주의관점에서 인간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부터 공리주의는 인간의 행위가 규칙을 지키듯이 일정한 형태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보는 규칙 공리주의rule-utilitarianism의 관점을 채택하고, 이 방법을 인간의 행위에 적용하는 대신 인간의 행위를 결정하는 규칙에 적용해야 한다. 사람들이 다른 행위의 대안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규칙에 따라 행위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규칙 공리주의는 사람들이 따르는 규칙의 효용을 비교한다. 도덕적 사고는 개인의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를 판정하거나 다스리는 데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관행과 제도로 짜여 있는 (규칙이 지배하는) 사회의 구성에 더 관심을 둔다. 물론 도덕의 핵심이라 할, 개인의 행위를 다스리는 일 또한 계속되기는 하지만, 그 다스림 역시 더는 각각의 상황에 나타날 수 있는 최대 효용을 엄격하게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규칙을 적용하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어느 특정 상황에서 개인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정하려면, 그 상황에서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가장 적절한 규칙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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