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법을 찾아서: 규칙 공리주의

공리주의에 관해 지금까지 제기된 비평들을 정리해보자. 첫째, 공리주의가 부도덕한 결과를 빚어낸다는 점이다. 둘째, 공리주의는 인류 전체의 행복을 증진해나가는 데 필요한 사회의 관행(약속과 같은)이나 인간관계를 수용하지 못해, 본래 목적에서 빗나가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셋째, 공리주의는 정책결정 과정을 거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려서 정작 그 결정에 따라 행복을 증진할 시간을 남겨두지 않기 때문에, 본래 목적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런 일련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공리주의는 나름의 대책을 내놓는다. 여기서는 마지막 비평, 즉 공리주의의 거창하고 복잡한 정책결정 방식을 들여다보려 한다.
먼저, 비평의 요지를 더 확실하게 해둘 필요가 있다. 공리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는 그것이 인간의 능력과 합리성을 너무 비현실적으로 과대평가하는 데 있다. 공리주의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합리적인 사고에 따라 개인의 이익과 전체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존재로 본다.
그렇게 보는 것이 옳다면, 인간은 능숙한 계산가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늘 여러 대안들을 평가하고 비용과 효과를 셈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공리주의를 비평하는 사람들이 볼 때, 이런 인간의 모형은(경제학 자라면 좋아할지 모르지만) 인간이 실제로 생각하고 행위하는 방식을 아주 잘못 그리고 있다. 인간은 각각의 단계마다 일일이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의 형태를 따라 행위한다. 행위의 패턴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렇듯 행위의 형태를 마련해두고 있기에, 매 순간마다 처음부터 일일이 계산해나가는 실로 불가능한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인간 행위의 패턴 자체를 재검토할 여지는 있지만, 이런 일은 상대적으로 무척 드물게 이루어질 뿐이다. 대개는 시간이 없어서 깊이 생각하거나 검토하는 일에 매달리는 것은 오히려 비생산적인 결과만 가져올 뿐이
다. 그뿐 아니라 공리주의는 사회적 환경을 극복해가는 개인의 합리성을 과대평가한다. 실상을 들여다보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어서 사회적 환경을 뛰어넘어 멀리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이 한정되어 있다. 대체로 인간이 사고하고 행위하는 방식은 사회구조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그것의 영향을 받는다.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낸 행위의 형태를 따르는데, 이것이 여러 사람들과 공유하는 사회적 형태다. 수없이 다양한 인간들의 행위는 개인이 제각각 효용을 계산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사회에서 형성된 관행이자 규칙을 반영한다. 그 밖의 방식으로도 인간의 행위를 옳게 이해할 수는 없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치명적인 비평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곧 살펴볼 터이지만 공리주의는 오히려 이런 비평들을 역이용하여 자신들의 논리를 강화한다. 말하자면, 공리주의자들은 인간이 행위하고 사고하는 방식에 관한 이 모든 경험적 사실을 일단 인정한다. 물론 공리주의자들에 따르면, 공리주의도 자연주의 이론이기에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하며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진실로 이렇게 생각한다면, 인간의 사고와 행위에 관한 이런 통찰을 바탕으로 공리주의가 펼쳐야 할 논리의 형식이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공리주의가 내세워야 할 논리는 인간이 합리적으로 이익을 극대화하는 존재가 아니라 규칙을 따르는 존재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세워져야 한다. 앞서 지적한 대로, 공리주의에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발생한 것은 인간의 모든 행위를 옳거나 그르다고 판정하는 이른바 행위 공리주의의 관점에서 인간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부터 공리주의는 인간의 행위가 규칙을 지키듯이 일정한 형태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보는 규칙 공리주의rule-utilitarianism의 관점을 채택하고, 이 방법을 인간의 행위에 적용하는 대신 인간의 행위를 결정하는 규칙에 적용해야 한다. 사람들이 다른 행위의 대안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규칙에 따라 행위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규칙 공리주의는 사람들이 따르는 규칙의 효용을 비교한다. 도덕적 사고는 개인의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를 판정하거나 다스리는 데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관행과 제도로 짜여 있는 (규칙이 지배하는) 사회의 구성에 더 관심을 둔다. 물론 도덕의 핵심이라 할, 개인의 행위를 다스리는 일 또한 계속되기는 하지만, 그 다스림 역시 더는 각각의 상황에 나타날 수 있는 최대 효용을 엄격하게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규칙을 적용하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어느 특정 상황에서 개인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정하려면, 그 상황에서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가장 적절한 규칙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