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은 아랍세계와 이스라엘의 관계가 종말을 고하게 될 것

 

 

 

 

 

 

 

중동 평화에 중점을 두면 현 사태를 달리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분석가 요시 K. 할레비가 “이집트의 유일한 야권세력인 무슬림 형제단이 집권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암울한 가정” 을 두고 『뉴욕 타임스』지의 글로벌 에디션에 기고한 바에 따르면, “결국은 아랍세계와 이스라엘의 관계가 종말을 고하게 될 것” 이라고 한다. “무슬림 형제단은 일찍이 이스라엘과의 평화를 반대해온 데다, 권력을 장악하면 1979년에 체결한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을 폐기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뉴욕 타임스』지의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도 이를 잘 알고 있었으나, 본지에는 “무바라크가 분노의 대상이 될 법하다” 며 무바라크 퇴진 “이후는 이스라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니 당국이 우려할 만하다” 고 밝혔다. 하지만 무바라크와 이스라엘은 이를 초래한 책임을 서로 감당하고 있다. 예컨대, 무바라크는 “권위주의 국가와 무슬림 형제단 사이의 공백을 채우려” 하지 않았고, 이스라엘 총리인 네타냐후— 오늘날과 1990년대 말 초기 집권 시대를 통틀어— 는 “평화안을 테이블에 제시하지 않기 위해 갖은 구실을 찾으려 한 탓에 평화협상의 무바라크가 되었으니 말이다.” 이 같은 혼란 속에서 무슬림 형제단은 무바라크 이후 중동에서 활약할 수 있는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고 말았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마스가 가자지구를 장악할 때와 마찬가지로, 이를 두고도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샤리아국가” 는 카이로와 튀니스 거리를 메운 사람들이 열망해온 민주정치와는 관계가 없다. 이슬람주의의 유일한 세속적 “대안” 이라며 자신을 정당화한 독재자들은— 퇴출자와 현역을 통틀어— 이슬람세계를 왜곡했는데, 이슬람주의자들이 “[이슬람주의를 일컫는] 이슬람교가 해결책” 이라며 내세운 슬로건으로 그 주장을 반박할 때도 왜곡이 또 한 차례 벌어지고 말았다. 비이슬람주의 무슬림에게는 이슬람주의가 아니라 민주적인 자유가 대안이었다.
따라서 중동의 미래는 분명치가 않다. 권위주의에서 민주정치가 급속도로 이행되리라는 발상은 서방세계의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이슬람주의 조직이 권위주의 정권을 이은 정부— 실체가 무엇이든— 수립에 참여하는 것은 민주정치의 향방을 더욱더 불분명하게 만들 따름이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촉발된 아랍의 봄은 리비아를 비롯하여 탱크를 동원하여 대량 살상을 자행한 시리아에까지 번졌다. 이슬람주의자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시리아의 바스정권이 시리아를 공동묘지로 만든다면 2011년 말경의 소요사태는 암울한 아랍의 겨울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2011년 가을, 아랍의 봄은 이미 이슬람주의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당시 이슬람주의자들의 조직들은 현지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를 두고 어느 친민주정치 당원은 『뉴욕 타임스』지와의 인터뷰에서 “이슬람주의자들은… 실제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같습니다. … 리비아인은 대개 독실한 이슬람교도가 아닙니다만 이슬람주의자들은 조직력이 강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라고 밝혔다. 본지는 이슬람주의 지도자 셰이크 알리 살라비와 트리폴리 여단의 압둘 하킴 벨하지 사령관이 각각 정치와 군
사력에 행사하는 영향력도 아울러 보도했다. 이집트와 튀니지에서도 조직력이 탄탄한 이슬람주의 집단이 부각되고 있다.
지역을 살펴보자면, 터키는 아랍의 봄을 지지했다. 독재자가 축출된 세 국가— 이집트, 리비아, 튀니지— 에 2011년 말경 순방한 첫 정치인은 에르도안 터키 총리였다. 그는 방문 일정을 앞두고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이스라엘을 규탄하고 터키 주재 이스라엘 대사를 추방했다. 그러자 카이로의 무슬림 형제단은 그를 “영웅” 으로 추앙했다. 뉴스 전문가는 이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에르도안 총리는 수 세기간 오스만 제국의 중심지였던 터키에서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아랍의 봄을 발판으로 삼으려고 했다.” 또 다른 권위자는 터키가 “아랍 지역에서 정치세력으로 부상한 자국을 홍보하며 영향력을 확산시키려 했다”99고 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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