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더스 문명은 여전히 우리에게 거대한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인더스 문명에서 발견된 문서는 그 수도 얼마 되지 않거니와, 아직까지도 해독되지 못했다. 수메르어와 아카드어로 쓰인 고대 기록 덕분에 고대 서아시아 문명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었던 것과 달리, 인더스 문명은 여전히 우리에게 거대한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인더스 문명은 말이 없으니 유적지에 남아 있는 유물들을 살펴 그들의 삶을 어림짐작해보는 것이 고작이다. 모헨조다로에서 발견된 건축물은 크게 세 가지, 즉 대형 목욕탕・곡물창고・기둥이 세워진 집회장으로 분류된다. 너비가 12m, 폭 7m에 이르는 대형 목욕탕은 깊이가 무려 3m나 된다. 목욕탕 양 끝에 있는 역청을 바른 나무 발판이 있는 견고한 계단으로 탕에 출입할 수 있다. 탕 안에 물을 가두어두기 위해서 욕탕 바닥을 톱으로 잘라, 시멘트와 모래를 물로 반죽한 석고 모르타르를 바른 벽돌로 만드는 것으로 방수처리를 했다. 벽돌의 겉면에는 비슷한 비율로 모르타르가 칠해져 있고, 벽돌 사이사이에 역청을 발라 이어 붙였다. 물은 근처 우물에서 끌어오게 되어 있고, 한쪽 모서리에 배수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목욕탕 주변에는 탈의실들이 있고, 위층으로 이어지는 계단도 있다. 고지대의 최상부에 위치한 이 정교한 건물은 종교적인 용도로 쓰인 건물임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이 목욕탕은 이후의 인도 역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사원 호수의 원형인 제례용 목욕탕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목욕탕을 이용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특권계급인 사제들뿐이었을 것이다. 당시 사제의 모습을 가장 여실하게 보여주는 유물은 모헨조다로에서 발견된 소형 조상이다. 소형 조상은 장식 머리띠를 하고 있는 턱수염이 난 사제의 모습을 돌에 새긴 조각상이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것은 붓다에게 일생을 바친 데 대한 존경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대형 목욕탕에서 조금 떨어진 북쪽에서는 여덟 개의 소형 목욕실이 발견되었다. 이곳을 발굴한 이는 이 유적이 사제들만의 성소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종교를 후원하는 상류계급의 전용 욕실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심지어는 상류층 인사들의 부인이나 딸들이 이곳을 이용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모헨조다로 사람들이 몸을 씻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는 사실은 이 목욕탕이 종교적 의식과 관련 있는 시설임을 분명히 암시한다. 이 종교적 의식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바가 전혀 없지만 말이다. 대형 목욕탕 서쪽에는 거대한 곡물창고가 있는데, 이곳은 목욕탕처럼 알쏭달쏭한 미지의 공간은 아니다. 이 곡물창고는 환기구가 이리저리 복잡하게 나 있는 27개의 벽돌 구조물 위에 건축되어 있다. 소실된 곡물창고의 상부는 아마 목재로 건축되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인더스 계곡의 울창한 숲에서는 흑단같이 쓸 만한 목재를 구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이곳의 흑단을 실은 상선이 페르시아 만과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도착했다는 기록도 있다.
곡물창고는 대형 목욕탕보다 더 오래된 건축물인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고대인이 곡물의 저장을 수단으로 사회질서를 유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집권세력은 노예이건 자유인이건 간에, 고용인에게 현물로 임금을 지불해야 했을 것이다. 모헨조다로에서 잉여식량을 곡물창고에 저장한 것은 생산과 분배의 체계가 엄격한 통제 하에 있
었다는 걸 의미한다. 저 멀리 남쪽 로톨에 있는 벽돌로 지은 항구에서 그러했듯이 말이다. 인더스 문명에도 상거래를 하는 계층은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고고학적 증거들은 정부 주도의 경제활동이 주를 이뤘음을 보여준다. 모헨조다로 북부의 하라파 유적지에서는 두 채의 곡물창고가 발견되었다. 각 곡물창고에는 5칸의 작업장과 2칸의 창고가 있었다. 특정한 목적을 위해 건축된 이 시설에서 정부가 고용한 인부들이 도시의 거주민들을 위해 밀가루를 저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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