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맥호벡Frank MacHovec의 『한 권으로 읽는 동양철학』(도서출판 知와 사랑) 중에서

 

 

 

 

 

 

붓다의 명상, 마음챙김, 선불교의 현대식 적용

신체명상

눈을 감고 숨을 규칙적으로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을 의식하면서 긴장을 풀어라. 모든 감각을 의식하라. 처음에는 이상해 보일 수 있지만, 더 깊이 있 는 통찰명상으로 발달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신체명상body meditation은 매일 연습해야 한다. 아침에 일어날 때와 잠들 때 하라. 일상적인 활동이 신체명상 의 방법이 된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하라. 눈을 뜨고 있을 때에도 평화로운 광경, 벽의 그림, 카펫이 깔린 바닥, 옷감, 가구, 심지어 컴퓨터를 보면서도 명상의 인식을 발달시킬 수 있다. 조용하게 혼잣말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어느 때라도 몇 분 동안 일을 멈추고 자신이 하는 일 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표현하라. 촉각과 온기, 압력에 대한 감각과 그 느낌을 발달시켜라.

시각

방금 설명한 신체명상 방법을 이용해 자신이 보고 있는 것에 정신을 집중 하라(“나는 ……을 보고 있다”).

미각

미각을 명상의 대상으로 사용하는 좋은 예로 일본의 다도를 들 수 있다. 음 식을 천천히 먹을수록 맛, 질감, 온도, 향에 대한 명상적 인식을 발달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입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충분히 체험하라. 자극적이지 않은 지, 짜릿한지, 또는 매운지, 달콤한지, 쓴지, 혹은 신지, 따뜻한지, 차가운지 등 의 느낌을 말하라. 후각에 정신을 집중하라. 좋고 나쁜 냄새를 인식하라. 금방 자리를 뜨지 말 고 한동안 머물러 냄새를 느끼고, 늘 냄새에 대해 자신에게 조용하게 말하라.

물건

단단하거나 부드러운, 따뜻하거나 차가운, 크거나 작은, 고정되어 있거나 움직이는 물건과 물건의 촉감 그리고 느낌에 대해 명상하라. 단단한 줄기, 부드러운 잎, 날카로운 가시, 좋은 향이 있기 때문에 장미는 명상하기 좋은 대 상이다. 장미는 수천 년 동안 효과적인 명상의 대상이었다. 어떤 물건이라도 괜찮다. 시간이 지나면 하나가 될 물건을 내키는 대로 선택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 마음의 눈을 뜨는 데 도움이 된다.

감정

감정도 명상의 대상으로 이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좋거나 나쁜 기분, 확 고하거나 변하거나 복잡한 기분이 있다. 감정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어떻게 생겼다 사라지고 희미해지는지, 어떻게 달라지는지, 마치 구름이 땅 위를 지나가는 것처럼 감정이 어떻게 자신을 피해가고 거쳐 가는지 관찰하라.

마음챙김

마음명상mind meditation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관찰하는 것과 비슷하다. 스탠퍼드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 어니스트 힐가드는 이를 ‘숨겨진 관찰자a hidden observer’라고 표현했다. 사소한 것에서 심각한 것까지 무엇이든 마음속에 있는 것에 대해 명상하라. 마음속의 어떤 생각은 미소를 떠올리게 할 것이다! 또 어떤 생각은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닫게 될 것이다. 마음명상이 중요한 건 이 때문이다. 마음명상은 먼저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보고 그 중에 정말로 중요한 것을 가려내도록 돕는다. 붓다는 선(선이 무엇일까?)과 선의 부재, 욕망 과 욕망의 부재, 사고와 감정(어떤 것이 더 나을까?), 정형과 무정형, 단순성과 복 잡성, 이기심과 이타심, 평온과 긴장 같은 더욱 심오한 생각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라고 권했다. 이렇게 하면 더 심오한 명상으로 가는 문이 열린다.

선불교의 현대식 적용

선불교 사상을 적용하면 더 높은 명상의 인식으로 도약하는 데 유용할 수 있다. 이러한 능력을 발달시키려면 3장에 나오는 공안과 우화를 되새겨보라. 공안에 대해 하나 이상의 답을 생각하고 그 대상이 사실이나 논리가 아니라 사토리, 즉 오도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무의식적으로 이런 식으로 사고하게 되거나 일상생활에서 쉽게 이러한 사고를 할 수 있다면 명상의 인식 범위가 다양해지고 넓어질 것이다.

선불교 사상을 이용한 또 다른 방법으로 때때로 하던 일을 멈추고 무슨 일 이 일어나든 내버려둔 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있다. 종종 이런 순간에 그동안 알아차리지 못했던 일, 생각, 감정에 관심을 두게 된다. 꽃 그리고 새 가 지저귀는 소리, 푸른 하늘과 구름, 소리와 정적, 머물고 움직이는 공기, 중요한 것과 하찮은 것은 인생의 가장 감동적인 순간에 속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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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맥호벡Frank MacHovec의 『한 권으로 읽는 동양철학』(도서출판 知와 사랑) 중에서

 

 

 

명상은 영적 깨달음을 얻기 위해 가장 많이 사용되며 동시에 가장 유용한 방법이다. 명 상의 방법은 많지만, 가장 흔한 방법은 방해받지 않는 편안하고 조용한 장소에서 15~20 분 동안 매일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종의 개인적인 사원이라 할 수 있는 특별한 명상 장소를 가지고 있다. 방 한구석 또는 선반이나 사이드테이블의 작은 공간이 될 수 도 있다. 향, 부드러운 음악 또는 촛불이 명상에 도움이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언젠가 나이든 불교 승려에게 명상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더니 “지금 바로 여기서 명상하는 것이 어떻습니까?”라고 말했다. 명상은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 지만 사람들은 조용한 장소에서 혼자 명상하는 것을 선호한다.

명상의 인식을 발달시키는 데 특히 도움이 되는 자세가 있다. 가장 흔한 것 중 하나가 팔짱을 끼고 책상다리로 앉는 자세다. 많은 사람들이 요가의 가부좌에 불편을 느끼는데 굳이 가부좌를 할 필요는 없다. 명상의 목적은 주의를 집중한 뒤 마음을 비워 평정을 얻 고 의식을 높이는 것이다. 몸이 긴장하거나 아프면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

명상의 인식을 발달시키기

명상의 인식을 발달시키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새로운 모험에 대한 열망 과 호기심으로 가득 찬 아이처럼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다. 자기 내면으로의 여행은 우주비행사가 우주공간을 탐험하는 것만큼 흥미진진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신전 입구에 다음의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마음이 순수한 자만이 여기에 들어갈 수 있다.” 이 문구는 고귀한 진리를 좇는 사람들에게 “행실을 바로 하라”라고 상기시켜 주었다. 선사들은 “얼마나 많은 짐을 지고 있느냐?” 라고 물었다. 어떤 선사들은 초심자들에게 “짐을 밖에 두라”고 말했다. 이는 매일 나누는 대화와 일상생활에 심오하고 신비한 의미를 적용한 사례이다. 열린 마음에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것이 포함한다. 손실이나 이익을 따 지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이타심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서양인은 명상에서 패스트푸드처럼 빠른 효과를 기대하는 나쁜 습관이 있다. 명상의 인식, 신비한 통찰력 혹은 지혜는 사거나 팔 수 없다. 꽃은 자연 과 자신의 본성에 의해 길러져 저절로, 홀로 핀다. 선불교에는 강물을 거스르 지 말라는 말이 있다. 성급함은 마음의 강을 막을 수 있다. 자신의 본성뿐 아 니라 마음의 강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자연의 섭리를 따라가라.

사전에서는 명상을 ‘깊고 지속적인 생각, 집중, 숙고 혹은 사색’으로 정의 한다. 명상은 보통 종교적인 정신 집중과 연관되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신비주의와 마찬가지로 명상은 심리 상태이며 영적 과정이기 때문에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아름다운 일출이나 일몰 혹은 감동적인 이야기나 한 곡의 음악이 신비로운 명상의 경험이 될 수 있다. 두 사람이 같은 것을 보고 듣더라도 그것을 제각기 다르게 인식한다. 그 경험이 당신을 신에게 인도하 거나 신과 연결시킨다면 신비한 일이며 이는 규칙적인 명상에서 얻을 수 있 는 최상의 효과이다.

명상은 변화된 의식의 상태이며, 자신 속에 있는 우물 아래로 내려가고 또 한 더 높은 수준의 인식으로 올라가는 것으로 표현된다. 명상은 도움을 요청 하거나 생각을 전하는 기도와는 다르다. 명상은 연결에, 기도는 대화에 더 가 깝다. 많은 정신건강 전문가들은 진정효과 때문에 명상을 추천한다. 명상이 정신치료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하는 것이다.

일과 속에서 영감 찾기

일간신문에서 한층 높은 수준의 영적 혹은 명상적 인식과 관련된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항목을 찾아라. 뉴스기사일 수도 있고 광고, 사진 또는 그 외에 무엇이라도 괜찮다.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음을 기억하라. 영적 성장은 개인적인 과정이다. 매일 하는 활동 중에서 보다 높은 가치나 의식과 관련된 것을 찾으려고 노력하라.

평화로운 장소 상상하기

매일 밤, 자려고 침대에 누웠을 때 자신만의 특별하고 평화로운 장소를 상 상하라. 사회적 관계에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그곳에서는 혼자 있어야 한다. 혼자 있어야 개인적 과정인 영적 성장이 용이해진다.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여서는 안 된다. 그곳에 머물렀던 시절과 그곳 사람들이 떠올라 명상의 인식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 장소는 안전하고 편안하며 오직 그대만을 위 한 특별한 곳이어야 한다. 산꼭대기의 작은 집, 바닷가의 오두막, 아름다운 정 원, 잔잔한 강 위에 떠 있는 배, 혹은 각자가 평온함을 느끼는 풍경을 생각하라. 매일 밤 잠들 때 같은 풍경을 그려보라. 길고 천천히 심호흡을 하면 긴장 을 푸는 데 도움이 된다. 끼어드는 다른 생각을 애써 떨쳐 버리려고 하지 말 고, 대신 그 풍경 속의 세세한 것들에 집중하라. 그러면 심상이 더 또렷해지고 방해하는 생각들이 희미해질 것이다.

짧은 휴가

낮 동안에 자신만의 평화로운 풍경을 간간히 그려보라. 몇 초 동안 눈을 감 고 심호흡을 하면서 그려보면 좋다. 운전 중이나 정신집중이 필요한 일을 하 고 있을 때 하면 안 된다. 아침 밥상 앞에 앉아 첫 술을 뜨기 전, 출근해서 책상에 앉았을 때, 점심식사 직후, 버스, 지하철, 기차 혹은 비행기 안에서, 집에 도착했을 때, 차에서 내리기 전, 욕실에서, 옷을 입고 벗는 동안 등이 적당한 때이다. 이렇게 하면 잠자기 전에 평화로운 광경을 더욱 또렷하게 그릴 수 있고,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긴장을 풀 수 있다는 또 다른 이점도 있다. 긴장될 때는 단순히 평화로운 광경을 그리며 평소보다 약간 더 깊게 숨을 쉬어 보아라.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겠지만, 그대는 자신의 평화로운 장소에서 실제로 몇 분을 보낸 것처럼 마음이 진정되는 효과를 느낄 것이다.

짧은 명상

위에서 간략히 설명한 단계들을 수행했다면, 침대나 바닥에 등을 대고 누 워 다리를 약간 벌리고 팔은 몸 옆에 두되 옆구리에 닿게 하지는 마라. 손바닥을 위로 하고 베개를 베라. 이것은 요가의 좌법에서 ‘송장자세’라고 불린다. 테이프가 다 감기면 자동으로 꺼지는 녹음기를 구하라. 대부분의 녹음기가 그렇다. 30분짜리 테이프(양 면에 각각 15분)를 사용하라. 방송이 나오지 않는 텔레비전 채널을 켜고 그 소리를 녹음하라. 들어보면 마치 파도소리 같다. 하 지만 거기에 음악이나 말소리가 섞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 소리는 ‘백색 소음’*에 가깝고 긴장을 푸는 데 도움이 된다. 하루에 한 번 하면 좋다. 방해를 받지 않는 조용한 시간에 자리에 누워 테이프를 틀어놓고 적당히 볼륨을 맞춰라. 최저음이 좋다. 원한다면 전화기를 꺼놓아도 좋다. 매일 밤 방문하는 그 장소를 다시 마음속에 그려본다. 그리고 자신만의 평화로운 장소에서 15분 동안 명상을 한다. 녹음기가 꺼지면 백색 소음이 멈춘다. 바로 일어나지 말고, 잠깐 머물면서 기분 좋은 휴식의 여운을 즐겨라. 밤이든 낮이든 언제든 자신만의 평화로운 장소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이러한 명상을 자신의 페이스를 조절하고 일상생활에 대처하는 데 이용하라.

붓다의 명상 방법

붓다는 하루 중 어느 때라도 조용한 장소에서 30분 정도까지 명상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실내건, 실외건 조용하거나 특별히 준비된 장소로 평화로 운 환경이어야 한다. 붓다는 힌두교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상체를 꼿꼿이 세운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몸이 피라미드 모양을 이루는 요가 자세를 취 했다. 붓다는 결가부좌를 강조하지는 않았다. 안정되고 균형 잡힌 자세면 충분하다. 주의를 집중할 수 있을 만큼 불편함 없이 편안해지는 것이 목표지만, 잠들 만큼 편안해서는 안 된다.

불교신자의 명상은 평정명상(사마타 수행samatha-bhavana)과 통찰명상(위파사 나 수행vipassana-bhavana)으로 불리는 두 가지 집중상태로 설명할 수 있다. 평정 명상은 한 가지 일에 주의를 집중하는 명상이다. 예를 들어, 색, 불꽃, 물 또는 호흡 같은 신체 기능이나 다섯 가지 번뇌(악의, 근심, 나태, 의심, 색욕)에 주의를 집중할 수 있다. 평온, 자유, 환희를 느끼면 평정명상 상태에 이르렀다는 뜻 이다. 통찰명상은 특정 지각에 더욱 강하게 집중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호흡 이 명상의 대상이라면 숨쉬기 전과 도중, 후의 공기, 공기가 콧구멍으로 들어 가 폐로 흘러가는 과정, 그 공기와 하나가 되는 느낌 등 숨쉬기의 모든 측면에 집중하는 것이다. 평정명상은 통찰명상으로 이어지고 통찰명상은 평정명상에 따라서 좌우된다. 붓다는 명상에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추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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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절 워버턴Nigel Warburton『한 권으로 읽는 철학의 고전 27 Philosophy the Classics』(도서출판 知와 사랑) 중에서

 

 

아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흔히 네 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진 교향곡에 비유된다. 네 개의 소절 각각은 서로 다른 음조와 박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쇼펜하우어는 때때로 앞 절로 되돌아가서 주제를 다듬는다. 이 책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 즉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표상하는 세계(표상으로서의 세계)와 우리의 관계에 관한 추상적인 논의로 출발한다. 둘째 절에서 그는 논의를 확장하여 과학이 기술하는 세계 말고 더 깊은 실재가 존재한다고 제안한다. 이 세계, 즉 물 자체(의지로서의 세계)는 우리가 스스로의 신체적 움직임을 관찰할 때 얼핏 들여다볼 수 있다. 셋째 소절은 예술에 관한 낙관적이며 상세한 논의이다.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전개한다. 즉 예술은 가차 없는 의지활동, 즉 인간의 정상적인 조건이면서 더 깊은 실재인 의지로서의 세계의 여러 모습들을 드러내주는 그러한 의지활동으로부터 피난처를 제공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어두운 비관론이 넷째 소절을 장악한다. 여기서 그는 왜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본성으로 인해 고통 받도록 운명 지어졌는지를 설명한다. 그렇지만 만일 우리가 온갖 욕망을 버리고 금욕적 삶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어렴풋한 희망이 있기는 하다.

쇼펜하우어가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라는 문장으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시작할 때 그가 뜻하는 바는, 경험은 언제나 지각하는 의식의 관점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실재의 근원적인 본성에 직접 접근한다기보다는 세계를 우리 자신들에게 표상한다. 그러나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사물의 참된 본성에 관한 지식을 낳지 못한다. 만일 우리가 현상에 만족한다면 우리는 성의 입구를 찾기 위해 성 주위를 도는 사람과도 같다. 매순간 멈춰서서 성벽을 스케치하는 그런 사람 말이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런 일이 지금껏 철학자들이 한 일의 전부이다. 그러나 그의 철학이 꾀하는 바는 그 성벽 너머에 있는 것에 대한 지식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일이다.

실재의 궁극적 본성에 관한 문제는 형이상학의 중심문제이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구분, 즉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 쇼펜하우어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고 부르는 것과 물 자체의 근원적 실재 사이의 구분을 받아들인다. 칸트는 경험 너머의 실재를 본체계라 부르며, 쇼펜하우어는 그것을 의지로서의 세계라 부른다. 우리는 그저 감각정보의 수동적 수용자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시간, 공간 그리고 인과성을 우리의 모든 경험에 배정한다. 그러나 물 자체인 의지로서의 세계의 수준에서는 이러한 범주들은 적용되지 않는다. 의지로서의 세계는 구분될 수 없는 전체이다. 쇼펜하우어가 개체화의 원리라 부르는, 특정의 사물들에로의 구분은 오직 현상적 세계에서만 발생한다. 의지로서의 세계는 존재하는 모든 것 전체이다.

의지로서의 세계는 그 말의 정의상 인간에게 알려질 수 없는 듯이 보인다. 그 세계는 경험을 통해 접근할 수 없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가 의지활동에, 즉 우리가 우리 신체를 움직이기 위한 우리의 힘을 경험할 때 의지로서의 세계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의지는 신체의 움직임과 분리되지 않는다. 의지는 그런 운동의 한 측면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지력을 의식할 때 우리는 표상으로서의 세계 너머로 진행하며, 물 자체를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신체를 표상, 즉 세계 속에서 마주치는 또 다른 대상으로 경험하며 동시에 그것을 의지로서 경험한다.

쇼펜하우어에게 인간만이 의지의 표현인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 모든 것이 의지의 표현이다. 달리 말해서 그는 ‘의지’라는 말을 넓은 의미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바위 한 덩어리도 의지의 표현이다. 그가 말하는 의지란 지성이 아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인간들을 고통스런 삶의 운명 속으로 몰아넣는 ‘방향 없는 맹목적 애쓰기’이다.

예술 art

예술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예술작품 감상은 우리로 하여금 의지활동의 가차 없는 밀어붙임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게 해준다. 예술은 우리에게 무관심적인 미적 경험을 가능하게 해준다. 어떤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우리는 온갖 현실적 관심이나 근심을 제쳐둘 수 있으며 또한 그래야만 한다. 이것이 예술작품이 우리에게 해주는 기능이다. 우리는 감상하는 동안에 스스로를 잊는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경험할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위대한 그림을 볼 때와 마찬가지로 폭포나 산을 보면서 평화로운 감상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예술의 천재들은 대상과 사태에 대한 무관심적 감상의 상태에 이를 수 있으며, 자신들의 감정을 작품의 감상자들에게 전달할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런 천재들은 순수한 앎의 능력을 가진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지각하는 것에 대한 플라톤적 이데아를 경험할 수 있다. 플라톤은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의자는 이상적 의자, 즉 의자 이데아의 불완전한 모방품이라 믿은 것으로 유명하다. 플라톤에게 의자를 그리는 화가는 실재의 의자인 플라톤적 이데아로부터 몇 단계 멀어진 의자의 모습을 내보이는 셈이 된다. 이것이 플라톤이 자신의 이상국가에서 화가를 금한 한 가지 이유이기도 하다. 미술가들은 실재와는 먼 모방품을 다루며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이데아들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쇼펜하우어는 예술의 천재는 작품을 통하여 자신이 묘사하거나 기술하는 개별적 사물들의 형상들 또는 플라톤적 이데아들을 드러내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예술의 천재들은 우리로 하여금 의지력으로부터 벗어나서, 플라톤적 이데아들에 관한 비개인적 지식을 얻게 해준다.

아름다운 대상과 광경은 욕망을 좇아 끊임없이 진행하는 우리를 뒤흔들어 놓기에 적합하다. 그렇지만 어떤 묘사가 다른 묘사보다 이런 기능에 더 적합할 수 있다. 즉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방식에 따라 어떤 것은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더 쉽게 해줄 수 있고 다른 것은 그렇지 못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묘사된 과일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실천적 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무관심한 채로 남아 있기가 매우 힘들다. 특히 배가 고프다면 말이다. 마찬가지로 같은 나체 그림이라 할지라도 어떤 나체 그림은 다른 나체 그림보다 무관심적 감상을 더 쉽게 해준다. 다른 어떤 그림은 관찰자를 성적으로 자극하여 실천적 관심을 되살아나게 한다.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것들과는 대조적으로, 숭고한 대상과 광경은 어떤 점에서 인간 의지에 적대적이다. 이런 그림은 그 장대함과 위풍으로 우리를 압도한다. 천둥을 일으키는 검은 구름, 거대한 바위산, 급류가 몰아치는 강, 이런 것들은 모두 숭고하다. 이런 숭고에 대한 미적 경험은 당신이 자신을 의지로부터 의식적으로 격리시켜, 자칫 공포의 대상일 것들을 즐거움으로 음미함으로써 성취될 수 있다. 이런 경험 역시 감상의 대상들에 대한 플라톤적 이데아를 드러내 보여준다.

예술과 자연에 대한 미적 관조에서 드러나는 플라톤적 이데아는 쇼펜하우어에게 매우 중요하다. 이 이데아가 우리에게 물 자체인 의지로서의 세계에 대한 어떤 지식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방법으로 물 자체에 대한 직접 지식을 얻을 수는 없지만, 플라톤적 이데아는 ‘의지의 가장 적절한 대상화’를 제공해준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단지 이데아가 드러내는 세계는 주관적으로 왜곡되어 있지 않으며, 그 세계는 물 자체에 최대한으로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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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맥호벡Frank MacHovec의 『한 권으로 읽는 동양철학』(도서출판 知와 사랑) 중에서

 

『티베트 사자死者의 서

천 년 전, 높은 히말라야 산중에서 티베트 승려들이 죽음부터 환생할 때까지의 여정을 가르쳤다. 『티베트 사자의 서The Tibetan Book of the Dead』로 불리 는 『바르도 퇴돌Bardo Thodol』은 티벳불교의 대가 파드마 삼바바[蓮華座]가 8세기경에 쓴 108개의 경전 중 하나로 내용과 형식면에서 소승불교나 대승불교 보다 비밀스럽고 신비한 탄트라불교Tantric Buddhism(혹은 Esoteric Buddhism)에 속한다. 탄트라불교는 인도에서 발달해 중국, 한국, 일본에 전해졌고, 또한 티베트에도 전해져 각자 독자적 전개를 보였다. 인도어의 호칭은 바즈라야나 vajrayana이며 금강승剛乘으로 번역한다. 티베트의 불교신자들은 이승에서 깨 달음을 얻지 못해도 49일 동안 사후의 세 바르도bardo(단계를 뜻하는 산스크리트 어)를 거치며 이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죽음이 그 첫 단계 치카이 바르도chikhai bardo이고, 두 번째 단계는 떠돌아다니는 꿈같은 쵸니드 바르도chonyid bardo,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환생 전인 시드파 바르도sidpa bardo이다. 산 자 가 사자에게 이 책을 소리 내어 읽어주는데, 사자가 환생의 길을 찾도록 돕기 위해서이다. 전형적인 기도문의 예와 함께 각 단계의 내용을 소개한다.

지침

이 가르침으로 사후에도 성불할 수 있다. 이 가르침과 사후 일어나는 일들 을 듣고 기억하며 되새기고 알면 성불할 수 있다. 죽는 순간에 이 가르침을 알고 있었다면 길고 고통스러운 여정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 이 가르침을 모른다면 지금 주의 깊게 들어라. 경험할 광경과 소리는 그대가 어떤 종교를 믿는지 그리고 그대가 얼마나 그 종교를 실천하며 살았는지 상관없이 나타날 것이다.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흡수하면 의식이 시체와 분리되자마자 그대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이것은 위대한 자유이다. 가장 죄 많은 사람도 이 가르침 과 사후에 일어나는 일을 듣고 기억하며 되새기고 알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 또한 이 가르침을 불신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

설명

이 가르침을 모든 사람, 병자, 죽어가는 사람, 사자에게 읽어주어라. 이것을 배우고 되새기고 깨달아라. 이것을 단 한 번만 듣거나,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바르도에서 이를 기억하고 이해하게 될 것이다. 바르도에서는 기억력 이 아홉 배나 좋아지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으면 그를 가르쳤던 스승이 이 가 르침을 읽어주어야 한다. 그것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같은 신앙을 가진 형제 나 학식 있는 사람이 읽어주어야 한다. 그것도 불가능할 경우에는 목소리가 또렷한 사람이 읽어주어야 한다. 읽는 동안 조용해야 하며 울음소리가 없어 야 한다.

시신이 없을 때는 읽는 사람이 고인의 침대나 의자에 눕거나 앉아야 한다. 고인의 영혼이 그곳에 있을 것이다. 시신이 있다면 죽음이 찾아왔을 때 그 사람의 귀에 대고 또박또박 읽어주어야 한다. 제물을 올리고 좋은 향을 피워 야 한다. 사자가 49일 동안 바르도를 여행하는 동안 이 가르침을 매일 세 번 혹은 일곱 번 읽어주어야 한다. 심장이 멈추고, 폐가 활력을 잃고, 마음이 더 이상 이승의 일을 인식하지 못하기 전에 『사자의 서』를 처음 한 번은 꼭 읽어주어야 한다. 고인에게 읽어준 『사자의 서』는 시신과 함께 묻거나 태워야 한다.

치카이 바르도

전에 이 말을 들었을지 모르지만, 그대는 지금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 지 못한다.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 수도 있지만, 이를 이해하지는 못한다. 이제 집중하라. 지금 듣고 있는 말이 기억나면 정광명淨光明(Primary Clear Light) 을 볼 수 있다. 이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진지하게 진리를 찾아 좋은 업보와 결합시키면 세 단계의 바르도를 거칠 필요 없이 해탈의 경지에 이를 것이다.

기도문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보며 모든 것을 사랑하고 지켜주시는 온 사방의 붓다와 보살님들, 지금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오소서. 지혜롭고 이해심 많으며 강하고 지켜주시는 무한한 자비로운 이들이여, 이승을 떠나는 아무개(고 인의 이름)에게 조언을 주소서. 이것은 커다란 변화이고 아무개는 도움과 깨달음이 간절히 필요하나이다. 아무개는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업보의 힘으로 둘러싸인 텅 빈 공간 속 깊은 곳으로 떨어지고 있나이다. 아무개는 불안 과 두려움에 떨고 있으며 바르도를 헤쳐 나갈 힘을 필요로 하나이다. 자비로 운 이들이여, 이 미약한 자를 도우시고 이 무방비한 자를 보호하소서. 도움의 손길과 힘을 주소서. 아무개를 두려움, 악한 업보의 힘, 길고 고통스러운 바르도에서 구하소서. 그대들의 힘과 사랑이 아낌없이 흐르게 하소서. 진심으로 겸허하게 그리고 간절히 믿으며 바라옵나이다.

첫 번째 기도문

사방의 붓다, 도의 아버지, 성스러운 어머니, 도의 형제자매, 현재와 과거 모든 시대의 스승, 신, 신령, 수많은 신자들이여, 사랑과 연민으로 듣고 그 길 을 걷게 도와주소서.

두 번째 기도문

우리가 이생을 살면서 이생에서 깨달음의 길을 찾아 헤맬 때, 전지하신 붓다와 스승들이 우리를 일깨우고 강하게 하셨나이다. 성스러운 어머니여,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고 또한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길고 고통스러운 바르도를 모면하게 하소서. 우리로 하여금 성불하게 하소서.

열 번째 기도문

우리가 아축불阿閦�佛(Blue Buddha)이 다스리는 동방에서 환대받게 하소서. 보생불寶生佛(Yellow Buddha)이 다스리는 남방에서 환대받게 하소서. 아미타불 阿彌陀佛(Red Buddha)이 다스리는 극락세계西方淨土에서 환대받게 하소서. 미묘 성불微妙聲佛(Green Buddha)이 다스리는 북방에서 환대받게 하소서. 비로자나 불毘盧遮那佛(White Buddha)이 다스리는 연화장蓮華藏*의 세계에서 환대받게 하 소서. 모든 붓다와 함께할 수 있도록 모든 세계에서 환영받게 하소서. 바르도 의 모습과 소리가 우리의 모습과 소리가 되게 하소서. 삼신三身(Tri-kaya), 즉 신비로운 화합의 법신法身(Dharma-kaya), 지혜의 보신報身(Sambhoga-kaya), 깨달 음의 화신化身(Nirmana-kaya)을 보고 받아들이고 함께하게 하소서.

* 청정과 광명이 충만한 이상적인 불국토佛國土.

 

스물네 번째 기도문

환생할 시간이 되면 악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바라옵건대 태어날 때 나쁜 업보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스물일곱 번째 기도문

처음 나의 미래 부모를 보았을 때 신성한 어머니, 아버지이게 하소서. 환생 을 선택했을 때 붓다의 심성을 지니게 하소서.

 

서른 번째 기도문

일과 의무를 익힐 때 빠르게 이해하고 배우게 하소서. 어디서 태어나든 만사가 잘 되게 하시고 저를 만나는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하소서.

 

마지막 기도문

진실로 바라오니 나의 동기와 의도가 순수하게 하소서. 모든 곳의 모든 사람이 성불하게 하소서. 깨달음이 온 세계에 퍼지게 하소서. 이 가르침을 모두 잘 따르게 하소서. 미덕과 선함이 영원토록 충만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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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절 워버턴Nigel Warburton『한 권으로 읽는 철학의 고전 27 Philosophy the Classics』(도서출판 知와 사랑) 중에서

 

 

 

 

임마누엘 칸트의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

 

선한 의도가 중요하다. 행위의 도덕성은 그 결과들보다는 오로지 그 배후의 의도들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 도덕성은 객관적이다. 즉 그것은 취향이나 문화의 문제가 아니며, 오히려 모든 합리적 존재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어떤 것이다. 칸트의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의 과제는 자신이 ‘도덕의 지상원리’라고 부른 것, 다시 말해서 정언 명법을 확립함으로써 이런 주장들을 설득시키는 일이다. 이 책은 도덕철학에 관한 좀 더 복잡하고 상세한 저작을 위한 짧은 서문으로서 저술되었다. 이 책은 의무론적 윤리설에 대한 간명한 서술로서 오늘날까지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선의지 the good will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조건 없이 선한 것이 바로 선의지이다. 이로써 칸트가 뜻하는 바는, 선한 의도는 무조건적으로 선하다는 말이다. 다른 선한 것은 모두 특정한 상황에서만 선하다. 예를 들어 용기는 선한 속성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그것 자체로 보면 반드시 선한 것만은 아니다. 용기는 자체의 선함을 보증하기 위해 선한 의도 즉 선의지를 필요로 한다. 권력과 부, 명예도 선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 또한 선의지 없이는 악한 목적에 사용될 수 있다.

선의지는 그 자체로 선하다. 즉 이것이 초래하는 다른 어떤 것 때문에 선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칸트 자신이 말하듯이 우리가 선한 의도만 가진다면, 설령 ‘계모같이 인색한 천성’을 가진 사람이 우리가 하려는 일을 방해한다 해도 도덕적 관점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의 선한 의도들이 우리의 통제 밖에 있는 사건들에 의해 모두 좌절된다 해도 선의지는 여전히 보석처럼 빛난다.

이런 견해는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뒷장에서 논의됨)와 같은 결과주의적 도덕론과 날카롭게 대립된다. 결과주의적 도덕론은 행위의 도덕적 가치를 행위의 현실적 또는 가능적 결과에 의해 판단한다. 그러나 칸트에게 이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결과는 도덕적 가치 평가와는 무관하다. 비록 그것이 삶의 여러 다른 측면들과는 대부분 관련이 있지만 말이다.

의무와 경향성 duty and inclination

도덕적으로 행위하기 위한 유일하게 적절한 동기는 의무 의식이다. 어떤 사람들은 외면적으로는 의무에 따라 행위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오직 자기이익에 따라서만 행위한다. 예를 들면 영리한 가게주인은 경험 없는 손님에게 비싸게 받지 않을 것이다. 이런 행위가 궁극적으로 장사에 나쁘다는 것을 그 주인은 알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는 의무로부터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숙고로부터, 즉 계몽된 자기이익으로부터 행위를 하는 것일 따름이다. 의무에서 비롯된 행위란 오로지 당신이 이 행위가 옳음을 알기 때문에 행하는 행위이며 이 밖의 다른 어떤 동기에서 비롯된 행위가 아니다.

의무는 단순한 경향성(마음의 이끌림: 옮긴이)과 대조된다. 어떤 사람들은 동정적인 천성을 가질 수 있다. 이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보면 돕고 싶어 한다. 오직 동정적인 경향성에서만 비롯된 행위는 아무런 ‘도적적’ 가치도 없다고 칸트는 말한다. 의무의 동기는 아주 중요하다. 동정이나 인정에 이끌리는 자연적 경향성은 전혀 없이, 오직 의무 의식에 따라 타인을 돕는, 그런 사람들이 바로 도덕적으로 찬양받을 만한 사람들이다. 순전히 경향성에서만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전혀 도덕적으로 행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경향성이 아무리 칭찬할 만한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칸트가 이런 의아한 견해를 내놓는 이유는 도덕성은 모든 합리적 존재에게 열려 있는 반면에, 경향성은 우리의 의식적 통제 밖에 있다는 데에 있다. 당신이 동정적 천성을 갖고 안 갖고는 궁극적으로 운의 문제이다. 칸트는 기독교의 ‘네 이웃을 사랑하라’를 재해석하여, 여기서 사랑이란 그가 ‘실천적’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 즉 의무 의식에서 행위를 하는 것을 뜻한다는 논리를 편다. 우리가 보통 뜻하는 정서적 태도로서의 ‘격정적’ 사랑이라기보다는 말이다. 달리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했을 때, 그는 당신에게 이웃에 대해서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당신에게 의무 의식으로부터 행위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준칙 maxims

어떤 행위의 도덕적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마지막 결과가 아니라 그 행위의 동기가 되는 밑바탕의 원리들이다. 칸트는 이런 원리들을 준칙maxims이라 부른다. 같은 행동일지라도 서로 다른 준칙의 결과일 수 있다. 어떤 경우에 당신은 ‘언제나 진실을 말하라’는 준칙에 따라 진실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 당신의 행동은 ‘당신이 거짓말하고도 무사하리라는 확신이 없는 한 언제나 진실을 말하라’는 준칙에 따른 행동과 구별될 수 없다. 오직 첫 번째 준칙만이 도덕적이다. 칸트는 정언 명법을 가지고, 도덕적 준칙을 다른 준칙들과 구별하는 방법을 제공한다.

정언 명법 the categorical imperative

우리의 도적적 의무는 도덕법칙에 대한 존중에서 생겨난다. 도덕법칙은 칸트가 정언 명법이라 부르는 것에 의해 규정된다. 가언 명법은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존경받기 원한다면 당신은 약속을 지켜야 한다’와 같은 진술이다. 즉 이 명법은 조건적 진술이다. 이와 달리 정언 명법은 ‘약속을 지켜라’와 같은 명령이다. 이 명령은 당신의 목적과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적용된다. 우리의 모든 도덕적 행위들을 일으키게 하는 하나의 기본적 정언 명법이 있다고 칸트는 생각한다. 이 명법을 칸트는 여러 가지 형식으로 설명한다.

보편적 도덕법칙 universal moral law

정언 명법의 첫 번째 형식은 ‘오직 당신이 보편 법칙이 되기를 의욕할 수 있는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이다. 여기서 ‘의욕하다will’는 ‘원하다want’와 아주 다르다. 그것은 ‘합리적으로’ 의도하다를 뜻한다. 또한 여기서 ‘법칙’은 법률적인 법칙이라기보다는 도덕적 법칙을 뜻한다(도덕법칙을 위반하는 많은 행위들이 완벽하게 합법적일 수 있다). 요점은 이렇다. 한 준칙이 진정 도덕적 준칙이려면, 그것은 관련된 유사 상황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 준칙은 보편화 가능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준칙은 비개인적이어야 한다. 즉 당신을 특별히 예외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만일 한 행위가 도덕적으로 그르다면, 그것은 당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도덕적으로 그르다. 만일 한 행위가 도덕적으로 옳다면, 그 행위는 관련된 유사한 상황에 있는 그 누구에게도 도덕적으로 옳다.

정언 명법의 형식이 담고 있는 함축을 설명하기 위해 칸트는 지킬 의도가 없는 약속의 예를 사용한다. 당신은 그런 약속행위가 때로는 편리하다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이 합리적이라면 모든 사람에 대해서 그런 준칙, 즉 ‘당신이 어려운 사정에 있을 때는 당신의 약속을 깨라’는 준칙을 의욕할 수 없다고 칸트는 말한다. 만일 그 준칙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다면 모든 약속 관행이 무너질 것이다. 이런 준칙은 자기 파괴적이다. 당신은 약속에 대해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런 준칙은 도덕적 준칙일 수 없으며, 당신은 그런 준칙을 보편적 법칙으로 의욕할 수 없다. 이렇게 정언 명법은 도덕적인 준칙과 도덕과 무관한 준칙을 구분하는 방법을 제공한다. 만일 당신이 어떤 준칙을 합리적으로 보편화할 수 없다면 그것은 도덕적 준칙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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