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절 워버턴Nigel Warburton『한 권으로 읽는 철학의 고전 27 Philosophy the Classics』(도서출판 知와 사랑) 중에서

 

 

아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흔히 네 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진 교향곡에 비유된다. 네 개의 소절 각각은 서로 다른 음조와 박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쇼펜하우어는 때때로 앞 절로 되돌아가서 주제를 다듬는다. 이 책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 즉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표상하는 세계(표상으로서의 세계)와 우리의 관계에 관한 추상적인 논의로 출발한다. 둘째 절에서 그는 논의를 확장하여 과학이 기술하는 세계 말고 더 깊은 실재가 존재한다고 제안한다. 이 세계, 즉 물 자체(의지로서의 세계)는 우리가 스스로의 신체적 움직임을 관찰할 때 얼핏 들여다볼 수 있다. 셋째 소절은 예술에 관한 낙관적이며 상세한 논의이다.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전개한다. 즉 예술은 가차 없는 의지활동, 즉 인간의 정상적인 조건이면서 더 깊은 실재인 의지로서의 세계의 여러 모습들을 드러내주는 그러한 의지활동으로부터 피난처를 제공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어두운 비관론이 넷째 소절을 장악한다. 여기서 그는 왜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본성으로 인해 고통 받도록 운명 지어졌는지를 설명한다. 그렇지만 만일 우리가 온갖 욕망을 버리고 금욕적 삶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어렴풋한 희망이 있기는 하다.

쇼펜하우어가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라는 문장으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시작할 때 그가 뜻하는 바는, 경험은 언제나 지각하는 의식의 관점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실재의 근원적인 본성에 직접 접근한다기보다는 세계를 우리 자신들에게 표상한다. 그러나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사물의 참된 본성에 관한 지식을 낳지 못한다. 만일 우리가 현상에 만족한다면 우리는 성의 입구를 찾기 위해 성 주위를 도는 사람과도 같다. 매순간 멈춰서서 성벽을 스케치하는 그런 사람 말이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런 일이 지금껏 철학자들이 한 일의 전부이다. 그러나 그의 철학이 꾀하는 바는 그 성벽 너머에 있는 것에 대한 지식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일이다.

실재의 궁극적 본성에 관한 문제는 형이상학의 중심문제이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구분, 즉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 쇼펜하우어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고 부르는 것과 물 자체의 근원적 실재 사이의 구분을 받아들인다. 칸트는 경험 너머의 실재를 본체계라 부르며, 쇼펜하우어는 그것을 의지로서의 세계라 부른다. 우리는 그저 감각정보의 수동적 수용자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시간, 공간 그리고 인과성을 우리의 모든 경험에 배정한다. 그러나 물 자체인 의지로서의 세계의 수준에서는 이러한 범주들은 적용되지 않는다. 의지로서의 세계는 구분될 수 없는 전체이다. 쇼펜하우어가 개체화의 원리라 부르는, 특정의 사물들에로의 구분은 오직 현상적 세계에서만 발생한다. 의지로서의 세계는 존재하는 모든 것 전체이다.

의지로서의 세계는 그 말의 정의상 인간에게 알려질 수 없는 듯이 보인다. 그 세계는 경험을 통해 접근할 수 없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가 의지활동에, 즉 우리가 우리 신체를 움직이기 위한 우리의 힘을 경험할 때 의지로서의 세계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의지는 신체의 움직임과 분리되지 않는다. 의지는 그런 운동의 한 측면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지력을 의식할 때 우리는 표상으로서의 세계 너머로 진행하며, 물 자체를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신체를 표상, 즉 세계 속에서 마주치는 또 다른 대상으로 경험하며 동시에 그것을 의지로서 경험한다.

쇼펜하우어에게 인간만이 의지의 표현인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 모든 것이 의지의 표현이다. 달리 말해서 그는 ‘의지’라는 말을 넓은 의미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바위 한 덩어리도 의지의 표현이다. 그가 말하는 의지란 지성이 아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인간들을 고통스런 삶의 운명 속으로 몰아넣는 ‘방향 없는 맹목적 애쓰기’이다.

예술 art

예술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예술작품 감상은 우리로 하여금 의지활동의 가차 없는 밀어붙임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게 해준다. 예술은 우리에게 무관심적인 미적 경험을 가능하게 해준다. 어떤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우리는 온갖 현실적 관심이나 근심을 제쳐둘 수 있으며 또한 그래야만 한다. 이것이 예술작품이 우리에게 해주는 기능이다. 우리는 감상하는 동안에 스스로를 잊는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경험할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위대한 그림을 볼 때와 마찬가지로 폭포나 산을 보면서 평화로운 감상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예술의 천재들은 대상과 사태에 대한 무관심적 감상의 상태에 이를 수 있으며, 자신들의 감정을 작품의 감상자들에게 전달할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런 천재들은 순수한 앎의 능력을 가진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지각하는 것에 대한 플라톤적 이데아를 경험할 수 있다. 플라톤은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의자는 이상적 의자, 즉 의자 이데아의 불완전한 모방품이라 믿은 것으로 유명하다. 플라톤에게 의자를 그리는 화가는 실재의 의자인 플라톤적 이데아로부터 몇 단계 멀어진 의자의 모습을 내보이는 셈이 된다. 이것이 플라톤이 자신의 이상국가에서 화가를 금한 한 가지 이유이기도 하다. 미술가들은 실재와는 먼 모방품을 다루며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이데아들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쇼펜하우어는 예술의 천재는 작품을 통하여 자신이 묘사하거나 기술하는 개별적 사물들의 형상들 또는 플라톤적 이데아들을 드러내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예술의 천재들은 우리로 하여금 의지력으로부터 벗어나서, 플라톤적 이데아들에 관한 비개인적 지식을 얻게 해준다.

아름다운 대상과 광경은 욕망을 좇아 끊임없이 진행하는 우리를 뒤흔들어 놓기에 적합하다. 그렇지만 어떤 묘사가 다른 묘사보다 이런 기능에 더 적합할 수 있다. 즉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방식에 따라 어떤 것은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더 쉽게 해줄 수 있고 다른 것은 그렇지 못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묘사된 과일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실천적 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무관심한 채로 남아 있기가 매우 힘들다. 특히 배가 고프다면 말이다. 마찬가지로 같은 나체 그림이라 할지라도 어떤 나체 그림은 다른 나체 그림보다 무관심적 감상을 더 쉽게 해준다. 다른 어떤 그림은 관찰자를 성적으로 자극하여 실천적 관심을 되살아나게 한다.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것들과는 대조적으로, 숭고한 대상과 광경은 어떤 점에서 인간 의지에 적대적이다. 이런 그림은 그 장대함과 위풍으로 우리를 압도한다. 천둥을 일으키는 검은 구름, 거대한 바위산, 급류가 몰아치는 강, 이런 것들은 모두 숭고하다. 이런 숭고에 대한 미적 경험은 당신이 자신을 의지로부터 의식적으로 격리시켜, 자칫 공포의 대상일 것들을 즐거움으로 음미함으로써 성취될 수 있다. 이런 경험 역시 감상의 대상들에 대한 플라톤적 이데아를 드러내 보여준다.

예술과 자연에 대한 미적 관조에서 드러나는 플라톤적 이데아는 쇼펜하우어에게 매우 중요하다. 이 이데아가 우리에게 물 자체인 의지로서의 세계에 대한 어떤 지식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방법으로 물 자체에 대한 직접 지식을 얻을 수는 없지만, 플라톤적 이데아는 ‘의지의 가장 적절한 대상화’를 제공해준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단지 이데아가 드러내는 세계는 주관적으로 왜곡되어 있지 않으며, 그 세계는 물 자체에 최대한으로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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