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절 워버턴Nigel Warburton『한 권으로 읽는 철학의 고전 27 Philosophy the Classics』(도서출판 知와 사랑) 중에서

 

 

 

 

임마누엘 칸트의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

 

선한 의도가 중요하다. 행위의 도덕성은 그 결과들보다는 오로지 그 배후의 의도들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 도덕성은 객관적이다. 즉 그것은 취향이나 문화의 문제가 아니며, 오히려 모든 합리적 존재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어떤 것이다. 칸트의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의 과제는 자신이 ‘도덕의 지상원리’라고 부른 것, 다시 말해서 정언 명법을 확립함으로써 이런 주장들을 설득시키는 일이다. 이 책은 도덕철학에 관한 좀 더 복잡하고 상세한 저작을 위한 짧은 서문으로서 저술되었다. 이 책은 의무론적 윤리설에 대한 간명한 서술로서 오늘날까지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선의지 the good will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조건 없이 선한 것이 바로 선의지이다. 이로써 칸트가 뜻하는 바는, 선한 의도는 무조건적으로 선하다는 말이다. 다른 선한 것은 모두 특정한 상황에서만 선하다. 예를 들어 용기는 선한 속성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그것 자체로 보면 반드시 선한 것만은 아니다. 용기는 자체의 선함을 보증하기 위해 선한 의도 즉 선의지를 필요로 한다. 권력과 부, 명예도 선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 또한 선의지 없이는 악한 목적에 사용될 수 있다.

선의지는 그 자체로 선하다. 즉 이것이 초래하는 다른 어떤 것 때문에 선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칸트 자신이 말하듯이 우리가 선한 의도만 가진다면, 설령 ‘계모같이 인색한 천성’을 가진 사람이 우리가 하려는 일을 방해한다 해도 도덕적 관점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의 선한 의도들이 우리의 통제 밖에 있는 사건들에 의해 모두 좌절된다 해도 선의지는 여전히 보석처럼 빛난다.

이런 견해는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뒷장에서 논의됨)와 같은 결과주의적 도덕론과 날카롭게 대립된다. 결과주의적 도덕론은 행위의 도덕적 가치를 행위의 현실적 또는 가능적 결과에 의해 판단한다. 그러나 칸트에게 이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결과는 도덕적 가치 평가와는 무관하다. 비록 그것이 삶의 여러 다른 측면들과는 대부분 관련이 있지만 말이다.

의무와 경향성 duty and inclination

도덕적으로 행위하기 위한 유일하게 적절한 동기는 의무 의식이다. 어떤 사람들은 외면적으로는 의무에 따라 행위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오직 자기이익에 따라서만 행위한다. 예를 들면 영리한 가게주인은 경험 없는 손님에게 비싸게 받지 않을 것이다. 이런 행위가 궁극적으로 장사에 나쁘다는 것을 그 주인은 알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는 의무로부터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숙고로부터, 즉 계몽된 자기이익으로부터 행위를 하는 것일 따름이다. 의무에서 비롯된 행위란 오로지 당신이 이 행위가 옳음을 알기 때문에 행하는 행위이며 이 밖의 다른 어떤 동기에서 비롯된 행위가 아니다.

의무는 단순한 경향성(마음의 이끌림: 옮긴이)과 대조된다. 어떤 사람들은 동정적인 천성을 가질 수 있다. 이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보면 돕고 싶어 한다. 오직 동정적인 경향성에서만 비롯된 행위는 아무런 ‘도적적’ 가치도 없다고 칸트는 말한다. 의무의 동기는 아주 중요하다. 동정이나 인정에 이끌리는 자연적 경향성은 전혀 없이, 오직 의무 의식에 따라 타인을 돕는, 그런 사람들이 바로 도덕적으로 찬양받을 만한 사람들이다. 순전히 경향성에서만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전혀 도덕적으로 행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경향성이 아무리 칭찬할 만한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칸트가 이런 의아한 견해를 내놓는 이유는 도덕성은 모든 합리적 존재에게 열려 있는 반면에, 경향성은 우리의 의식적 통제 밖에 있다는 데에 있다. 당신이 동정적 천성을 갖고 안 갖고는 궁극적으로 운의 문제이다. 칸트는 기독교의 ‘네 이웃을 사랑하라’를 재해석하여, 여기서 사랑이란 그가 ‘실천적’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 즉 의무 의식에서 행위를 하는 것을 뜻한다는 논리를 편다. 우리가 보통 뜻하는 정서적 태도로서의 ‘격정적’ 사랑이라기보다는 말이다. 달리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했을 때, 그는 당신에게 이웃에 대해서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당신에게 의무 의식으로부터 행위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준칙 maxims

어떤 행위의 도덕적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마지막 결과가 아니라 그 행위의 동기가 되는 밑바탕의 원리들이다. 칸트는 이런 원리들을 준칙maxims이라 부른다. 같은 행동일지라도 서로 다른 준칙의 결과일 수 있다. 어떤 경우에 당신은 ‘언제나 진실을 말하라’는 준칙에 따라 진실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 당신의 행동은 ‘당신이 거짓말하고도 무사하리라는 확신이 없는 한 언제나 진실을 말하라’는 준칙에 따른 행동과 구별될 수 없다. 오직 첫 번째 준칙만이 도덕적이다. 칸트는 정언 명법을 가지고, 도덕적 준칙을 다른 준칙들과 구별하는 방법을 제공한다.

정언 명법 the categorical imperative

우리의 도적적 의무는 도덕법칙에 대한 존중에서 생겨난다. 도덕법칙은 칸트가 정언 명법이라 부르는 것에 의해 규정된다. 가언 명법은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존경받기 원한다면 당신은 약속을 지켜야 한다’와 같은 진술이다. 즉 이 명법은 조건적 진술이다. 이와 달리 정언 명법은 ‘약속을 지켜라’와 같은 명령이다. 이 명령은 당신의 목적과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적용된다. 우리의 모든 도덕적 행위들을 일으키게 하는 하나의 기본적 정언 명법이 있다고 칸트는 생각한다. 이 명법을 칸트는 여러 가지 형식으로 설명한다.

보편적 도덕법칙 universal moral law

정언 명법의 첫 번째 형식은 ‘오직 당신이 보편 법칙이 되기를 의욕할 수 있는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이다. 여기서 ‘의욕하다will’는 ‘원하다want’와 아주 다르다. 그것은 ‘합리적으로’ 의도하다를 뜻한다. 또한 여기서 ‘법칙’은 법률적인 법칙이라기보다는 도덕적 법칙을 뜻한다(도덕법칙을 위반하는 많은 행위들이 완벽하게 합법적일 수 있다). 요점은 이렇다. 한 준칙이 진정 도덕적 준칙이려면, 그것은 관련된 유사 상황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 준칙은 보편화 가능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준칙은 비개인적이어야 한다. 즉 당신을 특별히 예외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만일 한 행위가 도덕적으로 그르다면, 그것은 당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도덕적으로 그르다. 만일 한 행위가 도덕적으로 옳다면, 그 행위는 관련된 유사한 상황에 있는 그 누구에게도 도덕적으로 옳다.

정언 명법의 형식이 담고 있는 함축을 설명하기 위해 칸트는 지킬 의도가 없는 약속의 예를 사용한다. 당신은 그런 약속행위가 때로는 편리하다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이 합리적이라면 모든 사람에 대해서 그런 준칙, 즉 ‘당신이 어려운 사정에 있을 때는 당신의 약속을 깨라’는 준칙을 의욕할 수 없다고 칸트는 말한다. 만일 그 준칙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다면 모든 약속 관행이 무너질 것이다. 이런 준칙은 자기 파괴적이다. 당신은 약속에 대해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런 준칙은 도덕적 준칙일 수 없으며, 당신은 그런 준칙을 보편적 법칙으로 의욕할 수 없다. 이렇게 정언 명법은 도덕적인 준칙과 도덕과 무관한 준칙을 구분하는 방법을 제공한다. 만일 당신이 어떤 준칙을 합리적으로 보편화할 수 없다면 그것은 도덕적 준칙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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