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헨조다로에서 놀라운 점은 획일적인 주택 디자인이다

 

 

 

 

모헨조다로에서 눈에 띄는 대형 건축물들 중 세 번째는 목욕탕과 곡물창고 남쪽에 있는 집회장이다. 북쪽 성벽 중앙에 입구가 있고, 직사각형 기둥들이 지붕을 떠받들고 있는 구조의 이 집회장의 면적은 약 27m2에 달한다. 이 회합의 장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정교하게 포장된 방과 벽으로 둘러싸인 안뜰의 잔해가 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손상된 이 잔해는 고위 공무원의 사유지였을지도 모른다. 이후 인도 문명의 알현실을 떠올리게 하는 이 기둥이 세워져 있는 집회장은 시민들의 토론의 장이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이곳에서는 주요 거주지의 운영에 대한 합의가 도출되었을 것이다. 이를 위해 ‘고지대’ 동쪽의 ‘저지대’에 사는 일반 시민대표들이 이곳에 모여들었을 것이다. 이 ‘저지대’에 건설된 시가지는 인더스 계곡 촌락과 도시 시가지의 전형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세심하게 설계된 도로들이 건물 사이 사이를 바둑판 형태로 가로지른다. 이 바둑판 형태의 도로에서 벗어난 오솔길이나 간선도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 도시들과는 사뭇 다른 도시 형태이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고대도시의 도로는 정신없이 얽히고설켜 있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서아시아의 이슬람 도시들에도 이러한 도로 형태가 여전히 남아 있다.
모헨조다로에서 또 한 가지 놀라운 점은 놀라울 정도로 획일적인 주택 디자인이다. 안뜰과 벽・창문・욕실 등의 형태가 균일하다. 당시에 엄격한 건축규제 법령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인더스 계곡 도시들의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종교적 목적의 건축물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목욕탕이 종교적 의식을 행하는 장소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더스 계곡에는 아직 종교가 생겨나지 않았다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1000년쯤 뒤에 갠지스 계곡 최초의 도시들에서도 종교용 건축물의 고고학적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이 도시들의 성벽 외곽지역에서 최초의 불교 유물이 다수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도시 외곽에 종교적인 시설을 건축한 것은 불교사원을 묘지 근처에 짓고 싶어 한 사람들의 바람 때문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승려의 강력한 신통력이 불교를 믿지 않는 이들을 홀릴 수도 있을 만큼 망자에 깃든 악령을 물리쳐줄 것이라고 믿었다. 또 다른 이유는 승려의 삶은 속세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관념 때문이었다. 모든 승려에게는 속세와 거리를 유지하고 금욕을 통해 영성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인들의 기호를 귀신같이 알아맞혀 금전적 지원을 이끌어내야 하긴 했지만 말이다. 갠지스 계곡의 도시들에는 불교신앙을 구전하는 전통이 확실히 뿌리내리고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니 꼭 불교가 아니더라도 인더스 계곡에도 문자로 기록되지 않았을 뿐 구전으로 전해진 그들만의 신앙이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유물 중에서 명백하게 종교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들을 찾아서 연구하는 것뿐이다. 종교적 의미가 담겨 있는 유물로는 소형 조상과 인더스 인장이 있다. 이 중에서도 꽤나 명확하게 종교적 의미를 담고 있는 유물은 여신을 빚은 테라코타이다. 이 테라코타는 이난나나 이슈타르 여신에 대응하는 인더스 문명의 여신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테라코타가 여러 지역들에서 아주 많이 출토되었다. 대부분 허리에 띠를 두르거나 로인클로스를 입은 여인이 부채 모양의 머리 장식과 목걸이를 착용하고 서 있는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특별히 세심하게 공들여 예술적으로 빚어낸 테라코타는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저렴한 비용으로 쉽게 제작할 수 있는 이 테라코타 여인상은 가정용 종교의례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직 인더스 문명의 문자를 해독할 수 없기 때문에, 인더스 계곡의 여신숭배문화를 설명해줄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여신은 다산과 풍요의 여신이었으리라고 추론해볼 따름이다. 이 인더스 문명의 여신이 오늘날 힌두교에서 모시는 여신 데비의 원형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데비는 물소 모습을 한 악마 마히사를 죽인 것으로 유명한 힌두교 최고 여신이다. 힌두교에서 이 여신의 위상은 그녀와 대적할 만한 남성 신 비슈누와 시바를 압도
할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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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주의와 폭력: 신세계 무질서

 

 

 

 

지하드운동은 단순한 테러도, 반란도 아니다. 첫째는 신개념 전쟁이고, 둘째는 사이드 쿠틉이 “이슬람식 세계혁명” 으로 규정한, 비국가 전쟁을 위한 정치적 아젠다를 일컫는다. 무력으로 세계를 재창조한다는 개념은 이슬람주의와 폭력이라는 광범위한 맥락에서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이슬람주의를 창시한 하산 알반나는 지하드聖戰를 가리켜서 세계의 이슬람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이슬람주의가 활용하는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는 전통 이슬람식 지하드를 다른 개념으로 바꾸었다. 달리 말하면, 정치적 이슬람교가 이슬람교에서 비롯되었으나 그와는 전혀 다른 사상이듯, 현대의 지하드운동 또한 고전 지하드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면 된다.

 

지하드와 지하드운동의 이해
2005년, 나는 “정치적 이슬람교의 지하드운동 뿌리” 란 제목으로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지에 기고하기 위해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이와 같은 뿌리를 모른다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 좀 놀랐다. 급진파와 소위 온건파는 같은 나무에서 뻗은 두 가지로, 동전의 양면에 빗댈 수 있다. 물론 제도적 이슬람주의가 중동에 민주정치를 전파해주기를 기대했던 사람들은 이 같은 발상을 환영하지 않았다. 마지막 장에서 다루겠지만, 민주정치가 그렇게 전파될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이 장에서 나는 동전의 뒷면에 해당하는, 지하드를 지하드운동으로 개조한 이슬람주의자들을 살펴볼 것이다.(고전 지하드와 근대 지하드운동의 뚜렷한 차이도 본서의 특징이라 하겠다) 지하드 운동이 이슬람주의의 주요 지향점이란 점을 감안해볼 때, 급진주의나 테러리즘의 맥락이 아니더라도 이를 진지하게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지하드운동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긴 하나 그것이 이슬람주의의 주류 사상은 아니며, 이슬람주의가 세계와 국가의 질서에 주로 관심을 두므로 폭력이 그에 내재된 것도 아니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오로지 샤리아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일념으로 폭력을 자행하나, 미국의 논쟁은 이 점을 항상 간과한다.
고전・전통 이슬람교에서 지하드는 자기수련이나 물리적인 투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정의는 서로 떼려야 뗄 수가 없다.4 무슬림은 그들이 알고 있는 세상에 이슬람세계, 즉 평화의 집(다르 알이슬람)을 확산시키기 위해 7~17세기까지 지하드 정복 전쟁, 즉 정의로운 전쟁을 벌여왔다. 이는 테러가 아닌, 코란의 지하드 개념과 일치한다. 무슬림은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가 독자적 전쟁 이론을 내놓기 훨씬 전부터 인륜적인 기준에 부합하는 목표에 한해 규정과 행동강령을 준행해온 것이다. 물론 이 같은 관행은 제네바협정에 명시된 관행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나, 정규군이 감행하는 지하드의 규제 시스템은 여전히 갖추고 있다. 비국가 주동세력의 비정규적 양상으로 벌이는 현대 지하드운동의 행동은 이 기준에는 일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서양 학자와 정책입안자들5은 고전 지하드와 현대 지하드운동의 차이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느냐가 문제일 것이다.6 2010년 6월, 나는 워싱턴 DC에서 원고를 마지막으로 수정하다가, 오바마 대통령의 대테러 수석보좌관인 존 브레넌이 전략・국제연구센터에서 연설한 내용 전문을 접하게 되었다. 연설 전문은 AP 연합통신에 게재되었으며 인터넷에 접속하면 열람할 수 있다. 존 브레넌의 연설에서 발췌한 다음 대목을 살펴보자.

 

대통령의 국토 안보 및 대테러 수석보좌관으로서, 자국의 안보 전략이 이 나라의 안전을 지키는 노력에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지 말씀드릴까 합니다. … 테러리즘은 전략에 불과하므로 우리의 적은 “테러리즘” 이 아닙니다. “테러” 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테러는 심리상태를 일컫는 말이니까요. … 그렇다고 “지하디스트” 나 “이슬람주의자” 라고 규정할 수도 없습니다. 지하드는 거룩한 투쟁인 데다 이슬람교의 정당한 신조로, 자신과 공동체를 정화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무고한 남녀와 어린이를 살해하는 만행에는 거룩하다거나 정당하다거나 혹은 이슬람다운 면모는 없지만요. … 종교적 맥락에서 우리의 적은 미국이 이슬람교와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속임수— 즉 알카에다와 동맹이 테러리즘을 정당화할 목적으로 선전하는— 라야 옳을 것입니다. … 우리의 적은 알카에다와 동맹세력입니다. … 우리는 알카에다와 극단주의 동맹들과 맞서 싸워야 할 것입니다.

 

오바마 정부를 대변하던 브레넌은 “이슬람주의” 와 “지하드운동” 은 쏙 빼고 “알카에다와 동맹세력” 을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극단주의자로 싸잡아버렸다. 이것이 바로 전 행정부가 내건 “테러와의 전쟁” 의 후속편이나, 그는 이 독트린을 두고 너무 많은 것들을 거부했다.
이 문제는 3장에서 논했던 유대인혐오증과 반유대주의의 차이점과 많이 비슷하다. 나는 3장에서 이슬람주의가 유대인을 혐오하는 것이 반유대주의라기보다는 “정치적 불만을 정당하게 표출한” 것— 즉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 인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고는 분석과정에서 이를 반증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지하디스트의 테러리즘은 무엇이며, 일반 무슬림에게서 서방세계를 떼어놓지 않고도 그와 싸울 수 있는 방편은 무엇인지 물어야 할 것 같다. 브레넌은 “종양과도 같은 극단주의의 폭력으로 국민의 목숨을 위협하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세력에 대응하는 것” 은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정당한 불만은 민주정치 제도와 대화를 통해 얼마든지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고 주장했다. 그러나 3장에서 내가 제시한 추론에 따르자면, 지하디스트의 이슬람주의는 특정한 불만을 고쳐 생각하도록 선택된 전술이 아니다. 비용대비 효과가 나은 전술이 있다고 판단되면 언제든 폐기해도 아쉬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폭력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이슬람 전통이 변조 과정을 거친, 이슬람교의 재해석으로 볼 수 있다.

브레넌도 다니엘 바리스코처럼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의 차이점을 간과하고, 이슬람주의를 대대로 내려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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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자들은 결과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특색이 있다

 

 

 

 

 

 

공리주의자의 눈에 규칙 공리주의는 설익은 공리주의로 비칠 뿐이다. 공리주의가 본래부터 지녀온 뛰어난 맥락 민감도contextsensitivity를 잃고 오직 규칙만 숭배하는 견해로 변질한 것이다. 본래 공리주의를 가장 단순한 형태로 나타내자면, 하나의 행위가 이미 정해진 한 묶음의 규칙에 들어맞는가에 따라 그 옳고 그름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가 특정 상황에서 가져올 결과에 비추어 그 옳고 그름이 결정된다는 의미에서 환경에 감응하는 특징을 띤 이론이다. 그런데 규칙 공리주의는 규칙에 들어맞기만 하면 어떤 행위건 모두 옳다고 주장한다. 이때 규칙은 환경과 결과에 비추어 공리주의의 방식으로 결정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정말 충분할까? 스마트는 비록 급조된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하나의 사례를 제시하면서 공리주의의 눈에 불만스럽게 비치는 문제점들을 잘 설명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규칙 공리주의의 한 가지 장점은 ‘약속을 지키라’ 같은 도덕규칙을 왜 준수해야 하는지를 공리주의적 이유를 들어 설명해준다는 점이다. 그런데 (비록 약속의 관행이 있는 사회가 약속할 줄 모르는 사회보다 유용하다 하더라도) 약속을 지키는 경우보다 그것을 깨는 게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 분명해보이
는 상황을 가상해보자.
먼저 약속을 깨는 것이 모든 종류의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약속을 깨면 계획이 뒤틀어진다. (약속하더라도 아무도 그걸 믿거나 지키려 할 사람이 없을 것이기에) 신뢰가 무너지고, 사회적으로 유익한 관행이 자취를 감추고 말 것이다. 서로 믿고 의지할 수가 없으니 덜 행복하고 더 불행한 사회가 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약속이 자꾸 깨지다 보면 약속을 함부로 깨지 않으려는 모든 사람의 본능적인 심리 성향 또한 무너지고 만다. 그런데 스마트는 약속을 깼을 때에 나타나는 좋은 결과가 나쁜 결과를 뒤덮어 버리거나 나쁜 결과의 타당성을 무색하게 만드는 사례를 보여준다.
당신은 한 남자와 함께 모래섬에 갇혔다. 두 사람은 내기를 하는데, 당신이 탈출에 성공하고 남자가 성공하지 못할 경우 남자는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그 지역의 승마클럽에 기부하기로 한다.
남자는 죽고 당신은 탈출에 성공한다. 당신은 그 재산을 승마클럽이 아닌 병원에 기부하면 더 보람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때 약속대로 해야 할까? 당신이 규칙 공리주의자라면, 약속을 이행하는 것이 옳은 행위일 것이다. 그래야만 사회적으로 유익한 규칙을 따르게 된다. 하지만 상황에 비추어 각각의 대안이 지닌 장단점을 비교해보자. 그 남자는 죽은 사람이기에, 약속을 깨더라도 노할 사람이 없다. 약속을 지켰노라고 말해주어야 할 상대가 없기에, 약속을 깨더라도 약속의 사회적 관행이 약화될 일은 전혀 없다. 다만 당신은 약속에 대한 자신의 본능적 집착을 약화시킬 수 있고(사실대로 말한다면, 당신은 그 약속에 관해 거짓말을 하는 셈이기에), 그만큼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셈이다. 그렇긴 해도 그 남자의 막대한 재산을 병원에 기부할 때 얻을 큰 보람에 비하면, 이 나쁜 결과란 매우 사소한 것이 아닐까? 여기서 스마트는 행위 공리주의를 성급하게 제쳐놓을 일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행위 공리주의자에게도 규칙은 유용할 수 있지만, 그것은 오로지 지침이나 길잡이나 수칙으로서 그러할 뿐, 규칙 자체가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정하는 기준의 일부가 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이 사례는 조작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여기서 적용된 추론을 고문에 그대로 적용하여 원칙이라는 핵심문제를 검토할 수 있다. 고문이 자행되는 세상보다는 고문 없는 세상이 훨씬 더 행복한 곳이므로, 규칙 공리주의자라면 고문할 것이 아니라 규칙을 적용하라고 할 것이다. 또 하나의 사례로, 테러범에게서 정보를 얻어내어야만 도시 파괴를 예
방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테러범을 고문해도 될까? 의무론자들 같으면, 아무리 그런 경우라 하더라도 우리와 같은 인류를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될 일이라며 고문하지 말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공리주의자들은 결과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특색이 있다. 요컨대, 스마트는 규칙 공리주의가 의무론과 입장을 같이하여 고문을 나쁜 행위로 지목하는 기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려 한 것이다. 규칙 공리주의는 특정한 사례들에서 빚어지는 결과를 너무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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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 공리주의 비판

 

 

 

 

 

그렇지만 의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규칙 공리주의가 내놓는 해법 앞에서 행복해하는 기색이 없다. 의무론자들이 볼 때, 규칙 공리주의는 여전히 문제를 안고 있는데 그것은 도덕적 규칙의 타당성을 너무도 부차적으로 너무도 제멋대로 다룬다는 것이다. 예컨대, 규칙 공리주의가 생명, 재산, 기본적 자유 같은 것에 대한 기본권을 어떻게 정당화하는지를 살펴보자. 벤담이 인간은 특별한 형이상학적, 도덕적 지위를 지니고 있어서 인간을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대하는 것은 금지된다는 자연natural rights 사상을 가리켜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비웃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자연권 이론은 권리를 의무론적으로 해석하면서, 어떤 특정 존재에 대해서는 ‘해서는 안 되느니라’ 식의 (형이상학적으로 모호한?) 라벨을 붙여 놓는다. 하지만 규칙 공리주의는 이런 식의 형이상학적 냄새를 풍기지 않고서도 권리를 정당화할 수 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규칙 공리주의는 두 개의 세상을 바라본다. 하나는 권리가 존중되는 세상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못한 세상이다. 여기서 규칙 공리주의는 권리가 존중되는 세상이 그렇지 못한 세상보다 행복하므로 권리는 도덕적 기준으로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달리 말하자면, 규칙 공리주의자가 볼 때 권리를 존중하는 관행은 가장 행복한 결과를 가져오는 데 이바지한다. 의무론자들의 주장이 안고 있는 문제는 바로 ‘때문에’ 앞에 나오는 구절에 있다. 권리를 존중해야 할 이유를 제시한 구절이다.
규칙 공리주의자들은 오직 권리를 존중하는 사회의 관행이 더 큰 행복을 가져올 때에만 권리에 도덕적 타당성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의무론의 관점에서 보면, 바로 이것이 문제다. 권리의 바탕은 인격이 지닌 존엄과 신성함에 있다는 것이다. 설령 더 행복한 세상을 가져오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런 바탕은 언제나 변함없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관대한 노예제가 시행되는 가운데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노예제 아래에서 살아가는 어떤 이들은 (비록 다른 측면에서는 잘 지낸다 하더라도) 기본 인권이 부정될 것이다. 이런 식의 행복한 세상에서 무엇이 도덕적으로 잘못되어 있는지 찾아낼 수 없단 말일까? 공리주의자들은 노예제가 원칙적으로 왜 나쁜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의무론자의 관점에서 보면, 노예제를 시행하는 세상은 인간의 심성에 깃들어 있는 자유와 존엄을 짓누르는 세상이다. (이 문제는 다음 장에서 칸트의 이론을 다룰 때 다시 살펴볼 것이다). 설령 그들의 이론이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가정하더라도, 인간의 자유와 존엄은 그에 견줄 수 없는 별개의 문제다. 물론 공리주의자들의 귀에는 존엄이니 신성이니 하는 따위의 말들이 금기라는 말처럼 희미하게 들릴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의무론자들의 입버릇이 되어버린, 사람을 노예로 부리는 건 금지된다식의 말이 오늘의 물질적 세계에서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물을지 모른다. 규칙 공리주의자들은 뜬구름 잡는 말을 피하려 할 것이고, 그 대신 노예제를 시행하는 사회는 훨씬 불행하기 쉽다는 식의 경험적으로 더 검증된 주장을 하려고 할 것이다. 이에 이르러 규칙 공리주의자는 공리주의나 결과주의의 기본 특색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공리주의가 비도덕적인 행위를 낳는다는 비판을 근본적으로 완화시키게 되었다고 기뻐할지 모른다. 그러나 공리주의 이론 가운데 의무론자의 귀에 거슬리는 요소는 여전히 남아 있다면, 그것은 곧 양쪽의 도덕적 지향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가로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그 차이는 도덕적 토론으로 쉽사리 해소되기 어렵다. 더 놀라운 것은 규칙 공리주의가 공리주의자마저 불행을 느끼게 만든다는 사실인데, 이러한 형태의 비평에 관해서는 더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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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의 융은 내면의 불안을 보상하기 위해 거만한 사람으로 살아야 했다

 

 

 

 

 

 

노년의 융은 과거를 돌아보며 그 경험이 자신에게 삶의 “길을 안내해준 등불”이 되었다고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십대의 융은 여전히 내면의 불안을 보상하기 위해 겉으로는 거만한 사람으로 살아야 했다. 열다섯 살 무렵 그에게는 격정적인 분노가 생겼는데, 후에 그는 이를 자신의 “용맹한” 본성이라고 표현했다.
융은 점차 부모와 더 큰 거리감을 느꼈지만 성인이 되어가면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성격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의 부모에게는 타고난 성격과 후천적 성격의 이중성이 있었는데, 그러한 점은 엄격하고 철저하게 통제되는 전통적인 사회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에밀리 융은 몸집이 크고 유머가 있으며 요리를 잘하고 다정한 주부였으며 보수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또한 본격적으로 살리지는 못했지만 “문학적 재능”이 있었으며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자신도 말을 많이 하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내면에는 강력하고 깊게 자리 잡은 냉철한 관찰자로서의 성격이 있어서 그녀가 지적한 것들이 아들에게 영향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 어머니가 그런 상황에서 한 말들은 너무나도 정확했기 때문에 나는 그녀의 말을 두려워했다 … 어머니에게는 완전히 다른 두 인격이 있었다 … 그녀는 낮에는 사랑을 베푸는 어머니였지만 밤에는 기이한 사람이 되었다. 밤의 그녀는 예지자이자 이상한 동물 같았고 곰의 동굴에 사는 여사제 같기도 했다. 그녀는 진실과 자연만큼이나 원초적이며 냉정했다. 그런 순간에 내가“ 자연의 마음”이라고 부르는 그녀의 본성이 구체화되었다.

 

나에게도 그런 원초적인 면이 있었고, 내가 항상 이를 달가워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사람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능력과 관련이 있었다. 나는 무언가를 알아채고 싶지 않을 때 나 자신을 속이고 모르는 척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세상의 이치를 꽤 잘 알고 있다 …이런“ 통찰력”은 본능에서 나오거나 또는 다른 사람들과의“ 신비적 융합participation mystique”에서 생긴다.

 

 

모자간에 어느 정도 비슷한 점이 있었다면 그들은 그만큼 가깝게 지냈을 것이다. 에밀리는 남편에게는 말할 수 없는 그녀의 모호한 결혼생활을 어린 융에게 털어놓으며 그를 “어른 대하듯” 했다. 하지만 융은 어린 나이였음에도 “어머니에 대한 신뢰에는 철저한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비밀”융은 자신을 어머니와
동일시했기 때문에 그녀의 인격도 이중적이라고 보았다.
그는 소년이 되면서 점차 어머니보다는 아버지의 영향을 더 많이 받게 되었다. 그는 언어에 재능이 있는 아버지에게 라틴어를 배웠으며 부모가 각방을 쓸 동안 아버지와 침실을 함께 썼다. 융은 “친애하는 인자한 아버지”에게 정신적인 교감을 느끼며 의지하고 싶어 했지만 그보다는 아버지의 풀리지 않는 복잡한 문제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스위스 개신교 개혁파 목사였던 파울 융은 밖에서는 조용하고 겸손했지만 집에서는 곧잘 시비를 걸고 화를 냈다. 부모의 불화로 어색해진 집안 분위기를 보며 융은 아버지의 종교생활이 공허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종교적 탐구에 대한 의욕이 크게 꺾였다. 그의 견신례를 위한 아버지의 종교적 지도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지루했다.” 아버지는 이
해 없는 믿음을 요구하는 것 같았다.

 

그 당시 나는 아버지가 말하는 모든 것에 심각한 의심을 품게 되었다. 아버지가 은총에 대해 설교하는 것을 들으면 … 스스로 믿지도 않으면서 남에게서 들은 말을 그저 전하는 사람을 보듯 그 말이 의심스럽고 공허하게 들렸다 … 그 후 열여덟 살이 되자 나는 아버지와 여러 차례 토론을 했다 … 하지만 (토론은) 언제나 만족스럽지 않게 마무리되었다 … 아버지는“ 그건 이치에 맞지 않아. 너는 언제나 생각부터 하는구나. 사람은 생각하지 말고 믿어야 한단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나는“ 그렇지 않아요. 사람은 경험을 통해 알아야만 해요”라고 생각했지만 아버지에게는“ 저에게 믿음을 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체념한 듯 나에게서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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