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칙 공리주의 비판

그렇지만 의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규칙 공리주의가 내놓는 해법 앞에서 행복해하는 기색이 없다. 의무론자들이 볼 때, 규칙 공리주의는 여전히 문제를 안고 있는데 그것은 도덕적 규칙의 타당성을 너무도 부차적으로 너무도 제멋대로 다룬다는 것이다. 예컨대, 규칙 공리주의가 생명, 재산, 기본적 자유 같은 것에 대한 기본권을 어떻게 정당화하는지를 살펴보자. 벤담이 인간은 특별한 형이상학적, 도덕적 지위를 지니고 있어서 인간을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대하는 것은 금지된다는 자연권natural rights 사상을 가리켜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비웃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자연권 이론은 권리를 의무론적으로 해석하면서, 어떤 특정 존재에 대해서는 ‘해서는 안 되느니라’ 식의 (형이상학적으로 모호한?) 라벨을 붙여 놓는다. 하지만 규칙 공리주의는 이런 식의 형이상학적 냄새를 풍기지 않고서도 권리를 정당화할 수 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규칙 공리주의는 두 개의 세상을 바라본다. 하나는 권리가 존중되는 세상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못한 세상이다. 여기서 규칙 공리주의는 권리가 존중되는 세상이 그렇지 못한 세상보다 행복하므로 권리는 도덕적 기준으로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달리 말하자면, 규칙 공리주의자가 볼 때 권리를 존중하는 관행은 가장 행복한 결과를 가져오는 데 이바지한다. 의무론자들의 주장이 안고 있는 문제는 바로 ‘때문에’ 앞에 나오는 구절에 있다. 권리를 존중해야 할 이유를 제시한 구절이다.
규칙 공리주의자들은 오직 권리를 존중하는 사회의 관행이 더 큰 행복을 가져올 때에만 권리에 도덕적 타당성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의무론의 관점에서 보면, 바로 이것이 문제다. 권리의 바탕은 인격이 지닌 존엄과 신성함에 있다는 것이다. 설령 더 행복한 세상을 가져오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런 바탕은 언제나 변함없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관대한 노예제가 시행되는 가운데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노예제 아래에서 살아가는 어떤 이들은 (비록 다른 측면에서는 잘 지낸다 하더라도) 기본 인권이 부정될 것이다. 이런 식의 행복한 세상에서 무엇이 도덕적으로 잘못되어 있는지 찾아낼 수 없단 말일까? 공리주의자들은 노예제가 원칙적으로 왜 나쁜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의무론자의 관점에서 보면, 노예제를 시행하는 세상은 인간의 심성에 깃들어 있는 자유와 존엄을 짓누르는 세상이다. (이 문제는 다음 장에서 칸트의 이론을 다룰 때 다시 살펴볼 것이다). 설령 그들의 이론이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가정하더라도, 인간의 자유와 존엄은 그에 견줄 수 없는 별개의 문제다. 물론 공리주의자들의 귀에는 존엄이니 신성이니 하는 따위의 말들이 금기라는 말처럼 희미하게 들릴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의무론자들의 입버릇이 되어버린, 사람을 노예로 부리는 건 금지된다는 식의 말이 오늘의 물질적 세계에서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물을지 모른다. 규칙 공리주의자들은 뜬구름 잡는 말을 피하려 할 것이고, 그 대신 노예제를 시행하는 사회는 훨씬 불행하기 쉽다는 식의 경험적으로 더 검증된 주장을 하려고 할 것이다. 이에 이르러 규칙 공리주의자는 공리주의나 결과주의의 기본 특색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공리주의가 비도덕적인 행위를 낳는다는 비판을 근본적으로 완화시키게 되었다고 기뻐할지 모른다. 그러나 공리주의 이론 가운데 의무론자의 귀에 거슬리는 요소는 여전히 남아 있다면, 그것은 곧 양쪽의 도덕적 지향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가로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그 차이는 도덕적 토론으로 쉽사리 해소되기 어렵다. 더 놀라운 것은 규칙 공리주의가 공리주의자마저 불행을 느끼게 만든다는 사실인데, 이러한 형태의 비평에 관해서는 더 살펴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