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대의 융은 내면의 불안을 보상하기 위해 거만한 사람으로 살아야 했다

노년의 융은 과거를 돌아보며 그 경험이 자신에게 삶의 “길을 안내해준 등불”이 되었다고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십대의 융은 여전히 내면의 불안을 보상하기 위해 겉으로는 거만한 사람으로 살아야 했다. 열다섯 살 무렵 그에게는 격정적인 분노가 생겼는데, 후에 그는 이를 자신의 “용맹한” 본성이라고 표현했다.
융은 점차 부모와 더 큰 거리감을 느꼈지만 성인이 되어가면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성격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의 부모에게는 타고난 성격과 후천적 성격의 이중성이 있었는데, 그러한 점은 엄격하고 철저하게 통제되는 전통적인 사회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에밀리 융은 몸집이 크고 유머가 있으며 요리를 잘하고 다정한 주부였으며 보수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또한 본격적으로 살리지는 못했지만 “문학적 재능”이 있었으며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자신도 말을 많이 하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내면에는 강력하고 깊게 자리 잡은 냉철한 관찰자로서의 성격이 있어서 그녀가 지적한 것들이 아들에게 영향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 어머니가 그런 상황에서 한 말들은 너무나도 정확했기 때문에 나는 그녀의 말을 두려워했다 … 어머니에게는 완전히 다른 두 인격이 있었다 … 그녀는 낮에는 사랑을 베푸는 어머니였지만 밤에는 기이한 사람이 되었다. 밤의 그녀는 예지자이자 이상한 동물 같았고 곰의 동굴에 사는 여사제 같기도 했다. 그녀는 진실과 자연만큼이나 원초적이며 냉정했다. 그런 순간에 내가“ 자연의 마음”이라고 부르는 그녀의 본성이 구체화되었다.
나에게도 그런 원초적인 면이 있었고, 내가 항상 이를 달가워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사람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능력과 관련이 있었다. 나는 무언가를 알아채고 싶지 않을 때 나 자신을 속이고 모르는 척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세상의 이치를 꽤 잘 알고 있다 …이런“ 통찰력”은 본능에서 나오거나 또는 다른 사람들과의“ 신비적 융합participation mystique”에서 생긴다.
모자간에 어느 정도 비슷한 점이 있었다면 그들은 그만큼 가깝게 지냈을 것이다. 에밀리는 남편에게는 말할 수 없는 그녀의 모호한 결혼생활을 어린 융에게 털어놓으며 그를 “어른 대하듯” 했다. 하지만 융은 어린 나이였음에도 “어머니에 대한 신뢰에는 철저한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비밀”에 융은 자신을 어머니와
동일시했기 때문에 그녀의 인격도 이중적이라고 보았다.
그는 소년이 되면서 점차 어머니보다는 아버지의 영향을 더 많이 받게 되었다. 그는 언어에 재능이 있는 아버지에게 라틴어를 배웠으며 부모가 각방을 쓸 동안 아버지와 침실을 함께 썼다. 융은 “친애하는 인자한 아버지”에게 정신적인 교감을 느끼며 의지하고 싶어 했지만 그보다는 아버지의 풀리지 않는 복잡한 문제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스위스 개신교 개혁파 목사였던 파울 융은 밖에서는 조용하고 겸손했지만 집에서는 곧잘 시비를 걸고 화를 냈다. 부모의 불화로 어색해진 집안 분위기를 보며 융은 아버지의 종교생활이 공허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종교적 탐구에 대한 의욕이 크게 꺾였다. 그의 견신례를 위한 아버지의 종교적 지도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지루했다.” 아버지는 이
해 없는 믿음을 요구하는 것 같았다.
그 당시 나는 아버지가 말하는 모든 것에 심각한 의심을 품게 되었다. 아버지가 은총에 대해 설교하는 것을 들으면 … 스스로 믿지도 않으면서 남에게서 들은 말을 그저 전하는 사람을 보듯 그 말이 의심스럽고 공허하게 들렸다 … 그 후 열여덟 살이 되자 나는 아버지와 여러 차례 토론을 했다 … 하지만 (토론은) 언제나 만족스럽지 않게 마무리되었다 … 아버지는“ 그건 이치에 맞지 않아. 너는 언제나 생각부터 하는구나. 사람은 생각하지 말고 믿어야 한단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나는“ 그렇지 않아요. 사람은 경험을 통해 알아야만 해요”라고 생각했지만 아버지에게는“ 저에게 믿음을 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체념한 듯 나에게서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