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주의와 폭력: 신세계 무질서

지하드운동은 단순한 테러도, 반란도 아니다. 첫째는 신개념 전쟁이고, 둘째는 사이드 쿠틉이 “이슬람식 세계혁명” 으로 규정한, 비국가 전쟁을 위한 정치적 아젠다를 일컫는다. 무력으로 세계를 재창조한다는 개념은 이슬람주의와 폭력이라는 광범위한 맥락에서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이슬람주의를 창시한 하산 알반나는 지하드聖戰를 가리켜서 세계의 이슬람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이슬람주의가 활용하는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는 전통 이슬람식 지하드를 다른 개념으로 바꾸었다. 달리 말하면, 정치적 이슬람교가 이슬람교에서 비롯되었으나 그와는 전혀 다른 사상이듯, 현대의 지하드운동 또한 고전 지하드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면 된다.
지하드와 지하드운동의 이해
2005년, 나는 “정치적 이슬람교의 지하드운동 뿌리” 란 제목으로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지에 기고하기 위해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이와 같은 뿌리를 모른다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 좀 놀랐다. 급진파와 소위 온건파는 같은 나무에서 뻗은 두 가지로, 동전의 양면에 빗댈 수 있다. 물론 제도적 이슬람주의가 중동에 민주정치를 전파해주기를 기대했던 사람들은 이 같은 발상을 환영하지 않았다. 마지막 장에서 다루겠지만, 민주정치가 그렇게 전파될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이 장에서 나는 동전의 뒷면에 해당하는, 지하드를 지하드운동으로 개조한 이슬람주의자들을 살펴볼 것이다.(고전 지하드와 근대 지하드운동의 뚜렷한 차이도 본서의 특징이라 하겠다) 지하드 운동이 이슬람주의의 주요 지향점이란 점을 감안해볼 때, 급진주의나 테러리즘의 맥락이 아니더라도 이를 진지하게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지하드운동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긴 하나 그것이 이슬람주의의 주류 사상은 아니며, 이슬람주의가 세계와 국가의 질서에 주로 관심을 두므로 폭력이 그에 내재된 것도 아니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오로지 샤리아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일념으로 폭력을 자행하나, 미국의 논쟁은 이 점을 항상 간과한다.
고전・전통 이슬람교에서 지하드는 자기수련이나 물리적인 투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정의는 서로 떼려야 뗄 수가 없다.4 무슬림은 그들이 알고 있는 세상에 이슬람세계, 즉 평화의 집(다르 알이슬람)을 확산시키기 위해 7~17세기까지 지하드 정복 전쟁, 즉 정의로운 전쟁을 벌여왔다. 이는 테러가 아닌, 코란의 지하드 개념과 일치한다. 무슬림은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가 독자적 전쟁 이론을 내놓기 훨씬 전부터 인륜적인 기준에 부합하는 목표에 한해 규정과 행동강령을 준행해온 것이다. 물론 이 같은 관행은 제네바협정에 명시된 관행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나, 정규군이 감행하는 지하드의 규제 시스템은 여전히 갖추고 있다. 비국가 주동세력의 비정규적 양상으로 벌이는 현대 지하드운동의 행동은 이 기준에는 일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서양 학자와 정책입안자들5은 고전 지하드와 현대 지하드운동의 차이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느냐가 문제일 것이다.6 2010년 6월, 나는 워싱턴 DC에서 원고를 마지막으로 수정하다가, 오바마 대통령의 대테러 수석보좌관인 존 브레넌이 전략・국제연구센터에서 연설한 내용 전문을 접하게 되었다. 연설 전문은 AP 연합통신에 게재되었으며 인터넷에 접속하면 열람할 수 있다. 존 브레넌의 연설에서 발췌한 다음 대목을 살펴보자.
대통령의 국토 안보 및 대테러 수석보좌관으로서, 자국의 안보 전략이 이 나라의 안전을 지키는 노력에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지 말씀드릴까 합니다. … 테러리즘은 전략에 불과하므로 우리의 적은 “테러리즘” 이 아닙니다. “테러” 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테러는 심리상태를 일컫는 말이니까요. … 그렇다고 “지하디스트” 나 “이슬람주의자” 라고 규정할 수도 없습니다. 지하드는 거룩한 투쟁인 데다 이슬람교의 정당한 신조로, 자신과 공동체를 정화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무고한 남녀와 어린이를 살해하는 만행에는 거룩하다거나 정당하다거나 혹은 이슬람다운 면모는 없지만요. … 종교적 맥락에서 우리의 적은 미국이 이슬람교와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속임수— 즉 알카에다와 동맹이 테러리즘을 정당화할 목적으로 선전하는— 라야 옳을 것입니다. … 우리의 적은 알카에다와 동맹세력입니다. … 우리는 알카에다와 극단주의 동맹들과 맞서 싸워야 할 것입니다.
오바마 정부를 대변하던 브레넌은 “이슬람주의” 와 “지하드운동” 은 쏙 빼고 “알카에다와 동맹세력” 을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극단주의자로 싸잡아버렸다. 이것이 바로 전 행정부가 내건 “테러와의 전쟁” 의 후속편이나, 그는 이 독트린을 두고 너무 많은 것들을 거부했다.
이 문제는 3장에서 논했던 유대인혐오증과 반유대주의의 차이점과 많이 비슷하다. 나는 3장에서 이슬람주의가 유대인을 혐오하는 것이 반유대주의라기보다는 “정치적 불만을 정당하게 표출한” 것— 즉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 인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고는 분석과정에서 이를 반증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지하디스트의 테러리즘은 무엇이며, 일반 무슬림에게서 서방세계를 떼어놓지 않고도 그와 싸울 수 있는 방편은 무엇인지 물어야 할 것 같다. 브레넌은 “종양과도 같은 극단주의의 폭력으로 국민의 목숨을 위협하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세력에 대응하는 것” 은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정당한 불만은 민주정치 제도와 대화를 통해 얼마든지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고 주장했다. 그러나 3장에서 내가 제시한 추론에 따르자면, 지하디스트의 이슬람주의는 특정한 불만을 고쳐 생각하도록 선택된 전술이 아니다. 비용대비 효과가 나은 전술이 있다고 판단되면 언제든 폐기해도 아쉬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폭력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이슬람 전통이 변조 과정을 거친, 이슬람교의 재해석으로 볼 수 있다.
브레넌도 다니엘 바리스코처럼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의 차이점을 간과하고, 이슬람주의를 대대로 내려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