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를 읽고 장자에게 배운다』 중에서

 

 

 

장자가 말했다.

 

“옛날에 가假라는 나라에 임회林回라는 사람이 살았다. 그 사람은 도망칠 때 귀중한 보물은 버리고 어린아이만 업고 갔다. 사람들은 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물었다. ‘왜 금은보화도 마다하고 아이만 업고 가시오?’ 그러자 임회가 말했다. ‘보물이 이익이라면 아이는 본성에 해당하기 때문이라오.’ 이처럼 이익은 후에 재난이 닥치면 갈라설 수 있지만 본성은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절대 떨어지지 않고 견고하게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이어서 장자는 이렇게 말했다.

 

“군자지교담약수君子之交淡若水, 소인지교감여례小人之交甘如醴” 즉 군자 사이의 사귐은 물과 같아서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다. 반면 소인배 사이의 사귐은 단술처럼 달콤하지만 오래 유지되기 어렵다. 군자는 진심으로 서로를 대하지만 소인은 늘 이해를 따지므로 이득을 볼 때는 좋지만 일단 이해가 어긋나면 바로 등을 돌린다. 이어 장자는 옛날이야기를 하나 더 했다.  한韓나라와 위魏나라가 변경을 두고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자화자子華子가 한나라의 소희후昭僖侯를 찾아가 말했다.

“각국이 협의했다고 칩시다. 그리고 이 협의서를 먼저 손에 넣는 사람이 천하를 호령하는 것으로 하죠.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만약 왼손으로 이 협의서를 잡으면 오른손을 잘라버리고, 오른손으로 잡으면 왼손을 잘라버리는 겁니다. 이래도 그 협의서를 갖고 싶소?”

 

다시 말해서 이 협의서를 손에 넣으려면 반드시 한쪽 손을 희생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소희후는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

“천하를 못 얻는다 하더라도 내 손을 지키겠소. 천하는 외적인 것이지만 손은 내 것이오.”

 

자화자는 그의 대답을 분석해주었다.

“결국 천하를 갖는 것보다 두 손이 중요하다는 뜻이겠죠. 그것이 손이 아니라 몸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천하와 비교한다면 한나라는 그중 작은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한나라 전체와 비교하면 지금 싸우고 있는 변경의 땅은 아주 작은 일부분일 뿐이지요. 그런데도 그 작은 땅 때문에 매일 근심에 싸여 몸을 상하게 한다면 수지가 맞지 않는 일입니다.”

 

이 말을 듣고 납득한 소희후가 말했다.

“실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말렸지만 당신의 말이 가장 설득력이 있소. 당신은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오.”

사람은 때로 어떤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끝내 그 목표를 달성하지만, 달성한 후에 그다지 기뻐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래서 인생이 쉽지 않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어떤 이득이든 얻으려고 한다면 그전에 반드시 저울질을 해봐야 한다. 당신이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치르는 대가와 그 목표를 이룬 후에 얻게 되는 기쁨 중에서 무엇이 큰지 말이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모든 일에는 이득과 손해가 존재한다. 사람들은 이득만 얻고 손해는 보지 않기를 바란다. 이것이 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 추구하는 바이다. 사람들은 점을 봐서 자신이 결정한 일의 당위성을 찾고자 하며, 하는 일마다 형통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장자는 이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장자는 운이 아주 좋은 아들 때문에 눈물을 흘린 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했다. 장자는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을까?

 

 

저자소개: 푸페이룽 傅佩榮
1950년에 태어난 푸페이룽은 타이완대학 철학대학원 석사, 미국 예일대학 철학박사이다. 타이완대학 철학과 학과장 및 철학대학원 원장을 역임하였으며 벨기에대학, 네덜란드 레이던대학 객원교수이기도 하다. 현재는 타이완대학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푸페이룽은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말솜씨를 가진 교수로, 타이완 『민생보民生報』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학교수로 선정되었다. 뿐만 아니라 타이완 교육부에서 수여하는 우수 교육자상, 『성공한 인생成功人生』으로 타이완 문화예술 분야 국가문예상, 『천론에 대한 유가와 도가의 해석儒道天論發微』으로 중정中正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현재까지 타이완에서 백 권이 넘는 책을 출간하는 등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특히 전통 경전 연구에 몰두하여 기존의 이론이나 고정관념을 탈피한 독창적인 견해를 내놓고 있다. 온고지신의 정신으로 『논어』, 『맹자』, 『노자』, 『장자』, 『역경』 등을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였으며 학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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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아트 선재 강의 후 통영을 다녀왔습니다

 

화요일 경주에 소재하는 아트선재에서 강의를 마친 후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송정으로 가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1박했습니다.

아래 사진은 호텔에서 내려다본 풍경으로 시간을 두고 찍은 것입니다.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친 뒤 지인의 차를 타고 통영으로 향했습니다.

아래 사진 케이블카에서 내려다본 통영 그리고 발치에서 바라본 통영의 모습입니다.

회, 멍게, 해삼을 너무 많이 주문해 반을 겨우 먹고 나머지는 포장해 식당을 나왔습니다.

케이블카를 타고 미륵산 정상에 올라 내려다본 풍경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날이 맑았더라면 대마도도 멀리 볼 수 있었을 터인데 비가 부슬부슬 내린 후라서 그렇게 멀리는 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남해는 여간 아름답지 않습니다.

충분한 교량과 해저터널로 교통이 매우 잘 되어 있었습니다.

시장하진 않았지만, 지난번처럼 부산역에서 부산어묵을 한 꼬챙이 먹고 KTX에 몸을 싣고 귀가하니 자정을 넘겼습니다.

사진 즐감하세요!!!

 

 

호텔에서 내려단 본 송정 해변입니다.

 

 

어둠이 내린 후 같은 곳에서 찍었습니다.

 

 

역시 같은 데서 찍은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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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왈 vs 예수 가라사대(도서출판 지와 사랑)

 

 

 

 

 

 

유교, 불교, 도교, 이슬람교의 융합

 

유학은 동중서 이후부터 자체적으로 영역이 분화되기 시작했고 정치유학, 학술유학, 민간유학 세 영역으로 나뉘었다. 정치유학은 무제 이후의 역대 황제들이 모두 채택한, 유학과 음양사상이 융합된 사상이다. 무제 때부터 거의 모든 황제가 태산에 올라 하늘과 땅에 제사 드리며 하늘의 명을 받아 황제가 되었음을 백성에게 알렸다. 이때부터 황제를 천자라고 불렀다. 정치유학은 황제가 제위에 오를 때 가장 두드러졌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봉건제왕을 위해 존재했던 정치유학은 사라졌고 현대사회에서도 더 이상 필요 없어졌다.
민간유학과 학술유학은 정치유학이 처한 상황과는 완전히 달랐다. 특히 학술유학이 그랬다. 민간유학은 비교적 굴곡이 많은 운명이었고, 학술유학은 변수가 많았다. 학술유학은 공자, 맹자, 순자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략 다섯 차례의 발전단계를 거쳤다. 첫 번째는 ‘오직 유학만을 존중하라’라는 단계로 구체적으로는 공자, 맹자, 순자 3대 성인들의 시기다. 3대 성인 이후 많은 유학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외부에서 도가사상을 받아들였고, 또 어떤 사람은 불교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해서 형성된 것이 학술유학의 두 번째 단계, 즉 유도호보형 유학이다. 유학과 도가사상이 상호 보완하는 이 유학은 위진魏晋 시기에 가장 두드러졌다. 위진시기의 유도호보형 유학은 유학과 도가사상이 상호 보완한 것, 유학과 불교가 상호 보완한 것 두 방향으로 분화되었으며, 둘 다 각각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위진 시기에 현학20 의 많은 명인들과 사상가들이 유도호보형 유학에 속한다. 이후 중국에서 불교의 세력이 점차 커졌다. 당나라의 문학가 겸 사상가인 한유 등은 불교를 배척하고 반대했으나 불교는 소멸되지 않고 오히려 확대되기까지 했다. 이때 많은 사상가들이 유학에서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을 불교에서 발견하기 시작했다. 불교는 추상적 사고 수준이 매우 높았다. 그래서 송나라와 명나라 때의 많은 사상가들이 불교의 형이상학적 내용을 받아들여 유학을 보충했으며 이로써 유학의 형이상학적 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학술유학의 세 번째 단계는 삼교합일형 유학이다. 삼교합일형 유학은 유학, 도가사상, 불교의 사상을 하나로 융합한 것이다. 정주21 를 대표로 하는 이학파22 든, 육왕을 대표로 하는 심학파23 든 대체로 삼교를 융합하여 하나로 만들었다. 그러나 융합에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정주는 이理를 강조했고 육왕은 심心을 강조했는데 이는 객관을, 심은 주관을 중시했다. 그러나 삼교합일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는데 명백한 문화 교류 의 결과였다.
학술유학의 네 번째 단계는 송나라 말부터 청나라 초기에 나타난 사교회통형 유학이다. 사교회통은 두 방향으로 발전했는데 유교, 불교, 도교, 기독교에 정통한 유학자들이 한 방향을 이루었다. 기독교는 중국에 유입된 후 명나라 말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기독교가 뿌리를 내릴 수 있었고, 기독교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 시기에 유교, 도교, 불교, 기독교사상을 하나로 융합한 학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인물로 서광계를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중국인의 시각으로 기독교를 이해한 학자들이다. 필자는 지금까지도 중국만의 특색 있는 기독교가 만들어지지 못한 이유가 이 네 가지 학설을 유기적으로 융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사교회통은 실패했다.
또 다른 방향의 사교회통은 유불선과 청淸의 융합이다. 여기서 말하는 청은 오늘날의 이슬람교로 당시에는 청진교淸眞敎로 불리었다. 이슬람교가 중국에 유입되기까지는 오래 걸렸다. 이슬람교를 중국으로 전파한 사람들은 대부분 상인이었다. 아랍 상인, 특히 페르시아 상인과 터키 상인이었다. 그들은 상업에 집중하느라 문화 교류를 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몇백 년 동안 이슬람교는 중국에서 신앙인만을 대상으로 전파되었고 중국문화와 융합되지 못했다. 명나라 말과 청나라 초에 이르자 이들 아랍인과 페르시아인, 터키인의 후손이 점차 중국 사회에 융화되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어떤 이는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서서히 자리 잡아갔다. 특히 회족24 에서 걸출한 인물로 뽑히는 이지는 아버지가 무슬림이었다. 이지 외에 유지, 왕산여, 마복초 등이 전도유망한 사상가들이었고 이들은 유교, 불교, 도교, 이슬람교를 아주 정교하게 융합했다. 뿐만 아니라 유학의 기본 개념으로 이슬람교의 일부를 해석하여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얻었다. 그중 왕산여는 이슬람교의 관점에서 유학사상을 해석하여 『청진대학淸眞大學』을 썼는데 이 책은 미국 하버드 대학 연경학사燕京學舍 학사장인 두위명의 지도반에서 영어로번역되기도 했다. 『청진대학』이 출판된 후, 미국 사회에서는 명나라 말과 청나라 초의 이슬람 사상가들 중에 추상적 사고력이 높은 학자와 사상가가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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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왈 vs 예수 가라사대(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국의 정식 통치사상이 된 유학

 

유가는 구류십가에서 독존유술이 될 때까지 교류를 멈추지 않았다. 진시황제는 나라를 건립한 뒤 분서갱유14 를 실시하여 유학자의 저작을 불태웠다. 그리하여 유가는 큰 타격을 받았다. 유학사상은 한나라 초기에도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다. 유방이 한나라를 세웠을 때, 황제 앞에서 진언할 때 늘 『시경』과 『상서』16 를 인용했다. 그러나 유방은 “이 몸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는데 어찌 시서詩書를 섬기겠는가!”라며 크게 화를 냈다. 이에 육가가 말했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 한들 어찌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유방은 마음이 불편했지만 오히려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나를 위하여 진나라가 천하를 잃은 이유와 내가 천하를 얻은 까닭이 무엇인지, 또한 과거에 성공한 나라와 망한 나라에 대해 시험 삼아 저술해 보도록 하오.”

이후 육가는 나라의 존망 징후에 대해 약술하여 모두 12편을 지었다. 육가가 매 편을 아뢸 때마다 유방은 칭찬일색이었고 옆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만세를 외치며 그 책을 『신어新語』(정치이론서)라 했다(『신어』, 『사기』「육고열전陸賈列傳」).
한나라가 막 세워졌을 때, 아직 제도가 자리 잡히지 않고 예절과 법도가 너무 간략하여 무장들이 걸핏하면 술에 취해 망언과 괴성을 질러대고 칼을 뽑아 마구 휘둘렀다. 그래서 유방은 휘하에 있는 장군들을 어떻게 단속할지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유방을 섬기고 있던 숙손통이 그의 고민을 알아차리고 기회를 잡아 아뢰었다.

“선비라는 사람들은 진취적인 일을 함께하기는 어렵지만 성업을 함께 지키기에는 적당합니다. 원컨대 노나라의 선비들을 불러 조정의 의례를 함께 만들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즉시 자질구레한 것들까지 규정하는 예의 제도를 만들어 부하들의 행위를 규제했다. 유방은 황제에 대한 예인 삼배구고두를 받자 “나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황제의 고귀함을 알았다”(『사기』 「유경劉敬・숙손통열전叔孫通列傳」)라고 했다.
이 일이 있은 후 유방은 유학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나라 초기의 황제들은 ‘노자의 학문’이라고 불리는 도가사상을 믿으며 여전히 유학을 홀대했다. 초기 통치자들은 도가의 ‘무위이치無爲以治(무로써 다스림)’ 사상이 사회 모순을 완화할 것이라 보고 도가사상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그 결과 확실히 사회 모순은 완화되고 생산력이 높아졌으나, 최고 봉건통치자인 황제가 무위이치를 오랫동안 실행하는 건 불가능
한 일이었다. 그래서 한나라 7대 황제 무제 때 ‘백가를 배척하고 유가만을 중시’하기 시작했고 유학은 중국에서 정식 통치사상이 되었다.
무제는 덕과 재능이 출중한 사람들을 등용하여 나라를 다스린 황제였다. 유가의 대가 동중서는 『천인삼책天人三策』을 통해 “백가를 배척하고 오직 유가만을 중시하라”라는 구호를 당당하게 외쳤고, 무제에게 다른 사상들을 폐기하고 유학만을 높이 세워줄 것을 청했다. 동중서는 유가만을 존중하라고 주장했으나 그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가 쓴 『춘추번로』18 를 보면 유학자와 도학자 그리고 음양학자의 사상을 하나로 융합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음양오행설을 제창한 제나라 음양학자 추연의 사상을 주로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동중서의 사상 또한 문화 교류의 산물이었다. 그의 사상은 ‘천인감응론’ 이라 불리는 신학 목적론의 한 유형이다. 유학과 음양사상을 융합하여 하나로 만든 체계로 백성에게 황제의 통치가 하늘의 뜻에 부합하도록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제 이후 중국 역대 황제는 모두 “봉천승운, 황제는 이르노라”라는 말을 자신의 조서 첫머리에 사용했다. 봉천승운奉天承運은 ‘하늘을 우러러 행운을 빈다’는 뜻이다. 이는 순수한 유학의 영향이 아니라 유학과 음양사상이 융합되어 나타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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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왈 vs 예수 가라사대(도서출판 지와 사랑)

 

 

 

 

 

 

유학의 3대 성인

 

공자
공자의 생애에는 굴곡이 많았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가난한 젊은 시절을 보내면서 잡다한 일에 능하게 되었다. 중년에 가세가 기울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말년에는 몇몇 사건으로 걱정이 많았다. 국가를 보위하고 세상을 구할 능력은 갖추었으나 군주들이 그를 가까이도 멀리도 두지 않았으므로 자신의 뜻을 펼칠 기회를 좀처럼 얻지 못했다. 그러던 중 다행스럽게도 노나라의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정치에 참여한 기간이 4년도 채 안 되었지만 중도재5 , 소사공6 , 대사구7 를 역임하고, 국상國相을 대행함으로써 정치적 업적을 많이 남겼다. 그러나 권력자와 정치적 의견이 맞지 않아 관직을 내놓았고 이후로 여러 나라를 유랑하기 시작했다.
공자는 제자들을 데리고 14년 동안 10여 개의 나라를 유랑했다. 동분서주하며 눈코 뜰 새 없이 움직였으나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고 고생을 많이 했다. 송나라에서는 죽을 고비를 넘기고, 광匡나라에서는 포위당했으며, 진나라와 채蔡나라에서는 식량이 떨어지는 힘든 생활을 했다. 그러다 결국 모함을 받고 위나라로 갔다. 그러나 그는 “두려워하며, 안 될 줄 알면서도 행한 사람이었다.”(『논어』 「헌문憲問」) 때로는 마음먹은 대로 일이 되지 않아 “나의 도가 실행되지 않아서 뗏목을 타고 바다로 떠간다면 나를 따를 자는 유(자로)이겠구나!”(『논어』 「공야장公冶長」)라고 한탄했다. 이를 볼 때 공자가 유랑하면서 다른 사상과 문화를 접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공자는 문화 교류를 통해 비교적 완성된 인학 체계를 세울 수 있었다. 인仁은 인간관계에 필요한 원칙으로 구체적으로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러난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공손함, 관용, 신뢰, 영민, 은혜, 존경, 충성 등의 덕목을 실천함으로써 인간관계를 잘 맺는 것이다. 이러한 인애는 “인으로써 정치를 하면 천하를 얻을 수 있다”라는 맹자의 인정사상仁政思想으로 발전했다. 이른바 인의와 인학이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인간학의 일부다. 공자가 주장한 인애는 사람에게는 마땅히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억지로 시키지 말아야 한다(己所不欲 勿施於人)”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사회에 가장 기본이 되는 도덕률이 되었다.

 

맹자
맹자는 전쟁으로 매우 혼란한 시대에 태어났다. 그는 세상을 구하고 유학의 도통을 지켜나가기 위해 공자의 사상을 이어받았다. 그리하여 완전한 인정사상 체계를 구축했다. “궁핍할 때는 홀로 깨우침을 얻기에 힘쓰고, 깨우침을 얻었을 때는 세상에 나가 좋은 일을 한다”, “돈과 권력을 가졌으면서도 음탕하지 않은 사람, 가난하면서도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 폭력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는 사람”(『맹자』 「슬문공하膝文公下」) 등 사람됨의 정신을 내세워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고, 공자 다음의 ‘아시아의 성인(亞聖)’으로 추앙받았다.
맹자는 추鄒나라에서 태어나 제나라에 오래 머물렀다. 유학사상의 계승자였으나 다른 사상이나 문화에도 개방적인 태도를 취했다. 맹자는 제나라 문화의 새로운 내용들을 많이 흡수하여 공자의 인학사상을 인정사상으로까지 발전시켰다. 이는 통치자와 최고 지도자는 인애의 마음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인정을 실시해야 한다는 견해로 유학사상을 한층 진보시킨 것이다. 맹자는 공자의 예치禮治와 덕정德政 사상을 발전시켜 왕도를 제창하고 인정을 주장했다. 그는 또한 공자의 정신인 “내가 하고자 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억지로 시키지 말아야 한다”라는 점을 중시하여 천하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고, 즐거워하는 것을 천하와 함께 즐거워하며, 근심하는 것을 천하와 함께 근심한다는 현자의 처세를 강조했다. 백성이 즐거워하는 것을 즐거워하면 백성들 또한 윗사람의 즐거워함을 함께 즐거워하고, 백성의 근심을 걱정하면 백성들 또한 그 윗사람의 근심을 함께 걱정한다. 천하가 다같이 즐거워하는 것을 함께 즐거워하고, 천하가 다같이 근심하는 것을 함께 걱정한다. 그렇게 하고서도 왕 노릇을 하지 못할 사람이란 없다(『맹자』 「양혜왕하梁惠王下」). 이 사상을 놓고 맹자는 제나라 통치자와 여러 차례 토론을 벌여 설파했고 결국 인정사상이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다. 맹자가 말한 왕도는 덕으로 인을 행하는 것이다. 그는 “인정을 행하여 왕 노릇을 하면 능히 막을 자가 없을 것이다”(『맹자』 「양혜왕하」)라고 했다. 즉 인정으로 천하를 통일하는 것을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는 성선설에 입각하여 인정을 주장했다. 성선설에서 강조하는 것은 자연의 속성이 아닌 사회 속성으로서의 인성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가치를 긍정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추구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등 이상주의 색채가 농후하다. 이처럼 맹자는 독특한 가치를 지향하는 유학자의 길을 걸었다. 그의 경험과 사상 역시 다른 사상과 교류했기 때문에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순자
순자는 본래 제나라 사람은 아니었지만 제나라에서 오랜 기간 머무르며 유학했다. 그는 맹자 다음으로 유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순자는 유학을 근본으로 제자백가8 의 사상, 문화와 교류하여 장점을 받아들여 마침내 제자백가 학설을 집대성한 사람이 되었다. 순자의 사상은 2천여 년 동안 중국 봉건사회에 넓고 깊은 영향을 미쳤다.
기원전 266년에서 기원전 255년 사이에 순자가 진나라로 가서 소왕昭王을 만났다. 소왕은 선비가 나라에 어떤 유익함을 주느냐고 순자에게 물었다. 그러자 순자가 대답했다.


“선비란 옛 임금을 본받고 예의를 존중할 줄 알며 신하의 도리를 행함으로써 윗사람을 귀하게 합니다. 임금이 선비를 등용하시면 곧 조정의 실세를 잡아 모든 일을 합당하게 할 것이고, 등용하지 않으시면 백성들 틈에 섞여 성실히 지내면서 순종할 것입니다. ……선비가 조정에 있으면 정치가 아름다워지고, 낮은 지위에 있으면 풍속이 아름다워지는데 선비가 사람들의 아래에 있어도 이와 같습니다.”

소왕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사람들 위에 있으면 어떠합니까?”


 

“그가 윗사람이 되면 그 공덕은 광대해집니다. 안으로는 견고하게 안정되며, 조정에서는 예절이 잘 닦이고, 관아에서는 법칙이나 도량형이 바로 서게 됩니다. 또 아래에서는 충성, 믿음, 사랑, 이로움이 나타나서 불의를 행하고 죄 없는 사람을 죽여 천하를 얻으라고 해도 하지 않습니다. 이는 임금의 의리를 사람들이 믿고, 온 세상에 통해서 천하가 떠들썩하게 응해 오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무엇 때문인가 하면 귀한 이름이 명백하게 드러나 천하가 다스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까이 있는 자들은 노래 부르며 즐거워하고, 멀리 있는 자들은 넘어지면서도 달려옵니다. 온 세상이 한 집안 같아서 모든 족속이 따르며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무릇 이러한 사람을 일러 사람의 스승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경』 「대아大雅」의 문왕유성 편에서 이르기를 “서쪽에서 동쪽, 남쪽에서 북쪽에 이르기까지 복종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네”라고 했는데 이는 사람의 스승을 두고 이른 것입니다. 무릇 사람의 아래가 되어서도 그와 같고, 사람의 위가 되어서는 이와 같은데 어찌 사람의 나라를 유익하게 하는 일이 없다고 하겠습니까!”(『순자』 「유효儒效」)


 

순자가 제나라로 갔을 당시 제나라는 제왕 건建이 왕위에 있었지만 조정을 군왕후가 통제하고 있었다. 순자는 제나라 재상에게 진언하여 제나라의 대내외 정세를 설명하고 “인후명통9 한 군자를 구해 군왕을 보좌하는 일을 맡기고 그들과 더불어 참정하여 시비를 판단하면 나라 안의 그 누가 감히 의로운 일을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군왕의 후비들이 궁중을 더럽히고 간신이 조정을 혼란스럽게 하며 탐관오리가 관청을 어지럽
힌다”라고 정치의 폐단을 비판했다. 그 결과 “제나라 사람이 순자를 모함하여 순자는 초나라로 갔다.”(『사기』 「맹자순경열전孟子筍卿列傳」) 순자는 초나라 난릉에서 벼슬을 지냈지만 역시 순탄치 못했다. 벼슬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사람이 순자를 임명한 춘신군에게 순자를 모함했고 그는 어쩔 수 없이 초나라를 떠나 다시 조나라로 돌아가야 했다.
고향에서 순자는 상경上卿(정1품이나 종1품의 판서)에 임명되었고 비교적 높은 예우를 받았다. 제나라 도성에 명성이 자자한 직하학궁10 에서 그는 세 번이나 제주11 가 되었고 그중 가장 연장자였다. 순자는 직하학궁에서 많은 학자들을 양성했다. 이 학궁은 오늘날의 고등 교육기관과 비슷하지만 단순한 대학이 아니라 대학원의 성격을 띠는 학교로, 대학과 사회과 학원을 합쳐 놓은 것과 비슷하다. 맹자, 순자 등 많은 대가들이 모두 여기 출신이다. 구류십가12 또는 백가쟁명이라 불리는 주요 유파들 역시 직하학궁으로 모여들었다. 순자는 직하학궁의 실질적인 최고 직책의 자리에서 많은 사상가들을 양성했으며 직하학궁은 그의 제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순자는 유학을 왕도와 패도13 가 함께 중시되는 단계로까지 발전시켰다. 순자의 사상은 제나라 문화 속에 침투되어 있던 도가사상과 법가사상을 많이 흡수했지만 본질적으로 공자의 사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처럼 세 명의 원시 유가 성인들 사이에서도 미세한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차이는 사상과 문화의 교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원시 유가 시기에 사상과 문화 교류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학의 시초인 공자는 도가의 시초인 노자에게 예를 물었고, 맹자는 제나라 직하학궁에서 순어곤과 함께 연구하고 토론하는 등 절차탁마했다. 순자 역시 직하에서 백가의 학문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교류 때문에 유학은 처음부터 활력을 잃지 않고 공자의 인학이 맹자의 인정으로, 다시 순자의 왕도와 패도로 끊임없이 발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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