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왈 vs 예수 가라사대(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국의 정식 통치사상이 된 유학
유가는 구류십가에서 독존유술이 될 때까지 교류를 멈추지 않았다. 진시황제는 나라를 건립한 뒤 분서갱유14 를 실시하여 유학자의 저작을 불태웠다. 그리하여 유가는 큰 타격을 받았다. 유학사상은 한나라 초기에도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다. 유방이 한나라를 세웠을 때, 황제 앞에서 진언할 때 늘 『시경』과 『상서』16 를 인용했다. 그러나 유방은 “이 몸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는데 어찌 시서詩書를 섬기겠는가!”라며 크게 화를 냈다. 이에 육가가 말했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 한들 어찌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유방은 마음이 불편했지만 오히려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나를 위하여 진나라가 천하를 잃은 이유와 내가 천하를 얻은 까닭이 무엇인지, 또한 과거에 성공한 나라와 망한 나라에 대해 시험 삼아 저술해 보도록 하오.”
이후 육가는 나라의 존망 징후에 대해 약술하여 모두 12편을 지었다. 육가가 매 편을 아뢸 때마다 유방은 칭찬일색이었고 옆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만세를 외치며 그 책을 『신어新語』(정치이론서)라 했다(『신어』, 『사기』「육고열전陸賈列傳」).
한나라가 막 세워졌을 때, 아직 제도가 자리 잡히지 않고 예절과 법도가 너무 간략하여 무장들이 걸핏하면 술에 취해 망언과 괴성을 질러대고 칼을 뽑아 마구 휘둘렀다. 그래서 유방은 휘하에 있는 장군들을 어떻게 단속할지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유방을 섬기고 있던 숙손통이 그의 고민을 알아차리고 기회를 잡아 아뢰었다.
“선비라는 사람들은 진취적인 일을 함께하기는 어렵지만 성업을 함께 지키기에는 적당합니다. 원컨대 노나라의 선비들을 불러 조정의 의례를 함께 만들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즉시 자질구레한 것들까지 규정하는 예의 제도를 만들어 부하들의 행위를 규제했다. 유방은 황제에 대한 예인 삼배구고두를 받자 “나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황제의 고귀함을 알았다”(『사기』 「유경劉敬・숙손통열전叔孫通列傳」)라고 했다.
이 일이 있은 후 유방은 유학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나라 초기의 황제들은 ‘노자의 학문’이라고 불리는 도가사상을 믿으며 여전히 유학을 홀대했다. 초기 통치자들은 도가의 ‘무위이치無爲以治(무로써 다스림)’ 사상이 사회 모순을 완화할 것이라 보고 도가사상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그 결과 확실히 사회 모순은 완화되고 생산력이 높아졌으나, 최고 봉건통치자인 황제가 무위이치를 오랫동안 실행하는 건 불가능
한 일이었다. 그래서 한나라 7대 황제 무제 때 ‘백가를 배척하고 유가만을 중시’하기 시작했고 유학은 중국에서 정식 통치사상이 되었다.
무제는 덕과 재능이 출중한 사람들을 등용하여 나라를 다스린 황제였다. 유가의 대가 동중서는 『천인삼책天人三策』을 통해 “백가를 배척하고 오직 유가만을 중시하라”라는 구호를 당당하게 외쳤고, 무제에게 다른 사상들을 폐기하고 유학만을 높이 세워줄 것을 청했다. 동중서는 유가만을 존중하라고 주장했으나 그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가 쓴 『춘추번로』18 를 보면 유학자와 도학자 그리고 음양학자의 사상을 하나로 융합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음양오행설을 제창한 제나라 음양학자 추연의 사상을 주로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동중서의 사상 또한 문화 교류의 산물이었다. 그의 사상은 ‘천인감응론’ 이라 불리는 신학 목적론의 한 유형이다. 유학과 음양사상을 융합하여 하나로 만든 체계로 백성에게 황제의 통치가 하늘의 뜻에 부합하도록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제 이후 중국 역대 황제는 모두 “봉천승운, 황제는 이르노라”라는 말을 자신의 조서 첫머리에 사용했다. 봉천승운奉天承運은 ‘하늘을 우러러 행운을 빈다’는 뜻이다. 이는 순수한 유학의 영향이 아니라 유학과 음양사상이 융합되어 나타난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