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왈 vs 예수 가라사대(도서출판 지와 사랑)

유학의 3대 성인
공자
공자의 생애에는 굴곡이 많았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가난한 젊은 시절을 보내면서 잡다한 일에 능하게 되었다. 중년에 가세가 기울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말년에는 몇몇 사건으로 걱정이 많았다. 국가를 보위하고 세상을 구할 능력은 갖추었으나 군주들이 그를 가까이도 멀리도 두지 않았으므로 자신의 뜻을 펼칠 기회를 좀처럼 얻지 못했다. 그러던 중 다행스럽게도 노나라의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정치에 참여한 기간이 4년도 채 안 되었지만 중도재5 , 소사공6 , 대사구7 를 역임하고, 국상國相을 대행함으로써 정치적 업적을 많이 남겼다. 그러나 권력자와 정치적 의견이 맞지 않아 관직을 내놓았고 이후로 여러 나라를 유랑하기 시작했다.
공자는 제자들을 데리고 14년 동안 10여 개의 나라를 유랑했다. 동분서주하며 눈코 뜰 새 없이 움직였으나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고 고생을 많이 했다. 송나라에서는 죽을 고비를 넘기고, 광匡나라에서는 포위당했으며, 진나라와 채蔡나라에서는 식량이 떨어지는 힘든 생활을 했다. 그러다 결국 모함을 받고 위나라로 갔다. 그러나 그는 “두려워하며, 안 될 줄 알면서도 행한 사람이었다.”(『논어』 「헌문憲問」) 때로는 마음먹은 대로 일이 되지 않아 “나의 도가 실행되지 않아서 뗏목을 타고 바다로 떠간다면 나를 따를 자는 유(자로)이겠구나!”(『논어』 「공야장公冶長」)라고 한탄했다. 이를 볼 때 공자가 유랑하면서 다른 사상과 문화를 접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공자는 문화 교류를 통해 비교적 완성된 인학 체계를 세울 수 있었다. 인仁은 인간관계에 필요한 원칙으로 구체적으로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러난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공손함, 관용, 신뢰, 영민, 은혜, 존경, 충성 등의 덕목을 실천함으로써 인간관계를 잘 맺는 것이다. 이러한 인애는 “인으로써 정치를 하면 천하를 얻을 수 있다”라는 맹자의 인정사상仁政思想으로 발전했다. 이른바 인의와 인학이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인간학의 일부다. 공자가 주장한 인애는 사람에게는 마땅히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억지로 시키지 말아야 한다(己所不欲 勿施於人)”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사회에 가장 기본이 되는 도덕률이 되었다.
맹자
맹자는 전쟁으로 매우 혼란한 시대에 태어났다. 그는 세상을 구하고 유학의 도통을 지켜나가기 위해 공자의 사상을 이어받았다. 그리하여 완전한 인정사상 체계를 구축했다. “궁핍할 때는 홀로 깨우침을 얻기에 힘쓰고, 깨우침을 얻었을 때는 세상에 나가 좋은 일을 한다”, “돈과 권력을 가졌으면서도 음탕하지 않은 사람, 가난하면서도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 폭력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는 사람”(『맹자』 「슬문공하膝文公下」) 등 사람됨의 정신을 내세워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고, 공자 다음의 ‘아시아의 성인(亞聖)’으로 추앙받았다.
맹자는 추鄒나라에서 태어나 제나라에 오래 머물렀다. 유학사상의 계승자였으나 다른 사상이나 문화에도 개방적인 태도를 취했다. 맹자는 제나라 문화의 새로운 내용들을 많이 흡수하여 공자의 인학사상을 인정사상으로까지 발전시켰다. 이는 통치자와 최고 지도자는 인애의 마음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인정을 실시해야 한다는 견해로 유학사상을 한층 진보시킨 것이다. 맹자는 공자의 예치禮治와 덕정德政 사상을 발전시켜 왕도를 제창하고 인정을 주장했다. 그는 또한 공자의 정신인 “내가 하고자 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억지로 시키지 말아야 한다”라는 점을 중시하여 천하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고, 즐거워하는 것을 천하와 함께 즐거워하며, 근심하는 것을 천하와 함께 근심한다는 현자의 처세를 강조했다. 백성이 즐거워하는 것을 즐거워하면 백성들 또한 윗사람의 즐거워함을 함께 즐거워하고, 백성의 근심을 걱정하면 백성들 또한 그 윗사람의 근심을 함께 걱정한다. 천하가 다같이 즐거워하는 것을 함께 즐거워하고, 천하가 다같이 근심하는 것을 함께 걱정한다. 그렇게 하고서도 왕 노릇을 하지 못할 사람이란 없다(『맹자』 「양혜왕하梁惠王下」). 이 사상을 놓고 맹자는 제나라 통치자와 여러 차례 토론을 벌여 설파했고 결국 인정사상이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다. 맹자가 말한 왕도는 덕으로 인을 행하는 것이다. 그는 “인정을 행하여 왕 노릇을 하면 능히 막을 자가 없을 것이다”(『맹자』 「양혜왕하」)라고 했다. 즉 인정으로 천하를 통일하는 것을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는 성선설에 입각하여 인정을 주장했다. 성선설에서 강조하는 것은 자연의 속성이 아닌 사회 속성으로서의 인성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가치를 긍정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추구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등 이상주의 색채가 농후하다. 이처럼 맹자는 독특한 가치를 지향하는 유학자의 길을 걸었다. 그의 경험과 사상 역시 다른 사상과 교류했기 때문에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순자
순자는 본래 제나라 사람은 아니었지만 제나라에서 오랜 기간 머무르며 유학했다. 그는 맹자 다음으로 유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순자는 유학을 근본으로 제자백가8 의 사상, 문화와 교류하여 장점을 받아들여 마침내 제자백가 학설을 집대성한 사람이 되었다. 순자의 사상은 2천여 년 동안 중국 봉건사회에 넓고 깊은 영향을 미쳤다.
기원전 266년에서 기원전 255년 사이에 순자가 진나라로 가서 소왕昭王을 만났다. 소왕은 선비가 나라에 어떤 유익함을 주느냐고 순자에게 물었다. 그러자 순자가 대답했다.
“선비란 옛 임금을 본받고 예의를 존중할 줄 알며 신하의 도리를 행함으로써 윗사람을 귀하게 합니다. 임금이 선비를 등용하시면 곧 조정의 실세를 잡아 모든 일을 합당하게 할 것이고, 등용하지 않으시면 백성들 틈에 섞여 성실히 지내면서 순종할 것입니다. ……선비가 조정에 있으면 정치가 아름다워지고, 낮은 지위에 있으면 풍속이 아름다워지는데 선비가 사람들의 아래에 있어도 이와 같습니다.”
소왕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사람들 위에 있으면 어떠합니까?”
“그가 윗사람이 되면 그 공덕은 광대해집니다. 안으로는 견고하게 안정되며, 조정에서는 예절이 잘 닦이고, 관아에서는 법칙이나 도량형이 바로 서게 됩니다. 또 아래에서는 충성, 믿음, 사랑, 이로움이 나타나서 불의를 행하고 죄 없는 사람을 죽여 천하를 얻으라고 해도 하지 않습니다. 이는 임금의 의리를 사람들이 믿고, 온 세상에 통해서 천하가 떠들썩하게 응해 오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무엇 때문인가 하면 귀한 이름이 명백하게 드러나 천하가 다스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까이 있는 자들은 노래 부르며 즐거워하고, 멀리 있는 자들은 넘어지면서도 달려옵니다. 온 세상이 한 집안 같아서 모든 족속이 따르며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무릇 이러한 사람을 일러 사람의 스승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경』 「대아大雅」의 문왕유성 편에서 이르기를 “서쪽에서 동쪽, 남쪽에서 북쪽에 이르기까지 복종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네”라고 했는데 이는 사람의 스승을 두고 이른 것입니다. 무릇 사람의 아래가 되어서도 그와 같고, 사람의 위가 되어서는 이와 같은데 어찌 사람의 나라를 유익하게 하는 일이 없다고 하겠습니까!”(『순자』 「유효儒效」)
순자가 제나라로 갔을 당시 제나라는 제왕 건建이 왕위에 있었지만 조정을 군왕후가 통제하고 있었다. 순자는 제나라 재상에게 진언하여 제나라의 대내외 정세를 설명하고 “인후명통9 한 군자를 구해 군왕을 보좌하는 일을 맡기고 그들과 더불어 참정하여 시비를 판단하면 나라 안의 그 누가 감히 의로운 일을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군왕의 후비들이 궁중을 더럽히고 간신이 조정을 혼란스럽게 하며 탐관오리가 관청을 어지럽
힌다”라고 정치의 폐단을 비판했다. 그 결과 “제나라 사람이 순자를 모함하여 순자는 초나라로 갔다.”(『사기』 「맹자순경열전孟子筍卿列傳」) 순자는 초나라 난릉에서 벼슬을 지냈지만 역시 순탄치 못했다. 벼슬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사람이 순자를 임명한 춘신군에게 순자를 모함했고 그는 어쩔 수 없이 초나라를 떠나 다시 조나라로 돌아가야 했다.
고향에서 순자는 상경上卿(정1품이나 종1품의 판서)에 임명되었고 비교적 높은 예우를 받았다. 제나라 도성에 명성이 자자한 직하학궁10 에서 그는 세 번이나 제주11 가 되었고 그중 가장 연장자였다. 순자는 직하학궁에서 많은 학자들을 양성했다. 이 학궁은 오늘날의 고등 교육기관과 비슷하지만 단순한 대학이 아니라 대학원의 성격을 띠는 학교로, 대학과 사회과 학원을 합쳐 놓은 것과 비슷하다. 맹자, 순자 등 많은 대가들이 모두 여기 출신이다. 구류십가12 또는 백가쟁명이라 불리는 주요 유파들 역시 직하학궁으로 모여들었다. 순자는 직하학궁의 실질적인 최고 직책의 자리에서 많은 사상가들을 양성했으며 직하학궁은 그의 제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순자는 유학을 왕도와 패도13 가 함께 중시되는 단계로까지 발전시켰다. 순자의 사상은 제나라 문화 속에 침투되어 있던 도가사상과 법가사상을 많이 흡수했지만 본질적으로 공자의 사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처럼 세 명의 원시 유가 성인들 사이에서도 미세한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차이는 사상과 문화의 교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원시 유가 시기에 사상과 문화 교류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학의 시초인 공자는 도가의 시초인 노자에게 예를 물었고, 맹자는 제나라 직하학궁에서 순어곤과 함께 연구하고 토론하는 등 절차탁마했다. 순자 역시 직하에서 백가의 학문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교류 때문에 유학은 처음부터 활력을 잃지 않고 공자의 인학이 맹자의 인정으로, 다시 순자의 왕도와 패도로 끊임없이 발전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