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왈 vs 예수 가라사대(도서출판 지와 사랑)

 

 

 

 

종파를 넘어선 교회일치운동

 

개신교의 많은 교파들이 종교 박해와 차별에 맞서 싸워 마침내 종교의 자유를 얻어냈다. 이 과정은 네덜란드 혁명과 청교도 혁명의 기점이 된 유럽과 미국의 사회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영국 청교도들은 박해를 받았지만 혁명을 일으켜 1688년에 모든 교파의 권리는 평등하다는 원칙을 이끌어내고 고대하던 신앙의 자유를 공인받았다. 유럽은 16세기부터 개신교의 교파들에게 합법적 권리를 부여했다. 북아메리카에서는 신앙의 자유를 위해 식민지를 개척했고, 모든 교파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한다는 내용을 건국 이념에 포함시켰다. 16세기 후반부터 북아메리카의 개신교에서는 장로교, 회중파교40 , 침례교41 , 감리교, 퀘이커교42 등을 비롯한 새로운 교파가 오늘날까지도 계속 생겨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경건주의운동, 대각성운동, 기독교 사회주의운동, 사회 복음주의운동, 근본주의운동에서부터 20세기에 일어난 교회일치운동에 이르기까지 각종 종교 운동이 일어났다. 신학에도 각종 학파들이 형성되었다. 17세기 이후의 이성주의, 낭만주의, 관념주의, 자유주의, 신정통주의, 실존주의, 경험주의, 기독교 현실주의, 과정신학, 세속신학, 희망신학 등이 주요 학파들이다.
16세기 이후 동방정교회는 러시아에서 지위가 점차 높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차르43 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17세기에는 교례와 의식을 개혁했으며, 18세기에는 표트르 1세가 교구제를 폐지하여 총대주교구 제도로 대체했다. 19세기 이후에는 동방정교회에 속한 각 국왕들이 연이어 독립 교회를 형성하여 각 나라의 정교회가 서로 구속하고 지배하는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의 흐름이 되었다.
근대 기독교는 유럽에서 각 대륙으로 뻗어나가 모든 나라에 전파되었다. 20세기부터 각 나라의 기독교에서는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려는 교회자립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종파를 넘어 교회일치를 실현하기 위한 연합운동이 세계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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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를 읽고 장자에게 배운다』 중에서

 

 

 

 

이득과 손해 사이의 저울질

실제로 매우 구체적인 일들에서 이득과 손해를 따져볼 수 있다. 예를들어 이런 점은 유익하고 저런 점은 해롭고, 몇 퍼센트 이득이고 몇 퍼센트 손해인지 등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이익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실제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다. 유가에서는 수단의 정당성을 강조한다. 반면 도가에서는 전체적인 동향을 강조해 운명을 거론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어떤 때는 삶이 시류에 그냥 함께 휩쓸려 간다. 개혁개방 30년 이래 중국 경제는 눈부신 발전을 거뒀다. 이것은 개인의 힘이 아닌 시대의 힘이요, 개혁개방이라는 정책을 선택한 덕분이었다. 개혁개방 이전에는 개인 혼자서 아무리 노력해도 개혁개방 후와 같은 성과를 얻을 수 없었다. 시대의 차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대적 조류의 비중은 과연 얼마나 되며 그 속에서 개인은 얼마만큼의 이익을 거머쥘 수 있을까? 설사 다른 사람이 당신 앞에 놓인 이득을 보았다고 해도 그것이 반드시 당신 것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유가에서는 이익을 보면 그것을 취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생각하고 했다. 맹자는 여러 나라를 다니며 가르침을 펴는 것을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지, 그것이 자신의 이익으로 이어져서 한 건 아니었다. 유가에서는 벼슬을 해서 백성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국시대 중기, 장자는 유가의 가르침과 달리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해 자기 삶의 행복을 찾는 이들을 더 많이 목격했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백성에게는 재난이 된다. 이는 사람들이 멀리 내다보는 안목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도가의 가르침을 배워 전체를 보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장자는 조삼모사朝三暮四의 고사로 이를 설명했다.
어떤 사람이 원숭이를 키웠다. 하루는 사료값이 부족했는지 원숭이들과 상의를 했다. 앞으로는 사료로 주는 밤을 아침에 석 되, 저녁에 넉 되를 주겠다며 그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그랬더니 원숭이들이 모두 화를 내며 싫다고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바꿔서 아침에는 넉 되, 저녁에는 석 되를 주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모두 좋아하며 승낙하는 것이 아닌가.
장자가 이 우화를 들려준 의도는 무엇일까? 원숭이가 셈에 약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였을까? 아침에 석 되, 저녁에 넉 되이면 모두 일곱 되이고 아침에 넉 되, 저녁에 석 되여도 모두 일곱 되이다. 단지 분배하는 방법이 달라졌을 뿐이다. 그렇다면 왜 원숭이들은 처음 제안에는 불같이 화를 내고 나중 제안은 흔쾌히 받아들였을까? 간단하다. 원숭이가 속은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원숭이보다 좀 나을까? 인생을 조삼모사에 빗대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젊었을 때에 고생을 좀 하더라도 중년 이후에 형편이 나아지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즉 젊은 시절에는 3을, 늙어서는 좀 더 많은 4를 얻는 것이다. 반대로 조사모삼朝四暮三은 어떨까? 젊은 나이에 성공하여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늙어서는 젊었을 때보다 조금 쇠락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대개 후자를 더 원한다. 먼저 조금이라도 더 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다들 중요한 점을 잊고 있다. 어떻게 되든 총합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
인생을 긴 안목으로 보자. 평생 얼마를 얻고 얼마를 잃든, 결국 그 총합은 비슷하다. 당신이라면 초기에 많이 가졌지만 나중에 적게 갖는 쪽과 반대로 초기에는 좀 부족했지만 나중에 풍족해지는 쪽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선택은 자유다. 하지만 명심할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총합은 같다는 사실이다.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내 친구 중 한 명은 젊었을 때 일찍이 자신의 뜻을 펼쳤는데 늙어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친구의 경우 먼저 4를 갖고, 나중에 또 4를 얻었으니 혼자서 온 이득을 다 챙긴 셈이다. 정말로 이런 사람이 있을까? 당연히 있다. 그렇지만 많지는 않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이 더 행복할까? 그것은 알 수 없다. 한 사람이 순탄한 인생을 살았다고 하면 그는 자신의 시간과 노력 그리고 정신 이 모든 것을 외부 세계와 교류하는 데에 소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은 평생 다른 사람과의 교류에만 바빠 정작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시간은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평생 순탄하지 못한 삶을 사는 사람도 있다. 즉 처음에도 3, 나중에도 3밖에 얻지 못하는 삶이다. 젊어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늙어서도 형편이 그다지 나아지지 않는다면 참 억울할 노릇이 아닌가? 하지만 따지고 보면 억울해 할 일도 아니다. 이럴 경우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시간이 더 많이 주어지고 자기수련과 성장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바로 이것이 삶의 가치를 결정해준다.
이번 장에서는 이해관계를 논하면서 본래 상대적인 개념으로만 인식했던 이득과 손해가 사실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살펴보았다. 지금 당장 눈앞의 큰 이득을 취하기 위해 작은 손해를 감수한다거나, 혹은 당장의 작은 이득이 나중에 큰 화를 초래한다거나 하는 등 여러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 모두는 전체적으로 따져봐야 할 문제들이다. 작게는 인간의 일생도 하나의 총체이고, 크게는 우주도 하나의 총체이다. 도가에서는 물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들이 서로 따지지 않는 것처럼 어떤 이해관계에도 흔들리지 말라고 말한다. 남에게 일어난 일을 나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 이것이 도가의 높은 경지 중 하나다.

 

 

저자소개: 푸페이룽 傅佩榮
1950년에 태어난 푸페이룽은 타이완대학 철학대학원 석사, 미국 예일대학 철학박사이다. 타이완대학 철학과 학과장 및 철학대학원 원장을 역임하였으며 벨기에대학, 네덜란드 레이던대학 객원교수이기도 하다. 현재는 타이완대학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푸페이룽은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말솜씨를 가진 교수로, 타이완 『민생보民生報』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학교수로 선정되었다. 뿐만 아니라 타이완 교육부에서 수여하는 우수 교육자상, 『성공한 인생成功人生』으로 타이완 문화예술 분야 국가문예상, 『천론에 대한 유가와 도가의 해석儒道天論發微』으로 중정中正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현재까지 타이완에서 백 권이 넘는 책을 출간하는 등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특히 전통 경전 연구에 몰두하여 기존의 이론이나 고정관념을 탈피한 독창적인 견해를 내놓고 있다. 온고지신의 정신으로 『논어』, 『맹자』, 『노자』, 『장자』, 『역경』 등을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였으며 학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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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왈 vs 예수 가라사대(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세에 유럽 전역으로 전파된 기독교

 

중세에 가톨릭교회에서 수도회 제도를 만들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안토니우스가 처음으로 수도주의Monasticism를 제창했고 이후 수도회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면서 규칙도 제정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기강이 해이해졌고 결국 10세기 클루니 수도회에서 개혁운동이 일어나 수도회 조직을 정비하고 강화했다. 13세기에 프란체스코 수도회와도미니크 수도회가 주축이 된 탁발수도회38 역시 수도회 조직을 정비하고 강화하는 혁신운동을 펼쳤다. 16세기에는 예수회를 비롯한 새로운 수도회가 출현했고 수도사들이 사회 각계각층에서 활동했다. 수도회와 수도사들은 황무지를 개척하여 농사를 짓거나 상업, 금융, 문화, 교육, 학술 등과 관련된 일에 종사했으며 심지어 정치 활동도 했다. 이러한 모습은 유럽 역사에서 독특한 사회현상으로 유럽 사회를 지탱해온 큰 힘이라고도 할 수 있다.
스콜라철학을 바탕으로 한 교육도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중세 수도회에는 고대 문헌들이 많이 보존되어 있었으며 그 덕분에 교회와 수도회를 중심으로 문화, 교육, 과학, 학술 활동 등이 활발히 일어날 수 있었다. 수도회는 많은 저술가와 과학자들을 배출했다. 뿐만 아니라 교회와의 긴밀한 교류로 예술이 발전하기 시작했고 수도회가 운영하는 대학교도 만들어져 스콜라철학을 바탕으로 한 신학이론이 형성되었다. 이때 안셀무스, 토마스 아퀴나스, 피에르 아벨라르, 로저 베이컨과 같은 사상가들이 출현했고 이는 인류 사상의 보고를 형성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중세에는 기독교가 로마제국에서 유럽 전체로 전파되었다. 16세기 초 마르틴 루터를 중심으로 한 종교개혁을 시작으로 스위스와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장 칼뱅 추종파와 헨리 8세의 개혁운동을 거쳐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프랑스, 북유럽의 여러 나라들로 번져나갔다. 불씨처럼 번져나간 종교개혁운동으로 루터교와 개혁교회, 성공회를 비롯하여 로마 교황청을 이탈한 새로운 교파가 형성되었다. 이는 기독교 3대 교파 중 하나로 중국에서는 신교라 부른다. 이때부터 가톨릭교회, 동방정교회 그리고 개신교(프로테스탄트교회) 세 교파가 대등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훗날 개신교에서는 더 많은 교파들이 생겨났고 그 교파들은 유럽 및 미국의 역사와 자본주의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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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멘 하라의 『일체감이 주는 행복』(도서출판 知와 사랑)

부제: 나를 치유하는 신성한 연결고리

 

 

과거로부터의 회복과 갱생

 

나를 임신했을 때, 엄마는 오페라 ‘카르멘’을 보고 집시 소녀 카르멘을 연기한 배우에게 완전히 매혹되었다. 그리고 엄마는 만약 딸을 낳게 된다면 이름을 카르멘으로 지으리라 작심했다고 한다. 어릴 적에 엄마는 그 이야기를 해주며 내 모습이 오페라에서 본 바로 그 카르멘과 똑같다고 주장했다. 엄마도 내가 언젠가는 가수가, 오페라 가수가 되리라 예감했던 것일까? 내 생각에 엄마는 무의식적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에 존재하는 내 영혼의 과거를 감지했던 게 아닐까 싶다. 나 또한 그런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던 것 같다. 어릴 적 천식에도 불구하고 나는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으며, 커서 유명해져 텔레비전에 나오겠다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곤 했다. 그리고 음악 경연 대회에 나가 상을 받고 10대 초반부터 오페라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나는 내 운명에 대해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었다. 전생에 무대에 선 나의 모습이 섬광처럼 지나간 적도 있다. 결국 나는 16세에 처음 음반을 녹음했으며, 유럽의 텔레비전 쇼에 나가 대중가요와 로큰롤을 불렀지만, 그래도 항상 오페라에 끌렸다.

많은 이들은 자신의 숨겨진 재능이나 운명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먼 과거의 감추어진 기억들을 안고 살아간다. 그런 기억들은 어떤 이미지나 촉감 혹은 다른 여러 감각에 의해 살아난다. 동물을 지극히 아끼는 마음에 자신이 전생에 동물 관련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든 적이 없는가? 혹은 프랑스에 한 번도 가본 적 없고 프랑스와 아무런 인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 강렬한 애착을 느끼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의 영혼이 전생의 경험이나 관심사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신호일 수 있다. 시간의 순환적 본성 덕에, 당신은 해결되지 않은 업을 풀고 특정한 사람들과의 소중한 인연과 즐거움을 누릴 기회를 얻게 된다. 과거의 삶은 항상 당신의 일부로 존재하며, 환생을 통해 되살아난다.

나는 최면술이야말로 잊어버린 개인의 과거를 되살릴 놀라운 기술이 아닐까 생각한다. 불균형의 뿌리인 무의식으로 들어가서 기억을 되돌아봄으로써, 나쁜 습관을 고치고 공포증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과거에 당신이 가난하고 굶주리게 살았다면, 그에 대한 두려움으로 지금 과식하는 습관이 생겼을 수 있다. 또한 비이성적인 행동의 기원을 전생에서 발견하게 되면 그런 비이성적인 행동이 이해가 될 것이며, 당신의 에너지 영역에 남아 있는 트라우마를 해방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자신에 대해 전체적으로 더 깊이 성찰하기만 원한다 할지라도, 나는 전생을 돌아볼 기회를 제공하는 최면술을 권하고 싶다. 최면술을 통해 당신은 자신이 의식하지 못했던 재능을 기억해낼지도 모르고, 숨겨진 열정을 찾아내어 새로이 추구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을지도 모른다.

영화에서는 종종 최면에 빠지면 완전히 잠들어버리기도 하는데, 결코 그렇지는 않다. 최면 상태에서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의식할 수 있다.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지 않으면 아무도 최면을 걸 수 없으며, 자신의 현재 상태를 자각함과 동시에 최면 상태에서 본 것을 이후에도 기억할 수 있다. 당신이 비록 고통스러운 기억을 되살린다 하더라도, 훌륭한 치료사이자 최면술사라면 괜찮다고, 당신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은 단지 기억일 뿐이라고 안심시킬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당신의 업은 표면으로 떠올라 해방될 수 있다. 생을 거듭할 때마다 따라다니는 업의 자취는 간혹 곤혹스러울 수도 있다.

내 인생에서도 이 같은 경험이 있었다. 남편은 예술품 중개인이었다. 남편은 구입한 미술품이나 도자기 혹은 고가구 등을 모조리 집으로 가져와 보관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집 창고는 19세기 그림 등 골동품으로 가득 찼다. 버질이 병에 걸리기 훨씬 전인 어느 날 밤, 나는 거실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잠에서 깼다. 계단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간 나는 거실에 서 있는 한 여인을 보았다. 빅토리아풍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붉은 머리에 안색이 창백했다. 나는 그 아름다운 유령에게 물었다. “누구세요?”

여인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 이름은 줄리아예요. 그 사람을 당신과 살게 내버려둘 수 없어요. 그 사람은 내 남편이었으니 내게로 와야 해요.”

“누구 말이죠?”

나는 어떤 대답이 나올지 두려웠으나 그 유령에게 물었다. 유령은 나를 똑바로 보며 대답했다. “버질.” 그 말과 함께 여인은 사라졌다. 몇 년 후 한밤중에 나는 버질이 자면서 투덜거리는 소리에 놀라 일어났다.

“나한테서 원하는 게 뭐지? 싫어, 날 그냥 내버려둬요, 줄리아.”

그 말을 끝으로 버질은 잠에서 깨었다.

“누구랑 얘기했어요?”

“누구냐 하면, 줄리아라고. 그런데 누군지 모르겠어.”

버질이 말했다.

“그녀에 대한 꿈을 가끔씩 꾸는데 나한테 언제나 자기 곁으로 오래.”

나는 머리털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생긴 여자예요?”

버질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붉은 머리 여자인데, 다른 시대에서 온 것 같았어. 빅토리아 시대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어.”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한 달 정도 지나 창고에 쌓인 골동품을 정리했다. 그러다가 19세기 그림을 한 점 발견하고 그야말로 비명을 질렀다. 딸이 내 비명을 듣고 달려올 정도였다.

“무슨 일이에요? 엄마가 비명을 지른 거예요?”

“이걸 봐.”

나는 그림을 딸에게 보여주었다. 딸도 나만큼 놀란 모습이었다. 그림 속에는 숱이 많은 갈색 머리와 눈썹 그리고 수염을 기른 남자가 서 있었다. 빛나는 갈색 눈동자와 두툼한 입술까지 영락없이 버질과 똑같았다. 만약 그 초상화가 버질이 태어나기 100년 전에 그려진 것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림 속 인물이 버질이 틀림없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 남자 곁에는 줄리아와 똑같이 생긴 창백하고 붉은 머리의 여인이 서 있었다.

이렇듯 우리의 영혼은 전생의 기억을 담고 있으며,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단지 현재밖에 볼 수 없기는 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현생을 인정함으로써 우리 영혼이 거쳐온 온전한 경험들을 제한하고 있다. 이번 생이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다시 생각해보라. 지금 이 순간 당신은 영혼의 수많은 순환 주기 중하 나를 지나고 있을 뿐이다.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카르멘 하라 박사는 '더 뷰The view', '굿모닝 아메리카Good morning America', '투데이 쇼Today show' 그리고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 [뉴욕 포스트The New York Post]를 비롯한 미국의 텔레비전 쇼와 언론 매체에 출연하는 유명 인사이며 심리치료학자다.

할리우드 스타에서부터 저명한 정치인들까지 그녀를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다년간의 경험을 통한 부부 치료나 인지치료 방식이 그녀의 신비한 직관력과 합쳐져 그녀는 세계적인 상담사로 발돋움했다. 또한 세 장이나 음반을 낸 재능 있는 음악가이며, 자신만의 고유한 보석을 디자인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홈페이지 www.CarmenHarra.com과 페이스북 carmen Harra- (Wholeliness)를 방문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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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왈 vs 예수 가라사대(도서출판 지와 사랑)

 

 

 

 

로마제국에서 영향력이 강화된 교회

 

초기에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탄압을 받았다. 그래서 신앙을 지키려던 많은 사람들이 순교했으나 이 때문에 오히려 크리스천이 많아지고 추종자들이 늘어났다. 심지어 사회 상류층, 특히 황실 사람들도 크리스천으로 개종했다. 교회의 힘이 곳곳에서 점차 커져갔고 의례와 관리가 체계를 잡아가기 시작하여 주교를 대표로 하는 교계제가 확립되었다. 또한 각 교회에 전파된 여러 종류의 성경을 한데 모아 신학자들이 번역하고 정리했다. 이는 경전의 기준을 세우고 권위를 갖춘 번역본을 만들기 위한 토대가 되었다. 이때 유명한 저술가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교부로 불렸으며, 그리스철학을 받아들여 기독교 신학을 더욱더 체계적이고 정밀하게 서술했다. 이를 통해 후대 신학과 교리가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기독교는 점차 고대문화를 대신할 수 있을 정도로 영향력이 커졌다.
교회는 3세기 동안 고군분투하며 영향력을 계속 키워간 반면, 로마제국은 내부의 권력 갈등으로 상황이 계속 악화되고 있었다. 마침내 로마 황제는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여 기독교도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자유를 누리고 차별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승인했고, 392년에는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했다. 이로써 서양에서 기독교는 비합법에서 합법, 나아가 국교로 승인받는 역사적 순간을 맞았다.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은 정치와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분열했다. 기독교 역시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부 지역 교회와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부 지역 교회 사이에 반목과 대립이 나날이 심해졌다. 로마는 현실적인 요구 때문에 정교합일 정권을 수립했다.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교황의 정치적 지위가 높아지고 정치, 경제, 사회에서 교회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8세기 프랑크왕국의 피핀 왕은 교황과 제휴하여 정교합일 통치를 시작했고 이 통치 형태가 천여 년 동안 지속되었다. 9세기에는 샤를마뉴가 왕위에 오를 때 교황에게 왕관을 받아 써, 반드시 교황의 승인을 받아야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관례를 남겼다. 서부 교회는 교황을 필두로 서유럽 전체의 정신문화를 통제했고 정치, 경제, 사회 등 다방면에서 세속 정치권력과 겨룰 수 있는 힘을 갖추게 되었다. 그래서 서유럽에서 왕권은 오랫동안 교권의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정치적으로 여러 권력이 병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훗날 서양의 역사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반면 동로마에서 교황의 권력은 줄곧 강화되었으나 교회는 오랫동안 세속 정치권력의 통제를 받았다. 로마 교황은 사도의 우두머리인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자칭하며 모든 교회의 수장으로 대할 것을 요구했다. 동부교회는 오랫동안 로마 가톨릭교회를 대등한 위치에 두고 예로써 대했지만 교리와 의식에서는 다소 차이가 났다. 이러한 차이는 결국 1054년 교황과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가 서로 갈라서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서부 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로, 동부 교회는 동방정교회로 분열되었다. 중세에는 기독교 세력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13세기 초, 로마 가톨릭교회의 세력이 최고조에 달하면서 서유럽 나라들의 군주들은 교황에게 신하로서 공물을 바칠 수밖에 없었다. 교회는 성지수복이란 명의로 십자군전쟁 을 여덟 차례나 일으켰고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국가 군주가 대군을 이끌고 직접 전쟁에 참여했다. 13세기 말에는 교황과 프랑스 국왕이 전쟁을 일으켰다. 이 싸움에서 교황이 패하여 프랑스에 한 차례 머리를 조아렸고 이 일을 계기로 14세기에는 아비뇽의 교황청과 로마의 교황청이 병존하게 되었다.
15세기 초에는 교황 세 명이 대등한 힘을 과시하는 국면을 초래했는데 이는 교황청의 위신을 크게 떨어뜨렸다. 16세기 가톨릭교회는 종교개혁 운동에 맞서 가톨릭교회 혁신운동을 펼쳤다. 개신교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신앙규범을 확정하고 교회 제도를 개혁했다. 그리고 예수회를 설립하여 영향력의 확대를 꾀했으나 각 민족국가의 견제 속에서 교황청의 권력은 서서히 쇠락해갔다. 17세기 프랑스의 가톨릭교회는 쟝세니즘33 과 갈리카니슴의 분쟁으로 분열했다. 18세기 로마 교황청(바티칸 시국)은 나폴리의 침입을 받았고 19세기에는 이탈리아가 전개한 통일운동으로 점점 더 몰락해 갔다. 로마 교황청은 1929년 라테란협정35 으로 바티칸 시국에 대한 주권을 겨우 승인받았다.
1870년 가톨릭교회는 마리아는 원죄 없이 태어났다는 무염시태無染始胎설과 교황의 교리적 선언에 오류가 없다는 무류無謬설과 관련된 조항을 교리로 제정하여 사상통제를 강화했다. 그러나 1960년대에는 기존의 보수주의 방침을 바로잡아 내부에서는 혁신을, 외부에서는 대화를 강조하여 새로워진 면모를 보여주었다. 9세기 동방정교회는 동유럽 여러 나라에서 발전하기 시작하여 러시아를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잇달아 국교로 삼았다. 11세기 동로마제국(혹은 비잔티움제국)은 쇠퇴의 길을 걸었다. 11세기 말에서 12세기까지 가톨릭 십자군은 동로마제국의 영토를 경유하여 동유럽을 정벌했다. 13세기 초에는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동방정교회의 집정 관할구역 중 네 곳을 강제 철거했다. 네 곳 중 두 곳이 이슬람교의 점령지가 되었고, 한 곳을 십자군이 점령했다. 15세기 초, 터키의 오스만제국은 동로마제국을 위협하여 플로랜스 공의회The Council of Florence에서 콘스탄티노플 교구를 로마 교구에 소속시킬 것과 로마 교황의 지휘권을 인정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동방정교회 내부에서 격렬한 반대가 일어나 이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네 곳의 교구 모두 수단의 보호를 받아야 할 신세로 전락했다. 이때부터 콘스탄티노플 교구는 동방정교회에서 가장 의미 있는 교구라는 상징만 남고 실제로는 이슬람교의 지배를 받는 교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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