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왈 vs 예수 가라사대(도서출판 지와 사랑)

로마제국에서 영향력이 강화된 교회
초기에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탄압을 받았다. 그래서 신앙을 지키려던 많은 사람들이 순교했으나 이 때문에 오히려 크리스천이 많아지고 추종자들이 늘어났다. 심지어 사회 상류층, 특히 황실 사람들도 크리스천으로 개종했다. 교회의 힘이 곳곳에서 점차 커져갔고 의례와 관리가 체계를 잡아가기 시작하여 주교를 대표로 하는 교계제가 확립되었다. 또한 각 교회에 전파된 여러 종류의 성경을 한데 모아 신학자들이 번역하고 정리했다. 이는 경전의 기준을 세우고 권위를 갖춘 번역본을 만들기 위한 토대가 되었다. 이때 유명한 저술가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교부로 불렸으며, 그리스철학을 받아들여 기독교 신학을 더욱더 체계적이고 정밀하게 서술했다. 이를 통해 후대 신학과 교리가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기독교는 점차 고대문화를 대신할 수 있을 정도로 영향력이 커졌다.
교회는 3세기 동안 고군분투하며 영향력을 계속 키워간 반면, 로마제국은 내부의 권력 갈등으로 상황이 계속 악화되고 있었다. 마침내 로마 황제는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여 기독교도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자유를 누리고 차별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승인했고, 392년에는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했다. 이로써 서양에서 기독교는 비합법에서 합법, 나아가 국교로 승인받는 역사적 순간을 맞았다.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은 정치와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분열했다. 기독교 역시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부 지역 교회와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부 지역 교회 사이에 반목과 대립이 나날이 심해졌다. 로마는 현실적인 요구 때문에 정교합일 정권을 수립했다.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교황의 정치적 지위가 높아지고 정치, 경제, 사회에서 교회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8세기 프랑크왕국의 피핀 왕은 교황과 제휴하여 정교합일 통치를 시작했고 이 통치 형태가 천여 년 동안 지속되었다. 9세기에는 샤를마뉴가 왕위에 오를 때 교황에게 왕관을 받아 써, 반드시 교황의 승인을 받아야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관례를 남겼다. 서부 교회는 교황을 필두로 서유럽 전체의 정신문화를 통제했고 정치, 경제, 사회 등 다방면에서 세속 정치권력과 겨룰 수 있는 힘을 갖추게 되었다. 그래서 서유럽에서 왕권은 오랫동안 교권의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정치적으로 여러 권력이 병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훗날 서양의 역사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반면 동로마에서 교황의 권력은 줄곧 강화되었으나 교회는 오랫동안 세속 정치권력의 통제를 받았다. 로마 교황은 사도의 우두머리인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자칭하며 모든 교회의 수장으로 대할 것을 요구했다. 동부교회는 오랫동안 로마 가톨릭교회를 대등한 위치에 두고 예로써 대했지만 교리와 의식에서는 다소 차이가 났다. 이러한 차이는 결국 1054년 교황과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가 서로 갈라서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서부 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로, 동부 교회는 동방정교회로 분열되었다. 중세에는 기독교 세력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13세기 초, 로마 가톨릭교회의 세력이 최고조에 달하면서 서유럽 나라들의 군주들은 교황에게 신하로서 공물을 바칠 수밖에 없었다. 교회는 성지수복이란 명의로 십자군전쟁 을 여덟 차례나 일으켰고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국가 군주가 대군을 이끌고 직접 전쟁에 참여했다. 13세기 말에는 교황과 프랑스 국왕이 전쟁을 일으켰다. 이 싸움에서 교황이 패하여 프랑스에 한 차례 머리를 조아렸고 이 일을 계기로 14세기에는 아비뇽의 교황청과 로마의 교황청이 병존하게 되었다.
15세기 초에는 교황 세 명이 대등한 힘을 과시하는 국면을 초래했는데 이는 교황청의 위신을 크게 떨어뜨렸다. 16세기 가톨릭교회는 종교개혁 운동에 맞서 가톨릭교회 혁신운동을 펼쳤다. 개신교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신앙규범을 확정하고 교회 제도를 개혁했다. 그리고 예수회를 설립하여 영향력의 확대를 꾀했으나 각 민족국가의 견제 속에서 교황청의 권력은 서서히 쇠락해갔다. 17세기 프랑스의 가톨릭교회는 쟝세니즘33 과 갈리카니슴의 분쟁으로 분열했다. 18세기 로마 교황청(바티칸 시국)은 나폴리의 침입을 받았고 19세기에는 이탈리아가 전개한 통일운동으로 점점 더 몰락해 갔다. 로마 교황청은 1929년 라테란협정35 으로 바티칸 시국에 대한 주권을 겨우 승인받았다.
1870년 가톨릭교회는 마리아는 원죄 없이 태어났다는 무염시태無染始胎설과 교황의 교리적 선언에 오류가 없다는 무류無謬설과 관련된 조항을 교리로 제정하여 사상통제를 강화했다. 그러나 1960년대에는 기존의 보수주의 방침을 바로잡아 내부에서는 혁신을, 외부에서는 대화를 강조하여 새로워진 면모를 보여주었다. 9세기 동방정교회는 동유럽 여러 나라에서 발전하기 시작하여 러시아를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잇달아 국교로 삼았다. 11세기 동로마제국(혹은 비잔티움제국)은 쇠퇴의 길을 걸었다. 11세기 말에서 12세기까지 가톨릭 십자군은 동로마제국의 영토를 경유하여 동유럽을 정벌했다. 13세기 초에는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동방정교회의 집정 관할구역 중 네 곳을 강제 철거했다. 네 곳 중 두 곳이 이슬람교의 점령지가 되었고, 한 곳을 십자군이 점령했다. 15세기 초, 터키의 오스만제국은 동로마제국을 위협하여 플로랜스 공의회The Council of Florence에서 콘스탄티노플 교구를 로마 교구에 소속시킬 것과 로마 교황의 지휘권을 인정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동방정교회 내부에서 격렬한 반대가 일어나 이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네 곳의 교구 모두 수단의 보호를 받아야 할 신세로 전락했다. 이때부터 콘스탄티노플 교구는 동방정교회에서 가장 의미 있는 교구라는 상징만 남고 실제로는 이슬람교의 지배를 받는 교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