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행복 이해하기

 

행복을 가로막는 주된 장애는 행복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특정한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특정한 인생의 목표를 달성하기 전까지는 행복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미래 지향적인 사고방식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기보다는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더욱이 지금 당장 행복하지 않으면서 다가올 행복만을 기다린다면, 행복은 점점 더 먼 미래로 멀어질 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끝없는 기대와 거듭되는 좌절을 거듭하며 평행선을 달릴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목표점에 도달할 것이라고 늘 기대하기 때문에 절대로 그 지점에 이르지 못한다. 아름다운 산길을 걷는다고 가정해보자. 웅장한 산과 싱그러운 풀밭, 시원한 냇가와 잔잔한 호수 그리고 더없이 아름다운 나무들이 반겨주지만, 우리는 불행하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이보다 더 빼어난 풍경을 감상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사로잡혀 현재 우리를 둘러싼 빼어난 경치를 돌아보지 않고 지나치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특정한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좋은 것들에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현재의 순간을 받아들일 때, 우리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따뜻하고 긍정적이며 놀라운 치유의 체험을 하게 된다. 산책할 때 들리는 새들의 노랫소리는 경이로움 그 자체다. 하지만 내가 현재에 충실하고, 마음이 열려 있을 때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식탁 위에 있는 백장미는 놀 랍도록 아름답더라도 실제로 보지 않으면 그 아름다움을 알 수 없다.
미국 독립선언서에는 행복추구권이 명시되어 있다. 그런데 이 행복의 추구가 오히려 우리를 힘들게 만든다. 우리는 평생 행복해지려고 애쓰지만, 이런 노력은 행복을 발견하는 일이 결코 아니다. 행복을 쫓아가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의 삶과 자유, 그 밖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빼앗고 바로 여기에 있는 삶의 경이로움을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자기 꼬리를 쫓는 개처럼 우리는 빠르게 반복되는 악순환을 거듭한다. 하지만 아무리 빨리 달린다고 해도 우리는 목표에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 일상적인 평일 아침을 생각해보자. 요란한 알람시계가 우리를 잠에서 억지로 깨운다. 우리는 몇 분만이라도 더 자려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당기며 버틸 것이다. 그러나 이내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날 해야 할 일들을 모두 검토한다. 처리해야 할 목록을 하나 둘 떠올릴수록 그날 하루를 시작하기도 전에 피곤해진다. 날마다 변함없는 아침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는 거의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한다. 샤워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의 따스함도, 아침을 깨우는 커피의 향긋함도 느끼지 못한다. 샤워를 하는 동안 우리는 머릿속으로 오늘 어떤 옷을 입을까 고민한다. 커피를 마시면서도 머릿속은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한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하다. 차를 몰 때는 혼잡한 교통 상황 탓에 찬란한 아침 태양과 황홀한 구름, 싱그러운 나무와 푸른 하늘을 보지 못한다. 직장에서는 더 고단하다. 회사에 들어서면서부터 서둘러 업무를 처리하고 또 그 다음 업무로 넘어가느라 우리는 이 순간에서 종종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 한 업무를 다 마치기도 전에 다음에 해야 할 일을 미리부터 생각한다. 그리고 걱정을 앞세운다. 오늘 그 업무를 모두 다 처리할 수 있을지, 업무평가를 잘 받을 수 있을지, 상사와 동료들이 자신을 좋아할지 걱정이 많다. 하루가 속히 지나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는 기진맥진해 있지만 일 때문에 지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을 앞질러 초조하게 미래로 달려가는 모든 근심과 걱정이 우리를 지치게 만드는 것이다.
퇴근길에 운전을 하면서도 한시라도 빨리 집에 도착하고 싶어 안달이다. 하지만 정작 집에 도착해서도 우리는 이 순간에 충실하지 않다. 저녁에 해야 할 일을 미리 생각하거나 직장에서 있었던 일을 되돌아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시간을 낭비하는 행동이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우리는 완전히 깨어 있을 수도 살아 있을 수도 존재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이런 행동은 습관처럼 우리 내면에 깊이 뿌리 박혀 있다.
행복해지는 방법은 간단하지만, 우리는 흔히 그것을 망각하며 살아간다. 행복해지려면 샤워기에서 나오는 따뜻한 물과 커피 그리고 아침의 따사로운 햇볕 앞에 온전히 존재해야 한다. 근심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지 말아야 한다. 삶을 스스로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업무를 한 번에 하나씩 처리해야 한다. 퇴근길,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는 그 순간에만 집중하라. 그리고 주어진 저녁 시간을 즐기면 된다.
어렸을 적 우리는 현재의 순간에 온전히 존재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아침식사를 맛있게 먹었고 비와 물웅덩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때 부모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서둘러! 학교에 늦겠다.” 물론 늦지 않고 시간을 지키는 일은 어린이가 배워야 하는 것이지만, 이런 경험은 습관적 에너지를 형성하여 끊임없이 우리를 미래로 달음질치도록 몰아넣는다. 성인이 된 후 우리는 아침식사를 즐기지 못한다. 물웅덩이는 길을 가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불교의 우주론에서 육도六道에는 ‘배고픈 망령’(아귀餓鬼)이라는 생존 상태가 있다. 배고픈 망령은 배불뚝이에 탐욕스러운 식욕을 가졌지만, 입과 목구멍은 바늘구멍처럼 좁아 제대로 먹을 수 없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빼어 닮았다. 우리는 원하고, 원하고, 또 원한다. 우리는 끝없이 원하며 결코 만족을 모른다. 풍요로운 선진국에 살면서도 죽기 살기로 더 많은 것을 원할 뿐이다. 현재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있는 것을 받아들이고 즐기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행복은 우리가 가진 것보다 현재를 받아들이는 능력과 더 관련이 있다. 행복이란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것이며, 쉬는 법을 배우고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도록 그 작은 입과 목구멍을 완전히 열어젖히는 일이다. 행복은 한마디로 현재의 순간에 일어나는 일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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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은 가능하다

 

고속도로에서 본 광고판은 행복이 우리 외부에 있다는 또 다른 메시지도 암시한다. 우리가 오직 좋은 물건만을 사용하거나 소비하면, 좋은 사람들을 사귀고 만나면, 좋은 직장을 구하면, 좋은 심리요법을 찾으면, 돈이 충분하면, 그 밖의 여러 조건들이 갖춰진다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물론 어떤 일은 즐겁고 도움이 된다. 하지만 바탕에 깔려 있는 ‘우리 자신 밖에서 행복이 발견된다’는 생각은 매우 위험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행복을 발견할 수 있을까? 먼저 행복은 늘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시작할 수 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이내 행복해질 수 있다. 다른 무엇도 할 필요가 없다. 다른 곳에 갈 필요도, 자신을 변화시키거나 다른 사람이 될 필요도 없다. 행복은 매우 단순하다. 행복을 어렵게 하는 건 복잡하게 생각하려는 우리의 성향이다.
행복은 단순하다. 궁극의 진리가 단순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라는 예수의 말씀이나, 하느님께서 선지자에게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느님 됨을 알지어다”(시편 46:10)라고 하신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과연 그게 전부일까 하고 믿지 못한다. 힌두교 현자인 라마나 마하르시는 말했다. 모든 종교는 사람들이 정교하고 매력적이며 난해한 것을 찾기 때문에 생겨났다.(Mitchell 1991, 147)
온갖 종류의 복잡한 문제를 덧붙여야 하고 반드시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하며 특정한 규칙을 따라야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근본 진리를 모호하게 만들며 때로는 번뜩이는 깨우침의 통찰을 얻는 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방해물이 된다. 행복을 복잡하게 만드는 건 종교만이 아니다. 우리는 갖은 방법으로 행복을 복잡하게 만든다. 행복을 찾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행복을 찾는 일을 더 어렵게 만들고, 오히려 우리 자신이 훼방꾼이 되고 있다. 행복은 늘 가능하다. 이 말은 바로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행복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행복을 위한 전제 조건이란 없다. 무엇을 바꾸거나 다른 사람이 될 필요도 없다. 우리는 바로 당장 행복해질 수 있다. 행복이란 늘 가능한 것이므로 정녕 해야 할 질문은 당신이 행복해지는 것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우파니샤드(2장 참조)가 말하듯이 기쁨은 만물이 지닌 근본 본성이므로 일부러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 행복에 관한 검증되지 않은 개념을 비롯한 장애물들을 제거하기만 하면 된다. 행복이 가능해지는 방법을 익히면 이런 장애물들은 사라진다. 우리는 바로 당장, 바로 여기에서 행복을 느끼기에 충분하다는 사실을 이내 깨닫게 될 것이다.
행복은 이미 우리 가까이에 있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감관과 능력을 생각해보자. 우리에게는 멋진 형태와 색깔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눈과 아름다운 소리를 들려주는 귀가 있다.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도와주고 훌륭한 일을 얼마든지 해내는 두 손도 있다. 산책하는 즐거움을 주고 걸음마다 기쁜 마음으로 지면과 교감할 수 있게 도와주는 발과 다리도 있다. 그리고 신비스럽기까지 한 언어 능력을 지닌 우수한 지능도 있다. 이런 감관과 능력은 이미 기쁨의 엄청난 원천이다. 이 중 어느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능력이 결여된 사람이 있더라도 나머지 능력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을 배운다면 행복의 풍요로운 원천을 발견할 수 있다.
행복이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행복해지는 능력은 우리 내면에 이미 존재한다. 행복은 뛰어난 유전자를 물려받고 좋은 인맥이 있으며 잘생긴 외모를 갖춘 그런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보통 행복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장애물은 행복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행복은 자격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행복은 늘 가능하므로 바로 지금 행복해질 수 있다. 사실, 바로 지금이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살아 있는 유일한 시간은 지금뿐이다. 지금이 바로 생명이 존재하는 시간이다. 과거 어떤 시점에서는 행복했는데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과거는 지나갔다. 행복은 과거에 존재하지 않는다. 기분을 상쾌하게 만드는 시원한 물 한 잔을 즐기고 싶은가? 그렇다면 물 마실 시간은 지금뿐이다. 어제의 물은 마실 수가 없다. 진정한 행복의 원천은 바로 지금 우리와 우리 내면과 주변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미래에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는가? 여기에 미래란 없다. 미래는 결코 여기에 없다. 내일의 한 잔 물을 우리가 즐길 수 없듯이 미래에 행복을 미리 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 이 순간에 행복해지는 방법을 모른다면 미래에도 행복해질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에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미래에도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마실 수 있는 신선한 물은 과거는 물론 미래의 한 잔 물도 아니다. 과거와 미래는 모두 구름이나 그림자처럼 실체가 없는 공허한 허상에 불과하다. 과거는 망령이고 미래는 꿈이다. 생명의 물은 우리 앞에 구체적이고 생생한 실재로 존재하지만, 바로 지금, 여기에만 있을 뿐이다. 우리가 바로 지금, 바로 여기에서만 살아 숨 쉴 수 있다는 생각은 매우 심오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이런 통찰을 당연하고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치부해버린다. 이런 통찰을 확실히 그리고 완전히 이해해야만 행복의 길로 진입할 수 있다. 그래야만 삶이 우리에게 인식되고 우리 또한 삶을 진정으로 체험할 수 있다. 현재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피상적으로 단지 하나의 개념으로만 받아들인다면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실행의 개념으로, 삶의 한 방식으로 생각해야만 이 신선한 물을 마시는 체험에 이를 수 있다. 현재에 우리가 충실할 때, 우리의 의식이 이전에 있었던 일이나 이후에 일어날 일에 허비되지 않을 때, 우리가 온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붓다의 유일한 목표는 고통에서 헤어나오는 것이었다. 그는 종교를 창시하거나 철학을 세우는 일 또는 형이상학적 진실을 추구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인간의 고통을 끝내기만을 바랐다.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행복을 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는 가운데 붓다의 깨우침을 찾기 위해서 우리가 행복의 본질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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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왈 vs 예수 가라사대(도서출판 지와 사랑)

 

 

 

 

 

 

신학계의 주목을 받은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46 는 북아프리카(지금의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교도의 하급관리로 재산이 많지 않았다. 그는 게으르고 편하게만 살려 했고 세속에 연연하는 사람이었으나 죽기 전에 세례를 받고 크리스천이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허랑방탕한 삶을 살았지만 한편으로는 고상한 진리를 추구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언제나 선과 악이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는 17세 때 만나 교제한 여자와 14년 동안 동거하고 사생아를 낳았다. 19세 때 키케로의 저작을 읽은 후 진리 탐구에 강력하게 끌려 그것을 생애의 유일한 가치로 여기고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9년 동안 마니교47 를 신봉하며 학문 연구와 제자 육성에 힘썼다. 카르타고에서 희극 한 편을 써서 작가로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마니교의 교리에 회의가 생기기 시작했고, 마니교 지도자를 찾아가 토론을 벌였지만 그들은 교리와 관련된 설명을 명쾌하게 내놓지 못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결국 383년에 로마로 떠났고 이듬해 밀라노에서 수사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다 밀라노에서 새로운 회의주의 철학에 마음을 빼앗겼다. 이때가 그의 생애에서 가장 갈등이 심했던 시기였다. 어머니는 아들의 마음을 잡기 위해 정략결혼을 준비했지만 상대 여자의 나이가 너무 어려서 성사되지 못했다. 그는 동거녀와 관계를 청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여자와 동거하려고 했는데 이는 그의 생애에 크나큰 오점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자 플로티누스48 의 전기를 읽다가 플로티누스가 노년에 기독교로 귀의했다는 대목에서 흥분했고 모든 선과 진실의 근원이 하느님이란 것을 깨달았다. 뿐만 아니라 주교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듣고 교회의 권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또한 고상하고 성결한 삶을 사는 이집트인 수도사의 이야기를 듣고 지식인이면서도 성적 노예로 살고 있는 스스로를 부끄러워했다. 그는 비통한 마음으로 자책하면서 화원의 나무 아래에 엎드려 통곡했다. 그때 갑자기 아이와 같은 음성이 들렸다.

 

“들고 읽어라.”

 

깜짝 놀란 그는 울음을 그치고 『신약성경』을 다시 읽어 보았다.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몸을 무장하십시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로마서」 13:13~14).

그는 하느님에게 받은 능력으로 죄악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편안해졌다. 마음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회개하고 정부와 헤어졌다. 친구와 함께 산에 은거하며 철학을 연구하고 많은 논문을 썼다. 제자를 양성하지는 않았다. 그는 친구와 아들을 데리고 밀라노로 가서 암브로시우스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113편의 책과 5백여 편의 설교문을 작성했으나 그의 학식은 이를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이단과 논쟁을 벌일 때마다 신학에서 보인 그의 재능은 과히 천재적이었고 그래서 늘 신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은 크게 신학, 경전 해석, 윤리, 철학, 자서전으로 분류할 수 있다. 대표작으로 『참회록』, 『신국론』, 『삼위일체론』이 있으며, 그중 『참회록』은 자신이 직접 겪은 이야기를 쓴 책이다. 『참회록』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행하는 신비로운 일과 은혜를 자신의 경험으로 직접 증명한 것으로 인간이 신과 친밀하게 교제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은 훗날 종교적 경험을 저술한 책의 전형이 되었고 세계적인 명작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신국론』은 교회사와 관련된 철학서로 총 22권이며 아우구스티누스가 14년에 걸쳐 완성한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기독교를 강력히 옹호하기 위해 이교도와 로마의 애국주의를 반박하고 지상의 나라와 하늘나라에 대한 기원과 발전 그리고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지상의 나라는 자애自愛와 하느님에 대한 멸시로 반드시 쇠락할 것이고, 하늘나라는 신의 사랑을 근본으로 반드시 흥성하여 영원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 사상은 특히 로마 가톨릭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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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멘 하라의 『일체감이 주는 행복』(도서출판 知와 사랑)

부제: 나를 치유하는 신성한 연결고리

 

 

 

 

예언과 예지

 

예언은 꿈을 낳으며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열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본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종종 예기치 못한 운명의 반전에 당황하고 놀란다. 가령 자신이 임신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고객을 만났는데, 나는 그 사람의 미래에서 아이를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이루어졌다! 또한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고객을 앞에 두고, 그 사람의 인생에 나타날 새로운 배우자의 이름 첫 글자를 떠올린 적도 있다.

버지니아라는 고객은 집이 압류되어 절망적인 상태에 처해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그 집에서 살 운명이고 서류상의 문제도 곧 정리될 테니 그 집에 계속 머무르라고 말했다. 거의 2년 동안 그녀와 그녀의 가족은 주택 담보대출을 갚지 않고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싸웠다. 하지만 가족들과 자신이 강제로 쫓겨날까 두려워한 나머지 버지니아는 내 충고를 무시하고 아파트를 구해 이사해버렸다. 소유물 대부분은 보관 시설로 실려 갔고, 그녀는 아끼던 피아노를 비롯해 가구 등을 팔기 위해 광고까지 게재했다. 하지만 헐값에 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실망스럽게 하나도 팔리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가 집을 떠나지 않을 운명이기 때문이라고 나는 재차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그 집에서 살아갈 운명인 미래가 현재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의자 하나, 책상 하나도 팔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버지니아는 예전 집 근처를 지나가다 그 집이 아직 비어있으며 ‘판매 중’이란 팻말도 붙어 있지 않음을 확인했다. 나의 충고에 힘입어 버지니아는 가족을 다시 그 집으로 이사시키고 가구도 다시 갖다 놓은 다음, 법적 투쟁을 계속했다. 결국 대출 회사는 그 집이 저당 잡혔다는 증거를 내놓지 못했고, 버지니아는 자신이 살아갈 집의 소유권을 획득했다.

우리가 직관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하나의 결과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자유의지가 수많은 다른 결과들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래의 가능성을 들여다볼 의지만 있다면, 당신의 마음도 상상할 수 없었던 미래를 향해 열릴 것이다. 불행하게도 인간은 수천 년 동안 인류 최후의 날이라는 관념에 집착해왔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예언이나 부정적인 예지는 우리 인간의 두려움을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 예정된 대재앙의 날이 다가오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사람들은 집단적인 공포의 기억을 잊고 다음 멸망의 날을 기다린다. 예를 들어 수많은 사람들이 2000년 1월 1일에 컴퓨터를 먹통으로 만들어 거대한 혼란을 불러일으킬 바이러스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잠재적인 문제를 인식하고 그에 충분히 대비한 덕분인지, 심각한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제 누군가가 2012년 12월 12일을 새로운 날로 정해놓았다고 하자. 하지만 나는 당신이 그날도 역시 아무 일 없이 지나가리라고 믿기를 바란다. 무시무시한 사건이 일어나는 극적인 날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전환점이 되는 날일 뿐이다. 옛 예언자들이 어째서 절대로 긍정적인 전망을 드러내지 않았는지 나는 종종 궁금할 때가 있다. 노예제도의 종말이나 항생제 개발에 대한 예언이 있었던가? 나는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인간이 달 위를 걷거나 이 지구상의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서로 통화할 수 있는 날에 대해 예언한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예언자들은 그것보다 세계대전이나 지도자의 죽음을 고대하고 있었을 뿐이다.

인류의 역사 내내 부정적 예언이 이어져온 까닭은 우리가 우리에게 내재된 변화와 고통을 두려워한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언자들의 경고를 받아들이고 우리의 태도를 변화시킴으로써, 무서운 예언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 게다가 우리가 분명히 깨우친 부분도 있다. 인류가 핵무기를 보유한 지 수십 년이 지났다. 그 핵무기는 지구상의 온 생명을 완전히 말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또 다른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핵무기를 보유한 뒤부터 서로의 공통점을 찾게 되었으며, 우리에게 평화를 이루고 상호 이해를 달성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깊이 통찰하게 되었다. 미래의 부정적인 현상에 대한 예언이 계기가 되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행동을 바꾸고 궤도를 수정할 수 있다. 태초에 이 세상은 즐거움을 누리기 위한 천국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온갖 끔찍한 재앙에 대한 상상을 멈추고, 보다 긍정적인 미래를 계획해야 한다.

직관력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나는 개인들의 삶에 일어나는 긍정적인 사건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인류가 위대한 교훈을 얻어 이 격랑의 시기를 통과하리라고 굳게 믿는다. 우리는 분명 새로운 평화와 더 높은 의식의 시대로 진입하겠지만, 그 전에 걱정을 멈추고 변화의 힘을 제대로 포착해서 노력에 대한 결실을 맺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미래는 밝아지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카르멘 하라 박사는 '더 뷰The view', '굿모닝 아메리카Good morning America', '투데이 쇼Today show' 그리고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 [뉴욕 포스트The New York Post]를 비롯한 미국의 텔레비전 쇼와 언론 매체에 출연하는 유명 인사이며 심리치료학자다.

할리우드 스타에서부터 저명한 정치인들까지 그녀를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다년간의 경험을 통한 부부 치료나 인지치료 방식이 그녀의 신비한 직관력과 합쳐져 그녀는 세계적인 상담사로 발돋움했다. 또한 세 장이나 음반을 낸 재능 있는 음악가이며, 자신만의 고유한 보석을 디자인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홈페이지 www.CarmenHarra.com과 페이스북 carmen Harra- (Wholeliness)를 방문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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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 여기

 

최근 고속도로를 달리다 행복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잘 보여주는 광고판을 보았다. “행복을 여세요”란 간단한 문구와 함께 한 사람이 그물 침대에 누워 쉬고 있고 옆에 콜라 두 병이 놓여 있었다. 이 광고는 우리가 행복을 휴식과 관련해서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휴식을 통해 행복을 즐기지 못하기 때문에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대부분은 휴식을 취하기보다는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데 더 익숙해져 있다. 휴식을 취할 시간이 생겨도 막상 편히 쉬지 못할 때가 허다하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오랫동안 일한 후에는 좀처럼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찾기 어렵다. 몸이 바짝 긴장해 있고 마음도 늘 걱정 때문에 좌불안석이다. 온종일 정신없이 뛰어다니다가 갑자기 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쳐서 쓰러지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우리는 종종 영화나 텔레비전을 보면서 또는 소설이나 잡지를 읽으면서 휴식을 취한다. 그러면 최소한 일상의 집착에서 벗어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런 매체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여 휴식을 취하려고 하는 바로 그 행동 때문에 오히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스트레스를 받는다. 진정한 휴식은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지만, 우리는 가만히 있는 데 익숙하지 않다.
앞서 광고가 암시한 행복이 휴식과 관련 있다는 개념이 사실이라면, 행복이 병에 담겨 우리에게 온다는 광고의 메시지는 분명 허튼 소리다. 이처럼 상업주의와 소비지상주의가 우리를 공허하게 만든다.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만 생각해보면 절대 이런 개념에 속지 않을 것이다. 교묘한 광고 메시지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사이 우리의 마음속에 몰래 파고든다. 어떤 제품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는 개념은 언뜻 보아서도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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