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낭비하지 않기, 모두 다 최상이야

 

● ● 시간 낭비하지 않기

 

우리의 문화는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이는 언제나 생산적인 일을 하고 무엇인가를 성취해야만 하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심오한 행복의 본질, 즉 붓다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행복을 알게 되면 시간 낭비란 이제껏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의미를 지닐 것이다. 우리는 현재에 충실하지 않거나 마음을 열지 않을 때 시간을 낭비한다. 어떤 활동을 하느냐는 별로 상관없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의식하며 살아 있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더라도 소중한 시간인 반면, 책을 읽더라도 책에 충실하지 않고 그저 빨리 읽어버리려고 서두른다면 이는 시간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다. 어떤 불교 신자들은 우리가 지옥계, 축생계, 아귀계, 심지어 천신계에서 각기 다른 형태로 수백만 가지 생을 살지만, 이 모든 것이 결국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오직 인간의 삶에서만 성장하고 자비를 베풀며 행복하고 현명할 수 있다. 인간의 삶에서만 우리는 깨어 있을 수 있으며 붓다가 될 수 있다. 의식하지 않고 잠에 취해 있거나 마음이 닫힌 상태로 지금 하는 일과 이 순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인간으로 태어난 기회를 낭비하는 것이다.

 

● ● 모두 다 최상이야

선禪에 진전이 없어 실의에 빠진 한 학생이 있었다. 오랜 시간 명상했지만 아무런 발전이 없었다. 바뀌는 것도 없었고 여전히 행복하지 않았다. 어느 날 그는 사원에 필요한 음식을 구입하려고 시장에 갔다. 그가 상점 주인에게 최상품만 달라고 하자 상점 주인이 말했다. “모두 다 최상일세!” 바로 그 순간 그는 깨우침을 얻었다. 모두 다 최상이라는 것을 아는 건 모든 것에 대한 판단을 멈추고 현재 부족한 것에 대해 초점을 맞추는 걸 중단하며 단순히 그 자체에 대한 체험에 마음을 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경험을 상상 속의 이상과 비교하는 일을 멈추고 살아 있다는 그 자체로 위대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모두 다 최상이 된다.
물론 이 말은 우리가 보는 주변의 모든 것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완벽하다’는 말은 단지 우리가 그렇게 되길 바라는 상태를 의미할 뿐이다. 보는 행위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우리 주변의 소리가 늘 기분 좋은 건 아니지만, 듣
는다는 그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보고, 느끼고, 맛보고, 만지고, 냄새 맡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만족을 주며 기적과도 같다. 모든 것이 그렇게 되어야 하는 문제가 아니다. 만사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 성이 차는 성향은 행복을 가로막고 매 순간 완전히 살아서 경험하는 데 우리를 완전히 뿌리 내리지 못하게 방해한다. 주변 환경이나 자신에 대해 완벽을 추구하는 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불완전함과 다투지 않기

나는 어렸을 적 즐거워야 할 순간에 엄지손가락에 생긴 거스러미가 신경 쓰여 유쾌하지 못했던 경험이 있다. 그때 난 무슨 일에나 거슬리는 게 꼭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일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는다. 꿈에 그리던 생일선물을 받았는데 건전지가 들어 있지 않을 수도 있고, 멋진 자전거가 있지만 타이어에 펑크가 났을 수도 있다. 인생에는 늘 불완전한 무엇인가가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만 같다. 이런 불완전함에 집착하고 집중하면 불완전함이 우리의 의식을 완전히 점령할 수도 있다. 심지어 이를 의식하지 않으려는 노력조차도 상황을 악화시키고 우리를 깊은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한다. 이것은 시라노(추한 외모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 사랑을 고백한 프랑스 극작가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 주인공)의 큰 코가 거슬려서 보지 않으려고 하나, 결국 온통 이 코만 떠올리는 것과 같다.
이 모든 것의 공통 맥락에는 저항과 다툼의 요소가 있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은 것과 맞서 다투려고 한다. 하지만 정작 다툼을 시작하면 그렇게 다투는 자신이 싫어져 어려움이 몇 배로 증가한다. 슬픔, 분노 또는 당황스러움 같은 감정은 그 자체로 나쁜 건 아니지만 우리는 그런 감정 상태에 맞서 다투려고 한다. 행복해지는 것은 모든 것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경험의 불완전성에 느긋해지는 것이다. 행복이란 불완전성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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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은 마음챙김이다

 

행복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특별한 여행을 하면서 느끼는 행복, 무엇인가를 만들면서 느끼는 행복, 무엇인가를 성취하면서 느끼는 행복 등이 있다. 이런 행복은 모두 좋은 것일 테지만, 여기서 비롯되는 긍정적인 감정은 일시적이다.
현재의 순간에 행복을 느끼고 깨어 있는 법을 배우는 수행을 붓다는 정념正念(smŗti), 곧 마음챙김이라고 했다. 마음챙김은 안정된 상태의 행복이고 평온과 만족을 수반하기 때문에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행복이다. 마음챙김은 조건과 환경이 아닌 우리 자신의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신뢰할 수 있다. 마음챙김은 인생의 모든 순간에 깨어 있는 것이다. 늘 여기가 아닌 다른 곳, 이 순간이 아닌 다른 시간에 얽매여 있었던 탓에 우리가 놓친 삶과 그 밖의 모든 것을 삶을 마감하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깨닫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현재의 순간에 발생하는 일이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일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기적 같은 일들을 놓치는지도 모른다.

 

 

행복은 흥분되는 일이 아니다
누군가는 마음챙김이 그리 신나는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마음챙김은 만족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마음챙김은 휴식을 취하고 평온한 상태에서 마음을 여는 일이다. 신나지만 결국에는 공허감과 언짢은 느낌을 주는 것에 중독된 우리를 풀어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챙김이 행복의 튼튼한 토대가 되는 것이다.
붓다의 행복은 심오한 것으로 신나는 경험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현재에 오롯이 존재하는 행복이며 낡은 벽의 작은 틈새에서 자라나는 꽃을 감상하는 행복이다. 평온과 만족 그리고 평화와 편안함이 없다면 우리는 현존할 수 없으며, 꽃을 볼 수도 없다. 높은 자리로 승진하는 순간, 대학원에 합격하는 순간, 좋은 회사에 입사하는 순간 또는 인생의 동반자를 맞이하는 순간은 모두 기분 좋은 순간들이다. 그러나 이런 순간들의 기분 좋은 감정은 이내 사라진다. 인간의 뇌는 흥분 상태로 오래 있지 못하고 마음의 안정을 다시금 찾으려고 한다. 이런 과정을 항상성이라고 한다. 즐겁고 신나는 일이 생겼을 때 우리는 마음챙김을 통해 좀 더 충분히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보통 우리는 시간이 흘러 더 이상 즐겁지 않을 때 일상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마음을 챙기면 일상에서도 경이로움이 발견된다.
진정한 행복은 소리 없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가 목표와 계획에서 벗어날 때, 그리고 흥분과 지루함이 모두 사라질 때 온다. 방안에 들어서면서 흘러 들어오는 햇살을 발견할 때 마음에서 조용한 기쁨이 일어나고 거실 화초에 푸른 이파리가 무성한 것을 보면서 깊은 만족을 느낀다. 단순히 점심식사를 할 때도 진정으로 그곳에 존재하고 음식이나 주변 환경, 주변 사람들에게 충실하다면 깊은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점심시간에 근심거리만 생각하고 대화한다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는 점심시간을 놓치는 것이다. 마음을 고요하게 다스리고 다른 일에 정신을 팔지 않아야만 행복을 즐길 수 있다. 흘러 들어오는 햇살, 푸른 화초, 즐거운 점심시간을 즐기려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유일한 전제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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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왈 vs 예수 가라사대(도서출판 지와 사랑)

 

 

 

 

 

‘종교를 위한 철학’을 제기한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는 1224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 아퀴나스와 아우구스티누스는 중세 유럽 기독교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이자 신학자다. 아퀴나스는 사상이 풍부하고 이론이 참신하여 새로운 사조에 잘 들어맞았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주소하여 스콜라철학의 이론체계를 새롭게 구성했다. 그는 문제를 논증할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술을 능수능란하게 이용했다. 평생 동안 열여덟 권의 대작을 남겼으며 대표작으
로 『대 이교도 대전Summa contra gentiles』, 『신학 대전Summa theologiae』, 『존재와 본질에 관하여De ente et essentia』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주소한 것 등이 있다. 특히 『신학 대전』은 가톨릭사상을 집대성한 책으로 가톨릭 신학의 경전으로 받아들여진다.
아퀴나스는 ‘종교를 위한 철학’을 제기했다. 이성주의와 이중진리설이 더욱더 대세가 되는 상황에서 “신앙이 이성에 우선하며 신학이 철학 위에 있다. 그래서 철학은 신학의 시녀 노릇을 해야 하며 신학을 위한 철학이 되어야 한다”라고 논증했다. 그는 이성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이성과 신앙, 철학과 신학이 구별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성과 철학은 이성적인 진리를 추구하고 신앙과 신학은 계시적인 진리를 추구한다. 그러나 이성과 신앙이 추구하는 두 가지 진리의 최종 실체와 원천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나온다. 두 진리가 원칙적으로 모순이 될 수 없으며 신앙의 진리는 이성으로 이해되고 증명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성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은 신앙뿐이며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에 입각해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고 모든 사물은 하느님이 무에서 창조한 것이라는 결론을 끌어냈다.
하느님은 모든 사물의 제1원인이다. 모든 사물은 형태와 물질로 구성되어 있고 사물의 제1원인은 하느님이기에 형태와 물질 또한 제1원인인 하느님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세상의 모든 사물은 하느님이 무에서 창조한 것이다. 하느님은 영원하다. 따라서 세상의 창조가 시간의 시작이냐에 대해서는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단지 세계의 창조가 시간의 시작이라는 신성한 계시를 믿을 수밖에 없다. 우주의 체계는 등급제로, 가장 낮은 층에는 물, 흙, 불, 공기 네 가지 원소로 구성된 모든 사물과 대지로 이루어진다. 그 위층에 식물, 동물, 사람이 있고 사람은 만물의 중심이다. 천체는 지구에 머무르는 정신적인 실체다. 가장 높은 층에는 온 우주가 추구하는 최고 목적인 삼위일체의 하느님이 계신다. 아퀴나스는 교회의 권력이 최고 권위를 가진다는 주장으로 교회를 옹호했다. 즉 하느님이 인간보다 높고, 영혼이 육체보다 높은 것처럼 교회도 세속국가 위에 있다는 것이다.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전 세계의 권력이 그의 아래에 있다. 따라서 국가는 반드시 교회에 복종해야 하고 국왕도 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 또한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세상에서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다. 세상에서 누리는 행복은 결코 최고의 행복이 아니다. 천국에서의 행복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 잠잠히 하느님을 바라보며 영혼의 구원을 얻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누리는 최고의 행복이다. 최고의 행복을 추구하는 건 사람의 자연적인 욕망이자 인생의 최종 목적이다. 또한 행위의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은 그 행위가 최고의 행복 추구에 도움이 되었느냐에 달려 있다. 최고의 행복, 즉 하느님을 추구하는 행복을 방해하는 모든 이교 행위자를 교적에서 제명하고 화형에 처해야 한다.
종교 재판소는 아퀴나스의 이 이론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가톨릭교회는 아퀴나스의 신학을 가톨릭의 공식 신학으로 지정하고 지금까지도 지침으로 삼고 있다. 1323년 교황은 그를 성도聖徒로 추서하며 교회의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이로써 가톨릭 신학은 순조롭게 발전할 수 있었다. 1274년 1월, 아퀴나스는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의 초대를 받아 리옹에서 열리는 종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길을 나섰으나 도중에 병에 걸려 사망했다. 1879년 교황은 “그의 학설은 가톨릭교회에서 유일하게 진실한 철학이다”라고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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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를 읽고 장자에게 배운다』 중에서

 

 

 

 

경쟁하지 않고도 이기는 지혜

 

경쟁은 인류 발전의 원동력이 되어 왔다. 이는 오래전부터 있어 온 사회의 질서이기도 하다. 이러한 경쟁의 적정선은 어디일까? 경쟁과 관련된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는 없을까? 흔히 어른들은 자녀나 손아랫사람이 학창시절, 직장생활을 하면서 각 방면에서 자기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기를 기대한다. 한 미국인 할머니가 손자 둘을 데
리고 길을 가고 있었다. 그때 어떤 사람이 할머니에게 물었다.
“손자들이 참 귀엽네요. 몇 살이에요?”
그러자 할머니가 대답했다.
“나중에 의사가 될 이 녀석은 9살이고, 변호사가 될 저 녀석은 7살이에요.”
무슨 뜻일까? 미국인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의사나 변호사가 되기를 희망한다는 의미일까? 그렇지만 모두 의사나 변호사만 하려고 든다면 다른 직업은 어떻게 될까? ‘어떤 직업이든 그 분야의 대가가 있다’라는 말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된다. 문제는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선택해야 하는데, 그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경쟁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오래전의 동료가 생각난다. 그에게는 초등학교 1학년인 아들이 하나 있었다. 이 아이는 학교에서 늘 신나고 재미있게 생활했을 뿐만 아니라 친구들과도 아주 잘 지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전 과목 모두 반에서 꼴등을 도맡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반 친구들은 그 아이를 특히나 좋아했다. 적어도 내
뒤에 한 명은 더 있다는 생각에서였는지 그 아이를 보며 다들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아이는 점차 자신감을 잃어갔다. 하루는 동료가 이런 아들을 보고 생각했다. 즐겁게 학교생활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감을 상실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동료는 아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오늘부터 아빠와 새로운 놀이를 해보자. 학교에서 선생님과 공부했던 내용을 매일 수업이 끝난 다음 아빠와 함께 다시 해보는 거야.”
아이는 아빠가 자기와 함께 공부해준다는 말에 기뻤다. 드디어 다음번 시험이 돌아왔고, 아이는 반에서 1등을 했다. 모두 놀랐다. 아이는 신이 나서 집에 돌아왔다. 아빠가 아들에게 말했다.
“난 너에게 마음만 먹으면 1등도 문제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단다. 네 자신을 믿으렴. 그리고 이제 다시 전처럼 행복한 꼴등으로 돌아가렴.”
초등학교 시절의 6년을 신나게 논 이 아이는 학창시절의 추억을 많이 만들었다. 성적은 여전히 하위권이었지만 친구도 많이 사귀었다. 중학교에 진학할 때 아들이 자발적으로 아버지에게 말했다.
“놀만큼 놀았으니 이제부터는 공부에 열중하겠어요.”
그 후 아들은 한 번도 부모에게 염려를 끼치지 않고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마쳤다. 매우 감동적인 일화가 아닌가? 우리는 감히 이런 시도를 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 동료는 시도했고 결과도 아주 이상적이었다. 이 이야기에서처럼 사람이 어떤 일을 하기까지는 외적인 요구와 내적인 의지가 함께 작용한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되도록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은 피하라고 여러 차례 당부했다. 노자의 삼보三寶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삼보 중 첫 번째는 자애, 두 번째는 검소함, 그리고 세 번째는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는 겸손함이다. 당신이 먼저 나서서 다른 사람들을 이기려고 한다면 실제로 지도자 역할을 해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만약 지도자가 된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추대
해서 내가 그들을 위해 일하겠다고 결심한 것에 불과하다. 결코 내가 다른 사람들과 그 자리를 다퉈 쟁탈한 것이 아니다. 당신이 경쟁으로 자리를 쟁취했다면 당신의 능력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건 사실이겠지만 그들이 진심으로 당신을 따른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경쟁을 어떻게 여겨야 할까? 여기 한 사례를 보자. 어느 날 한 미국인이 신이 나서 집에 돌아가 아내에게 말했다.
“오늘 진짜 운이 좋았어. 내가 세계 챔피언을 둘이나 이겼거든.”
부인이 물었다.
“당신이 무슨 재주로요? 세계 챔피언도 쓰러뜨릴 만한 대단한 능력이 대체 뭐죠?”
그러자 남편은 말했다.
“수영 챔피언과는 테니스 경기를 했고, 테니스 챔피언과는 수영 경기를 했지. 그래서 내가 둘 다 이겼다고. 그러니까 난 오늘 세계 챔피언 두 명을 쓰러뜨린 셈이지.”

분명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당신의 약점과 다른 사람의 장점을 겨뤄보는 것은 어떨까? 며칠 전 베이징 국제공항에서 미국 NBA 농구팀 선수들을 보았다. 하나같이 2미터가 넘는 장신이었다. 그들 옆을 지나는 내가 난쟁이처럼 느껴졌다. 내가 그들과 농구경기를 한다면 결과는 뻔하다. 물론 그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큰 키라는 좋은 조건을 타고났으니 무리해서 겨루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 사람의 의지는 하늘의 뜻도 이길 수 있다지만 지나치게 억지를 부리면 오히려 노력한 만큼의 결과도 얻지 못한다.

노자는 경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천지도리이불해天之道利而不害, 성인지도위이불쟁聖人之道爲而不爭” 하늘의 도는 이롭게 할 뿐 해하지 않으며, 성인의 도는 행할 뿐 다투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자연의 법칙은 다투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늘의 도는 그저 만물에 이롭고 해를 끼치지 않으며 인간도 하늘의 도를 본받아 경쟁하지 않는 덕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나날이 치열해지는 경쟁과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그렇게 하기란 쉽지 않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경쟁을 초월할 수 있을까? 노장사상은 이에 관해 어떤 독특한 견해를 풀어 놓을까?

 

 

저자소개: 푸페이룽 傅佩榮
1950년에 태어난 푸페이룽은 타이완대학 철학대학원 석사, 미국 예일대학 철학박사이다. 타이완대학 철학과 학과장 및 철학대학원 원장을 역임하였으며 벨기에대학, 네덜란드 레이던대학 객원교수이기도 하다. 현재는 타이완대학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푸페이룽은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말솜씨를 가진 교수로, 타이완 『민생보民生報』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학교수로 선정되었다. 뿐만 아니라 타이완 교육부에서 수여하는 우수 교육자상, 『성공한 인생成功人生』으로 타이완 문화예술 분야 국가문예상, 『천론에 대한 유가와 도가의 해석儒道天論發微』으로 중정中正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현재까지 타이완에서 백 권이 넘는 책을 출간하는 등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특히 전통 경전 연구에 몰두하여 기존의 이론이나 고정관념을 탈피한 독창적인 견해를 내놓고 있다. 온고지신의 정신으로 『논어』, 『맹자』, 『노자』, 『장자』, 『역경』 등을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였으며 학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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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멘 하라의 『일체감이 주는 행복』(도서출판 知와 사랑)

부제: 나를 치유하는 신성한 연결고리

 

 

 

지금까지의 예지자와 앞으로의 예지자

 

처음 지구상에 출현한 인간부터 마지막으로 지구의 공기를 빨아들일 사람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우주의 모든 영혼과 연결되어 있다. 물론 1천 년 전에 지구에 살다 간 어느 부족의 사람이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보다는 부모나 형제, 친구들이 더 가깝게 느껴진다. 하지만 시간은 무한하며,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하나의 가능성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다시 말해 우리는 조상들 그리고 후손들과 연결되어 있는 만큼 소중한 이들과도 연결되어 있다.
이 지구상의 단절과 분리를 끝내기 위해서는, 시공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그리고 현재의 세계를 체계화하기 위해 우리가 고안해낸 온갖 한계를 넘어서는 신성한 연결고리를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종교와 민족, 성별을 초월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았다면, 서로에 대한 차별을 멈추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이해하고 조화시켜 나가야 한다.
우리 후손들이 어떤 세상에서 살아갈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어쩌면 우리의 선택에 충격받거나 우리가 현재 믿고 사는 것들에 대해 재미있어할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과거 우리 조상들이 그랬듯이, 우리에게도 미래의 후손들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점이다.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우리는 지구를 건강하고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몫을 다해야 한다. 부모는 자식에 대해 본능적으로 책임을 다하지만, 우리에게는 또한 후대 사람들에 대한 의무가 있다. 완전히 성공적이지는 못하다 할지라도, 이 지구상의 모든 아이들에게 이상적인 세계를 물려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일체감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인간이 선하다는 믿음을 재건하는 일이고, 모든 영혼이 진보와 긍정적인 변화를 맞이할 가치가 있음을 깨닫는 일이다.
또한 2년 전에 죽었건 2천 년 전에 죽었건 간에 우리보다 먼저 이 세상을 살다 간 사람들을 생각해야 한다. “어른을 공경하라”라고 우리는 자주 말하지만, 이는 앞선 모든 시대를 살다 간 사람들에게 다 통하는 말이다. 잊어버렸거나 제쳐둔 것들을 되돌아봄으로써 우리는 그들에게서 배우고, 과거의 실수에서 교훈을 얻고, 물려받은 업을 풀어야 한다. 뒤를 돌아봄으로써 우리는 더 나은 미래로 전진할 수 있다. 어쩌면 조상들과의 연결이 끊어졌을 수도 있지만, 끊어진 인연을 되찾는 일도 가능하다. 가령 당신이 입양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렇더라도 일본 문화에 강한 친밀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것을 받아들이라. 당신은 진정으로 이 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고, 어쩌면 전생에 일본에 살았거나 현생에 살게 될 운명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누구이고 어디에 속한다는 생각에 매여,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수많은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
여러 전생을 통해 당신은 남성 또는 여성으로, 부유하거나 가난하게, 아시아인이나 미국인으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현재는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더라도, 전생에 일본에서 살았던 인연이 당신을 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미래에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일본에서 누군가를 만나 풀지 못한 업을 함께 풀어가야 할 운명일지도 모른다.
신성한 연결고리와 자신 사이를 열어놓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흐르는 시간의 복잡성을 받아들이라. 그러면 업을 풀어야 할 책임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신에게 도움을 청하고 당신과 영적 존재 간의 공명을 외면하지 말라. 과거에서 배우고, 미래를 계획하고, 일체감으로 돌아가기 위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여러 일들에 놀라워하라.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카르멘 하라 박사는 '더 뷰The view', '굿모닝 아메리카Good morning America', '투데이 쇼Today show' 그리고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 [뉴욕 포스트The New York Post]를 비롯한 미국의 텔레비전 쇼와 언론 매체에 출연하는 유명 인사이며 심리치료학자다.

할리우드 스타에서부터 저명한 정치인들까지 그녀를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다년간의 경험을 통한 부부 치료나 인지치료 방식이 그녀의 신비한 직관력과 합쳐져 그녀는 세계적인 상담사로 발돋움했다. 또한 세 장이나 음반을 낸 재능 있는 음악가이며, 자신만의 고유한 보석을 디자인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홈페이지 www.CarmenHarra.com과 페이스북 carmen Harra- (Wholeliness)를 방문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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