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에 집착하는 고통

 

붓다는 우리가 자신을 분리된 자아, 즉 시공을 통해 변치 않고 살아가는 독립체로 믿기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을 세계와 분리되어 있다고 바라보기 때문에 우리는 광활한 우주 속에서 소외감과 외로움을 느낀다. 개별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경쟁하고 애를 써야 한다. 이런 패러다임의 감옥에서 탈출하여 우리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고속도로에서 차를 몰다 심한 교통 체증으로 인해 꼼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을 때를 생각해보자. 고속도로에 있는 모든 사람은 자신이 바라는 것만을 추구하며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켜 서로 전진하려고 싸우는 분리된 개개인이다. 직장에서는 어떤가. 주변에 있는 동료는 경쟁자들이거나 잠재적 경쟁자들일 뿐이다. 우리는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서라면 친구와 가족마저도 조종하려고 시도한다. 실제로 무아는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개념이 아니다.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건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고립된 자아로서 다른 사람들과 싸우고 경쟁한다.
경험에 자아라는 개념을 덧붙이게 되면 우리의 정체성 때문에 다시 고통을 받게 된다. 누군가 우리를 비난하고 화를 내며 상처를 준다면 분노 혹은 슬픔이 생길 것이다. 이것 자체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가 ‘나는 고통받고 있어! 난 슬퍼! 난 화가 나! 이건 정말 최악이야!’ 하고 말할 때, 그것이 문제가 된다. 물론 우리는 불쾌한 느낌보다 유쾌한 느낌을 선호하지만, 이 느낌이 ‘나의 것’이야, 또는 이 느낌이 바로 ‘나’야 하고 불쾌한 느낌을 확인하게 되면 그것은 정말이지 끔찍한 것이 된다.
심지어 자아는 우리 자신, 우리의 유기체와 생각, 그리고 감각의 한계를 넘어선다. 우리의 구별은 우리 주변의 모든 것으로 확장된다. 나의 집, 나의 옷, 나의 일, 나의 차, 나의 음식, 나의 배우자 또는 나의 파트너, 나의 아이, 나의 부모, 나의 친구에까지 이른다. 자아의 정체성을 확대함으로써 우리가 불행할 가능성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나의 것으로 여기던 것들이 없어지거나, 문제가 생길 때마다 우리는 고통을 받는다. 상당히 과민한 더듬이들이 우리 몸 전체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작은 일에도 엄청난 고통이 수반된다. 이런 확대된 자아의 정체성으로 인해서 우리는 어떤 것들을 움켜쥐려고 한다. 우리는 자아의 느낌을 모든 사물, 사람에게 확대하기를 바란다. 더 많은
것들을 얻기 위해 자신을 혹사하고, 무엇인가를 잃으면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결국에는 사라질 것들이다. 붓다는 우리에게 묻는다. 불안, 고갈, 슬픔, 절망을 야기하지 않는 것을 네가 계속 보유할 수 있는가? 일부를 자아로 간주한다면 나머지들은 자아가 아닌 것을 의미하므로 자아의 패러다임은 폭력을 영구화한다. 우리는 자아가 아니라고 보는 것, 동질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에 대해 우리와 분리된 이질적인 대상으로 받아들이고 의심한다.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들은 위협적인 존재이며, 따라서 우리는 이것들을 양심에 거리낌 없이 가혹하게 다룰 수 있다. 전쟁이 한 예가
된다. ‘다른 사람’으로 보기 때문에 우리는 상대방을 경멸하고 상대방과 상대방의 아이를 다치게 하며 불구로 만들고 죽이기까지 하지만, 소위 전쟁에서 발생하는 부차적인 피해로 간주하고 양심에 가책을 받지 않는다. 물론 상대방도 같은 식으로 우리를 보기 때문에 양심에 거리낌 없이 같은 일을 우리에게 저지른다.
이렇듯 우리는 우리를 제외한 모든 대상에 죄의식 없이 상처를 주며, 그 대상은 끊임없이 변한다. 친구가 우리를 화나게 했다면 그는 더 이상 우리의 친구가 아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를 무시하고 등한시하며 상처를 주기도 한다. 여동생이 우리가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하면 우리는 그녀가 더 이상 동생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동생과 더 이상 대화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불행에서 우리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행운에서도 우리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까지 찾아야 한다. 직업적인 성공이나 사랑 또는 그 밖의 무엇이든 친구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그 일이 우리 자신도 바라던 일이었다면 질투심이 생긴다. 이런 감정을 의식하게 되면 우리는 고통을 받는다. 그래서 이 불쾌한 감정에서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는 심리적 방어 기제를 사용한다. 가장 원초적인 형태의 심리적 방어 기제는 부인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부러워하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조차도 의식하려고 하지 않는다. 또는 어떤 식으로든 친구의 성과를 가능한 한 평가절하하거나, 친구에게 찾아온 좋은 일이 실제로는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럴 자격도 없는데 친구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행동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좋은 일에 진심으로 기뻐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자아라는 관념에서 자유로워질 때 비로소 우리는 집착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리고 집착과 다툼을 멈출 때 우리의 고통도 사라진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생기는 좋은 일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겪을 때 침착하게 그들과 함께 하는 방법도 배울 수 있다. 버리면 행복이 달아날 거라는 두려움에 차 있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더 많이 버릴수록 더 행복해진다. 자아의 구별을 종식시키는 것이 우리의 고통을 끝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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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버리기

 

비영구성의 통찰을 거부할 때 자아에 대한 붓다의 통찰은 더욱더 충격이 된다. 자아에 대한 붓다의 시각은 문제의 근원, 즉 불행의 근원을 다룬다는 점에서 파격적이다. 고대 기록에 따르면 붓다의 가르침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이 통찰로 그 자리에서 불행을 영원히 떨쳐버리고 깨우침을 얻었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일까 하는 문제를 떠나서 이를 통해 우리는 변화, 고통에서의 해방, 행복을 위한 그의 통찰에 높은 가치가 부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붓다는 우리가 자신의 경험을 깊이 들여다볼 때 자아라고 부를 만한 것이 전혀 없다는 점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우리 내부에는 우리를 조종하는 호문쿨루스homunculus(라틴어로 ‘작은 생명체’라는 뜻), 즉 난쟁이가 없다.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것은 나의 몸과 몸의 감관, 그리고 마음과 마음의 사고 과정뿐이다. 이 가운데 자아는 어디에 있는가? 신경심리학자로 『붓다 브레인Buddha’s Brain』의 공동저자인 릭 핸슨은 말했다.
요컨대, 신경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통일된 자아를 지니고 있다는 일상의 느낌은 완전한 환상이다. 일관성 있고 실체가 있는 듯이 보이는 ‘나’는 실제로 고정된 중심이 없이 발달 과정 내내 많은 하위 조직과 그 아래 하위 조직으로 생성되며 경험의 주체가 있다는 근본적인 감각은 서로 다른 무수히 많은 주관성의 순간들로 만들어진다.
깊이 들여다보면 ‘나’는 전적으로 무아의 요소로 구성된 것을 알 수 있다. 이 문장을 읽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물질과 에너지를 주변의 환경과 교환한다. 예를 들면 음식을 먹을 때, 조금 전만 하더라도 자아가 아니었던 것이 이제는 자아의 일부가 된다. 마찬가지로 숨을 들이마시면 자아가 아니었던 공기분자들이 자아가 되고, 숨을 내쉬면 자아였던 공기분자들은 더 이상 자아가 아니게 된다. 화장실에서 일을 보면 자아였던 물질이 더 이상 자아가 아니게 된다.
우리가 분리된 자아가 아니라면 과연 우리는 무엇일까? 우리는 햇빛이다. 우리는 흙이다. 우리는 물이다. 우리의 모든 것이 이런 것들에서 유래했다. 우리는 그 밖의 모든 것과 분리된 정적인 자아가 아니라 주변의 모든 것 그리고 우주 만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동적인 생명 과정이다. 수없이 많은 인연들이 모여 우리라는 존재가 발현되는 것이다. 이 중 하나라도 없다면 우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인연과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그 무엇과도 분리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붓다가 살던 시대의 힌두교의 믿음과 수행을 배경으로 무아를 이해할 수 있다. 힌두교의 가장 심오한 진실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아트만이 곧 브라만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 자신이 신이라는 뜻이다. 붓다는 수년간 자기 내면에 있는 아트만을 찾으려고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지쳐서 찾기를 포기하고 느긋하게 휴식을 취했을 때 비로소 깨우침을 얻었다. 자아 같은 것은 없다! 그 순간 붓다는 슬픔을 뒤로 하고 열반의 행복에 들어섰다. 이 충격적인 생각이 진정 자유로워질 수 있는 열쇠다. 우리 자신이 세계와 분리된 자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자신이 소중하다거나 소중하지 않다는 생각 또는 자존심이 높거나 낮다는 생각이 그 실체를 드러내는데, 이것은 우리 의식 속에서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단순한 생각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단지 우리 의식 속에서 춤추는 우주의 에너지일 뿐이며 나타났다 다시 사라진다. 이런 생각이 사실인지 아닌지 마음속으로 고민하게 되면 점점 더 그 생각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그런 고민은 무아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곧 사라진다. 단지 좀 더 생각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이런 개념의 타당성을 고민하기보다는 그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이런 개념은 나타났다 사라지는 생각일 뿐이며, 왔다가 가버리는 정신적인 현상일 뿐이다. 무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두 가지 요소가 있다. 바로 자아에 집착하는 고통과 이 통찰을 우리가 거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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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를 읽고 장자에게 배운다』 중에서

 

 

 

 

경쟁을 초월하는 방법

 

『장자』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사람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빈배가 와서 부딪혔다. 배에 타고 있던 사람이 아무리 성격이 나쁘다고 해도 충돌해 온 배에 사람이 타고 있지 않은 이상 화를 내지 못한다. 하지만 그 배에 누군가가 타고 있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사람은 분명 배 주인에게 화를 낼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 바로 겸허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라는 뜻이다. 당신이 마음을 비우고 자신을 빈 배라고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의 배와 충돌해도 상대방은 당신에게 화내지 않는다. 당신은 빈 배와 같아서 상대방의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자의식이 너무 강해서 어디를 가든 남과 겨뤄 이기려고 한다면 다른 사람은 당신의 배가 아직 자신이 타고 있는 배와 닿기도 전에 당신을 의식하게 된다. 그래서 노자는 ‘허虛’를 해법으로 내놓았다.
많은 사람들이 도를 익히기 위해서는 특별한 수련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노자』 16장을 보자. “치허극致虛極, 수정독守靜篤” 완벽하게 비웠을 때 완전한 정靜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가득 찬 것을 좋아한다. 노자도 가득 찬 것이 나쁠 것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마음을 비우고 배는 채워라. 마음을 어떻게 비워
야 할까?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할까? 노자가 말한 ‘허’를 최대한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당신이 오늘 유치원 앞을 지나갔다고 하자.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밖으로 흘러나왔다. 아이들은 무엇이 그렇게 즐거울까? 간단하다. 단순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의 얼굴만 봐도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아이 때는 단순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점점 자라서 중고등학교, 그리고 대학에 간다. 이때도 부모님을 보면 그저 좋을까? 그렇지 않다. 이제 전처럼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지고 싶은 것도 많고 바라는 것도 많아졌지만 예전만큼 즐겁 경쟁하지 않고도 이기는 지혜지는 못하다. 그래서 첫 번째 허虛 자는 되도록 단순해지라고 말한다. 종종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요즘 나는 즐거운가?”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면 지금 당신 마음속에는 단 하나의 목표만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좀 고생스러워도 정작 자신은 그것을 고생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목표가 동시에 두 개 이상 생겼을 경우에는 힘들어진다. 시시각각 무엇을 우선해야 할지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두 가지가 동등하게 공존하기는 어렵다는 걸 깨닫게 된다. 결론적으로 허의 핵심은 ‘단순’으로, 인생의 순간순간을 단순하게 살라는 것이다. 저마다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전진하면 모든 노력을 그곳에 쏟을 수 있기 때문에 성공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다.
두 번째는 정靜이다. 옛날 사람들 가운데 먹고살 만한 사람들은 청동으로 만든 거울을 샀다. 깨끗하게 닦은 후 그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았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했을까? 그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으면 강가로 달려가 물에 비친 모습을 봐야 했다. 그러나 강물은 흐르기도 하고 가만히 정지해 있기도 한다. 흐르는 물에 얼굴을 비추면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러므로 반드시 정지해 있는 평평한 물에 얼굴을 비춰야 했다. 장자는 거울을 사용한 비유를 즐겼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인용심약경至人用心若鏡”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의 마음은 거울과 같다는 뜻이다. 바꿔 말해 거울 자체에는 티끌 하나 없는데 당신의 몸에 온갖 먼지와 때가 묻어있어서 흐릿하게 보인다는 뜻이다.
우리는 왜 사람 하나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자신의 편견이나 집착 혹은 독선 때문이다. 마음이 거울처럼 깨끗해서 그 어떤 집착이나 잡티도 없다면 만물이 당신 마음속에 원형 그대로 매우 선명하게 비칠 것이다.
노자의 허와 정에 대해 이야기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도가사상은 경쟁이 사회 진보와 발전을 위해 불가피한 요소라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것은 사회 전체의 경우이며 개인일 경우는 문제가 달라진다. 개인이 경쟁 여부를 선택한다고 하자. 젊은 시절에 좀 더 많은 도전과 경쟁을 받아들인다면 자연의 법칙에 더 부합하는 선택이다. 그러나 평생을 경쟁하며 살겠다고 한다면 고생스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만약 경
쟁이 불가피하다면 어느 한 분야만 싸워 지키고 그것을 제외한 다른 분야는 다른 사람들에게 내줘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노자는 허정虛靜을 생명의 본질로 보았다. 만물의 성장 과정은 지극히 복잡하고 활력이 넘치지만 사실 생명은 무에서 유로, 다시 유에서 무로 흘러가며 결국 공허하고 고요한 근원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이 진정으로 허정과 공령空靈의 경지에 도달해야만 진정한 해탈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도법자연道法自然’의 경지에 도달해 허정이라는 최상의 상태에 이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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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왈 vs 예수 가라사대(도서출판 지와 사랑)

 

 

 

 

 

 

기독교 3대 교파의 특성과 차이점

 

가톨릭교회
가톨릭교회는 로마 교황청이 구심점 역할을 해서 ‘로마 가톨릭교회’라고 부르고 개신교(신교)와 구별하여 ‘구교’라고도 한다. 가톨릭이 중국에 유 입된 후 중국 교인들은 하느님을 『사기』 「봉선서封禪書」에서 가장 높은 주재자라는 뜻의 ‘천주天主’를 본떠서 불렀다. 그래서 천주교라는 명칭이 생겼다.
가톨릭교회 교인들은 삼위일체 하느님도 믿고 성모 마리아도 믿는다. 기본 교리는 다음과 같다. 성부가 천지와 인간을 창조했다. 성자는 지상으로 내려와 인간이(성육화)되었고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부활한 후 승천했다. 성자는 최후의 날에 지상에 재림하여 인류를 심판할 것이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비롯하며 인류에게 생명을 부여한다. 교회는 성자가 세운 곳으로 성스럽고 공의로우며 유일무이하다. 사도에서 이어온 교회는 사람들의 죄를 속죄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 교인들 사이의 교제는 영적인 힘을 발휘하며 교인의 육신은 부활해서 영생한다. 하느님은 선한 자에게는 상을, 악한 자에게는 벌을 내린다.
가톨릭 교계제도에서 신품51 은 매우 엄격하다. 성직자가 되려면 신품을 받아야 하며 그 종류는 일곱 가지다. 1품은 수문품守門品, 2품은 강경품講經品, 3품은 구마품驅魔品, 4품은 시종품侍從品, 5품은 차부제품次副祭品, 6품은 부제품副祭品, 7품은 사제품司祭品이다. 1~4품은 낮은 신품으로 소품이라 하며 5~7품은 높은 신품으로 대품이라고 한다. 위계는 주교, 대주교, 총대주교, 추기경으로 나뉘고 추기경은 로마 교황의 최고 고문으로 진홍빛 의관을 착용한다.
가톨릭교회는 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 스페인, 포르투갈, 폴란드, 헝가리, 미국, 리투아니아, 라틴아메리카, 필리핀 등지에 분포되어 있다. 가톨릭교회 행정의 중앙기관은 바티칸 시국에 있다. 바티칸 시국은 교황 집권제를 실시하여 중국을 제외한 세계 각지에서 벌이는 선교 활동을 주관한다. 또한 교인들의 정신적 지도자인 주교를 임명하는 권한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가톨릭교회는 과학의 발전으로 위기에 봉착했다. 그래서 1960년대 이후 위기 극복을 위해 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하여
교의와 전례의식, 조직과 정치 등 다방면에서 현대화를 추진하고 다윈의 진화론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개신교
개신교를 ‘프로테스탄트 교회’라고도 하고 중국에서는 ‘예수교’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신교’라고 부르며 기독교 3대 교파 가운데 하나다. 개신교는 처음에 루터교, 칼뱅교, 성공회 등의 교파를 형성했으며 이후 계속 분화되어 더 많은 종파들이 만들어졌다. 이들을 통틀어 개신교라고 부른다. 개신교는 로마 교황의 절대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며 교황청의 통제도 받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가톨릭교회의 교계제를 반대하고 교회 제도의 다양성을 주장한다. 교인은 성직자의 중재 없이 하느님과 직접 소통할 수 있으므로 성직자와 일반 교인 간에 차별이 없다. 종교의식과 성례를 간소화하고 사제의 혼인금지 규정을 폐지했으며 수도사를 양성하지 않고 사회봉사를 강조한다. 마리아가 천주의 모친이라는 설과 연옥설을 부정하고 세례식과 성찬식만 거행한다. 또한 성모, 성인, 천사, 성상, 성물, 성사를 숭배하지 않는다.
19세기에서 20세기까지 몇몇 교파들이 종교와 과학의 조화를 강조하여 성경을 이성적으로 해석하고 하느님 없는 종교를 전파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개신교는 종파를 뛰어넘어 하나가 되자는 교회연합운동을 벌였다. 개신교는 주로 영국, 미국,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북유럽의 많은 나라,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등지에 분포되어 있다.

 

동방정교회
동방정교회는 기독교 3대 교파 가운데 하나다. 기독교는 창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서부 교회와 라틴어를 사용하는 동부 교회로 분열되었다가 1054년에 정식으로 갈라섰다.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는 동부 교회는 정교회라 자칭했는데 초대 교회에서 이어져온 정통 기독교라는 뜻이다. 동쪽에 있기 때문에 동방정교회라고 하고 종교의식을 행할 때 그리스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리스 정교회’라고도
한다. 9세기에서 11세기까지 비잔티움제국은 동방정교회의 교리를 정립하여 동유럽과 근동 지역으로 전파했다. 교리는 『신약성경』과 『성전聖傳』의 가르침을 기초로 하며 『심경心經』 역시 교리를 반영하고 있다. 삼위일체의 하느님, 내세, 사후 보상, 천당, 지옥, 말세 심판 등을 널리 전파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구속했음을 믿는다. 그리고 하느님과 인간을 잇는 중재자 역할을 교회가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일곱 가지 성사 를 중요하게 여기고 교회의 절기와 단식 역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가톨릭교회
가 주장하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서 비롯한다는 설과 연옥 그리고 동정녀 마리아가 순결한 상태에서 잉태했고 육신이 승천했다는 교리 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또한 로마 교황은 단지 로마의 주교이자 서부 교회의 수장일 뿐, 그의 절대적인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동방정교회에는 통일된 종교 지도체제와 교회 수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의식을 행할 때는 그리스어 외에 지방 민족의 언어도 사용할 수 있다. 주교를 제외한 일반 성직자는 결혼할 수 있으며 동방정교회만의 교계제와 교구제를 실시한다. 초대 기독교의 교리와 의식을 고수하며 하느님과의 신비로운 소통과 거룩한 예배 분위기를 강조한다. 예배당은 엄숙하고 화려하며 성도상이 곳곳에 걸려 있다. 종교의식을 행할 때 예배당 전체에 촛불을 켜서 매우 장중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동방정교회는 초기에 발칸반도, 서아시아, 북아프리카에서 그 위세를 과시했고, 훗날 러시아, 동유럽, 중국, 한국, 일본 등지로 전해졌다가 이후 서유럽, 북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등지로 전파되었다.
동방정교회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초대 교회의 교리와 의식에 얽매였으므로 보수적이다. 『니케아신경』53 의 기본 원칙과 일곱 공의회54 에서 의결된 사항을 엄격하게 지키고 원칙에 어떠한 수정도 가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둘째, 신비주의 색채가 농후하여 교사는 신비주의적 기도자로서 하느
님과 교제한다. 또한 세상과 단절한 채 평생 은둔하면서 수도하는 금욕주의를 실천한다.
셋째, 황제의 통치를 직접 받으므로 의존성을 띤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황권에서 독립하여 자유로웠던 반면, 동방정교회는 세속 정권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었다. 황제는 교회의 성직자 임명, 주교회의 소집, 종교회의에서 내린 결정 비준, 교의 해석 등의 권한을 가졌고 독재통치를 실시했다. 정교합일이었지만 황권이 교권 위에 있었다.
넷째, 네 개의 총대주교구 체제로 힘이 분산되어 각각의 독립교회를 이뤘다. 그래서 교황청과 같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로마제국이 분열된 후 주교들은 자신들의 세력과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교구 권력쟁탈전을 벌였다. 결과적으로 동로마에는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콘스탄티노플, 안티오키아 등 네 개의 총대주교구가 대등한 힘을 과시하게 되었다. 이 밖에도 국가별 또는 민족별로 별도의 체제를 갖춘 10여 개의 교구와 교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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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멘 하라의 『일체감이 주는 행복』(도서출판 知와 사랑)

부제: 나를 치유하는 신성한 연결고리

 

 

 

 

초자연적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고대에는 신과 소통하는 능력을 지닌 이가 그 사회에서 큰 존경을 받았으며, 지도자들은 정기적으로 예언자나 주술사의 도움을 받아 보이지 않는 세계에 접속했다. 과학이 종교나 무속의 세계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설명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이전의 소중한 지혜를 잊고 말았다. 하지만 과학이 보이는 세계의 신비를 중시하고 종교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신비를 설명하려 애쓰는 동안, 각각의 세계는 하나의 큰 그림이 아니라 반쪽으로 된 그림만 보아왔다. 아인슈타인이 한때 이야기했듯이, “종교 없는 과
학은 절름발이이고 과학 없는 종교는 장님이다.” 과학과 기술이 파괴적인 방향으로 사용되는 것을 막으려면, 인간의 삶에 대한 정신적인 깨달음과 감수성이 필요하다. 우리는 원자를 쪼개는 법은 알고 있을지 몰라도, 도덕적인 삶의 방식을 가르쳐주던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신성한 힘과 소통하는 법은 잊고 말았다. 과학과 종교의 범위 안에서 한쪽의 중요성만 지나치게 부각시키지는 말아야 한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의학과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인간 존재의 근원을 정신적으로 설명하려 하기보다는 물질적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이 더 강해져갔다. 또 무신론과 불가지론이 인기를 얻었다. 물론 과학의 성취에 자부심을 가져야 하겠지만, 초자연적인 경험이라 부를 만한 현상을 무시하지는 말아야 한다. ‘초자연적paranormal’에서 접두어 para-는 ‘너머’라는 뜻인데, 나는 이것이 완전히 정상적인 현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또한 비술Occult(라틴어 occultus는 단순히 ‘숨겨진’이란 뜻이다)을 두려워하거나 무시할 이유도 없다. 보이지 않는 세계는 우리의 감각으로 감지할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세계와 소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종교는 무속을 두려워해야 할 요술로 취급하고, 과학은 무속에 대해 논리를 부정하는 속임수라고 몰아붙인다. 흥미롭게도 이들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경험을 조명한 나비효과나 벨Bell의 정리 같은 새로운 양자역학 이론은 무시하려 애쓴다(간단히 말하자면, 벨의 정리는 두 입자가 한 번이라도 서로 연결된 적이 있다면 이후 하나의 입자에 일어나는 일은 멀리 떨어진 다른 입자에도 영향을 미치며, 이 두 입자 사이에는 서로에게 감응하고 반응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소통방식이 존재한다는 이론이다).
우리의 정보나 인식은 유한하고 좁다. 이에 비해 신성과 초자연성은 영원히 존재하며 무한하다. 나는 인간의 의식이 변화의 단계를 거치면서 우리가 영성에 대한 신뢰를 되찾고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신비한 힘을 다시 존중하게 되리라고 믿는다.
나는 또한 사제나 경전 혹은 전통적인 신학이 가르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는 일도 없어지리라 믿는다. 우리가 신성한 연결고리를 받아들이고 우리를 지켜보는 영적 존재와 서로를 깨닫게 되면, 종교가 말이나 가르침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체감의 경험에 비해 얼마나 부족한지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신을 묘사하려 하면 할수록, 우리는 신에 대한 인식을 스스로 제한하게 된다. (그래서 신의 모습을 그리는 것을 금지하는 종교도 있고 신의 이름을 부르거나 쓰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종교도 있다. 불행히도 그러한 가르침이 너무 원칙대로만 받아들여진 나머지, 원래의 진정한 의미는 잊고 말았다.)
당신이 신을 어떻게 보는지는 상관없다. 다정한 아버지로 볼 수도 있고, 자애로운 어머니로 볼 수도 있으며, 그저 보살피는 힘으로 볼 수도 있다. 신의 이름을 간절히 부를 때마다, 기도로써 신을 떠올릴 때마다, 당신은 인간의 마음으로는 위대하고 복잡한 신의 본질을 모두 이해할 수 없음을 자연스럽게 깨달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옳은 행동인지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신과 소통하거나 신의 사랑과 연결되는 데 굳이 옳다고 할 만한 방법이란 없기 때문이다. 단지 당신이 쓰는 단어가, 당신이 행하는 의식이, 당신이 상상하는 신의 이미지가 일체감을 경험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 여부가 가장 중요하다.
종교적 가르침 중에서 서로를 단절시키고 신으로부터 소외시키는 것들을 그냥 지나쳐 넘긴다면, 우리는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더 많이 경험할 수 있다. 앞으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저 너머의 신과 그리고 영적 존재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내면적 지식의 형태로, 상징적 메시지의 형태로, 신과의 합일의 형태로 영적인 답변을 얻게 될 것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와 대화하는 능력은 인류의 가장 아름다운 성취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카르멘 하라 박사는 '더 뷰The view', '굿모닝 아메리카Good morning America', '투데이 쇼Today show' 그리고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 [뉴욕 포스트The New York Post]를 비롯한 미국의 텔레비전 쇼와 언론 매체에 출연하는 유명 인사이며 심리치료학자다.

할리우드 스타에서부터 저명한 정치인들까지 그녀를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다년간의 경험을 통한 부부 치료나 인지치료 방식이 그녀의 신비한 직관력과 합쳐져 그녀는 세계적인 상담사로 발돋움했다. 또한 세 장이나 음반을 낸 재능 있는 음악가이며, 자신만의 고유한 보석을 디자인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홈페이지 www.CarmenHarra.com과 페이스북 carmen Harra- (Wholeliness)를 방문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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