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멘 하라의 『일체감이 주는 행복』(도서출판 知와 사랑)

부제: 나를 치유하는 신성한 연결고리

 

 

 

 

 

일체감과 열린 사고

 

나는 내가 무지하다는 사실 말고는 아무것도 모른다.
—소크라테스

 

지금까지 사고는 과소평가되어왔다! 우리의 삶이 균형을 잃었으며 직관력의 가치가 지나치게 폄하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말은 옳다. 그렇다고 해서 의식의 힘이나 합리적 정신을 무시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을 치유할 강력한 무기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제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에 잘못된 점이 많고 생각이 협소하다는 것이 문제다. 사고가 제한되면 알 수 없는 미래와 미지의 어떤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나므로, 우리의 발전에 큰 장애가 된다. 그러면 우리는 일체감의 치유력에서 멀어지게 되고, 변화에 저항하게 된다.
사고가 제한되면 세상을 보는 시야가 좁아지고, 다른 모든 정보에 눈이 멀게 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우리와 다른 생각을 하면 뭔가 문제가 있다고 여긴다. 개인의 자아와 집단의 자아가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게 되고, 두려움이 그 안에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그와는 달리, 열린 사고는 당신이 보고 듣고 접촉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종합하는 드넓은 전망이나 의지와 관련되어 있다. 열린 사고는 평화와 힘을 가져다준다. 왜냐하면 열린 사고를 가져야만 신성한 연결고리를 깨우치고 품에 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보이지 않는 세계, 이 세상을 살다 간 사람들,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이 지구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연결해주는
신성한 연결고리 말이다. 더불어 열린 사고는 당신을 창의성으로 이끌 것이고, 당신을 유연하면서도 강인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또한 낙관주의를 배양할 것이고, 위기에서 기회를 찾도록 안내해줄 것이며, 변화의 시기에 경험할지 모를 불확실성에 관대해지도록 도와줄 것이다.
지적 탐험과 창의적이고 열린 사고를 받아들이게 되면, 의식이 고양되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또한 우리 모두가 일체감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신과 더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생각의 폭을 넓히면, 당신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더욱 영적이고 더욱 애정 넘치고 더욱 연민 가득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건강한 정신적 습관을 가지고서 행복과 만족감 속에서 살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세상을 치유하는 데 기여하겠다고 기꺼이 책임을 떠맡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거나 많은 경험을 통해 다양한 생각을 접하며 살아왔다면, 사고가 열려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해서 열린 사고를 계발하는 데 높은 지적 능력이나 강도 높은 훈련 또는 특별한 재능이 필요하지는 않다. 하지만 어느 정도 용기가 있어야만 시간을 들여 스스로 거북해할지 모를 생각들을 성찰하고, 새로운 관념에 귀 기울이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어 새로운 관념들을 숙고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거대한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끊임없이 몰려드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의견을 재빠르게 개진하거나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적 요구에 부딪힐 때마다 우리는 불안해하거나 거북해하기 쉽다. 이 장에서는 어떻게 자아의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을지, 어떻게 한계에 갇힌 편협한 사고를 거부할 수 있을지, 어떻게 스스로 마음을 열어 생각을 확장할 수 있을지를 보여줄 생각이다. 그러면 당신은 전에 알아차리지 못했던 여러 연결고리들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당신과 달라 보이는 사람들과의 연결고리, 건강하고 행복한 삶으로 이끌어줄 서로 대립되는 생각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말이다. 생각의 폭을 넓히려면 수많은 질문을 던져야 하고, 비슷한 환경에서 다른 이들이 무엇을 했는지 탐구해야 한다. 그런 다음 다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배우며, 편견에 사로잡힌 사고방식(당신의 사고방식도 포함해서)을 파악하고 깨우쳐야 한다. 여기에는 노력과 용기가 필요하고, 비판적 분석과 직관적 성찰도 필요하다.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카르멘 하라 박사는 '더 뷰The view', '굿모닝 아메리카Good morning America', '투데이 쇼Today show' 그리고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 [뉴욕 포스트The New York Post]를 비롯한 미국의 텔레비전 쇼와 언론 매체에 출연하는 유명 인사이며 심리치료학자다.

할리우드 스타에서부터 저명한 정치인들까지 그녀를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다년간의 경험을 통한 부부 치료나 인지치료 방식이 그녀의 신비한 직관력과 합쳐져 그녀는 세계적인 상담사로 발돋움했다. 또한 세 장이나 음반을 낸 재능 있는 음악가이며, 자신만의 고유한 보석을 디자인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홈페이지 www.CarmenHarra.com과 페이스북 carmen Harra- (Wholeliness)를 방문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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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정기를 흠뻑 받았습니다

 

 

지리산에서 사흘 지내면서 산의 정기를 흠뻑 받았습니다.

지리산은 한반도의 모체가 되는 산입니다.

계곡이 많고 넓게 자리를 잡고 있어 여러 곳에서 쉽게 등산할 수 있는 산입니다.

어머니의 품과 같이 한국인을 아늑하게 품어주는 산입니다.

설악산, 속리산, 한라산 등은 남성적인 산으로 스스로를 뽐내는 산이라면,

지리산은 어느 한 봉우리를 뽐내는 것이 아니라 여러 봉우리들이 공존하는 너그러운 산입니다.

달궁마을에서 민박을 하며 계곡에 몸을 담그는 등 산의 정기를 온 몸에 받았습니다.

 

 

정령치에서 내려다본 장면들입니다.

첫 날은 비가 부슬부슬 와서 산이 젖어 있습니다.

 

 

 

 

 

 

 

 

 

달궁마을 계곡입니다.

 

 

 

 

 

 

 

 

 

지리산의 일면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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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우리의 모습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일까?

 

우리는 시간의 시냇물 속에 있는 에너지 흐름의 한 유형이다. 물의 흐름을 생각해보자. 어떤 곳에서는 나무의 뿌리가 냇가로 뻗어 나와 소용돌이를 만든다. 물에 소용돌이 형태의 에너지 유형을 만드는 것이다. 에너지 유형에 말려든 특정 물 분자들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또한 연속성이 있다. 물은 계속해서 거의 같은 방식으로 소용돌이치며, 이 소용돌이는 이러한 현상을 만드는 원인과 조건이 변할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우리는 단지 이런 유형의 흐름일 뿐이다. 사람들은 매일 정해진 유형과 지속성을 충분히 인식하기 때문에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지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또한 항상 변화하고 있다. 소용돌이가 냇가와 실제로는 분리되지 않은 것처럼 우리는 존재의 바탕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다.
평범한 탁자를 보자. 탁자란 무엇인가? 탁자에서 다리 하나를 제거한다면 그것을 탁자라고 할 수 있을까? 다리 두 개를 제거한다면 어떨까? 여러 장의 나무 널빤지를 길게 이어 붙여 탁자의 윗부분을 만들었다고 가정해보자. 그중 널빤지 한 장을 제거한다면 여전히 탁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널빤지를 몇 개나 제거해야 더 이상 탁자가 아닐 수 있을까? 우리는 탁자를 일종의 자아, 즉 본래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생각하지만,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탁자를 찾아보기란 매우 어렵다. 탁자에서 나무라는 요소를 제거하면 탁자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고, 탁자에서 햇빛의 요소를 제거하면 나무도 없고 나아가서 탁자도 사라진다. 탁자를 만든 목수의 증조모를 제거해도 마찬가지다.
물리학자의 눈으로 보면 탁자는 형체가 있는 별개의 독립체라는 개념에서 점점 더 멀어진다. 물리학자는 탁자가 형체가 없으며 빠르게 움직이는 분자들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분자 자체는 원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또 원자는 아원자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 탁자는 형체가 있는 물질이라기보다는 공간에 가깝다. 그리고 형체가 있는 가장 작은 조각조차도 형체가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 조각을 구성하는 아원자 입자마저 매 순간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나타났다 사라지기 때문이다. 현 차원에서 사라진 입자가 다른 차원에서 존재할 수 있다는 이론을 제시하는 물리학자들도 있다. 탁자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더 신비롭고 흥미롭다. 바다의 파도를 생각해보자. 파도 또한 하나의 에너지 유형이다. 그것은 생성되고 일시적으로 존재하다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파도는 바다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그것을 파도로 떠올릴 때 그것은 분리된 어떤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사실 파도는 물과 동일하며 일시적으로 물결치는 형태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뿐이다.
파도가 “다른 파도들보다 더 크니까 내가 그것들보다 나아!” 하고 말하거나 “내가 나아 왜냐면 다른 파도들보다 더 매력적이니까” 하고 주장한다면 말이 되는 소리일까? 혹은 “나는 다른 파도들만 못해” 하고 말한다면? 파도들이 모여서 어떤 파도가 자기들보다 못하다고 판정하고 그 파도와의 관계를 끊겠다고 말한다면 어떨까? 또는 한 파도가 다른 파도를 돕기로 마음먹었다면 이것이 뭔가 숭고하고 중요한 일일까? 모든 파도는 그 존재의 바탕, 즉 물에서 생성되고 물로 돌아가기 때문에 어떤 비교라도 말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파도를 돕는 파도 역시 결국 둘 다 물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자기가 특별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붓다는 우리가 불과 같다고 말했다. 불도 분리된 하나의 자아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불이 항상 변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불은 이리저리 일렁이며 불꽃 하나가 잠시 솟아났다가 사라진다. 불의 바탕이 되는 기존 연료는 소진되고 새로운 연료가 소모되는 에너지로서 매 순간 변화한다. 여기서 매 순간 모든 불이 같은 불일까? 같은 불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다른 불이라고도 단정 지을 수 없다. 불은 실제로 하나의 과정이다.
한 예를 더 들어보자. 우리가 양키스나 다저스의 팬이라고 말해보자. 양키스는 무엇이고 다저스는 무엇인가? 우리가 수년간 한 팀을 응원하는 동안 그 팀의 모든 것이 변화했다. 구단주와 감독, 선수들이 바뀌었고, 야구장과 유니폼도 바뀌었다. 심지어 지명타자 규칙도 새로 생긴다. 이처럼 야구 규칙마저 영원한 진리는 아니어서 수시로 바뀐다. 그러므로 양키스나 다저스를 응원하고,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이겨서 신나거나 져서 풀이 죽어 있을 때, 우리가 실제로 응원한 것이 무엇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도 지속성은 있다. 구단들에게는 모든 직원이 바뀐다고 하더라도 생각과 운영 면에서 일정한 유형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양키스는 자부심과 뛰어난 성적이라는 기풍을 그리고 다저스는 위기를 잘 헤쳐 나가는 팀이라는 기풍을 유지하고 있다. 모든 것이 흘러가고 변화하지만 한편으로 지속성과 유형도 발견된다. 지속성이나 변화를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는 보통 변화를 과소평가하고 지속성에 초점을 맞춘다. ‘팀’이라고 불리는 단어 때문에 우리는 고정되고 안정된 것을 떠올린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다. 변화와 지속성의 세계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살고 있는 곳보다 훨씬 더 흥미롭고 경이롭다. 평범한 사물들과 살아 있는 존재를 흘러가고 변화하며 이타적이고 서로 연결된 상태로 보는 것은 칠각지七覺支(불도 수행에서 참과 거짓, 선악을 살피어서 올바로 취사선택하는 일곱 가지 지혜) 중 하나로 붓다는 이를 ‘택법擇法(지혜로써 참과 거짓을 가림)’이라고 일컬었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르네 데카르트는 무아의 본질을 살펴보려고 했지만, 결국에는 자신이 발견한 공허의 직전에서 물러나야 했다. 데카르트는 왁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말랑말랑하여 모양이 변하고 또 변하지만, 이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같은 왁스로 생각한다. 그는 왁스가 변하고 또 변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같은 왁스로 생각한다는 걸 알았다. 우리는 이 모든 변형을 통해서도 그것을 동일한 왁스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불교 신자는 우리가 왁스와 같은 자아상을 지녔다고 말할지 모른다. 데카르트는 두려웠겠지만 그 자신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더욱 곰곰이 생각했다. 그는 마침내 그의 유명한 공식인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결론으로 그는 크게 안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문제가 해결된 것일까? 우리는 생각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자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반드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음을 암시하는가? ‘내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실제로 아는 모든 것은 생각하는 것으로 불리는 과정뿐이다.
실제로 우리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는 생각에 미혹되어 진정으로 존재하지도 진정으로 살아 있지도 않다. 생각과 개념에 미혹되어 우리는 세계를 유령 같은 추상적인 것으로 본다. 날뛰는 생각을 가라앉혀야만, 우리는 살아 있고 호흡을 의식하며 나무를 보고 커피 맛을 느낄 수 있다.
때때로 인간은 스스로를 보고 ‘나’를 관찰하는 존재로 생각한다. 그러나 관찰을 멈추면 이 관찰하는 나에게 어떤 일이 생길까? 관찰하는 나 또한 왔다가 가는 영화 필름처럼 깜박이는 아원자 입자의 존재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 다시 말하면 관찰하는 나 역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이는 단순히 또 하나의 행온이고 모든 행온과 마찬가지로 우리 의식 속에서 일어나 잠시 지속되다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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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세력이 오랜 투쟁 끝에 몸에 익히게 된 건 반민주화다

 

 

 

민주화세력이 오랜 투쟁 끝에 몸에 익히게 된 건 반민주화다.

반민주화세력과 오래 투쟁하다보니 그들의 습성이 조금 몸에 익혀진 것이다.

반면 반민주화세력은 민주화세력에 오래 시달리다 보니 생존을 위해 어느 정도 민주화 습성을 갖추게 되었다.

국민이 혼란스러운 것은 바로 이 놀라운 두 가지 변신 때문이다.

오랫동안 민주화를 지지해오던 사람들은 민주화세력의 반민주화 태도에 증오심을 갖게 되었고, 오랫동안 반민주화를 혐오하던 사람들은 놀랍게도 반민주화세력에게서 민주화의 조짐을 발견하고 그 세력을 용인하기까지 하게 된 것이다.

두 세력이 오래 싸우다 보니 서로 닮게 된 것이다.

오늘날 여당과 야당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는 이런 점에서 다분히 비롯되었다.

반민주화세력이 조금씩 민주화 습성을 익히게 된 것은 생존에 대한 몸부림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원래 반민주화세력은 목적만 좋으면 그 과정은 반민주적이라도 용인되어야 한다는 태도를 지닌 세력이다.

그래서 오늘날에까지도 정권이 민간사찰을 감행한 것이고, 부정부패한 사람들을 기용한 것이며, 국가의 중대한 사안을 국민 몰래 저들끼리 처리하고 있는 것이다.

반민주화세력은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기 전에 핵심멤버들이 줄줄이 검찰의 칼날에 목이 달아나는 것으로 일단 위축된다.

그러나 그 뿌리는 새로운 토양을 만나면 다시 과거의 영화를 누리게 된다.

이해가 되지 않는 건 반민주화세력에 관한 것이 아니라,

민주화세력의 반민주화 경향이다.

민주화를 신주 떠받듯이 하던 사람들이 어느새 독선과 아집이라는 반민주화의 증세를 나타내는 것이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과정은 반민주적이어도 좋다는 해괴한 논리를 신봉하게 된 것이다.

반민주화세력에게서 배운 점이다.

사나운 시어머니 밑에서 며느리 생활을 한 사람은 자신도 어느새 사나운 시어머니가 된다.

독재자에게 항거하던 사람이 자신도 어느새 독재자가 된다.

과거에 민주화운동에 열심이었던 사람들이 정치권에 발을 디디지 못하고 밀려나 자기의 일을 하는 것을 본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비민주적 사고를 구현하고 있는 점이다.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다수의 바람을 저버리는 것이다.

그토록 훌륭한 가치라고 생각하고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던 사람들이 바람직한 그 가치를 버리고 자신의 영달을 위해 독선과 아집으로 독재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민주화운동에 순정을 바쳤던 사람들이 죄다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의 눈에는 그들이 말만 민주화를 외치고 실제로는 자신들의 영달을 꾀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반민주화세력과 오래 투쟁하다보니 그들의 습성이 조금 몸에 익혀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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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 지와 사랑의 신간 <법왕 달라이 라마> 중에서

 

 

 

 

 

글로벌 책임감의 파워

 

세상이 점점 작아지고 전 세계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가 되고 있습니다. 정치, 군사적 동맹으로 커다란 다국적 집단이 형성되고 산업과 국제 무역이 지구촌 경제를 만들었습니다. 과거와 달리 전 세계를 연결하는 통신망 덕분에 거리, 언어, 인종의 장벽이 사
라지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인구 과잉, 천연자원의 고갈, 우리가 공유하는 이 작은 행성에 사는 생물체의 아름다운 삶의 형태들과 함께 공기, 물, 나무를 위협하는 환경 위기와 같은 심각한 당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협력하고 있습니다.

 

보편적 책임감의 필요성
도전에 직면한 이 시대에 우리는 보편적 책임감을 더욱 키워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이나 가족, 나라만이 아니라 인류 모두의 이익을 위해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보편적 책임감은 인류 생존의 진정한 열쇠입니다. 이는 세계평화를 이루고, 천연자원을 공정하게 사용하며, 미래 세대를 위해 환경보호를 하기 위한 초석입니다.
인류는 한 가족입니다
좋든 싫든 우리 모두는 거대한 인류가족의 일부로 지구상에 태어났습니다. 타인도 우리와 같은 인간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을 바라며 고통을 원치 않습니다. 요즘에는 지구의 한 지역에서 발생하는 일이 종국에는 지구 전체에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중대한 지역 문제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그것을 전 지구적인 문제로 다뤄야 합니다. 저는 이 사실을 희망의 원천으로 봅니다. 협력의 필요성만이 인류를 강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더욱더 발전적이며, 행복하고, 안정적이며, 문명화된 미래를 위해서 우리 모두는 진실되고 가슴 따뜻한 형제애를 반드시 함양해야 합니다.

 

이타주의는 치료약
티베트인들은 많은 병들이 사랑과 연민이라는 하나의 약으로 치유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성정은 인간이 행복해지는 데 궁극적인 원천이며, 이에 대한 욕구는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합니다. 불행히도 사랑과 연민은 너무 오랫동안 많은 사회 교류의 영역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대개는 가족과 가정에 국한된 채 공적인 생활에서 사랑과 연민을 실천하는 것은 비실용적이거나 심지어 순진한 행동으로 간주됩니다. 저의 관점에서 볼 때 이는 슬픈 일입니다.

 

이타주의 실천하기
연민으로 가득 찬 마음은 범람하는 호수와 같으며, 끊임없는 에너지, 결단, 친절의 원천입니다. 그 마음은 씨앗과도 같습니다. 씨앗이 자라면 용서, 관용, 내면의 힘, 두려움과 불안을 극복하는 자신감 등과 같은 많은 품성들을 낳습니다. 연민의 마음은 묘약과 같습니다. 나쁜 상황을 유익한 상황으로 변모시킬 수 있으니까요.

 

갈등 해결하기
해결이 불가능해 보일 때는 양측이 서로를 연결하는 기본이 되는 인간의 본성을 상기해야만 합니다. 양측이 모두 양보하면 적어도 더 큰 갈등이 일어날 위험을 피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형태의 타협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렇다면 이런 방법을 자주 사용하면 안 될까요? 저는 꿀벌과 같은 작은 곤충의 사례에서 감동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자연법칙에 따라 꿀벌은 생존을 위해 함께 협력합니다. 일반적으로 꿀벌 집단은 협력을 기반으로 생존합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특별한 자질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실천에 있어서는 곤충만도 못합니다. 어떤 면에서 저는 우리가 꿀벌보다 가난하다고 생각합니다.

 

물질적 성장에 대한 과도한 강조
우리는 물질을 추구하는 데 너무 몰두한 나머지 사랑, 친절, 협력, 보살핌에 대한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등한시했습니다. 우리의 토대인 본질적인 인간성을 상실하고 오로지 물질적인 발전만을 추구해서 어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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