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우리의 모습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일까?

 

우리는 시간의 시냇물 속에 있는 에너지 흐름의 한 유형이다. 물의 흐름을 생각해보자. 어떤 곳에서는 나무의 뿌리가 냇가로 뻗어 나와 소용돌이를 만든다. 물에 소용돌이 형태의 에너지 유형을 만드는 것이다. 에너지 유형에 말려든 특정 물 분자들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또한 연속성이 있다. 물은 계속해서 거의 같은 방식으로 소용돌이치며, 이 소용돌이는 이러한 현상을 만드는 원인과 조건이 변할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우리는 단지 이런 유형의 흐름일 뿐이다. 사람들은 매일 정해진 유형과 지속성을 충분히 인식하기 때문에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지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또한 항상 변화하고 있다. 소용돌이가 냇가와 실제로는 분리되지 않은 것처럼 우리는 존재의 바탕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다.
평범한 탁자를 보자. 탁자란 무엇인가? 탁자에서 다리 하나를 제거한다면 그것을 탁자라고 할 수 있을까? 다리 두 개를 제거한다면 어떨까? 여러 장의 나무 널빤지를 길게 이어 붙여 탁자의 윗부분을 만들었다고 가정해보자. 그중 널빤지 한 장을 제거한다면 여전히 탁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널빤지를 몇 개나 제거해야 더 이상 탁자가 아닐 수 있을까? 우리는 탁자를 일종의 자아, 즉 본래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생각하지만,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탁자를 찾아보기란 매우 어렵다. 탁자에서 나무라는 요소를 제거하면 탁자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고, 탁자에서 햇빛의 요소를 제거하면 나무도 없고 나아가서 탁자도 사라진다. 탁자를 만든 목수의 증조모를 제거해도 마찬가지다.
물리학자의 눈으로 보면 탁자는 형체가 있는 별개의 독립체라는 개념에서 점점 더 멀어진다. 물리학자는 탁자가 형체가 없으며 빠르게 움직이는 분자들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분자 자체는 원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또 원자는 아원자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 탁자는 형체가 있는 물질이라기보다는 공간에 가깝다. 그리고 형체가 있는 가장 작은 조각조차도 형체가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 조각을 구성하는 아원자 입자마저 매 순간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나타났다 사라지기 때문이다. 현 차원에서 사라진 입자가 다른 차원에서 존재할 수 있다는 이론을 제시하는 물리학자들도 있다. 탁자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더 신비롭고 흥미롭다. 바다의 파도를 생각해보자. 파도 또한 하나의 에너지 유형이다. 그것은 생성되고 일시적으로 존재하다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파도는 바다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그것을 파도로 떠올릴 때 그것은 분리된 어떤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사실 파도는 물과 동일하며 일시적으로 물결치는 형태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뿐이다.
파도가 “다른 파도들보다 더 크니까 내가 그것들보다 나아!” 하고 말하거나 “내가 나아 왜냐면 다른 파도들보다 더 매력적이니까” 하고 주장한다면 말이 되는 소리일까? 혹은 “나는 다른 파도들만 못해” 하고 말한다면? 파도들이 모여서 어떤 파도가 자기들보다 못하다고 판정하고 그 파도와의 관계를 끊겠다고 말한다면 어떨까? 또는 한 파도가 다른 파도를 돕기로 마음먹었다면 이것이 뭔가 숭고하고 중요한 일일까? 모든 파도는 그 존재의 바탕, 즉 물에서 생성되고 물로 돌아가기 때문에 어떤 비교라도 말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파도를 돕는 파도 역시 결국 둘 다 물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자기가 특별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붓다는 우리가 불과 같다고 말했다. 불도 분리된 하나의 자아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불이 항상 변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불은 이리저리 일렁이며 불꽃 하나가 잠시 솟아났다가 사라진다. 불의 바탕이 되는 기존 연료는 소진되고 새로운 연료가 소모되는 에너지로서 매 순간 변화한다. 여기서 매 순간 모든 불이 같은 불일까? 같은 불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다른 불이라고도 단정 지을 수 없다. 불은 실제로 하나의 과정이다.
한 예를 더 들어보자. 우리가 양키스나 다저스의 팬이라고 말해보자. 양키스는 무엇이고 다저스는 무엇인가? 우리가 수년간 한 팀을 응원하는 동안 그 팀의 모든 것이 변화했다. 구단주와 감독, 선수들이 바뀌었고, 야구장과 유니폼도 바뀌었다. 심지어 지명타자 규칙도 새로 생긴다. 이처럼 야구 규칙마저 영원한 진리는 아니어서 수시로 바뀐다. 그러므로 양키스나 다저스를 응원하고,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이겨서 신나거나 져서 풀이 죽어 있을 때, 우리가 실제로 응원한 것이 무엇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도 지속성은 있다. 구단들에게는 모든 직원이 바뀐다고 하더라도 생각과 운영 면에서 일정한 유형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양키스는 자부심과 뛰어난 성적이라는 기풍을 그리고 다저스는 위기를 잘 헤쳐 나가는 팀이라는 기풍을 유지하고 있다. 모든 것이 흘러가고 변화하지만 한편으로 지속성과 유형도 발견된다. 지속성이나 변화를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는 보통 변화를 과소평가하고 지속성에 초점을 맞춘다. ‘팀’이라고 불리는 단어 때문에 우리는 고정되고 안정된 것을 떠올린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다. 변화와 지속성의 세계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살고 있는 곳보다 훨씬 더 흥미롭고 경이롭다. 평범한 사물들과 살아 있는 존재를 흘러가고 변화하며 이타적이고 서로 연결된 상태로 보는 것은 칠각지七覺支(불도 수행에서 참과 거짓, 선악을 살피어서 올바로 취사선택하는 일곱 가지 지혜) 중 하나로 붓다는 이를 ‘택법擇法(지혜로써 참과 거짓을 가림)’이라고 일컬었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르네 데카르트는 무아의 본질을 살펴보려고 했지만, 결국에는 자신이 발견한 공허의 직전에서 물러나야 했다. 데카르트는 왁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말랑말랑하여 모양이 변하고 또 변하지만, 이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같은 왁스로 생각한다. 그는 왁스가 변하고 또 변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같은 왁스로 생각한다는 걸 알았다. 우리는 이 모든 변형을 통해서도 그것을 동일한 왁스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불교 신자는 우리가 왁스와 같은 자아상을 지녔다고 말할지 모른다. 데카르트는 두려웠겠지만 그 자신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더욱 곰곰이 생각했다. 그는 마침내 그의 유명한 공식인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결론으로 그는 크게 안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문제가 해결된 것일까? 우리는 생각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자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반드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음을 암시하는가? ‘내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실제로 아는 모든 것은 생각하는 것으로 불리는 과정뿐이다.
실제로 우리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는 생각에 미혹되어 진정으로 존재하지도 진정으로 살아 있지도 않다. 생각과 개념에 미혹되어 우리는 세계를 유령 같은 추상적인 것으로 본다. 날뛰는 생각을 가라앉혀야만, 우리는 살아 있고 호흡을 의식하며 나무를 보고 커피 맛을 느낄 수 있다.
때때로 인간은 스스로를 보고 ‘나’를 관찰하는 존재로 생각한다. 그러나 관찰을 멈추면 이 관찰하는 나에게 어떤 일이 생길까? 관찰하는 나 또한 왔다가 가는 영화 필름처럼 깜박이는 아원자 입자의 존재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 다시 말하면 관찰하는 나 역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이는 단순히 또 하나의 행온이고 모든 행온과 마찬가지로 우리 의식 속에서 일어나 잠시 지속되다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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